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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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33)
2014년 04월 04일 11시 45분  조회:2935  추천:1  작성자: 김송죽
 

 

33. 

한족총련합회가 해산되면서 산생했던 한족자치련합회마저 한국독립군이 해산됨과 같이 자연 해체되여버린후 수습할 뒷일들이 적지 않았다. <<8로>>들은 자진해서 그 일들을 꾸준히 해나갔다.

유해이장이 있은 후 김기철은 전처가 낳은 맏아들 두생(斗生)이네와 합가했다. 그래놓고는 이젠 늙은 몸인지라 집안일은 전부 두생에게 들어맏겨놓고 자기는 항전을 견지하는 투사들의 후원사업을 돕는 한편 교세확장에 힘썼다.

이해 늦가을의 어느날, 신안진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인 몇이 어느 부자집에 거처했다가 눈깜짝새에 황천객이되고말았다는 소문이 린근에 좍 퍼졌다. 그날 그 조선인 부자집의 아들이 장가를 가느라 이웃동네에서 색시를 데려오는 판인데 <<평남양>>유격대의 그 나젊고 용감한 리형박대장과 부녀대 대장 손옥봉(孫玉鳳)이 중도에서 잔치집의 꽃가마를 가로채여 자기들이 신랑신부로 가장해서 타고 들어와 그같이 감쪽같이 해치웠다 한다. 귀신이 들어도 혀를 내둘릴일이라 <<평남양>>의 명성은 이일로하여 날로 더 높아갔다.

그런데 아직도 지방에 남아 유격전을 하고있는 독립군 잔류인원들의 처지는 점점 더 우심해갔다. 손상거, 로옥중의 <<팔대대>>와의 협력이 끊어졌고 안진태부대와도 련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주검만 늘어갔다. 그들이 희생되면 <<8로>>들은 무슨 방법으로든 시체를 찾아다 추도하고 묻어주었는데 장소는 김장군의 구광근처였다. 그곳에 평토한 독립군이 열다섯이였다.

산시에 살던 독립군가정들은 서로가 극친해져 갈라지기 아쉬워했지만 그냥 한곳에만 모여살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흩어지도록했다. 그래서 강석이네도 정든 고장을 떠나 장돌뱅이식의 살림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해의 초겨울에 강석이네가 이사간 곳은 조선사람이 몇집안되는 홍단자라는 마을이였다. 헌데 이사와서부터 김기철로인은 자기가 웬 수상한 인간의 감시를 받고있는 기미를 감촉하고 불안해졌다. 그는 이사를 잘못왔다생각하고 곧 뜨려했다. 그러자 마침 이해의 12월에 도문과 목단강사이 철길이 다 놓이여 동포이사군이 목단강쪽으로 쓸어들었다. 그네들속에 석여든다면 은거가 용이해질것이기에 그는 1935년 봄을 잡자 12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홍단자를 훌쩍 떠나 전사호툰(前沙虎툰屯 ㅡ지금의 중흥촌) 가까이 네호사는 <<봇동마을>>에 이주해 그곳에서 뙈기논을 일쿠고 농사질을 하는 한편 양봉도 하면서 은신했다.

이해의 여름 어느 음산한 날 이른아침때 가깝게 지내는 성이 윤씨인 사람이 허둥지둥 달려오며 소리쳐 알리였다.

<<치화! 치화! 이거 큰일났네! 전사호툰에서 간밤에 우리 사람이 수태죽었어!>>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런 소리에 온집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불안해하였다.

해림근처의 전사호툰에는 한국독립군이 해체되자 가정이 있음으로해서 관내로 가지 않고 산에 들어가지도 않은 독립군이 여럿있었다.

이런데로 세놈의 살인귀가 기여들어 그곳의 악당과 여러날을 밀모한 끝에 밤중에 변복한 정안군망나니들을 동원해서 돌연히 독립군을 19명이나 체포했다. 그중에는 김기철이 면목아는 이전 정의부의 독립군 8명도 들어있었다. 이날따라 궂은비 내리고있는 밤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살인귀의 지휘하에 얼굴이 알리지 않도록 복면한 악당들은 독립군 19명을 하나 하나 마을밖에 있는 <<장군나무>>밑으로 끌고가 거기서 살해하였는데 총칼을 쓰지 않았다. 그자들은 자기손으로 독립군을 직접 죽이지 않고 한마을에 사는 중국사람을 시켜 작두로 목을 자르게했던 것이다. 땅은 피에 즐벅하고 피비린내에 숨막하는 살육은 이렇게 벌어졌는데 그자들이 총구를 들이대고 협박하는통에 별수없이 작두를 든 사람들은 머리 하나를 자르고 돈 3원씩 받았다.

이렇게 무서운 살인을 했던 마을의 중국사람들은 정안군이 가버리고 날이 밝자 모두 죄가 두렵고 보복이 겁나 녕안쪽으로 창황히 솔가도주했다.

<<간밤에 중국사람이 조선사람을 죽이고 도망갔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웨쳐댔다.

이 일이 발생한지 며칠안되여 일본군과 령사관의 <<사건조사단>>사람 몇이 전사호툰에 나타났다. 보살의 탈을 쓴 그자들은 <<황국신민이 된 이국땅에 와 살면서 되놈의 손에 이같이 참살을 당하니 과연 가슴아픈일이다.>>고 하면서 조난가정들에 <<위안금>>이라면서 30원씩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집단학살을 당한 이들의 혼을 위로한다면서 그 자리에다 비석까지 하나 해세웠다.

이 얼마나 그럴듯한 기만술책인가!

<<우리는 왜 눈치를 채지 못했는가?>>

이러면서 마을사람들은 경각성무디였음을 통탄해하나 그것은 너무나 뒤늦은 후회였다.

이번에 어떤 사람은 확실히 경각성이 너무나무디여 죽었다. 김기철이 면목아는 한 독립군은 이웃의 중국사람과 관계가 괜찮았다. 그래서 그 중국사람은 그가 화를 면하게끔하려고 했다.

<<오늘밤 무슨 일 날것 같은데 집에 있지 말아주오.>>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은 그날밤은 해림의 제 친구집에 가서 잤다.

<<오늘밤만 더 피해주오,>>

이래서 두 번째날에는 마을의 연자방아간 풍구밑에서 숨어잣고 사흗날에는 돼지굴에서 잤다.

<<제발 하루만 더.>>

그 중국친구가 거의 빌다싶이 사정했건만 그 사람은 죽자고 그랬던지 남을 공연히 고생만 시킨다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밤에 집에서 자다가 붙잡혀 목을 잘리우고말았다.

그 중국사람은 물론 비밀이 루설되기만하며 그 책임으로 온 가족이 도룩날가봐 무서워서 그쯤밖에 일깨워준것만은 사실이였다.

헌데 그 독립군은 환장을 했던지 이 일을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언반구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이 참화를 당한게 아닌가. 참으로 미욱한 짓을 했으니 통탄할 일이였다.

<<8로>>와 살아있는 독립군과 희생된 유가족들은 외견상 교의 행사로서 살해된 이들의 안식을 빌어 추도식을 거행했다.

 

반만년 길게 오는 우리 력사가

국수를 보존코저 목숨바치신

지사와 인인(仁人)들의 피로 먹삼아

거룩한 페지페지 꽃송이로다

 

이 력사 우리 뇌에 뿌리박히고

그 꽃은 우리 몸에 열매되여서

만고의 대치욕을 당한날부터

순국한 제현들이 접종(接踵)하셨네

 

제현의 끓는 피가 우리 가슴에

뜨거운 눈물되여 솟아오를 때

우리 몸 희생삼아 추도제단에

알뜰히 바치오니 받으시소서.

 

일제는 이번 참안은 <<공산비적>>이 빚어낸것이라 했고 <<악당>>들의 침투를 막고 인신을 보호해준다면서 주민들을 강박동원해서 마을주위에 토성을 쌓고 포대를 구축하여 집단부락으로 만들어버렸다.

강박에 하는수없이 <<보동마을>>에서 전사호툰으로 이사를 한 김기철은 이 집단부락의 주민들에게 <<깨여들으라, 교활한 왜놈들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있다. 항일세력을 하나라도 줄이느라 독립군을 살해한거다. 군중이 항일군을 돕지 못하게 하느라 거짓말을 한다. 한중백성을 리간시키느라 악독한 짓을 한거다. 속지들말거라. 왜놈은 부처님인게 아니라 살인백정이다.>>하고 일깨워주었다.

그는 젊잖고 올바른 말을 하며 친근성이 있었기에 동네의 조선사람들한테 존경받았거니와 중국사람들도 선생이라 존경해 불렀다. 양부가 그러하거니와 이제 7살밖에 안되는 강석이도 이 마을에 이사와서부터 제또래의 애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어느날 그의 집에서는 돼지를 잡았다. 내장은 돼지잡이군들과 로인들의 술안주를 하자고 삶았다. 그런데 술상차려놓고 돼지간을 찾으니 그놈이 반남아 감쪽같이 잃어졌다.

<<귀신이 곡할일이네. 돼지간 반쪽은 어디로 갔을가?>>

양모는 괴이쩍어하면서도 가마안을 자꾸 허우적이며 찾았다.

<<저놈은 돼지고기도 안먹는데?....>>

김기철은 양녀가 아까 가마목에서 돌아친 일을 상기하면서도 간대로야 했다.

<<8로>>는 전부터 강석이를 계집애로 취급하지 않고 <<저놈>>, <<이놈아가>>라고들 하면서 무척 귀여워했다.

언니 영조가 달려들어오더니 어머니한테 동네아이들이 돼지간을 먹는다고 <<보고>>를 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강석이가 그애들에게 주었다는거였다. 강석이더러 그건 왜 주었느냐고 물으니 애들이 너무 먹고싶다기에 훔쳐냈노라고 고스란히 고백했다. 그걸 훔쳐내가느라 뱃가죽까지 데여 말이 아니였다.

<<이눔아가 애비 닮아놔서 제 간이래두 남을 빼줄거야.>>

놀러왔던 정해식은 이러면서 웃었다.

그후에도 이러루한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일제는 열화와 같이 타오르는 동북인민들의 반일반만감정과 항일력량을 소멸코저 총력전(總力戰)을 벌리였는바 악명높은 <<3광정책>>으로써 본격적으로 집단부락을 만들어 항일유격대와 백성들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이해의 11∼12월사이에 1천명이 넘는 일본군이 해림일대의 산간지대를 수색했다. 한두호씩 산재해있는 집은 보기만 하면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사람은 붙잡기만 하면 죽이였다. 그리고는 산주변에 있는 부락들이 알라고 아래와 같은 <<유고문>>을 내리였다.

 

<<공산비적한테 식량을 날라가지 말고 집에다 재우지도말지어다. 이를 명령하니 위반하는 자 하나 생기면 그 가족은 물론 마을까지 전몰하는 참화를 입을테니 그런줄을 명심할지어다.>>

 

특히 <<빨간소매깃>>이라 별명을 가진 만주국 국군인 정안군(精安軍)이 일본헌병대의 앞잡이로 나서서 날뛰였는데 무릇 그자들게 발견되여 발길이 닿는 곳이면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참상이 빚어지군했다. 그 모양을 보고는 어쩌면 제동포도 모르고 이민족의 개가 되어 동족상잔에 날뛰는가 하면서 치를 떨지 않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집단부락은 흡사 피난민의 수용소와 같고 집중영과도 같았다. 물론 일제침략자들은 이런 집단부락을 만듦으로서 군중과 항일유격대를 갈라놓는데 유리했다. 그렇다고 해서 항일의 봉화를 다 꺼버릴수있는것은 아니였다.

억압이 종당에는 반항을 야기시기마련이다.

집단부락주민들은 일제와 그 주구들을 몹시 증오했다. 그래서 일제는 선무공작을 하는 한편 선동분자를 붙잡느라 쌍불을 켰다.

12월중순의 어느날, 일본경찰은 지방의 순경과 특무들을 거느리고 출동했다. 이날따라 김기철로인은 외출하지 않고 왕씨네 가계방에 가 있었다. 무심중 눈길이 창밖으로 던져졌던 그는 마을길에 일본경찰과 순경이 쏘다니는것을 발견하고 신경이 곤두섰다. 눈앞에 들이닥친 이 위험을 어떻게 벗어날지 미처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가게방주인 왕씨도 벌서 사태의 위험성을 알아채고는 술 한고뿌를 얼른 떠주면서 김로인보고 며느리방에 들어가 마시라며 등을 밀었다.

순경이 바깥문열고 들여다보니 가계방에 중국인주인만 보이는지아 그만 돌아가버렸다. 그래서 김기철로인은 요행 아짜아짜한 고비를 넘길수있었다.

그런데 그자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집에 다시뛰여 온 집안을 마구수색하면서 수라장을 만들어놓았다. 일본경찰의 앞잡이중에 중국사람 하나가 사복특무고 순경옷입은자는 조선사람이였다. 별명이 <<홍몽둥이>>인 이자는 일제의 앞잡이질을 하면서 어찌나 무도하고 츙포했던지 아근에 소문난 망나니였다. 그자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게 되니 행패질이라도 한바탕하고 돌아가려는 속창이였던 것이다.

그자는 칼로 벼뒤주를 찔러댔다.

이때 일본경찰은 젓먹이를 안고있는 강석의 양모한테 달려들어 닦달을 놓았다.

<<이년, 네 남편 어디갔어?>>

그자는 양모의 뺨을 치면서 일본말로 숨긴 사람을 내놓으라고 으르댔다.

아들이 겁에 질려 와ㅡ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강석이도 울었다. 일본경찰이 양모를 또 때릴가봐 자지러지게 울었다.

이런 판에 두생이가 피끗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말했다.

<<참, 아버지는 간지 여러날되건만 왜 오늘도 안오실가. 바보같은 녀석들이 늙은이를 잡아다가는 뭘 할려구? 아버지 고생하시겠는데....>>

이 집의 식솔과는 초면이였던 <<홍몽둥이>>는 귀를 쭈빗하고 강구더니 방금 한 말을 곧 그대로 일본경찰에게 번지였다.

그제야 그자들은 행패를 거두고 물러갔다.

김기철로인은 피신할겸 동경성에 가서 한동안있으면서 총본사의 일을 도와주었다.

대종교본사가 동경성에 자리잡아 교주 윤세복(尹世復)은 <<3.1학원>>을 세우고 학원모집을 끝내고는 <<천가집(天歌集)>>출판을 서두르고있는 차이였다.

이해의 통계를 보면 밀산, 목단강, 녕안, 동녕, 신안진, 할빈, 아성 등지에 대종교의 교회당 21개소 일어섰고 교도는 모두 9,982명에 달했다.

 

눈물겨운 한해를 보내고 또 한해 1936년을 맞이했다.

이해 늦봄의 어느날, 김동한(金東漢)이라는 초면의 사나이가 마을에 나타나 김기철을 찾았다. 김로인은 래방자가 같은 동포이고 나이도 있거니와 유식해보이고 범상치 않은지라 친절스레 맞아주었다.

그랬더니 래방자는 허심탄회를 한다면서 자기가 조선이 병탄되자 비분해서 구국에 나섰던 일이며 로씨야에 건너가 홍군에 가입해 원동전쟁에 참가했던 일이며 유지들과 함께 광복을 꿈꾸었던 일이며 그러다가 뜨로쯔끼분자로 몰리여 혁명대오에서 쫓겨나 원동씨비리에서 방황했던 일이며를 말하고는 이제는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니 공연한 희생을 말고 자기처럼 여생을 편안히 보내는것이 상책이 아니냐 권했다. 즉 김기철로인을 동원해서 산에 들어간 얼마 안되는 독립군들을 전부 귀순시켜보자는 꿍꿍이였다.

함구무언이 된 김기철은 눈살이 꼿꼿해서 넌 도대체 어느 후례자식의 씨종자인데 이 모양이냐고 쏘아보았다.

고향이 함북 명천인 김동한은 로씨야에 있을 때 벌써 일제에 매수되여 앞잡이가 된 혈채많은 민족대반역자였다.

일제는 그 피비린내나는 <<간도대토벌>>이 끝나자 소탕하기 어려운 항일대오를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방책을 모색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사람이 조선사람을 잡게 하는것이였다. 일제는 저희들 <<토벌>>과 배합하여 항일대오를 내부로부터 와해, 파탄시켜볼 생각으로 김동한을 총두목으로 하는 치안공작반(즉 <<협조회>>)를 조직하였다. 이 치안공작반은 1934년 9월 6일에 간도성 연길에서 조직되였는데 주요성원은 모두가 이미 변절한 공산당항일간부와 변절한 독립운동자들이였다. 이들은 모두 특무기관의 특별훈련을 받았으며 헌병대와 수비대의 직접적인 장악하에 있었다.

치안공작반은 엄밀한 조직망을 갖고있었는데 이때 그 본부는 연길에 있고 명월구와 왕청에 지부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 10개의 구회(區會)와 총반(總班)과 반(班)들이 있었다.

이자들은 동북의 항일력량을 없애기 위해 투항을 권유하고 반란을 책동했을 뿐만아니라 모략과 술책으로 항일대오를 파괴하고 분렬시켰다. 항일련군 제1군과 제2군내부의 분렬과 숙반확대화를 조장한 <<민생단>>사건도 바로 이자들의 소행이였다. 이 치안공작반은 지난 1934년 9월부터 1935년 7월까지 불과 10개월밖에 안되는 사이 간도에서 공산당지부를 파괴한것만도 190여개소 되고 살해한 혁명간부와 군중은 무려 1,800여명에 달했다.

일제가 <<동기토벌>>을 했지만 만주의 항일은 의연히 발랄했다. 크고 작은 각가지 명색의 항일무장들은 중국공산당의 장악하에 하나의 통일된 무력으로 점차 이루어졌는바 이 통일된 무력체인 동북항일련군은 11개군으로까지 발전장대해갔다.

이에 경황해난 일제는 1937년도로부터는 6만여명에 이르는 대병력으로 <<토벌대>>를 만들어 항일부대들을 북만의 삼강평원(三江平原)에다 몰아넣고 비행기까지 동원시켜 집중섬멸 할 타산을 하면서 연변에 있던 치안공작반을 북만으로 끌어왔던 것이다. 본부는 가목사(佳木斯)에다 잡았는데 인원은 모두 100명이였다.

오늘 그 두목 김동환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가목사로 행차하던 중 이곳에 들리여 이렇게 항일대오를 와해시킬 꿍궁이를 친거다.

김기철은 그자의 본질을 알아채고 대노했다.

<<뭐라?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라? 누구를 막보고 이따위 허튼수작이냐? 권선징악이라했어. 넌 그래 인과보응을 모르느냐, 망측한 놈!>>

그 서슬에 김동환은 그만 줄행랑을 놓고말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점점 분기탱천한 김기철은 그자의 목을 비틀어놓지 않고 살려보낸것이 맹랑하고 분했다.

이럴즈음에 강석이는 뜻밖에 눈병과 다리병이 났다. 당지의 의술로는 고치기 어려웠다. 안달아난 <<8로>>는 생각던 끝에 일본 오사까에 있는 한 독립군운동자가 꾸리는 병원과 련계를 달았다. 그래서 강석이는 이듬해에 양부의 등에 업히여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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