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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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31)
2014년 04월 02일 23시 54분  조회:3428  추천:3  작성자: 김송죽
 

31.

쏘련에 건너간 왕덕림은 건너올 타산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3대대>>는 이젠 항일을 하지 않을 모양인가고들 했다.

왕덕림이 본래는 아무런 주의주장도 없이 목릉과 수분하일대의 수림속에서 한때 <<록림호걸>>의 토비식생활로 청년시절을 보내다가 길림군의 장학상이 끌어당기니 부하들을 데리고가서 거기에 가담해 정규군의 외모를갖추고 장교로 된 사람이다. 그는 <<9.18사변>>이 일어나기전까지 길림군에서 3려단 7련대 3대대 대대장노릇을 했다.그래서 민간에서는 그의 부대를 <<구3대대>>라 불러온 것이다.

왕덕림은 자기의 상관이였던 려단장 길흥이 일본군에 투항하고 길림경비사령관느로 되자 이에 격분하여 즉시 항일구국을 선언하고는 5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산에 들어가 중국국민구국군(中國國民救國軍)을 조직했다.

항일을 대대적으로 할것처럼하던 사람이 많은 력량을 이끌고 넘어가니 기세사나운 일본군을 대적키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부하였던 오의성이나 시세영, 사추항, 공헌영(다시건너왔음)같은 사람들은 적은 병력을 가지고도 일본군을 대항하여 항쟁을 견지하고있었다. 그네들이 이렇게 하는데는 한국독립군의 역할이 컸다. 2,500명의 날래고도 용감한 독립군들의 불요불굴의 정신은 탄복할만했다. 오의성이나 그 휘하에 있는 우사령이나 다가 한때는 조선사람을 일본놈앞잡이로 보고 일본치략군을 만주대륙에 끌어들인 장본인으로 보면서 대단히 꺼렸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청년들을 붙잡기만하면 무더기로 마구 학살했었다. 한국독립군과 련합전선을 맺은 후로는 인식이 달라진 오의성이였다. 그러나 아직 적지 않은 중국사람들은 <<5.30폭동>>이나 <<만보산사건>>에서 받은 인상이 그냥남아있어서 조선사람을 대함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침략군은 중조두나라 인민이 단합못하게 쐐기를 박느라고 계속 리간질을 일삼고있었다. 일본군은 가는곳마다 자기들은 조선사람을 보호한다고 떠벌이면서 자기들이 떠나기만하면 중국사람한테 멸족당할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래서 숱한 사람들이 집도 밭도 다 버리고 식솔을 데리고 일본군을 따라다니는 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군이 녕안을 점령하자 녕안은 졸지에 <<안전향>>이 되어 일본군의 선전에 넘어간 사람들이 그곳을 피난지로 삼고 모여들었다. 거기 동문 밀가루공장뒤에 있는 절간으로 수십세대가 쓸어들어 복대기쳤다.

어느날 김기철은 녕안에 갔다가 그 모양을 보고와서 절레절레 머리저었다.

<<말이아니네. 사람들 어쩜 머리가 저리두 깨치지 못했을가 참?!>>

리달문도 보고와서 툴툴거렸다.

<<멍청이같은 인간들! 쓸개빠졌다니까. 저렇게 왜놈밑구녕 따라다니니께 조선사람 다 팔지.>>

일본군을 좇아 피난다니는 사람들이 고생인들 오죽했으랴만 그러는통에 가뜩이나 편견많은 중국사람들한테 더구나 눈에 나게된것은 불보듯한 일이였다. 그러나 산시를 비롯한 독립군가족들이 있는 몇 개의 마을은 정황이 그렇지 않았다. 당지의 한족들은 조선사람을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일제를 미워하는 민족으로 보고있었다. 이는 그네들이 여러해동안 같이 살면서 독립군과 그의 가족들의 반일감정을 잘 보아왔기 때문이다.

1933년은 가혹한 세월이였다.

3월 5일, 일본침략군은 이날까지 해림일대를 점령하고있었다. 그자들은 항일무장의 항격을 몹시 받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르는 곳마다에서 살인, 방화, 략탈을 서슴없이 감행하여 잔인무도한 강도의 본색을 적라라하게 드러냈다. 여기 중동로의 해림일대가 독립군의 근거지였음을 잘알고있는 일본치략군은 수차나 독립군과의 교전에서 혼쌀을 먹은걸 가슴속에 앙앙하여 이곳 조선사람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자들이 채 오기전부터 독립군가정은 멸족시키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누구나없이 불안해하였는데 3월 2일날 오전 과연 한떼의 일본군이 갑작스레 나타나 산시마을을 지나게되였다. 그래서 일대의 소란이 벌어졌는데 이날따라 김기철이 집에 없었다. 그래서 자식여럿인 강석의 양모 김분희는 막다른골목에 이르러 발을 동동 구르다가 뛸수있는 애들만 이끌고 피난가면서 <<한얼님! 한얼님! 부우하소서!>>하고 강석이와 딸 하나를 중국집에다 잠간만 봐달라고 맡겨버렸다.

(한얼님: <<대종교>>하느님. 곧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뜻. 단군의 경칭임.)

 

백야 김좌진의 딸 강석이는 하도 기구하게 태여나서 그런지 체대가 부모를 담지 않고 애기때부터 작았다. 그렇지만 오달지고 약삭바르며 남다르게 지닐총이 좋아서 무척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났다.

강석이는 말을 번질줄을 알면서부터 양부모의 교양을 받았다. 그의 양부모는 백지장같이 말쑥한 그의 머릿속에다 김좌진과 독립군의 이야기며 력사를 차근차근 가르쳐 넣어주었다. 그래서 명도기박(命途奇薄)한 이 애는 남달리 일찍이 깨달음이 있게 된 것이다.

일본군이 위만군을 앞세우고 총을 쏘아대며 마을에 들어왔을 때 철부지 강석이는 울지도 않고 정신이 또렷해진게 과연 별일이다. 아마 이건 웬놈의 괴물들이냐고 호기심이 동해서 눈이 마록마록해졌던 모양이다. 기실 중국집에서는 독립군의 새끼를 제집에 그냥두었다간 도룩이 날가봐 무서워 애들의 손에 강낭떡을 쥐여 바깥에 내보내곤 집에 들여놓지 않은것이다.

양모가 돌아와보니 강석이 밀짚대에 눈언저리가 긁히워 피나는지라 와락 끌어안으며 울었다.

<<석아, 네가 살았구나! 그런데 이게뭐냐. 큰일날번했구나! 엄마가 죄졌구나... >>

적들은 산시를 떠나면서 한족차치련합회의 기관과 학교를 짓자고 말리운 목재더미에 불을 질러놓아 화광이 충천했다. 곁따라 독립군들의 사택 여러채도 불탓다. 그통에 산시는 한동안 그을음냄새와 연기가 자오록했다.

한편 산시역에 주둔하고있던 동북호로군 제28려의 중사반장 손상거가 일제의 그같은 야만적인 행위를 목격하고는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항일에 나섰다. 그는 자체로 장강룡대(長江龍隊)를 조직하고 두령이 되었다. 이러루한 자발성적인 무장대인 서승대(西勝隊), 비인룡대(飛人龍隊), 기산대(岐山隊), 쌍산대(雙山隊), 점림대(占林隊), 사계호대(四季好隊), 금룡대(金龍隊) 8대의두령들은 서로 련락을 짓고는 봄에 산시의 양초구(洋草溝 ㅡ원명은 劉家房子)에 모여 <<왜적을 몰아내고 망국노로 되지 말자!>>는 구호아래 협동작전을 맹약하고는 팔대대(八大隊)를 설립했다. 이를 로팔대(老八隊) 혹은 서산팔대(西山八隊)라고도 불렀는데 인원은 도합 400여명이였다.

하루는 손상거가 총두령 로옥중(魯玉中)을 데리고 김기철을 찾아와서 같은지역내에 있는 조선인의 무장대와도 협동작전을 요청해왔다. 지방에 남아있는 몇 명안되는 독립군들로 조직되였던 무장대는 그네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여 팔대대에는 편입되지 않으면서 한동안 함께 일제와 싸우게되였다.

이럴때 여기 이 중동로에서는 또 하나 장방형의 붉은바탕중간에 <<평남양(平南洋)>>이란 세글자를 새기고 새노란 반달도안이 있는 기발을 추켜든 자그마한 항일무장대가 생겨나 일취월장하고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이전에 녕안일대에 있었던, 부호를 털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왜놈 여섯을 죽여버린 협객의 이름이 <<평남>>이였는데 지난해의 10월에 항일을 소극적으로 하는 구국군을 탈출해나온 원 동북군 제24려려장 리형박(李荊璞)이 그를 무척 흠모하여 자기 부대의 이름을 그같이 지었다고 한다.  

중동로는 중국과 쏘련이 공동으로 관리하고있었다. 쏘련은 이미 일본에 향하여 <<일본이 중동로의 권리를 침범할시 쏘련은 상당한 범위내에서 부득불 방지수단을 취할것이다.>>고 경고한바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길동지구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근근히 주요도시들만 차지하고 철도연선은 감히 통제할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전해의 3월 9일에 관동군의 조정하에 건립된 위만정권역시 공고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록 정규적이고 조직적인 항일행동은 못되지만 이 일대에서 군중들의 항일열조는 의연히 발발해져 각양각색의 이름을 가진 자발성적인 반일무장이 무려 40여개나되였는데 인원은 5,000명을 넘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네들 역시 하나의 단합된 력량이 못되여 강적앞에서는  하나하나 격파되고 붕괴도고있었다.

이런때에 정규적인 군사행동을 하고있는 한국독립군은 일제침략자와의 생사대결에서 자랑찬 승리를 거두고있었다. 한국독립군은 시세영 구국군과의 협동이 잘되여갔다. 시세영본신이 우선 조선사람과 좋게 지낼수있는 감정적기초가 얼마가량있은것이다. 아직 40살미만인 시세영은 농민의 자식으로서 산동에서 살 수 없어 6살때 부모들은 화룡(和龍) 륙도구(六道溝)에 이사를 왔다. 시세영은 그곳에서 자라나 30살때에 일제의 철도공정대에 뽑혀 조선에 나가 4년간 혹사를 당하고 돌아와서는 화룡에서 경찰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37살에 몇 명의 경찰무장을 휘동하여 분연히 항일의 길에 나섰던바 군중의 지지를 받아 짧은시간내에 수백명의 대오를 묶어세울수 있은것이다. 그는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왕덕림의 구국군에 가담했다. 구국군대의 다른 고위 장령들과는 달리 그는 조선사람의 반일감정을 믿고있었으며 그자신이 역시 침략자인 일제에 대해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과 증오를 품고있었다.

이 상통되는 마음이 바로 합작의 유대로 된 것이다.

한국독립군은 시세영부대와 련합하여 여러차례의 전투를 했는데 그중에서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왕청,수분대전자전투(汪靑,綏芬大甸子戰鬪), 녕안동경성전투(寧安東京城戰鬪)와 대황구전투(大荒溝戰鬪)가 가장컸고 전과도 휘황했다.

1933년 여름에 한국독립군은 동경성을 공격하여 많은 전리품을 획득함으로써 군수물자를 보충했다. 그러나 많은 피해를 입은 일본군 이즈까(飯塚)련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한국독립군을 추격하자 한국독립군은 전략상 근거지를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전저하(老田瀦河)에 도착한 한국독립군은 이즈까련대가 주둔하고있는 대전자(大甸子)를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총사령 리청천(본명 池靑天)은 먼저 용기있고 행동이 기민한 정찰병 10명을 부근의 마을에 보내여 적의 병력과 이동경로 등을 자세히 알아오게 했다. 결과 적들이 대전자에서 왕청으로 가는 길로 움직임을 알아냈다. 그 중간에는 태평령(太平嶺)이라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적군을 공격하기 유리한 지형이였다. 그리고 그 태평령은 지금 한국독립군이 주둔해있는 곳에서 기껏해야 8리가량의 거리밖에 안되였다. 그곳은 길이가 약 2리쯤 되는 긴 고개로서 <<乙>>자모양의 험악한 골짜기인데다 수목이 빽빽이 우거져서 적을 요정내기 과연 안성맞춤한 곳이였다.

한국독립군 2,500명과 구국군 2,000명은 함께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우고 총공격전에 병사들에게 아래와 같은 주의사항을 내렸다.

 

1. 공격개시는 적군의 후방이 태평령고개를 2⁄3이상 통과했을 때 장군의 명령에 의하여 할것.

2. 왜군만 공격할것이며 적재된 군용품에는 손해가 없도록 특히 주의할것.

3. 탄환은 풍부하니 각자 300발이상 준비하며 사격전 침묵을 지킬것.

4. 적군전멸후 군용품몰수때는 명령에 의하여 차례차례 정리에 착수할것.

 

총사령 리청천은 전사들앞에서 주의사항을 말하고나서 짧은 한마디 훈시를 했다.

<<태평령공격전은 2천만 대한인민을 위하여 원쑤를 갚는 격전이다. 총알 한 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수만의 령혼이 보우하여 주는 피의 사자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답게 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만대자손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우라!>>

비록 몇마디 안되는 간단한 훈화였건만 그것은 결전을 앞둔 전사들의 피를 끓게 하였다.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으면서 한번다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바치리라 굳게 다짐했다.

6월 10일, 결전의 아침이 밝아왔다.

리청천장군의 총성을 신호로 한중련합군은 일제히 몰사격을 퍼부었다. 복병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하고 태평령을 넘어오던 이즈까련대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창황히 응전했다. 그러나 사면팔방으로 포위된 일본군은 퇴로를 열 방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근 4시간의 격전 끝에 이즈까련대는 전멸되는 끝장을 보고말았다.

이쪽은 적들로부터 군복 3,000벌, 박격포 5문, 군용지도 20장, 담요 3,000매, 소총 150정, 수류탄 100상자, 탄약 300상자, 자동차 2대, 탐조등 2개, 약품 50상자, 망원경 25대, 돈 3만원과 평사포 3문을 로획했다.

 

한국독립군측은 희생자 5명에 부상자 7명뿐이였으니 두말할것 없이 대첩이였다.

헌데 이건 운명의 희롱이랄가, 이같이 한국독립군은 청산리전투때의 본때로 휘황한 전과를 올리면서 항전했건만 이해에 해체의 위기에 들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10월 13일날 밤. 한국독립군사령부는 전혀 예상밖에 구국군의 돌연습격을 받음과 동시에 전군이 무장해제를 강요받은것이다. 리청천이하 간부들은 모두 구금되였다.

청천벽력이였다. 

<<대체 무슨일이요? 왜 우리를 갑자기 원쑤로 보는거요?>>

<<왜 그러는가는 너희들 자신이 더 잘 알것이다.>>

오의성의 쌀쌀하고 독기서린 대답이였다.

대체 무슨원인에 이러는지 한국독립군에서는 점점 오리무중에 빠졌다.

당년 46살인 한국독립군총사령 리청천은 분노와 울분이 천장만장해도 갇힌 몸이니 별수 없었다. 그는 이번까지 두 번 이런 변고를 당해본다. <<자유시사변>>때도 죄없이 체포되였던 그는 카라한에 의해 인민재판에 회부되여 사형선고까지 받았더랬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귀한 목숨을 바치려하였을 뿐 지은 죄도 없이 당하는 죽음이니 너무도 억울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디 하소연할데나있는가. 그는 <<진리는 불멸하는 것이니 정의는 승리요 불의는 멸망이다. 의인이 없는 조선은 사멸해서 헤매게되니 단군의 혈맥으로 태여난 성손(聖孫)은 형제요 자매요 동포니 자자손손 조국의 강산을 지킬 의인이 되어달라. 최후까지 조국을 위한 렬사가 되어달라.>>는 유서까지 써놓고 사형이 집행될 이틑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자유시사변>>때 상해림정에서 밀사로 파견한 오광선(吳光鮮)이 김구(金九)에게 이 형편을 알리였고 이어 김구는 즉각 림정과 각 단체의 명의로 레닌에게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였다. 레닌은 항의를 받고 외국의 혁명가를 임의로 처단할수 없다는 국제법상의 관례에 따라 카라한에게 명령을 내려 그를 석방하게 하였던 것이다.

아직 조국의 광복을 위한 성스런 싸움이 남아있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되는 목숨이였다. 하여 리청천사령은 여러 가지로 궁여지책을 생각한 끝에 오광선을 다시 밀사로 림정에 보냈다. 이와 동시에 이번의 변고를 규명하기 위해 머리를 썼다. 그러노라니 마침내 한때 오의성의 측근이였던 그 후리후리한 키에 낯이 기름하고 남방말씨인 구국군총참모장이 한국독립군은 민족주의계렬의 독립단체인 한국독립당의 당군이라는 리유로 미워하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당년에 31살이였던 이 젊은 참모장이 성이 주씨라는것만을 알았지(기실은 周씨인데 朱로 잘못알았음) 그가 이름이 보중(保中)이고 백족이라는것을 모르거니와 그의 본래의 신분에 대해서는 더구나모르고있었다.

주보중은 운남륙군강무당 제17회졸업생이다. 그는 국민혁명군 제6군에 있을 때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소장부사장(少將副師長)으로까지 승급했고 공산당에 가입하여 쏘련에 가 군사학습을 했으며 학습을 끝마치고 돌아오자 1931년 12월에 동북의 항일투쟁을 조직령도하라는 중공중앙의 지시를 받고 파견되여 온 사람이다. 그가 이러한 신분의 사람인것은 오의성은 물론 왕덕림도 깜깜 모르고있었다. 왕덕림은 한동안 자위군좌로총지휘부 선전부에 있는 주보중을 출중한 군사인재임을 알아보고 구국군전방총지휘부 참모장으로 초빙하였던것이다.

리청천 등은 이 주총참모장이 도대체 무슨 혐원이 있어서 한국독립군을 이같이 적대시할가고 생각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남대관, 백남준 등이 한때 분별없이 <<공산당토벌>>에 나덤벼친 죄과보응이라는것까지는 미처 생각지를 못했다. 한가지 공개된 원인같으면 대전자령전투에서 시세영부대와 모순이 좀 생긴것뿐이였다.

10월하순에야 항일단체들의 항의와 여론속에서 오해가 풀린 것으로 총사령관 리청천을 비롯한 한국독립군의 간부들은 모두 풀려나왔다. 그렇지만 이번의 사건을 계기로 한국독립군은 구국군과의 련합전선이 깨여지고말았거니와 일부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일부는 흩어져서 사실상 해산된 셈이였다.

한국독립군의 해산은 곧바로 한국독립당의 비극이였다.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리청천, 오광선, 권준을 비롯한 간부 39명은 림시정부주석 김구의 주선으로 만주를 떠나 관내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당 당수 홍진 등도 관내로 이동했다. 그밖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군관학교에 입학하고저 상해로 갔다. 그리고도 나머지 적잖은 이들이 남았는데 그들은 최익과 안진태의 인솔하에 만주에서 계속 무장항일을 해볼 작정으로 시세영부대에 편입되여 삼림지대로 들어갔다. 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당은 이해의 말에 이르러 북경에다 본부를 두고 당세의 황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결국은 남경에 본부를 두고있던 한국혁명당과 합치여 이듬해인 1934년 3월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건립하였다,

한편 북만주에서 자기의 리념을 실현하려다 실패한 무정부주의자들은 한족총련합회가 해체됨과 동시에 북만주를 떠나 상해로 가서 거기서 남화한인청년련맹과 제휴하여 계속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 후에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의렬단투쟁을 펼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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