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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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35)
2014년 04월 06일 13시 42분  조회:3227  추천:1  작성자: 김송죽
 

35. 

일제는 만주에서 파쑈적인 고압통치를 실현코저 마치 짐승을 기르듯이 방대한 경찰대로를 건립하여 틈서리만 있으면 거기에다 그 경찰기구를 박아넣었다. 이러한 경찰조직들은 일제가 만주통치를 강화함에 따라서 부단히 개조, 강화되였는바 그것은 일제가 만주국을 공제하는 중요한 도구였던 것이다.

일제는 일찍이 1932년 3월부터 시작하여 경찰기구를 건립하였는데 위민정부(僞民政府)에 경무사(警務司)를 설치, 위만경찰을 통일적으로 관리하게끔했다. 경무사나 중앙경찰기구를 장악하고 관리하는것은 다가 일본인관리였고 성경찰청의 청장 역시 일본인이 담임했다.

위만경찰의 주요임무는 치안유지 즉 다시말해서 <<토벌>>과 국경보호였다. 그리고 일반적인 행정경찰이 있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경호, 형사, 종교, 사상, 풍기, 위생, 보안, 산업, 교통, 영업, 건축, 공장 등에 관여하고 또한 염업, 림업, 연무(아편)들을 관리했다.

위만정부는 1937년에 이르러 국경경찰대를 새로 증설했거니와 1938년에는 로동경찰까지 내와서 백성들의 로동을 통제했다. 그리고 경찰들은 또한 방첩(防諜), 첩보(諜報), 경방(警防), 경제보안(經濟保安)과 량곡출하(糧谷出荷)독촉 등도 책임지였다.

그러한즉 만주국의 정치생활에 있어서는 그 어느 하나가 경찰과 관련되지 않은것이라곤 없었다. 온 만주땅이 경찰천하 그대로 경찰국으로 되어버렸다. 이러하니 인민들이 받은 재난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이 외에도 위만정부는 또 중앙청향위원회(中央淸鄕委員會)라는것을 설치함과 동시에 각 성(省)과 현(縣)에도 성향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위원장은 성장, 현장이 직접맡고 위원은 당지의 일,만군경(日,滿軍警)과 행정기관의 두목들이 맡았다. 1933년 6월에는 그 전해에 건립되였던 청향위원회를 치안유지회(治安維持會)로 고쳤다가 그것을 1938년에 이르러 페지, 중앙과 성과 현들에는 치안정보련락회(治安情報連絡會)가 성립되여 일,만군경과 관게있는 기관들의 련락과 조절을 책임지었던 것이다.

위만당국은 1935년에 삼림경찰대를 내와 현장이 직접 그를 지도케 했다. 그러면서 1940년말에 이르러서는 11개성에 삼림경찰대가 설립되였는데 북만에는 빈강(濱江), 삼강(三江), 북안(北安), 흑하(黑河), 목단강 등에 한 개씩 있었다. 삼림경찰대의 주요임무는 <<토벌>>과 삼림채벌을 경비하는 것이였다. 이 삼림경찰대가 항일련군의 활동을 파괴하는 급선봉으로 나섰던것이다.

1939년 겨울, 동녕 대함창에서 조선으로부터 이사를 방금 온 농민 7명이 땔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갔다가 그중 하나가 붙잡히우지 않고 6명이 삼림경찰대의 손에 붙잡히였는데 중국말 한마디도 모르는 그들은 그만 항일련군과 련락하러 간 반일회의 사람으로 잘못몰리여 그 자리에서 총살당한것이다.

사람사는 마을로는 들어올 수 없는 독립군 몇이 륙봉산(六峰山)에 들어가 숨어있으면서 원시적으로 연명하고있었는데 1940년도 봄에 그중 한사람이 삼림경찰대의 포위에 들어 항격하다가 붙잡히우고말았다.

<<모두 나와들 보라!>>

경찰 열댓이 잘라낸 그의 목을 길다란 나무작대기 끝에 매여 달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거리바닥을 회술례했다.

꽹가리소리를 듣고 나왔던 사람들은 사람의 머리를 보고는 그만 <<엑크!>.하며 돌아섰다. 그러면 경찰들은 눈을 뜨고 좀 잘들 보아라. 너희들도 반만항일을 하면 이꼴이 된다. 항일련군을 도와주면 이런 끝장이다고 위협적인 선전을 했다.

나어린 강석이도 꽹가리소리나니 호기심에 끌려 나가보고는 기겁을 할지경 놀랬다. 머리카락 절반을 꼬아서 장대기 끝에 매고 나머지는 내리드리웠는데 그것이 둬자길이는 될것 같았다. 그래서 강석이역시 그게 어느 여자의 머리겠거니했는데 다른사람들이 수근대는걸 들으니 그건 꼭 남자의 머리라는것이였다. 그래 다시금 찬찬히 여겨보게 된 강석이는 그만 <<악!>> 하고 기겁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울음을 터치고말았다. 그는 사자의 낯을 보고 그가 누구라는것을 안것이다. 다른사람아니였다. 전에 여러축 그이네 집에 왔다간적이 있는 독립군인 리길태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처참히 살해된단말인가. 과연 너무나도 비참했다.

나어린 강석이는 그의 안식을 빌어 기도했다.

<<한얼림! 한얼림!>>

 

만주를 자기의 <<생명선>>으로 여기고있는 일본침략자들은 이 <<생명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그 무슨 <<정치범>>이요 <<사상범>>이요 <<경제범>>이요 하는 따위의 엄한 준법을 수태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온 동북인민은 날이갈수록 마수와도같은 철제밑에서 모진 학대와 유린을 당해야했다. 지어 만주국을 세웠으니 <<복위등극>>의 미몽이 실현된 셈이라 한 강덕황제마저도 지금와서는 일본황실의 조상을 제 조상으로 삼고 매일아침 절을 올려야 하고 천황을 애비라 해야하며 관동군사령관도 애비라해야지 그러지를 않고 그네들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거슬렸다가는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를 위태한 처지에 놓였다. 1935년부터 광대뼈가 불뚝나오고 잔수염을 기르고 키가 작은 요사오까라는 사람이 와서 줄곧 강덕황제의 신변을 떠나지 않았던것이다. 그에게는 두가지 신분이 있었는데 하나는 관동군고급참모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국제실어용패>>였다. 그의 실제직능은 바로 관동군과 강덕사이에 놓인 전화선과 같았다. 관동군의 모든 의도는 그를 통하여 강덕에게 전달되였던 것이다. 강덕은 순시, 손님접견, 례식거행, 신민훈시, 축하연 지어는 머리를 끄덕이고 미소를 짓기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의 지휘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 하며 어떤말을 해야하며 어떤 모임에 참석하고 어떤 모임에서는 어떤말을 할것인가 하는 등등은 모두 그의 분부대로 하여야했다. 지어는 강덕황제가 하려는 말을 거의다 그가 사전에 일본식중어로 종이장에다 써놓기까지 했다. 일제는 이같이 저들이 알심들이여 길러낸 괴뢰를 움찔못하게 복종시키는 한편 고압수단으로 아래를 틀어쥐였던 것이다. 그래서 미관말직의 인간들마저 초무(招撫)를 받듯 일제의 노복으로 충당되고있었다.

일제의 강압통치에 인간의 자유나 권리가 억탈되다보니 자연히 반항이 생기는 것이고 그래서 <<죄인>>은 늘어나니 경찰서에 잡혀가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이제는 철령하의 감옥이 넘어나서 다른데다 감옥을 더 짓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감옥을 더 지어도, 경찰이 아무리 혈안이되여 날뛰여도 정의로 향하는 마음만은 막을수도 꺽을수도 었는 것이였다.

해림일대에는 <<8로>>들의 지도하에 정체를 숨기고있는 독립군과 일부의 가족성원들로 비밀결사를 새로내왔다. 인원은 모두 70명. 그들은 모두가 대종교도들이였으므로 교리를 학습하는 명의로 자체의 비밀할동을 전개해나갔다.

양부의 오랜지기들은 의연히 강석이네집으로 놀러다녔다. 그들은 김기철이 늙은 몸에 옥고를 치르고있으니 만기가 될 때까지 살아서 돌아오겠냐고 근심했는데 다행이랄가 그는 죽지않고 돌아왔다. 경찰당국에서는 필시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딱히 모르고있은것이다. 바보아닌 이상에야 그 누구면 형리들의 앞에서 죄아닌 <<죄>>를 탄백해서 스스로 앙화를 뒤집어쓰겠는가.

어느날 여럿모인데서 정해식로인은 김기철이 경제학과를 나와서인지 계산이 빠르고 머리가 남달리 좋더라면서 그와 자기 그리고 리달문 셋이서 함께 엄동설한에 우쑤리강을 도보로 건너고 짐차를 잡아타기도했던 일을 말했다. 어떤때는 배를 곯아가면서 장사를 했던것이다. 그때 로씨야에서는 재봉침한대에 값이 30원이였는데 그것을 만주에 갖다 팔면 50원이였다. 그러니 20원이 떨어지는 셈이다. 당시 좁쌀 한근값이 2전이였으니 20원주면 좁쌀 1,000근을 살수있었다. 이렇게 한때는 부족되는 독립군의 식량을 그네들이 장사를 부지런히해서 더러해결했던 것이다.

정해식로인은 독립군이 밀산에 모여 쏘련으로 건너가자 따라건너가서 혼자 나돌다가 <<자유시사변>>을 목격했다.

<<이게 무슨놈의 짓들이야, 무슨놈의 짓!>>

의례 단합해서 항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동족상잔의 참극을 빚어내니 놀라고 분했던 그는 그때 이만(伊曼)에 있은 김좌진이 멋모르고 자유시로 올가봐, 오면 휩쓸리여 그도 변을 당할까봐 걱정되여 오지를 말라고 알리자고 여러날을 장달음놓았다. 그러다가 이만을 50리 앞에 놓고 김좌진은 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되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시름을 활 놓고 땅에 털썩 주저앉았던 사람이다. 그후 그는 옹근 한주일을 헤매다가 겨우 김좌진부대를 다시찾아왔다. 그리고는 그옆을 다시떠나지 았았던 것이다.

정해식로인은 자기가 김좌진을 따라다닌건 그가 소시적부터 용력과 재질이 비범하더니 과연 대업을 이룰만한 웅지있는 사람이였길래 좀이라도 받들어주자고 한것이라면서 늙은건 죽지 않고 아까운 그가 죽었으니 천도가 무심하다고했다. 그러면서 정로인은 김좌진이 돈 5만원 얻으러 김종근의 집에 갔을 때 경찰들이 강도로 보고 포승을 지우니 김좌진이

<<무겁기 천금닽다는 사나이의 말을 믿지 않고 이까짓 실오래기를 믿으려하는 너희들이 가소롭구나.>> 하면서 경찰을 비웃고는 포승을 끊어버린 일과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서는 밤에 잘 때 너무 갑갑해 팔을 벌린것이 쇠고랑이가 끊어져 그후부터 그의 팔목에다는 쇠고랑을 두 개씩이나 채운 일을 말했다.

부의가 황제로 된 후 일본관동군이 오직 일계(日系)의 천임관(遷任官)이상의 관리에게만 나누어준 <<일본인복무수지(日本人服務須知)>>라는 비밀수첩이 있었다. 그 비밀수첩에는 일제가 만주에서 일본인관리와 일본인을 제외한 기타의 모든 관리와 민족을 다스리는 30개 조목의 지도방책이 적혀있는데 그중 조선사람을 대함에는 아래와같이 되어있었다.

                    

<<조선인은 도적질하는 버릇이 있고 일하기를 싫어하며 도망치기를 좋아하고 큰소리치기 좋아하고 정치를 론하기 좋아하며 한민족(漢民族)과 혈연이 있고 오랜 원한도있으니 그네들을 리용하고 회유하여 <황민>으로 만들어야한다. 한민족과는 멀리 벌어지게 만들어야지 가깝게 지나게 해서는 안된다. 한민족과 조선인이 충돌이 생기면 시비를 갈라주되 조선인은 춰주고 한민족은 눌러놔야 하며 조선사람이 리치에 어긋났다면 둘다 똑같다고 해야 한다.>>

            

1940년 2월에 조선에서 창씨제도를 발표하고 조선사람의 성씨를 일본식으로 고치는 바람이 불었는데 그것이 곧추 만주에까지 득달했다. 항거의 바람이 일어났다. 누군들 전통적인 가족제도와 혈연관념을 버리자고 하겠는가. 만주에서도 친일분자들을 내놓고는 모두 선듯이 응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제는 창씨를 하지 않는 자는 일본국민이 아니라면서 먹는 쌀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면서 강요했다.

하여 하는수없이 창씨를 했는데 모두들 자기의 원성(原性)은 창씨속에 달아두었다. 례를 들면 김씨일 경우 <<金山>> 혹은 <<金海>>라 두자성으로 바꾸어 가네야마, 가네우미라고 불렀다. 리씨일경우도 마찬가지로 두자성 <<李家>>로 해서 리노우에라고 불렀고 최씨성일 경우에는 <<崔>>자를 뜯어 <<山佳>>로 두자성을 만들어 야마요시라 불렀다. 그러니 결국 보면 말이 창씨지 원성은 어떻게해서든 살린셈이이다.

<<내 성은 김가고 이름은 강석이야. 이건 나의 아버지와 독립군이 만들어준거야. 난 죽어도 안고칠테야.>>

이러면서 강석이는 성을 일본식으로 고쳐부를지언정 원 이름은 버리려하지 않았다. 양모 김분희가 그렇게 하도록 교양한것이다.

일제는 만주에서도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강박적인 노화교육을 실시했다.

1937년, 위민생부(僞民生部)는 새로운 학제(學制)를 반포했는데 거기에 목적은 <<충실 선량한 국민을 배양하는 것인데 즉 다시말해 건국정신에 기초하여 인격을 단련하고 덕성을 수양하는 것이다.>>라고 밝히였다. 그러한즉 교재내용 역시 유신(唯神)정치를 불어넣으면서 <<일만일덕일심(日滿一德一心)>>이니 <<대동아공영권(大同亞共榮圈)>>이니 하는 따위의 식민사상을 고취하는것이였다.

만인학교들에서는 일어(日語)를 국어(國語)로 정하고 한어(漢語)는 만어(滿語)로 고치는 지경에 이르었다.

이와 더불어 중학교는 분과제를 실시했는데 농, 공, 상, 수리, 광업 등 과로 나누어 일찍부터 청소년들을 노역식의 <<직업교육>>을 행하면서 학생들을 강제로 <<근로봉사>>에 참가케했다. 일제는 그야말로 중조 백성 모두를 일만할줄아는 도구로 만들려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중학교와 대학교에는 모두 무관을 파견하여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1937년이후부터 일본인관리와 일본교원들을 부단히 학교에 파견하고 중학교와 소학교의 교장과 부교장을 일본인이 담당케 했고 대학의 지도층은 몽땅 일본관리가 맡았다. 조선학교정황은 더 험악했다. 학생이 일단 학교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일본말을 해야지 조선말을 해서는 안되였다. 학생이 조선말을 하면 처벌을 받거나 벌금을 당했다. 그래서 벙어리모양으로 지내는 학생이 많았다.

이런 때에 또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것이 있어서 학생이나 일반 백성이나 학교, 직장, 모든집체장소에서 어떤 의식같은것이 있으면 하나의 절차로서 중이 념불하듯이 그것을 외워야했다. 그것은 자기가 일본의 신민임을 다짐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인데 학교와 보통성인용의 두 종류가 있었다. 일어로 된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학생용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힘을 합쳐 천황페하께 충의(忠義)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는 인고(忍苦)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렵니다.

 

   일반용

1. 우리들은 황국신민이다. 충의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한다.

2. 우리들 한국신민은 서로 친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한다.

3. 우리들 한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皇道)를 선양한다.

 

주문과도 같은 이 서사대신으로 만인들에게는 <<국민훈(國民訓)>>이라는 서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은 조선에서 사용하는것을 그대로 외웠다. 왜야하면 조선사람은 이미 황민으로 된 <<2등국민>>이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것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으로 강요했다. 그래서 일본말을 모르는 농민과 부녀자들은 그것을 외우느라 고초를 겪었다.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자해도 그것을 외울줄을 알아야 표를 살수가 있었다. 그러니 일본말을 몰라 자연히 본의아니게 외곡된 발음을 해서 곤역을 겪는 일이 수두룩 생기였다.

<<고고꾸신민나리>>를 <<고고꾸신는찌계다비>>로 풍자적으로 읽거나 그것이 정말 그런줄로 알고 외워서 웃기는 일도 있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일어사용을 강제하고 중등학교들에서 조선어과목들을 페지하였으며 창씨제도를 시행하면서 1940년 8월 10일자로 조선민족의 등불로 20여년간, 그나마 간들간들 유지해오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마저 페간시켜 아예 이 지구상에서 조선글자마저 없애치우려 시도했다.

그러했지만 양모 김분희는 네 아버지가 계셔도 이렇게 할것이다 하면서 강석에게 조선글을 차근차근 가르쳤다. 그래서 강석이는 제 민족의 글을 알게되였다. 강석이는 또 언니 영조와 더불어 지식있는 양모한테서 조선럭사와 산술도 배웠다. 이사를 자주하다보니 학교를 바로다닐수 없었던 자식들을 눈뜬 소경으로 만들지 않자고 하는 착한 녀인의 성심이였다.

황국신민화운동이 시작되고있었다.

만주국의 강덕황제는 관동군이 시키는대로 1940년 5월에 일본에 가서 일본황실조종이라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를 만주로 모셔왔다. 그때로부터 만주의 도처에 <<신사(神社)>>가  세워져서 만주국의 관리들은 규정대로 제를 지내야했고 만주국민은 누구나 그 앞을 지날때면 90도 경례를 해야했다. 그러지를 않으면 <<불경처벌법>>에 의해 징벌을 받았다.

이것은 만주국민, 특히는 다른 교도들의 지대한 불만을 야기시켰다.

<<우리의 조상은 단군이다. 왜놈의 조상이 나하구 무슨 상관이냐. 그따위 귀신짝에 다 경례를 하라구, 힝. 똥이나 발라놓겠다.>>

강석의 말이였다. 어려서 벌써 대종교를 알게된 그는 학교를 다니기보다 양모를 따라서 자기네의 교당에 더 즐겨다니였다. 마음속의 락원은 바로 그곳이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들어온 일제의 앞잡이가 일본어교재를 가지고다니면서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집들에 팔았고 조선글은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 일본글을 배워야 희망이 있다고 선전했다. 그자는 해림일대에 두 번 나타나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8로>>들이 감쪽같이 없새치운것이다.

 

북만에 흩어져있는 나머지 독립군들이 정체를 감추면서 이렇게 막연하게 보내고있을 때 관내에서는 수년간의 독립운동의 경험과 교훈을 통해서 민족운동력량집중이 기본원칙이 되고 절박한 선결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진용을 정비하고 혁명력량을 키워 중국의 항전에 참견하여 왜적을 구축하고 조국을 광복시킬 목적에서 전부터 광복진선을 조직하여 림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재건), 조선혁명당이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림시정부의 기초당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중국당국으로부터 중국령토내에서 광복군조직의 허락을 받은 림시정부는 광복군훈련대강을 마련하고 중국측의 심사를 거쳐 준비를 완료한 다음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광복군총사령부를 설립했다.

총사령은 리청천, 참모장은 리범석이였고 황학수가 부처장으로 되었다.

광복군의 중요 예산은 당분간 외국원조에 의해서 충당하기로하였다. 군의 방침은 우선 항일결전을 위한 전투부대를 편성, 훈련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아래와 같은 계획을 세웠다.

 

첫째, 대량으로 군사간부를 단기양성하는 한편 국내, 만주, 남북중국에 전원(傳員)을 파
      견하여 동포사병을 초련(招練)하여 훈련할것.

둘째, 군(軍)창립 1개년후에는 최소한 3개사단을 편성하여 중,미,영 등 련합군에 교전단
      체로 참가하여 전투할것.

셋째, 한편으로 선전을 실시하여 밖으로 종래의 투쟁력사와 현재의 분투상황을 소개하는
      동시에 안으로 적후방의 동포를 고동하여 총궐기 폭동할것과 군사행동에 향응 협조
      할것을 촉진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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