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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내린 뿌리 흔들리게 하지 말자
마침 잘벌린 토론이다. 개혁개방이래 국문이 열려 한국나들이가 시작되면서부터 적잖은 우리 동포가 고국과 조국, 리향민과 국민 등 의식면에서 심한 착란과 곤혹을 겪고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필자는 그 원인이 사상이나 립장에서 기인된다기보다 지금 주요하게는 상기의 단어들에 대한 인식부족에 있지 않느냐 생각하면서 그것만 깨우친다면 착란과 곤혹쯤은 해소되기 어렵지 않으리라 여긴다.
통털어 7천만으로 집계되는 우리 겨레를 놓고 조선에서는 조선땅을 떠나 사는 사람을 <<해외동포>>라 명명하면서 그 수를 500여만으로 추산하고있는데 그중 현재 중국에 살고있는 동포수가 1,927,278명으로서 전 해외동포수의 39%를 차지한다.(1994년통계)
보다싶히 이같이 적잖은 수의 우리 조선족은 다가 제 조상을 조선땅에 묻어두고 살길을 찾아 월경한 이주민의 후손들인 것이다. 바로 이같은 처지로 하여 우리는 지금 조선땅에서 살고있는 동포와는 색다른 이중성분의 사람으로 되어버린것이다. 왜? 그것은 바로 우리가 <<조국>>도 있고 <<고국>>도 갖고있는 사람이기에.
산설고 물선 이국타향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어떻게 생소한 지리와 풍토환경에 적응하며 어떻게 그 땅에다 자리잡고 자기의 지위를 세우면서 살아가는가하는 것이 물론 주요하게 그 나라의 국책여하에 달려있지만 자신의 태도와 노력여하에도 많이 관계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바뀜으로하여 이민자의 사회적위치 사회적지위도 변화되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력사만 간단히 회고해봐도 이 점은 자연히 증명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연변의 다른 지방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흑룡강으로는 일찍이 17세기중반기부터 동포가 들어와 살았다. 그중 집중이민시기가 천총(天聰)년간(1627~1635)이였는데 그때 만주씨족에 가입한 조선사람이 42개 성(姓)이였다고 <<청조통지(淸朝通志)>>에 기재되여 있다. 이민수가 점차늘어나 1757년에 이르러서는 흑룡강성의 녕안현만해도 동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주위에 조선족주민이 대략 4,000여명되였다 한다. 특히 1860년부터 70년까지의 10년간에 조선땅의 북부에서 력사에 보기드믄 재해가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봉건관료들의 폭정과 착취를 더는 받아낼 재간이 없어서 살길을 찾아 분분히 솔가도주, 비법월경하여 흑룡강까지 깊숙이 들어왔던 것이다.
녕고탑부도통(寧古塔副都統)은 자기의 관할내에 있는 각지 카륜(佧倫)으로부터 조선의 남부자녀들은 륙속하여 왕래가 부절한바 인가만 만나면 굳이 들어와서 구걸질이요 쫓아내도 막 무가내니 언어붙롱인 그네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 하는 보고를 받고는 류리걸식하는 조선사람 454명을 붙잡아서 조선의 리조정부에 넘겨준바있다.
그러했은즉 당시 몸하나 둘곳 없어 남부녀대로 떠돌아야했던 우리 선인들의 머릿속에 <<우리는 류랑민이다>>, <<우리는 타향살이한다>>는 굳어진 쓰라린 슬픔밖에 무슨 반가운 느낌이 있었겠는가!
청조(淸朝)가 봉금정책의 페기를 선포한 1883년이후, 특히는 본세기초 조선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합방>>이 됨으로 하여 동포들은 살길을 찾아 떼를 지어 들어왔는바 그 수가 무려 1백여만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적인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다 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힘차게 추진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부여구강주의(夫餘舊疆主義) 및 고구려주의(高句麗主義)적 민족의식을 내세워 재만동포들에게 만주가 과거에 조선의 령토였음을 확인시킴과 동시에 현재 만주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와 같은 동포임을 강조하였다.>> (<<在滿韓人獨立運動史硏究>> 박영석)
한편 독립운동단체들은 지주와 소작인사이 차지(借地)와 소작료문제, 조선사람의 법적인 귀화권문제, 조선사람을 위한 경찰권과 교육문제, 중국관리들의 가렴주구와 횡포 그리고 마적들의 횡포로 인한 조선사람들의 피해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뿐만아니라 독립운동자들은 만주에 있는 50여개의 독립단체들을 무어 준국가식의 정부인 참의부(參議府), 정의부(正議府), 신민부(新民府)를 세워 만주땅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의 자치를 실현하고저 진력했던 것이다. 한데 그 최고목표를 보면 <<독립전쟁론>>에 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였으니 민족주의선양이 고양(高揚)된것만은 사실이다. 하여 당시 망국의 설음에 젖어 있은 모든 동포들의 머릿속에 깊이 심어진것은 오로지 <<내 조국은 조선이다. 잃어버린 조국을 기어히 되찾아와야한다>>는 사상과 주장, 갈망 그것뿐이였던 것이다.
그 실례를 하나만들어보자.
당시 리상설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봉밀산(蜂蜜山) 밑에다 동포마을을 일떠세워놓고는 그것의 이름을 한흥동(韓興洞)이라 지었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란 뜻이니 그 하나의 집념이 얼마나 주체화되였는가를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한즉 설령 귀화권문제가 해결됐다해도 리향민의 심리는 그냥 갖고있었을 것이니 중국이 이제는 내 나라와 마찬가지라는 생각과는 너무나 소원(疏遠)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일본침략자가 9.18사변을 일으키자 북만에서는 한국독립당의 당군이며 그 전해에 신민부의 후신이였던 한족총련합회(본부는 해림의 산시에 있었음)의 무력을 모체로 하여 창립되였던 한국독립군이 구국군과 합법적인 관계로 손잡고 출병하여 피어린 항전을 벌리였던 것이다. 2,500여명에 달하는 한국독립군인들은 여러차례의 싸움에서 무비의 용감성을 발휘했고 전과역시 혁혁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충용무쌍하게 만들었던가? 그것은 바로 중국군과의 련합을 이룩하여 대일전에 참가했으니 이제 전쟁이 승리할 경우 강화회의를 통하여 조선이 독립할수 있으리라는 확신(確信) 그것이였던 것이다.
한데 동북의 군벌이였던 장학량이 항전을 견지할 념은 하지 않고 관내로 내빼는통에 시종 동북군과의 합작에 이뢰했던 독립군은 물자공급이 끊어짐으로 하여 더는 싸울수없어서 해산되고 만 것이다. 때는 1933년도 10월이였다.
그때로부터 동북항일전의 간거한 임무는 주로 중국공산당이 받아 메였던 것이다. 그리고 항일호소에 향응하여 수많은 지성인ㅡ 조선족 열혈남아들이 용약 떨쳐나 앞장서서 생사판가름의 혈전을 이어간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그들은 단지 조선의 독립 그것만을 위하여 싸운것이 아니라 참혹한 재난에 빠진 전 동북의 3천만인민을 구원하기 위해 광명한 새동북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싸운것이다. 우리 동포로 놓고보면 그것은 각오였고 그것은 의식의 전환이였으며 그것은 광의적인 일보의 전진이였다고볼수 있다.
허형식, 황옥청, 리학복, 리일평, 리성림, 김근, 김정국.... 흑룡강에서만도 동북의 광복을 맞아오기 위해서 이같이 우수한 항일장령과 많은 동포젊은이들이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치였던 것이다.
전국을 해방하는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 흑안령기슭으로부터 해남도까지, 료동반도로부터 신강끝까지.... 광활한 중국대지 그 어디엔들 우리 동포 열혈남아들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데가 있으며 넋을 파묻지 않은 곳이 있는가!
동포수가 43만인 이 흑룡강에만도 동포렬사가 2,675명.(1982년통계. 독립군희생은 들지 않았음) 우리가 흘린 피 그래 적었단말인가?
조상이 어디에 묻혔는가만을 굳이 따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 자격이 당당하거니와 응당 그렇게 되어야한다.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곳도 고향이요 내가 태여난곳도 고향이다. 하지만 조국은 하나뿐, 국적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그렇지 않는가?
힘들게 내린 뿌리 흔들리게 하지 말자 !
1995. 4. 11. 흑룡강신문.
현상문화토론
정정: 아래의 글은
장편전기 <<설한>> 40. 댓글에 답을 한 나의 글인데 잘못올리였음. 응당 그쪽으로 옮겨가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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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그번의 행차에 나는 예상밖에 랭대를 받고보니 심정이 과연 불쾌했던 것이다.
산시에 이르러 보니 근처 어느 한족학교에서 우선 장군의 석상제막식을 하는데 한국에서 온 한패의 적잖은 인물들은 귀빈석인 강당에 오르고 김강석누님과 나는 그들과 마주한 군중석맨앞줄 중간쯤에다 앉히는것이였다. 나냐 아무데앉히건 별문제요 개의치 않는데 강석누님이야 김좌진의 친딸이요 아버지의 구광을 평생지켜온 효녀가 아닌가, 허니까 이럴때는 응당 귀빈석에다 잘 모셔야 할게 아닌가?
누가 주관이 되어 그모양인지 그놈의 뒤틀진 행실ㅡ “한국식작법”에 나는 심기가 꼬였다. 하지만 그들만이 알고있을것 같은 내막ㅡ 연고를 모르니 그저 꾹 참는수밖에 없었다.
식이 끝나서였다. 장군의 석상가까이에 이르러 을동이가 나보고 “저의 할아버지의 전기를 쓴 분이라죠?”하고 말을 걸고는 같이 기념사진을 찍자는것이였다. 하여 그녀와 강석누님 나 이렇게 셋은 장군석상앞에서 사진을 찍은건데 보아하니 그녀가 우리 둘의 신원을 언녕 다 알고있었음이 분명했다.
정녕 그러하다면 도대체 왜서 그꼴인가?....듣자니 을동이는 그래도 한국사회에서는 할아버지의 곽광을 받아 한물쓰인다던데 례의범절은 통 몰라 가문의 명성을 더럽히는것 같아 나는 실망이 갔다.
그리고 그대로는 도저이 묵과할수 없는 일이라 나는 그를 세워놓고 한마디 따끔하게 힐난의 소리를 했던 것이다.
<<이 강석누님은 너의 고모니까 친혈육간이 되는거야, 안그래? 헌데 왜 그같이 매정스레 노는거냐? 도대체 왜서? 사람이 어쩜 이럴수야 있는가? 너무그러지 말라구. 그럼 못써, 못쓴다구. 인간이면 륜리도덕쯤이야 지킬줄을 알아야지.>>
을동이는 그번에 나한테 큰 유감을 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