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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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32)
2014년 04월 03일 11시 14분  조회:3175  추천:1  작성자: 김송죽
 

 

32.

<<8로>>를 비롯해서 한국독립군에 참가하지 않고 지방에 남은이들은 그지간 꼬박 4년간이나 김좌진장군의 해자(垓字)를 지켜왔다. 느구나 그 일을 자신의 의무처럼 여겼는데 그중에서도 <<8로>>중 한분인 리달문로인의 성의가 특별히 지극해서 감천(感天)할 지경이였다.

<<너들은 새끼가 있잖어. 이 늙은건 이제는 나서면 그림자뿐이니께 죽어두 아까울거없어.>>

이러면서 홀몸인 리달문로인은 자진 릉참봉이 되어 거의 주야장천이다싶이  장군묘를 지켜왔다.

본래는 홍범도의병대에 있다가 북로군정서 때 김좌진을 돕자고 넘어온 대종교도가 다섯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도 옛정을 잊지 않고 쏘련에 건너간 홍범도를 <<홍형>>이라면서 그리군 한다. 리달문역시 그쪽에서 넘어온 사람인데 홍범도보다 나이가 어리다. 리달문은 어떻게 넘어왔는가?

을미의병(乙未義兵)과 병오의병(丙午義兵)은 주로 유생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정미의병(丁未義兵)은 그렇지 않고 유생뿐아니라 해산당한 사병이나 일반국민이 많이 호응한 평민의병이였다.

이 의병투쟁에 리달문도 참가했던 것이다. 리달문은 본래 포수출신이다. 집이 갑산(甲山)에 있었던 그는 그 몇해전에 친구인 차도선을 통해서 함경북도 풍산군에 있는 홍범도를 알게되였고 같은 포수단에 있으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때 포수단은 주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느라고 조직된것인데 그 조직의 총책임이 바로 홍범도였다. 포수단은 노력하고 투쟁한 결과 관리들이 포수들에게 부여하는 과중한 세금을 인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던 중 정미의병이 일어났고 일제는 의병투쟁을 탄압하느라고 수비대를 동원했다. 그러면서 한편 의병들의 무장을 해제시킬 목적으로 1907년 9월 18일에 이른바 <<총포 및 화약류단속법>>이라는것을 만들어내여 발포했다. 이 법은 같은해의 11월에 함경도지방에도 적용되였다. 포수들이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도구인 총을 바치려하지 않으니 일제는 북청수비대를 동원시켜 강제로 빼앗으려들었다. 분노한 산포수들은 자기들의 자위행사를 위하여 포수단의 골간이였던 홍범도, 태양욱, 송상봉, 허근, 차도선 등의 노력과 령도하에 의병대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무기를 일단 검사하고나서 무기사용권을 주겠노라했다. 그래서 일부 순진한 포수들은 자기들이 소지했던 머스킷총을 일본군에게 가져다 바쳤다. 그러나 일본군은 약속대로하지 않고 압수해버렸다. 이런 배신적인 행위로하여 홍범도의병부대는 일본수비대, 경찰대와의 접전이 후치령(厚峙嶺)에서 벌어졌다. 이 첫 접전에서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일제의 수비대와 경찰을 괴멸시켰다.

이때 리달문은 차도선의병부대에 있은것이다.

차도선의병부대는 1907년 12월 31일 삼수(三水)에서 홍범도의병부대가 유인해온 일본수비대를 기습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일본군은 스스로 홍범도, 차도선 두 의병대를 신출귀몰하다는 소문을 냈다. 그후 홍범도와 차도선의 의병대는 또 한차례 합작하여 갑산수비대를 공격했는데 장장 9시간의 교전 끝에 적들을 전멸시키는 한편 갑산에 있는 일제의 기관을 전부 파괴하고 우편국도 점령하였다. 그후에도 여러차례 싸움이 있었는데 인본군은 번번이 패하기만했다.

일본군은 홍범도와 차도선이 령도하는 두 의병부대와 대응작전에서 목숨만 잃을 뿐 싸움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자 방략을 변경하여 선무공작으로 이 의병부대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자들이 던져주는 회유자금에 매수되고 감언리설에 속아넘어가 일부의병들은 투항했다. 의병장인 차도선마저 회유책에 넘어가 귀순했다.

그러나 리달문은 그자들의 회유책에 넘어가지 않았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1909년이후 국내에서는 의병투쟁이 어렵게되자 일부의병들은 국외인 만주지역과 로씨야령인 연해주지역으로 후일을 기약하면서 전략적으로 이동했다.

차도선의병대가 해산된 후 리달문은 홍범도의병대에 들어 싸우다가 1910년 3월 그 의병부대를 따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했다.

홍범도는 자기의 의병대를 이끌고 장백, 무순, 왕거지 등지를 이동하다가 그곳에 근거지를 두고있는 리진용, 조맹선, 윤세복, 차도선(귀순후 다시탈출 했음) 등과 손잡고 독립군의 성격을 띤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했다. 그리고는 국내와 련락을 취하고 우국청년들을 만주로 불러들이는 한편 만주에 있는 조선동포들도 포수단에 가입시켜 군사훈련을 받게했다.

이때 같은 함경도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리던 서일이 만주로 망명하여 중광단을 조직하고 외롭게 활동하고있었다.

한편, 국경선에서 왜적구축작전을 하고있던 홍범도부대는 1913년에 이웃인 연해주로 이동했다.

연해주에도 일찍부터 많은 독립운동자들이 건너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범도부대는 독립운동을 위한 재정적지원을 요청했건만 그곳의 부유층을 비롯한 주민들이 달가와하지 않아서 서로 대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때에 리달문은 의병대에서 나와 홀로 방황하다가 어느날 그곳에서 활약하고있던 독립운동자 정해식을 만나 서로 면목익히면서 어느덧 가까운사이로 되었다. 그러다가 정해식을 통해서 연해주로 무기구입을 떠나온 김기철을 또 면목알게 되었고 정해식이 식솔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오자 그도 따라서 건너와 김좌진을 찾아갔던것이다.

이때 신민회계통의 무관인 김좌진은 조성환, 리장녕 등과 함께 무장투쟁을 크게 전개할 결심을 먹은 서일의 초빙을 받아 대종교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정의단산하의 군정회를 림전태세를 갖춘 독립군으로 편성하고있던 참이였다.

김좌진은 오랜 교분이 있는 정해식을 반갑게 맞아주면서 초면이고 무식하기는하지만 성격이 호방하고 직심스러우며 산포수출신이여서 총을 잘쏘는 리달문도 반갑게 맞아 그를 자기 부대에 편입시켰다. 때는 1919년 8월경이였는데 그때 리달문은 나이가 벌써 48살이여서 아바이소리를 듣게된거다.

<<우리눔아 묘를 어느놈 다쳐만보지. 내가 그놈의 대갈통 박살내고말테다.>>

리달문은 이러면서 눈보라치는 엄한에도 권총을 품에 넣고 나가서 김좌진의 해자를 지켰다.

1933년도말, 한겨울에 왕천현 덕원리에서 살던 서일의 미망인 채씨가 식솔을 데리고 동경성에 이사왔다. 정해식, 리달문, 김기철, 김기섭 등 로인몇은 그네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인츰 동경성으로 보러 떠났다.

그들은 가다가 공교롭게도 길에서 독립군인 리길태와 마주쳤다. 한때는 지식인의 티가 나던 그가 초라한 모습으로 <<8로>>를 찾아오는 길이였다.

<<우린 이러다간 몇참못가서 제 스스로 자진하고말것 같습니다. 중국군은 언녕 패해서 끝장나고말았다지.... 지금은 공산당이 점점 주동이 돼서 항쟁을 이끄는 판입니다. 아직도 명색다른 부대가 올망졸망합니다만 믿고 손잡을만한건 하나도 없습니다.>>

리길태는 이러면서 시세영부대에도 들지 않고 여기 만주에서 항전을 견지할 결심을 품고 남아있는 이들이 당하고있는 처지를 말했다.

이에 리달문이 격해진 음성으로 꾸짖었다.

<<원 사람들이! 그토록되면서두 혼자 배돌건 뭐야. 왜 합작은 못해? 공산당도 항일하는 인간이겠지. 그렇다면 왜 그네들하구 손잡고 싸우질않나?>>

<<그네들이 우릴 달가와할가요? 한때 토벌당한 일 잊지 않을텐데.>>

<<그래 지벌당할 짓은 왜했나, 왜했어? 왜?>>

리달문은 오늘도 반공에 날뛰던 무정부주의자들을 원망했다. 김장군의 죽음도 한족총련합회의 붕괴도 가가 그들의 탓으로 보아온 그는 한국독립군이 무장해제를 당한 일까지도 그네들의 소행과 관련되지 않겠느냐며 원망했다.

정해식도 김기철도 김기섭도 김종진이나 김야운도 다 비탐한 죽음을 당하고말았는데 그네들만 자꾸 원망해선 뭘하느냐하면서 지금의 처지에서는 항전을 견지하자면 어쨌든 공산당과 손잡는 길밖에 있을것같지 않다고했다.

리길태는 이번걸음에 부족되는 양말, 장갑이며 행전같은것을 얻으려고 파견돼왔다. 김기철은 그더러 우선 산시에 가 자기 집에 숨어있으라했다.

늙은이들은 동경성을 향해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놓았다.

 

서일의 가정이 이사를 왔다니 대종교인 그들은 마치도 오래동안 격세했던 혈육을 만나러가는것 같은 심정이였다. 그것은 서일이 생전에 대종교와 독립혁명을 위해 마멸할 수 없는 공적을 쌓아놓고서 너무나 일찍이 동지들의 곁을 떠난것이 애석해서 더 그러했던 것이다.

백포종사 서일은 1921년 8월 27일 때이르게 조천한후 녕안 대흥동에 안장되였고 그의 기념제 추도식은 이듬해의 8월 15일 상해에서 진행하였다. 그후 시국이 좀 안정되였던 1927년 봄에 서일의 유해를 밀산의 당벽진에서 가져다 화장하고 화룡현 청호에 이장하였다. 이로써 청호는 신형 라철, 무원종사 김헌, 백포종사 서일, 이 3종사의 신해(神骸)를 봉장한 백두산하 동북록의 성지로 되었다.

1921년 8월, 서일이 밀산의 당벽진에서 조천하자 부고를 받고 달려갔던 대종교도들과 독립군장령들은 후사처리 두가지를 놓고 토론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서일의 유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서일의 아들 윤제를 장가보내는 일이였다. 서일은 당벽진에 와서 권씨성을 가진 집에 류숙하면서 늘 <<내 이집딸을 며느리 삼겠다>>고 말한바가 있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은 그것을 고인의 유언으로 삼고 서일의 아들 윤제를 권씨의 딸과 성가시키도록했다.

잔치는 3년후인 1924년에 했다. 한데 그때는 토비가 하도 욱실거리는때인지라 신랑이나 신부나 다가 왕청과 밀산의 당벽진을 곧추 오가지 못하해 부득불 쏘련을 거쳐 왕래했다.

그런데 서일의 며느리 권씨녀인은 아들 둘을 낳아놓고 1931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니 식솔이래야 서일의 미망인 채씨와 그의 아들 서윤제, 손자 경섭이와 만섭이해서 모두 넷뿐이였다. 채씨는 구면의 로인들을 만나자 지나간 이왕지사를 회억하면서 몹시 락루했다. 전해의 4월 5일과 6일 이틀간에 왕청현의 대감자, 덕원리, 동일촌 등 세 조선사람마을이  일제의 <<대토벌>>에 들어 잿더미로 되어버리고 무고한 백성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고한다.

살육을 도락으로 삼은 침략자의 마수가 펼쳐진 땅에서 어디가면 마음놓고 살아갈수 있으랴?

이런 상황이건만 아직 한사람도 흩어지지 않고있는 <<8로>>를 비롯하여 해림일대에 남아있는 재향독립군장병들과 그 가족들에서는 모두 국세변화를 각별히 중시해 살피고있었다.

1933년도 2월에 리승만이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조선대표로 참석했다니 이제는 되는가보다하면서 그 기회에 조선독립문제가 상정되여 하다못해 어떤 해결의 실마리라도 보이지나 않을가고 막연히 기대하기도했고 3월에 무정부주의자 백정기와 리광훈이 주중(駐中)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끼라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단히 맹랑해하기도 했다. 그들이 만약 계획대로 아리요시 아가라를 폭사했더라면 그것은 조선인민들을 또한번 쾌재를 부릴 장거로 되었을 것이다. 일제는 괴뢰 만주국수립에 대한 국제여론과 중국인민의 반만항일정서를 무마시키는 한편 화북침략계획을 실현코저 중국요인을 매수할 음모를 꾸미고있었다. 즉 일제의 륙군대신 아끼라의 계획에 따라 아리요시가 중국국민정부의 고급관료와 장교를 매수하여 중국인민의 반만항일운동을 무마시키고 조선독립운동탄압을 묵인받으려했던것이다.

그 전해인 1932년 4월 29일, 의렬단원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천장절(天長節)경축기념행사에 참가한 일본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대장과 일본 거류민단장 겸 행정위원장 가와바다를 즉사케 하고 일본군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중장, 상해총령사 무라이 등을 크게 중상시킨 일은 안중근이 이또오를 죽였을 때 처럼 큰 통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윤봉길의사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컷으면 세계여론기관들이 디투어 그것을 크게 보도했겠는가? 장개석은 지어 <<중국의 백만군대가 능히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인 윤봉길이 능히 하였으니 과연 장하도다!>>  하고 칭찬했다.

그 소식을 안 후 <<8로>>와 독립군가정들에서는 비밀리에 경축모임까지 가지였다.  

김기철, 리덕수, 등 로인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을 하직하기전에 윤봉길이 해놓은 1⁄10 만큼한 거사라도 하고싶었지만 폭탄도 없고 만들지도 못하고...궁리나지 않았다. 총잡고 항일을 못할바하곤 선전사업이라도 잘해 동포들의 동화되려는 의식을 깨우쳐주어 적어도 정신만은 노예로 되지 않고 살아가게 만들어보자고 하면서 <<8로>>들은 대종교의 교세확장에 힘쓰기로 했다.

그들은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한다.>>는 대종교의 종지를 실현하려고하였다.

대종교(大倧敎)는 민족신앙으로서 조화신(造化神)인 환인(桓因), 교화신(敎化神)인 환웅(桓雄)과 치화신(治化神)인 환검(桓儉)의 3위(位)의 일체 곧 <<한얼님>>을 신앙적대상으로 존중하는 조선의 고유의 교인것이다. 원래는 단군교(檀君敎)였는데 성(性), 명(命), 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을 조화적(調和的)인 근본교리로 1909년 음역 정월 보름에 홍암대종사(弘岩大宗師) 라철(羅哲)이 개종(開宗)하였던 것이다.

대종교는 일제가 1910년에 조선을 완전강점하자 반일구국단체로 변하였는바 교주 라철은 1914년에 총본사를 서울에서 북간도의 화룡현으로 옮겨와 장백산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 4도교구(四道敎區)를 설립하소 교세를 확대하는 한편 반일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었다. 대종교는 1918년에 독립단체인 중광단을 창립했고 이 단체는 무장투쟁을 목적해 대한정의단으로, 그것이 대한군정회와 대한군정부를 걸쳐서 나중에는 만주의 여러 독립군중에서도 가장 강유력한 북로군정서로 성장되였던 것이다.

대종교리에 일관한 맥락은 민족애와 철저한 애국주의였다. 때문에 교도들은 독립투사로 자라나고 혁명자로 자라나게 되었다.

동경성과 근촌의 대종교도가운데는 교원노릇하는 사람도 있고 의사노릇하는 사람도 있으며 로동자, 농민, 상인들도 있었다. 이에 교회는 교회의 교도들의 학습과 활동을 제대로 하게끔 하기 위하여 1934년 3월 9일에 동경성에다 경일시교당을 설치했다.

김기철은 그 구역의 교도가 아니였지만 그곳에서 교도들이 첫모임이 있는 날 김좌진의 친딸이자 자기의 양딸인 강석이를 데리고 갔다. 서일의 미망인 채씨는 물론 독립군에 있었던 교도와 전에 김좌진과 교분이 있었던 사람들은 다가 장군의 딸이 살아있다니 대체 어느만큼 컷고 몰골이 어떤지 보자고했다. 그래서 6살먹은 강석이는 난생처음 그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별다르게 사랑하고있음을 느끼게되였다.

어느날 리길태가 산시에 다시 나타났다. 임무를 맡고 밀산쪽으로 가다가 들린 걸음이였다. 김기철은 그한테서 잔존한 독립군들의 소식을 알게되였다. 주하(珠河)일대에 조상지(趙尙志)를 비롯한 중국공산당계렬의 혁명자들이 조직한 주하반일유격대(珠河反日遊擊隊)가 있는데 그 유격대의 주도하에 일부인원으로 조직된 독립군부대는 이해의 3월 추피툰(楸皮屯)에서 반일의용군(反日義勇軍), 삼림대(森林隊) 등 10여개의 항일부대와 더불어 공동항일조례를 내오고 동북반일련합사령부(東北反日司令部)를 설립했던 것이다. 그들도 시세영부대와 마찬가지로 몹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해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개별적인 독립군은 간도쪽으로 갔다는데 그 형편에 대해서는 지금 알길이 없었다.

일본군은 중동로일대의 요지들을 점령하고나서 차츰 농촌에까지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탄압도 우심해지고있었다. 그러니 그자들이 이제 김좌진의 묘지에 어떠한 행패를 부릴지도 모를 일이였다. 따라서 묘지를 장기적으로 지켜낸다는것도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8로>>는 의논 끝에 김장군의 유해를 고향으로 운구하기로 결정지었다.

그네들은 사람 하나를 조선에 보내여 김좌진의 본처 오숙근을 북만주로 데려왔다. 그래서 무정했던 그녀가 직접 제 남편의 유해이장에 관여하게 되었다.

왜적은 물론 다른 원쑤들도 긴좌진의 유해를 옮기는 일을 알기만하면 훼방을 놀것 같았다. 그래서 이 작업은 아주 비밀리에 진척시켰다. 그들은 우선 성명이 장기덕인 조선사람이 몇해전에 마적손에 죽은것을 고향에 이장하련다고 할빈에 있는 일본령사관을 속여 승낙받았던 것이다. 이같이 준비가 다 되자 1934년 5월 21일(음력 4월9일)새벽에 이장이 있었다.

철길북쪽, 워래는 일곱호 동네던 일가툰이 이때는 일본이민 18호가 새로 와 자리잡고 마을이름을 자경툰(自警屯 )이라 고쳤는데 거기에 그들의 무장대가 있었다.

그래서 이장은 몹시 조심스러운 가운데 진행되였다.

독립군들은 먼저 산소에 제를 지내고나서 묘를 헤치고는 장군의 골회를 갖고간 함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여덟사람이 상여를 메듯이 메고 산을 나와서 마을앞 약간 서남쪽으로해서 있는 자그마한 철교가에 내려놓았다.

날이 희붐히 밝아올 때 유개화차가 와서 잠깐머무는 사이 독립군들은 골회함을 제꺽 싣고는 모두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장군아, 독립날 함께 가자더니 네가 먼전 이렇게 가는구나!>>

백야 김좌진의 유해는 이렇게 안동(지금의 단동)을 거쳐 조선으로 이장됐는데 이쪽에서는 한사람이 책임지고 마감까지 따라갔다.

한편 김좌진의 묘가 갑자기 파헤쳐지고 빈 관만 남게되자 항간에는 하늘에서 칠선녀가 내려와 모셔갔다는지 칠선녀중에서 맏이가 배필이 되어 산다느니 하는 전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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