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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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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요란한 폭음이 온 시가를 들었다놓았다. 그러더니 시가남쪽 정거장모퉁이에서 려명전의 암흑을 불태워버리듯 뻘건 불길이 활활 솟구쳐올랐다. 부두에서 울려오는 경황한 배고동소리와 함께 온 시가는 날밝기전부터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포장도로로 공포에 전율하는 일본헌병대의 오토바이들이 미친듯이 달려가고 병사들을 가득박아실은 트럭들이 시내밖으로 창황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 실로 한없는 기쁨과 극도의 절망이 엄연한 대조를 이룬 순식간의 변화였다. 여지껏 통치자이며 주인이노라 행세해왔고 만주의 영원한 평안과 치안을 유지하노라 떠들어대던 일본인관리배들과 그를 붙좇아오던 온갖어중이떠중이들이 혹은 군복을 벗어 동댕이치고 혹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맨발바람으로 아우성치며 허겁지겁 달아나고있다. 략탈자의 본색을 오히려 세상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며 뽐내던 그들은 바로 여기 북만의 한 도시의 거리바닥에다 한때 오만스레 끌고 다니던 게다짝도 건사못하고 온갖 추태를 드러내면서 패전의 줄행랑을 놓고있었다.
여기 북만의 도시―수천년간 모래톱을 핥고 자갈을 씻고 진흙에 미끌면서 허허한 벌판과 산곡을 굽이쳐나와 다시금 수백리 평원을 지나 흑룡강과 합친후 나중에는 바다로 도도히 흘러들어가고있는 송화강남안에 자리잡은 아르금시(阿爾金―쟈므스의 옛이름)는 드디여 기나긴 고달픈 잠에서 깨여나 기쁨의 새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쿵! 쿵! 대포소리는 점점 더 요란한 폭음으로 도시를 진동했다. 가까운 시교에 있는 일본군의 최후방선을 격파한 쏘련붉은군대는 최후발악을 기도하는 자들에게 훼멸적인 타격을 안기면서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 항일련군이 그들과 배합작전을 했다.
우릉우릉!... 기체에다 오각별을 새긴 비행기가 도시 상공을 낮추 선회하면서 무수히 삐라를 뿌렸다. 그러자 시민들은 그 누구도 더는 방공호속에 숨어있을념을 하지 않고 달려나와 삐라들을 주어들었다.
<<해방이다! 해방이다!>>
<<만세! 만세!>>
이 기쁨 이 들끓음속에서 헌병대감옥의 육중한 철대문이 활짝 열려졌다. 숱한사람들이 그속에서 쏟아져나왔다.
<<야, 해방이다! 이젠 살았구나! 살았구나!>>
해방받은 뭇사람들속에서 지금 바야흐로 제 친구의 어깨를 마구 뚜드려대며 손을 추켜들고 기뻐 웨쳐대는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는 곧 김려홍이라고 하는 청년이였다. 콩크리트바닥에서, 사람의 뼈를 악착스레 갉아먹고있던 수백개의 쇠사슬이 귀청을 째며 다투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려홍이는 한감방에서 환난을 함께 겪어온 한족청년이며 털보인 왕복룡이와 함께 쇠사슬을 끌고나왔다. 얼굴은 전혀 피기라고 없어보였으나 두드러진 코날은 어딘가 강경한 인상을 안겨주는데다 우묵한 검은 눈은 형형 광채를 내뿜고있었다.
<<동포들! 형제들!>>
불시로 우렁우렁한 웨침소리가 환희로 들끓는 <<죄수>>들의 귀전을 때리며 울려퍼졌다. 그러자 들끓던 소음들이 일시에 뚝 멎었다. 눈썹이 짙고 체구가 웅장한 사나이가 망치와 정을 쥔 손을 높이 치켜들고 다시금 웨쳤다.
<<자, 쇠사슬을 끊어버립시다!ㅡ당신들의 발목에 채워진 그 철쇄를 부셔버립시다!― >>
기쁨의 환성이 다시금 와 ― 터졌다.
려옹이는 복룡이와 하께 그의 앞에 달려가 발목을 들이밀었다. 묵직한 쇠망치가 정을 겨누고 몇 번 힘껏 내리쳐졌다. 그러자 족쇄는 애처로운 소리를 내면서 뚝 끊어져버렸다. 려홍이는 마치 천근짜리 종낭을 발목에서 떼여버린것 같은 쾌감을 느끼며 금시 하늘에라도 날아오를것만 같았다. 려홍이는 흥분을 눅잦힐수 없어서 저도 모르게 족쇄를 끊어준 그 사람의 손을 덥석 잡아쥐였다. 그랬더니 그 사나이도 벌씬 웃으면서 어깨를 툭 쳤다.
<<그래 기쁘지? 암, 기뻐해야말구, 이젠 해방이 됐으니까!>>
<<아니, 인제보니 조선분이였구만요! 그런걸 난... 감사해요! 정말 난... >>
려홍이는 감격된 심정을 이루다 표현 못한채 엄벙덤벙 다그쳐물었다.
<<어른님, 그런데 어른님넨 무슨 군댄가요?>>
<<허허, 우리가 무슨 군댄가구?... 어디 알아맟춰보라구!>>
<<저― >>
<<왜 들어보질 못했엇나?... 우린 항일유격대라네.>>
<<아, 항일련군!...>>
<<그렇네, 바로 우리가 항일련군이지... 그래 젊은인 집이 어데 있나?>>
<<전 집이 촌에 있어요. 저 손가장이라구 하는데말입네다.>>
<<손가장? 그럼 저― >>
그가 무엇을 더 물으려는데 이때 허리에 탄때를 두르고 장총을 든 한 유격대원이 달려와 손을 올려 경례를 붙이였다.
<<지휘원동지, 홍군사령부에서 찾고있습니다.>>
려홍이는 눈을 껌벅거리며 그 말을 되씹었다.(지휘원동지라! ...도대체 어떤분일가?)
려홍이가 보건대도 그가 보통사람인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점은 유격대원에게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려홍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한결 다정하고 활달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젊은이하고 얘길 좀 해봤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구만. 집이 손가장에 있다고 했지?... 이제부터는 남한테 억눌림받지 말고 살아야 하우.>>
려홍이는 머리를 힘있게 끄덕이고나서 멀어져가는 그의 뒤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세상에 참 고마운분도 있구나!... 지휘원동지! 지휘원동지!)
려홍의 가슴속에는 무어라 형용할수 없는 뜨거운 정념이 북바쳐올랐다.
뭇사람들의 웅성거림속에서 발목에 채워졌던 쇠사슬이 부서지는 소리가 련달아 일어나는데 머리우에서는 8월의 뜨거운 태양이 그 어떠한 힘으로써도 막아낼수 없는 찬란한 빛과 열을 들끓고있는 이 모든 사람들의 머리우에다 한껏 뿌려주고있었다.
<<야 이거 참! 조롱에서 나온 새같이 막 날아보지 못하는게 한이구나... 우리가 이제는 어디루 가야 하나?... >>
<<어데루 가긴, 고향으루 가야지!>>
<<그래 그렇지, 빨리 집으루 가야지!>>
려홍이는 복룡이의 손을 꽉 움켜쥐고 붐비는 사람들의 사이사이를 헤가르며 급히 걸어나오다가 그만 멈칫 서버리고말았다. 저기 사람들이 몰켜선 이쪽에 젊은 녀인 하나가 방금 감옥문을 나온, 보아하니 필시 남편인듯한 젊은 사내의 품에 안겨 목메여우는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제길 뭘 그렇게 보나, 응?>>
복룡이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얼핏 그쪽을 보더니 코를 벌름거리며 능청스레 두눈을 슴벅했다.
<<흥, 갑자기 색시 생각이 나나부지?>>
<<그래 좀 나는것 같애.>>
<<생각난다구?... 허허.>>
<<한데 색시가 없는게 유감이거든!>>
<<색시가 없다니?... 그럼 고향에다 두고온건 뭐고?... >>
<<사람두, 그게 어디 색시인가, 처녀지... 헌데 그하고 약혼이라도 했더면 홀로계시는 아버지 걱정 덜했겠다.>>
<<이렇게 살았으니 됐어... 인제 내 시키는대루만 하라구 마을루 가거든 그 처녀하고 제꺽 약혼을 하고 그담엔 또 제꺽 약혼을 하고 그담엔 또 제꺽 잔치를 하란말일세.>>
<<그렇게 했으면 좋으련만 그 쳐년 벌써 시집을 갔을지두모르지!>>
<<제기, 한다는 소리가 그런 맹랑한 소리뿐이야... >>
려홍이는 제쪽에서 푸푸거리는 그의 넓적한 뒤잔등을 대 철썩 갈기며 팔을 잡아끌었다.
<<이 수세미같은 친구야, 그렇게 떠따고와대지 말고 어서 갈길이나 가자구!>>
큰길로 통한 대문가에는 허리에다 권총을 차고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이 트럭우에 두다리를 턱 버티고선채 팔을 저어가면서 한창 열변을 토하고있었다. 뒤잔등은 튼튼한 매돌짝같이 움직였고 격앙된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로동자, 농민들은... 해방받은 오늘 자기의 힘을 믿고... 한결같이 일떠나서 종국적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단결하여 싸워야 합니다. 지금의 국세는... >>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욱 몰려드는통에 려홍이는 하마터면 넘어질번했다.
<<젠장! ─>>
<<제길할! ─>>
복룡이도 따라서 눈을 부라리며 명토없이 한마디 욕지걸이를 하려다가 그만두고 려홍이의 팔을 잡아채면서 툴툴거렸다.
<<에잇 그까짓거 있어? 어서가자구!>>
<<아니야, 무슨 말을 하는지 좀 들어보자.>>
려홍이는 아닌게아니라 그 연설을 좀더 듣고싶었다. 하지만 왕털보가 고집스레 팔을 잡아 끄는통에 그 자리를 뜨는수밖에 없었다.
육중한 땅크의 무궤도가 굴러가는 소리, 포를 끄는 견인차의 엔진소리, 번뜩이는 철갑모를 쓰고 따발총을 멘 코 큰 사람들의 발구름소리... 소음에 잠긴 거리는 땀과 화약내 풍기는 행렬을 어디론가 급히 흘러보내고있었다. 장사진을 이룬 행군대렬을 가로건널수 없은 그들은 헌병대감옥아래쪽 관저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거리에 들어섰다. 큰거리에서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역시 분잡했다. 한참동안 걸어가느라니 층집벽가에 사람들이 가듣모여서고있었다. 다가가보니 커다란 종이에 쓴 글이 나붙었는데 그것은 파쑈일제침략자에 대한 최후의 일전을 맞이하면서 중공중앙에서 전국동포들에게 고하는 호소문이였다.
<<8월8일 쏘련정부는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인민은 열렬한 환영을 표시하는바이다. ... 대일전쟁은 이미 마지막단계에 들어섰으며 일본침략자 및 그 주구들을 종국적으로 전승할 때는 닥쳐왔다. ...전국인민들은 단결을 강화함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기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려홍이는 복룡이가 팔을 잡아 끌었어도 끝내 다 읽어보고야 자리를 떴다.
<<제길, 이게 대체 무슨 주제람?... 우린 정말루 녹초가 됐어. 어데건 좀 앉아쉬엿다가 가야지... >>
<<벌써 맥없다고 소리치면 집으론 어떻게 가겠나?>>
려홍이는 비록 이렇게 말은 했으나 그 역시 기진맥진했음을 어쩌는수 없었다. 이런 동란시기에 그라고 출출한 배를 요기할 재간은 없었으니말이였다. 그들은 널판자로 문을 닫아버린 어느 한 잡화점앞에서 다리를 퍼더버리고 앉았다. 날씨는 찌는듯이 무더웠다.
려홍이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쓱 문지르고나서 발목을 문질렀다.
<<제길, 족쇄를 없애서 가볍긴한데 왜 이눔의 다리가 이렇게두 저릴가?... >>
가슴터지는 울분이 또다시 솟구쳐올랐다. 옆에 앉은 봉룡이도 공연히 행인들을 흘겨보며 푸푸거렸다.
<<이젠 어느놈이건 우릴 업수히 여겼다간 혼빵날줄 알어... 절대 용서하지 않을테니말이다!... >>
바로이때였다. 마치 그의 결심을 떠보기라도 하듯이 변두리가 다 해여진 색난 캡을 눌러쓰고 기름때 얼룩진 작업복을 걸친 청년이 먼눈을 팔면서 급히 지나다가 그의 다리에 걸채여 비틀거렸다.
<<어허, 이자식봐라!>>
성질이 우락부락한 복룡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눈알을 부라리며 주먹부터 내들었다. 그통에 저쪽은 흠칫 뒷걸음쳤다.
<<보기는 왜 퀭해 보는거냐? 왜 함부로 건드리는가 말이다 응?>>
<<누, 누가 널 건드렸단말이냐?... >>
돌연적인 사태에 일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청년이 정신을 가다듬고 대들었다. 키는 자그마하나 당차고 야무지게 생긴품이 호락호락한 축은 아닌상싶어보였다. 복룡이는 두팔로 자기 옆구리를 짚고 턱 버티여섰다. 흡사 곰같은것이 과연 한번 해볼 태세였고 싸움은 조만간에 붙을것만 같았다.
<<아, 아니, 이거 어쩌자고 이러는거야, 사람도 원... 하하하!>>
려홍이가 제꺽 중간에 끼여들며 우선 복룡이부터 나무랐다.
<<복룡이, 이게대체 무슨 꼬리야?... 그렇게 아무사람하고나 주먹다짐하는게 아니야... 어서 물러서라구!... 그리구 임자도 주먹을 내리우라구. 우린 지금 성풀이하려고 단단히 벼르고있던판에 공교롭게두 임자가 괜히 걸려들엇단말이여.>>
<<하하하!... >>
복룡이는 어느새 분이 삭았는지 눈섶을 실룩거리더니 악의없이 웃음을 터쳤다.
<<에, 에참! 허허... >>
그제야 그 청년도 캡을 벗어 부채질하면서 어이없다는 듯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는데 보매 담소자약한 청년이였다.
<<그럼 임잔 조선사람이구만!>>
려홍은 이렇게 기쁜 소리를 쳤다.
<<옳아!... 그러구보니 임자도 조선사람이였구만!...>>
그역시 반가와 어쩔줄을 몰라했다. 려홍이는 이 낮선 거리에서 동족의 사람을 만나니 혈친을 난난것처럼 반가왔다.
<<하하하... >>
<<하하하... >>
둘은 함께 어깨를 들석이며 웃었다. 려홍이가 먼저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어디에서 뭘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청년은
<<내 꼴을 보면 제꺽 알수있겠는데... 기실 난 일해먹고 사는 로동자야.>>
하고 숫기좋게 대답했다. 마치 자기는 의협심있고 순후한 성품을 가진 사람과는 무관하게 사귀기를 좋아한다는 듯이 그는 털보인 복룡이를 건너다보더니 불쑥 한마디 건늬였다.
<<여봐, 이분은 이렇게 점잖은데 임자는 왜서 그렇게 험상궂게 대들엇나?... 수염은 왜 덥석개모양으루 기르구?... 그걸 자랑하느라 나한테 엄포를 놓앗댔나?... >>
그의 능란한 북방토배기의 중국말솜씨는 실로 감탄할 지경이였다.
<<에키, 이 버르장머리없는 사람 봐. 그따위 말본새는 어데서 배웠어?... 대체 몇 살이나먹었게?... >>
왕복룡이는 한족이나 다름없는 말재주에 슬그머니 탐복하며 롱담을 쾌히 받았다.
<<내말인가, 난 스므한살이야!>>
<<스므한살? 하하하... >>
복룡이는 헝클어진 턱수염을 치켜들고 온 골목이 들썽하게 웃어댔다.
<<그럼 날보구서 아재비라 해야겠네. 수염부터 보란말이여.>>
<<체, 수염만나면 아재비로 되나? 고양이란놈은 날적부터 수염났어.>>
캡쓴 청년은 이렇게 털보를 씨까슬러주고나서 기분좋게 한바탕 웃어대더니 손을 턱 내밀었다.
<<담배나있거든 한 대 달라구.>>
<<허허, 이녀석봐라. 우물와서 숭늉달라네. 그러지말고 임자가 잇거든 한 대 달라구... 우린 벌써 두해나 한모금도 피워보질 못했어.>>
복룡이가 손을 내밀며 되잡아 구걸하는통에 청년은 눈이 둥그래졌다. 그리고는 이제야 집요한 눈길로 두사람이 입고있는 옷주제부터 더부룩한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깐깐히 훑어보는 것이였다.
<<그렇게 놀라지를 말어. >>
려홍이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뒤말을 이었다.
<<우린 방금 감옥에서 해방되여 나온 사람들이야... 난 김려홍이라 부르고 이 사람은 내 친구 왕복룡이야.>>
청년의 기색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침통한 기색을 짓더니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러고보니 인자네들은 죄인이였구만!>>
<<뭐라구?... >>
려홍이는 격분한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벌컥일어났다.
<<그따위 소린 하지두말어... 우리가 왜 죄인이란말인가?...>>
려홍이의 숨결은 거칠었다. 마치 고요했던 수면이 일점광풍을 만난듯 잠시나마 환락속에 잠겼던 가슴속에 울분이 사품쳐오르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대관절 무엇 때문에 우리가 우리가 죄인이란말인가 엉? 우리에게 무슨죄가 있다고 그 소린가말이여?... 죄야 왜놈들이 진거지... 그놈들이 조선에서 조선사람을 못살게 굴더니 여기까지 좇아들어와서... 그리고 그놈들 앞장에서 졸개질해먹은 놈들도 모두 때려죽일놈들이지! 이보게 안그런가말이야?! 어서말해보라구!>>
려홍의 거친 음성은 분노로 하여 떨었다.
<<그렇구말구! 죄인이야 바로 그놈들이지!>>
조선말에 서툰 복룡이마저 격분해서 턱수염을 떨었다.
려홍이는 바지가랭이를 불쑥 걷어올리였다. 그러자 족쇄에 피인 험상한 숭터가 드러났다.
<<이걸, 이걸 좀 보란말이여!>>
청년은 숭터를 보자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살을 찌프렸다.
<<이보게 려홍이, 노여워말라구!... 그 귀축같은 놈들이 사람을 이지경으로 만들어놓다니?... >>
캡을 눌러쓴 청년은 려홍이의 심정을 리해하고 눈시울을 붉히였다.
<<나의 친구 박원섭이도 왜놈들에게 잡혀갔는데 헌병대감옥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안지는 오래오. >>
려홍이는 격분된 심정을 진정하고 잡혀간 사연을 물었다. 그랬더니 박원섭이란 청년은 회사당국에서 <<전선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로동자들의 로임을 형편없이 잘라내기에 이에 항거해나섰다가 <<반역>>으로 지목되여 잡혀갔다는 것이였다. 이 말을 듣자 려홍이는 자기가 2년전에 경찰놈들한테 억울하게 잡혀가던 일이 회상되여 다시금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그 사람, 당치도 않은 <<죄명>>을 들쓰고 이루 말못할 경난을 겪었을 그 사람에 대해서 동정심이 울컥 치솟아올랐다. 그리고 십상팔구는 벌서 이 세상에 살아있지도 않을 그 사람도 오늘 자기들처럼 감옥문을 나와 친구를 만날수만 있다면 여북 좋으랴 하는 심정이 간절하였다.
이때 량어깨가 햇볕에 그을러 거멓게 된 다른 한 조선청년이 런닝샤쯔의 아래섶을 배꼽까지 말아올린채 씨근거리며 지나다가 저의 동료를 알아보고 소리쳐불렀다.
<<아니 금록이, 거기서 뭘하고있나? 감옥문이 열렸다는데 어서가보자구!>>
캡을 쓴 청년은 몸을 홱 돌리더니 그리로 뛰여갔다. 그리고는 그 청년과 뭐라 수군거리더니 그의 바지호주머니를 들춰 담배 한갑과 성냥을 꺼내갖고 되돌아뛰여오는것이였다.
<<옛소, 이걸 갖고가오.>>
그는 들고 온 궐련과 성냥을 려홍의 손에 쥐여주더니 헐헐 숨찬 소리를 이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데 줄게라곤 없구만그려... 참, 초면이지만 잊지를 못하겠소. ...일후라도 시내로 오게 띠면 우리 집에 꼭 들려주오. ... 내 이름은 박금록인데 발전소에서 로동자질을 한다오. 그럼 자, 잘들돌아가오!>>
소박하나마 그사이에 사귄 친구의 자별한 정분이라 생각하니 려홍이는 가슴이 뜨거웠다. 려홍이는 복룡에게 담배를 넘겨주며 사연을 알려주었다.
<<저 친군 발전소에서 일한대... 이름은 박금록이라나. 그런데 이렇게 담배까지 두고 가잖어!>>
<<맘씨좋구 인정있는 청년인걸!>>
사람들속에 사라져가는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복룡이도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
이틑날 정오무렵에 그들 둘은 철길을 따라 걷고있었다. 긴 레루장은 꼭마치 불비에 데여 늘어진 구렁이들처럼 번들거렸고 철길에 깐 자갈들은 햇볕에 가열되여 흡사 가마안에서 방금 구워낸 벽돌처럼 뜨거웠다.
각기 자기네마을을 찾아가고있는 그들은 밤낮사을을 걸려서야 당도하게 된 한 자그마한 시골 정거장에서 서로 갈라져야 했다. 려홍이는 거기서 서쪽으로 70여리밖에 있는 손가장(孫家庄)으로 가고 복룡이는 동쪽으로 산길을 걸어 닷새후에야 당도할수있는 그성(金城)으로 가야했다.
두청년은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면서도 제각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려홍이는 철길에서 멀리 떨어진 연연히 푸른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느라니 새삼스레 지난날이 회상되였다, ...
려홍이는 이른봄 논갈이가 갓 시작되였을 때 연기에 그슬린 야장간곁채의 단간방에서 태여났다.
<<에그, 왜 인제오우?... 댁네가 또 아들을 낳았음메.>>
덕성스러운 이웃집로파가 수선떨면서 알려줬을 때 일밭에서 방금돌아온 김덕구는 마당한켠에 있는 섬돌에 걸터앉으며 되려 한숨만 내쉬였던 것이다.
<<반갑기는 하네만 내가 저눔이나 제대루 키우겠는지 원!...>>
차례로 세워보니 다섯째인데 태를 자르고 열흘만에 죽은 첫딸과 다섯 살까지도 채 자래우지 못하고 병마에 전부 잃어버리고 만 세아들의 기구한 운명과 탐탁한 자기 집 신세를 생각하고 김덕구는 그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몰아쉬였다. 헌데 대가 끊어지지 않으려고 그랬던지 려홍이는 태여나서 무병하게 자랐고 일곱 살을 먹어서부터는 들에 나가 소를 먹이면서 소잔등에서 <<천자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도 평온한건 아니였다. 그가 열한살나던해에 난데없는 손가네가 오는통에 본토배기지주ㅡ─당가중은 어디론가 쫓겨나버렸고 그의 땅을 부쳐먹던 김덕구는 마을의 여느집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작농으로 되어버렸기에 아들인 려홍이도 따라서 손지주의 소작농의 아들로 신분이 바뀌여버렸던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 태여나기전에 벌써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본래 어려서부터 풀무앞에서 잔뼈기 굵어진 재간있는 야장이였다. 무거운 메와 쇠집게 몇 개만이 유일한 가산이였던 그는 조선을 강점한 왜적을 물리치고저 일떠선 의병들의 칼을 벼려주었다가 그 일이 탄로나는통에 어느날 밤중에 식솔을 거느리고 솔가도주하여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왔다. 처음 몇해동안은 간도에서 그럭저럭 살다가 거기서 다시 자리를 떠 여기 이 북만으로 깊숙이 들어왔는데 달리는 살길이 없어서 또다시 야장간을 차렸다. 그랬다가 쉰살도 못넘기고 자기 후대에서나 한번 제 땅을 갖고 살면서 신세고쳐보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런데 그의 유언과는 달리 제 땅은 고사하고 살림은 날로 더 피페하여만가서 집은 거의 파산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이 타고난 팔자인지?... 설혹 그것이 숙명적인것이라해도 그에 순복하며 살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극진했던 김덕구는 대를 이어갈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농군으로 만들지 말고 출세시켜보려고 학교에 넣었댔으나 려홍이는 얼마를 다니지 못하고 <<국어>>를 배워주는 선생한테 호된 매를 맞고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였다.
려홍이는 생기와 정열과 희망으로 충만되였어야 할 청년시절을 억압과 고통속에서 모대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일련의 고압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실시하기 위한 신만주국건설계획방안에는 <<근로봉사>>라는 기편적인 조목까지 있어서 해마다 18~22세의 적령청년들을 뽑아다가 혹사했던 것이다. 려홍이는 열여덟살을 먹던 해(그 전해에 어머니가 세상떴다)에 <<근로봉사>>에 끌려나가 죽을고생을 치렀다.
일제는 <<제국건국리상>>을 내걸고 이른바 <<국민총동원운동>>으로 백성들로하여금 저들의 침략정책을 지지하게끔 강박했으며 해마다 돌아오는 <<기원절>>이면 <<제국건국리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군하였다. 지어는 조선사람도 <<대화민족>>에 가까운 <<제2등민족>>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그 기원절을 쇠야한다고 강박했으니 그것은 뭇사람들의 불만을 야기시키지 않을수 없었다.
<<나발같은 소리다!... 왜놈의 명절을 우리가 왜서 쇠야한단말인가?... 량심있는 사람이면 허튼소리를 듣지를 말라!...>>
려홍이는 이렇게 만나는사람들에게마다 격분해서 이야기했다. 그후 얼마안가서 어느놈의 고발로 경찰에 잡혀갔다가 제국을 반대하고 천황의 뜻을 거역한 위험분자로 지목되여 헌병대감옥에 이송되여 정치범으로 갖은 고생을 겪었다.
려홍이는 미결수감방에서부터 복룡이를 알게되였다. 복룡이는 보국대에 끌려나왔다가 기한이 만기되였건만 여전히 돌려보내지 않고 강박로동만시키니 이에 불만을 품고 남까지 충동하여 태공을 하게했던 죄로 감금되엿던 것이다. ...
려홍이는 벗과의 리별을 앞에 두고 응당 약속해두어야 할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생각했다. ...둘은 마침내 지정된 목적지에 이르렀다. 그들은 인적기마저없는 한적하고 초라한 정거장앞에서 마지막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게되였다. 지칠줄모르고 울어대는 숲속의 베짱이들만이 리별을 앞두고 나누는 그들의 오랜 담화내용을 되풀이해주는 듯하였다.
<<할수없는 일이군, 인제는 갈라져야겠네.>>
복룡이가 먼저 그 큰 손으로 려홍이의 손을 덥석 잡는데 그의 커다란 두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그들먹히 흘러나왔다. 려홍이는 붉어진 눈시울로 털보의 얼굴을 넋없이 쳐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복룡이, 어차피 갈라져야 하겠구나. 하지만 우리의 정만은 가를수 없다고 보는구나.>>
<<그렇구말구, 우리의 정이야 절대 가를수 없지!...>>
복룡이는 목구멍에 치미는 뜨거운것을 꿀꺽 삼키며 감격에 떠는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려홍이 , 난 나를 친형제같이 여겨준 너를 절대 절대 잊을수없다. 이건 진정이야, 죽어두말이다. ... 어느때고 우리 집엘 한번 꼭 놀러와줘. 오기만하면 삼생기연 짝사랑처럼 맞아주겠어... 정말이야.>>
<<고맙다. 절대로 잊지 말아다구!>>
려홍이는 다시한번 복룡이의 손을 힘있게 잡아흔들며 간곡히 말했다.
<<복룡아, 이제부턴 꼭 남한테 억눌림받지 말로 살아보자꾸나. 맘먹은대루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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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아무리 흉악스레 날쳐봤자 진리는 깨뜨리지 못하는 법. 판결에 넘겨졌던 저자는 결국 무죄로 석방됐고 소설을 다시고쳐 쓴 것이다. 그러기를 5섯번. 이 책은 1983년3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하여 출판되였다. 이듬해에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소설전편을 방송했고, 자치주는 이 소설을 職工三熱愛圖書必讀書 로 추천을 한 것이다. 소설에는 시대의 정치경향이 보인다. 하지만 주제는 좋으니 독자는 맘놓고 보기를 바라면서 문학적으로 미흡한 점에 대해서는 기탄없는 지적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