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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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30)
2014년 04월 01일 13시 40분  조회:2999  추천:3  작성자: 김송죽
 

 

30.

죽음신이 휘파람부는 세월이였다.

장개석은 내전을 벌리였고 동북군벌은 <<공비토벌>>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통에 수많은 혁명자들이 체포, 구금, 학살당하고 있었다.

이처럼 살벌한 판에 만주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관동군은 호시탐탐 기회가 오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우리가 중국을 정복하려면 먼저 만몽을 정복해야 하며 우리가 중국을 정복하기만 하면 기타 일체 아세아 제 국가 밑 남양의 제 국가는 전체가 우리를 무서워하고 우리에게 굴복할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의 자원을 지배하게 되는 그때에는 우리는 한걸음 나아가서 인도, 남양군도, 소아세아 및 구라파를 정복할수 있을것입니다. ...제1보의 대만정복, 제2보의 조선정복은 이미 전부 실현되였으나 제3보인 만몽을 소멸하고 중국전역을 정복하는 ...계획은 아직도 완수하지 못하고있습니다.>>

 

이것은 1927년에 벌써 일본천황께 올라간 유명한 <<다나까상주문>>이다. 사실인즉 일본이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것은 메이지유신후의 국책이였다.

1929년에 폭발한 자본주의세계의 경제위기는 일본을 습격했다. 일본은 공업위기에 농업위기가 착잡하게 엉킨데다 정치위기까지 덮치였다. 이같은 곤경에서 해탈하고 국내의 계급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일본은 무력으로 동북을 침략하는 길을 걸을 결심을 내리게되였다. 7월에 발생한 <<만보산사건>>은 일제가 침략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조작한것이다. 일제는 8월에 또 <<나까무라대위사건>>을 꾸며 일본륙군장요 나까무라의 피살책임을 중국측에 넘겨씌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음모가 실패하자 관동군사령관은 9월 18일 오전에 <<일단 사건이 생기면 각 부대는 즉각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라>>는 비밀명령을 내리고나서 밤 10시 20분에 남만주철도 류조구다리를 파괴하고는 그 책임을 중국측에 넘겨씌웠다. 일제는 이같이 도발사건을 일으켜놓고는 소위 <<자위조치>>라는 명목밑에 선전포고도 없이 불의에 봉천의 북대영(北大營)과 동대영(東大營)을 대거포격함과 동시에 진공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일제가 3천만 동북인민을 참혹한 재난속에 밀어넣는 <<9.18사변>>이 폭발되였다.

<<내 나라빼앗더니 이젠 또 중국까지 삼키려드는구나. 탐욕도 무극한 왜적들!>>

김기철로인은 분노하여 주먹을 떨었다. 불안한 그는 양녀를 품에 안고 근심했다.

<<이 명도 기박한 애야, 넌 또 이눔의 전재에 시달림받게 되었구나!>>

본명이 성범(成範)이고 별명이 치화(峙和)인 그는 <<한일합방>>에 불만을 품고 반일을 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른 사람이다. 그는 후에 다시 체포되였다가 탈옥하여 김좌진보다 몇해먼저 중국으로 망명했다. 19살때부터 그와 면목익혔던 김좌진은 자기보다 나이 20살이 이상인 그가 한가슴에 일제에 대한 증오와 망국지한이 꽉 차있는 우국우민의 애국자이며 독립운동자임을 잘 알고있었기에 생전에 간담상조(肝膽相照)하면서 그를 혁명동지로 부모맛잡이로 여겼다.

량반출신이고 독실한 대종교도이며 도꾜의 어느 대학에서 경제학부를 졸업했던 김기철은 한때 독립군에서 문서(文書)로 있으면서 군자금을 마련코저 장시길에 나서서 로씨야를 여러번 드나들면서 고생을 수태한 사람이다.

초빈을 지낸 김좌진의 유해를 다시 움직이여 정식장례를 지내였을 때 독립군들은 후사를 놓고 토론이 있었다. 그들은 장군이 남기도 간 일점혈육을 이제는 독립군에서 기르기로했는데 그 시름을 김기철이 자진해 맡아나섰다. 그는 피쌀 두섬을 중국인 리씨집에 사례의 뜻으로 주고는 사정을 말해 아이를 되안아왔다. 그떄 아이는 두 살이였다.

참의원장 리범윤로인이 아이를 그냥 <<산조(山鳥)>>, <<산새>>, <<새>>라고만 부르지 말고 정식이름을 지어 불러야할게 아니냐고 하더니 억세게 잘 자라라는 뜻에서 강석(剛石)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때로부터 자기를 세상에 낳아준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수도 없었던 이 유녀고아는 독립군양부모의 따스한 보살핌속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그의 양모역시 마음이 그지없이 선량한 녀인이였다. 그녀도 대학공부를 한 지식인인데 독립혁명에 뜻을 품고있던차 홀아비이며 자기보다 24살이나 이상인 김기철을 조선에서 만나 만주로 따라들어와서는 후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본명은 김분희(金粉姬)였고 청도(淸挑)라고도 했다.

그한테는 그녀가 낳은 아들 두문(斗文)이가 있었는데 강석이보다 13살우요, 딸 영조(英鳥)는 4살우였다. 그리고도 그녀는 자식 여럿낳았어도 얼마 기르지 못하고 잃었다. 이같은 형편에 남의 귀한자식을 맡았으니 과연 조련찮았다.

그런데 일제가 발동한 죄악적인 침략전쟁 때문에 이 한 독립군가정 역시 죽을고생을 격게되였다.

일제는 이번의 전쟁을 발동하기 위해서 장기간의 주밀한 계획과 준비를 했던것이다. 하건만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고 장학량의 정예부대 12만명은 관내로 이동했다. 사변이 터지기 이틀전이던 9월 16일 전보로써 일본군이 동북에서 그 어떤 도발을 하든지 저항하지 말고 충돌을 극력 피하라 지시를 했다는가? 그리하여 사변을 일으킨 이틑날 아침사이에 일본군은 너무나도 손쉽게 봉천(심양)의 군, 정, 민, 문화, 재정 등 모든 기관들을 점령했고 불과 한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료녕성서쪽의 일부지역을 내놓고는 중요한 성진(城鎭)은 모두 함락해버렸다. 9월 20일, 일제는 조선으로부터 혼합 제39려단을 봉천에 끌어들이여 관동군에 편입, 남만경비를 담당케 했다. 길림성 대리성장 희흡(熙洽)이 투항하자 일본군은 21일에 길림을 점령했고 이어서 닷새도 안되는 사이에 길림성 대부분을 함락하고말았다.

<<9.18사변>>을 일으킬 때 관동군의 병력은 다해봤자 1개사단에 6개의 독립수비대, 도합 1만여명밖에 안되였다. 게다가 그것마저 남만철도연선에 있는 일부 중요한 도시와 정거장에 널려있었다. 이때 료녕, 길림 두 개성에 있는 중국군대만해도 무려 7,8만여명이나 되었으니 제때에 저항만했더면 일제는 자기의 침략야망을 도저히 실현할수 없었을 것이다. 장학량이 관내로 이동시킨 병력을 되돌려온다면야 일제가 감히 당해내기나 하겠는가? 하건만 장개석정부는 항전할 궁리는 하지 않고 줄곧 공산당토벌에 열중했다.

전란의 재화는 온 만주땅을 뒤덮었다.

이와 함께 만주각지에서는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에 대처하여 항일투쟁이 신속히 발전하게되였다. 길동지구(즉 길림성동부를 가리키는데 목단강량안, 송화강 위쪽, 우쑤리강 동안의 각 현이 이 지구에 망라됨.)에는 각양각색의 군중성적인 반일무장이 건립되였는데 의용군으로는 주요하게 왕덕림(王德林)의 구국군, 리두(李杜)의 자위군, 정초(丁超)의 호로군이였는데 중동로이남은 왕덕림구국군이 차지하고있었다.

이런 때에 한국독립당은 11월 2일에 오상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한국독립당중앙위원회를 열고 자기의 관할내에 있는 36개 군구(軍區)에 총동원령을 내려 재만동포들이 군사행동을 하도록 결의했다.

한데 한국독립군은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하자고 보니 단독으로는 어려운점이 많았다. 력량도 력량이려니와 군수품을 공급, 지원받을곳도 없었다. 이같은 정황하에 그들은 중국군과의 련합전선을 이룩할 생각을 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련합군의 자격으로 대일전에 참가하는 것으로 되기에 전쟁이 승리할 경우에는 강화회의를 통하여 독립할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가졌던 것이다.

한국독립군은 11월 21일에 신숙과 남대관을 보청(寶淸)에 보내여 그곳에 주둔해있는 호로군총사령 정초를 만나고 제2군장 양문휘(楊文輝)와 제3군장 고봉림(高鳳林) 등과도 만나 협의케했다. 이들은 다가 시초에 항일을 주장하고나섰던 것이다. 신숙과 남대관은 호로군련합총부와 교섭한 결과 한(韓), 중(中) 량군은 중동로를 경계로 하여 동부는 한국독립군이, 서부는 중국 호로련합군이 각각 담당하기로 하고 후방교란은 한국(韓國)측이 담당하되 전쟁군수품은 중국측이 부담한다는 협의를 했다.

한편 한국독립당에서도 사람을 항일정부 빈현(賓縣)정부에 파견하여 교섭하였다. 결과 한국독립당에서는 소총 1,000자루와 군인징집동원비 15,000원을 지원받는 등 조건을 승인받고 빈현정부와 통일전선을 맺었다.

이에 한국군에서는 리탁(李鐸), 리범석 등이 선후로 중한군사위원회 중한군사위원회(中韓軍事委員會)를 조직하고 의용군모집을 시작했다. 리청천이 오상으로 가고 신숙은 아성현에 갔으며 심만호, 최관용은 유수현에 가고 윤한필은 빈현으로 갔다. 녕안으로 온것은 남대관과 권수정이였다. 그들은 선전문을 살포하고 군인모집에 힘썼다.

중동로일대에서는 <<둔전양병>.을 해온 덕분으로 많은 <<재향군인>>들이 다시금 항전에 떨쳐나섰다. 세차례 새로모집한 인원만도 120여명.

그런데 한국독립군의 기대는 무기와 자금을 제공해주겠다던 아성주둔군 풍점해(馮占海)가 약속을 리행하지 않음으로 해서 이루어질수 없었다. 그랬지만 한국독립군은 계속 중국군과 련합의 길을 찾는것으로써 무장방면에서의 렬세를 만회하려고 애썼다.

한편 신해혁명에 의해 나떨어진후 <<복위등극(複位登極)>>을 꿈꾸어 온 청조의 말대황제 부의(溥儀)를 괴뢰로 만들기 위해 일제는 그한테 오색의 만주국기를 주어서 <<집정>>의 자리에 올려앉혔다. 그리하여 1932년 2월 23일, 바로 그가 <<원수>>로 추대된 이날부터 동북은 일제의 식민지로 변하면서 3,000만 동북인민은 피눈물에 젖는 고난의 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것이다.

그에 앞서 1932년 2월 5일, 할빈(哈爾濱)을 함락한 일본침략군은 계속하여 만주의 여러 요지들을 점령하기 위해 위만군(僞軍)을 내세워 발악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중동로연선으로 공격하자 한중련합군(韓中聯合軍)은 의란(依蘭) 등지에서 접전했다. 그 싸움에서 실패하자 리청천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으로 전략적후퇴하여 거기서 각 부대를 재편성했다. 그때가 바로 2월이였다.

한편 일본관동군 제15려단장 아마노는 3월 6일에 녕안을 점령했고 일본군 독립수비대 제6대대장 우에다중좌는 약 500∼600명의 병력으로 <<우에다지대>>를 조직하여 돈화(敦化)로부터 북상하여 녕안으로 오면서 집게모양으로 구국군을 포위토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적의 이러한 시도는 중동로일대의 여러 항일부대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하여 분쇄되고말았다. 녕안에서 쫏겨난 아마노는 3월 26일 날샐옄에 패잔병을 수습해 기차를 타고 창황이 할빈쪽으로 내빼다가 고령자에서 철로로동자들로 조직된 유격대의 매복습격에 들어 아마노소장을 비롯한 장병 200여명이 격사당하고 나머지 40여명은 산속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녕안을 함락하고나서 목단강까지 함락하려들었던 아마노의 주력부대는 목단강에다 겨우 14일간 발을 붙이였다가 전군이 복멸되는 끝장을 보고만것이다.

4월 2일, 일본참모본부는 조선으로부터 제10사단을 끌어들이였고 4월 30일에는 일본륙군중앙부의 결정으로 상해(上海)에 파견되였던 제14사단을 돌려다 할빈에 배치했다. 목적은 그자들이 중동로간선을 리용하여 중동로와 중동로서쪽의 항일근거지를 대거진공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때에 간도일대에서 야수와 같은 일본군인들이 또다시 경신년토벌처럼 참안을 비져내고있다는 소문이 북만까지 들려왔다. 일제는 4월부터 항일무장투쟁을 탄압하려고 조선강점군 제19사단의 주력부대를 기본으로 <<간도파견대>>를 조직하여 악명높은 삼광정책으로써 조선동포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만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아무런 수속도 없이 곧 고형에 처했다. 처형당한 사람은 모두 조선의 애국적인 대학생과 로동자였는데 그자들의 백정의 칼은 부녀와 어린이도 가리지 않았다.>>

 

그 참상에 대해서는 9월 18일자 <<독일중국통신>>마저 이렇게 보도했다.

동포들의 참상을 어찌 보고만있겠느냐면서 복수심에 가슴타지 않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물론, 지방에 남아있은 이들도 자체로 무장대를 조직하여 결사적인 유격전을 벌리였다. 이러한 무장대의 조직자는 <<8로>>를 중심해서 <<재향군인>>으로 당지에 그냥 남아있은 이들이였다.

이즈음에 긴좌진 생전에 성동사관학교를 다니고 종적을 감추었던 김재덕이 일본헌병대에 뚫고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그는 헌병대에서 통역노릇을 했는데 바로 독립군이 적의 심장에다 박아넣은 한자루의 비수였다.

6월중순, 그한테서 정보가 와 <<무장대>>는 어느날 일본군인과 군관가족을 싣고가는 유개화차 6바곤중 군인들이 탄 바곤 3개를 해림웃쪽 오두(敖頭)의 강에다 처박아넣었다.

이번의 습격전에서 유녀 강석의 외삼촌인 김영기(金永基)가 불행히 희생되였다. 그리고 재덕이 역시 할빈에서 살해되였다. 적들은 단서를 잡지 못했지만 그를 의심하고 보이라폭발사고를 조작해서 데여죽게 한 것이다.

지방<<무장대>>는 그 두 렬사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한편 한국독립군은 항일무장대인 사복성(謝復成)의 자위군(自衛軍)과 련합전선을 맺고 독립유격려단으로 되어 항전하다가 고봉림부대와 다시 손잡고 싸웠다. 1932년 이해의 같은 6월달에 한국독립군과 고봉림의 중국군은 할빈을 함께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때마침 장마철이라 작전수행이 어려운데다가 또한 아성현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했기 때문에 이들은 작전계획을 변경시켜 쌍성보(雙城堡)를 공격하기로하였다.

쌍성보는 일제가 할빈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곳이였다. 그것은 그곳이 물산의 집결지며 또한 할빈을 잇는 교통요새로서 전략상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의 총사령인 리청천은 이곳을 공격하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한국독립군이 경빈선(京濱線)차단과 오가역부근을 담당하고 고봉림군은 란릉역(蘭陵 ㅡ쌍성보에서 가까운역전임)부근을 맡기로 하였으며 총공격때는 쌍방이 공격하되 중국군은 탄환 및 식량보급을 맡기로 작전계획을 짰다.

그리하여 8월 12일 공격을 개시한 한중련합군(韓中聯合軍)은 작전계획대로 쌍성을 중심으로 한 주요철도를 점령하고 또한 아성방면에서 쌍성으로 직통하는 국도(國道)도 점령했다. 장춘방면에서는 철도수비대를 항복시키고 주요건물을 파괴하였다. 한국독립군은 적을 포위코저 한걸음 한걸은 쌍성을 향해 돌진했다. 마침내 8월 15일 오후 2시, 쌍성밖 2리 지점까지 이른 독립군은 리청천사령의 지휘하에 20명씩 15부대로 편성되여 앞장서고 란릉방면에서부터 진격해온 중국군은 그뒤를 따랐다.

오후 6시, 드디여 진격명령이 내렸다. 사기충천한 선발대는 쌍성을 향해 돌격해갔다. 쌍성에는 2개련대정도의 일본군이 사수하고있었다. 그들은 장춘이나 할빈과의 통로가 이미 두절되여 구원병과 구원물자공급을 받을길 없는 정황이였지만 이곳을 빼앗기면 만주점령이 어렵게 되므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항일군의, 특히는 오랜 원한으로 다져진 한국독립군전사들의 분노를 이여낼수 없었다.

한중련합군은 결사적으로 싸워 전투가 시작되여 한시간반만에 쌍성보를 점령했다. 쌍성보전투승리는 항일기세를 대단히 높이였고 일본군은 이 전투를 지휘한 한국독립군 총사령 리청천의 목에 6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까지 했다.

한국독립군은 사기충천하여 원쑤와는 끝까지 싸우리라했다. 그런데 일본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쌍성보를 탈환하게되자 중국군이 맥을 버릴줄이야?

11월 19일, 할빈과 장춘에서 온 적의 증원부대가 13대의 비행기의 배합하에 쌍성보를 공격했던것이다. 중국군과 한국독립군은 적들과 판가리싸움을 벌렸다. 적의 땅크가 아군의 진지로 돌격해왔다. 중국군의 제 1, 2, 3군은 포위를 돌파했지만 그대신 희생이 참중했다. 고봉림려단장과 호위병 1패가 괴뢰군에 포위되였다. 그때까지 철퇴하지 않고 성문밖에 있던 한국독립군은 소식을 듣고 돌격대를 보내여 구원하게하였다.

이무렵 중국군 제2려단 려단장 사택분도 260여명의 호위대 대원들과 함께 포위되였다. 그들은 2시간동안 완강히 싸워 적 72명을 쓸어눕혔다. 하지만 구원병이 오지 않아 사택분과 호위대장병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말았다.

아군은 오상현 충하진(冲河鎭)까지 철퇴하였다. 중국군은 1만 3,000명밖에 남지 않았다. 사기가 저락된 장병들은 반나마 도망쳤던 것이다.

그에비해 한국독립군은 한명도 도망치지 않았거니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한국독립군은 충하진동쪽의 소성자(小城子)에 집결하였는데 사상자 52명에 말 35필을 잃고 기관총 2정 등을 손실보았을 뿐이다.

1932년말에 이르러 일본군은 중동로서쪽의 항일근거지를 공점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11월 29일에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은 련석회의를 열고 군사활동지역을 북만주로부터 동만주의 연길, 왕청, 훈춘, 동녕, 목릉 등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2월 4일, 리청천부대가 액목에 이동하였다. 오상과 액목사이에 로야령(老爺嶺)과 소백산이 있는데 눈이 너무많이 쌓여서 행군하기 곤난하였다. 그들은 밤이면 우등불을 둘러싸고 휴식했고 배가 고프면 옥수수가루를 눈에 버무려 먹었다. 이렇게 4일간의 간고한 행군을 거쳐 8일에 액목에 도착하였다.

12월 11일, 한국독립군 수류탄대는 총사령 리청천이 액목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인츰 환영하러 왔다. 전에는 독립군이 로야령을 사이두고 동서로 갈라져있었는데 이제는 총사령부로 옮겨오고 만나게되여 모두들 기뻐했다.

19일, 원 기병별동대 대장 조상갑이 총사령부가 왔다는 말을 듣고 400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회합했고 22일에는 강극모가 500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회합했다. 리청천사령은 이 두 부대를 녕안현에 보내여 경박호일대에서 일제침략군을 족치게했다. 그리고 각지의 기타 소부대는 총사령소재지로 집결하게 했다.

사람이 많아지자 부대의 군수품공급이 문제로 되었다. 하여 리청천은 선후하여 구국군 전선사령 겸 3려단장인 오의성과 구국군 전적사령 겸 4려단 려단장인 오진산에게 사람을 보내여 군수품공급문제를 상담케했다.

그런데 이때는 중국군의 내부가 매우 혼란했다. 지난 8월에 밀산에 있는 자위군총부(自衛軍總部)는 장개석이 남경에서 보내는 <<공비토벌>>전보를 받은바있다. 장개석은 그 비밀정보에서 자위련합군총사령 리두를 길림성사령관으로, 구국군총사령 왕덕림을 길림성경비사령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더러 항일을 그만두고 <<공산당분자를 체포하라>>. <<모조리 죽이라>> 이에 응하면 <<공비토벌경비>>를 주리라했던것이다.

왕덕림은 이런 밀전을 받고 과연 <<공산당토벌>>을 시작했다. 그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홍창회(紅槍會)를 시켜 흥원진서위자툰(興源鎭西葳子屯)에 있는 17퇀주력이 밖으로 나간 기회를 타 퇀부에 뛰여들어 퇀장 리연청(李延靑)을 살해하게 했다. 이에 격분한 구국군참모장 리연록(李延綠)은 부대를 데리고 가 홍창회의 대부분병사를 때려죽이고 두목 왕대법사(王大法師)를 잡아다 목을 잘라 동생 리연청의 제단에 올려놓았다. 리연청이나 리연록은 다가 왕덕림의 구국군을 쟁취하기 위해 내부로 뚫고들어온 중국공산당 당원이였다.

자위련합군좌로총지휘(自衛聯合軍左路總指揮) 마헌장(馬憲章)역시 부대내에 잠입한 공산당원과 지방의 반일회 회장을 살해하고는 대갚음으로 제 목숨을 잃었다.

장개석의 부저항명령에 의하여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항일할것 처럼 나섰던 구국군, 자위군, 호로군은 다가 항일보다도 공개적인 반공(反共)에 더 머리를 쓰기에 항일중임은 자연히 중국공산당이 떠메게되였다. 그러한즉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은 사실상 중국공산당의 노력과 지도에 의하여 견지되였던것이다. 이러함에도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은 공산당과의 합작같은것은 근본 념두에 두지도 않았다.

한국독립군은 결정대로 동만지역으로 이동하자 목릉에 있는 구국군과 합작하려했다. 그래서 강포해, 심만호, 공진원 등 세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별 성과가 없었다. 원인은 7월에 구국군역시 자위군이나 호로군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대패하여 형편없이 되였거니와 총사령관 왕덕림과 부사령관 공헌영(孔憲榮)이 중국 국민정부를 찾아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1933년 1월 1일부터 일단 목단강에 집결했던 일본군은 대포, 장갑차, 비행기를 총출동하여 중동로 동단의 왕덕림, 리두, 정초의 항일부대를 다시 대거진공하기 시작했다.

이에 왕, 리, 정은 군사상 통일되지 못했거니와 정치상에서 국민당의 부저항정책의 영향을 받았고 공산당의 적극적인 항일주장을 접수하지 않았으며 군중의리익을 침해하여 그들의 옹호와 지지를 더는 받지 못하였기에 수만명에 달하던 그 항일대오는 적의 진공앞에서 토담무너지듯이 쉽사리 붕괴되고말았다. 자위군총사령 리두는 1월 9일 하는수없이 호림(虎林)에서 철거하여 쏘련으로 건너갔고 1월 13일에는 구국군총사령 왕덕림과 부총사령 공헌영역시 일본군이 하성자(下城子)를 돌파하고 중동로 동단을 점령하게되자 1만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창황히 쏘련으로 건너가고말았다. 그런가하면 수분하에 있었던 자위군 제21려 려장 관경록(關慶祿)은 공공연히 일본군에 투항했고 진작부터 일위(日僞)와 암암리에 결탁이 있었던 호로군총사령 정초는 위만주국(僞滿洲國)의 요원으로되였다.

그러나 안도현(安圖縣)에 가있은 오의성(吳義成)은 도망가지 않고 남아서 잔여부대들을 수습하고 구국군 대리총사령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그의 수하 제14사의 사장이였던 시세영(柴世營)도 항일을 견지해보려고 남아있었다.

오의성은 신분을 속이고 들어와 신용을 얻어 그사이 어느덧 막역지우로 된 주보중(周保中)을 참모장으로 임명한 후 녕안, 돈화, 액목, 안도 등지에 분산되여있는 구국군을 정돈하여 4개의 로(路), 1개의 유격군으로 편성한 후 요진산(姚振山), 시세영을 각각 로의 사령으로 임명하고 리연록을 유격군사령으로 임명했다.

이런 때에 한국독립군은 오의성과 련합전선을 이루게 되었다. 구국군총사령 오의성은 한국독립군을 시세영부대와 합세하여 작전하도록하였다. 이때의 한국독립군병력은 무려 2,500여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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