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6.
7월 21일에 대종교총본사가 있는 청파호에 갔다가 거기서 마침 왕청으로 오려고 작정한 홍암대종사를 만나본 서일은 왕청 제집으로 오자 곧 붓을 들어 칠언률시 한수를 제꺽지어 자기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달했다.
來賓有事主人知 번사로 찾아가니 그대 마음 안다하네
道室從容日影遲 고요한 수도실엔 햇빛도 넘흘러라
我本不迷惟一意 나는 본시 미혹함 없어 한 뜻을 품었다 하며
而初無間莫三思 자네 비로서 거리 허물고 세 뜻을 정했다 짚으니
理無后覺先天息 철리는 깨달음을 타고난 듯 밝은 사람
名不虛存實地宜 명성도 헛됨 없이 소문과 하나 같아
錯綜平生疑心半 평생을 헷갈리며 반신반의했건만
孜孜說到夕陽時 힘써 깨달으니 날은 이미 어스름
이 시에서 서일은 라철스승을 만남으로 하여 인생의 철리를 깨달았음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비가 내리면서 해가 나있을 때는
악마가 녀편네를 때리고있는 때이다”
이것은 불란서 속담인데 좋고 나쁨이 뒤섞여 원하지도 않은 화가 덥쳐듬을 말하는 것이다.
남만 유하현의 동포들은 올 7월 24일부터 련 3일간 된서리 일찍이 내린통에 일년 농사가 페농이 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경학사(耕學社)에서는 이에 대처해 총동원하여서 원근 각처에서 중국인이 여러해동안 쌓아 두고 팔지 못한 수수와 조를 사들여 매호에 분배하여 련명(連命)하고 있다는 소식이 동만의 먼 이곳 왕청까지 전해왔다.
(명년에 또 재해가 들면 어쩌는가? 耕學社는 그 부담을 이겨낼 재간이 있을가?...)
서일은 소식을 듣고 걱정했다.
덕원리의 주민들은 모두가 그곳 동포들의 고충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한편 그런 재해를 나도 당했으면 어쩔번했을가 다른 재난은 막아낼수 있어도 자연재해만은 막아내지 못하는건데하면서 요행스러워했다.
(과연 그럴가? 인간이 자연재해를 왜 이겨내지 못한단말인가?...기후와 풍토에 맞는 종자를 개량해 내면 될건데 겁부터 집어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원.)
서일은 이로부터 한가지 진리를 도출해냈다. 인간이 어느 한 곳에서 명을 살려 가자면 강한 적응력을 키워야한는 그것이였다. 독립운동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높고 높다 저 <한밝메>여
한울 복판에 우뚝 솟았네
안개 구름 자욱함이여
일만 산악의 조종이로다
한배검 한울에서 내려오시니
거룩할사 배달의 대궐이시오
나라를 세우고 교화를 펴사
온 누리를 싸고 덮었네....
이것은 “임금이 지은 삼일신고 예찬”이란 노래의 첫 두절이다.
이 노래는 덕원마을의 대종교도들이 늘 부르고 있었다.
한데 배달민족의 신성한 교인 대종교가 자기의 명을 어떻게 이어갈까?..
<<대종교는 국조단군을 숭봉하는 교단으로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일정에 반대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대일적개심을 환발하고 민족적 혈통을 고수하야 국권회복의 선봉기수가 될 것임.>>
한일합방때부터 일제는 이같이 예측, 간파하고 페교할 것을 획책하였으나 굳이 해산만은 보류하였던 것이다.
단군교가 중광하자 이를 해체할 설이 비등할 때 일본의 “태양”잡지는 아래와 같은 론설을 실었다.
<<대종교는 그 제창된 것이 오래전 일이요 그 나라에 있어서는 가장 오래되니 古敎라 하겠고 또 그 신도가 많다고 하나 수중에 촌철이 없으니 설사 불궤한 행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것이 아니요 또 그때 해산하여도 늦지 않거늘 구태여 이제 강제로 해산시켜 종교에 간섭하였다는 원망과 비방을 들을 것이 없다.>>
언젠가 서일은 이 글을 읽어본 기억이 난다. 대종교를 대하는 일제의 일단을 보아낼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잔인무도한 왜놈이 우리 한국민을 완전히 동화시키려 들면서 그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자들은 국민성을 끊기 위해 한글교과서를 다 걷어들이였다. 이제 풍속습관마저 개변시키려들지 않겠는가? 배달민족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뿌리뽑으려 들지 않겠는가? 그자들은 배달민족의 교인 이 대종교를 감시만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서일은 일본의 야만스러운 잔인성을 간파했기에 이같이 생각했다.
이제는 이 대교를 다시 땅속에 묻히게 말아야 한다, 전 민족이 자기의 교를 믿고 사랑하고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깨달음이 먼저생긴 우리가 스스로 자각하여 책임지고 널리 포교해야할 것이다...
지금 만주땅 그 어디건 동포사는 마을이면 학교가 일어서고 “권학가”의 노래소리며 “학도가”의 노래소리가 울리였다.
동방의 붉은 해빛 명랑한 곳에
갱생의 큰소리 요란하지만
눈멀고 귀먹으면 어찌 알리오
눈뜨고 귀밝히자 청년학도야
서일은 오늘도 딸 죽청이를 데리고 등교하고 있었다.
죽청이는 어언 8살을 먹어 소학 2학년을 다니는데 공부를 잘한다. 하학해서 집에 돌아가서는 숙제를 얼른해놓고 자진 선생이 되여 제 동생 윤제에게 글을 배워주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누나질을 착실히 하는 애였다.
이날 아직 퇴교시간전이라 교원들이 누구도 교무실을 떠나지 않았는데 본지사람이 아닌 초면의 두 젊은이가 학교로 와서 서일을 찾는것이였다.
《당신들은 대체 누군데 그를 찾는거요?》
현천묵이 캐물었다. 낯선 사람이면 우선 신원부터 밝혀진 후에야 교장을 대면할수 있다는 태도였다.
《난 김성이라구 하는데 그분을 면목아오. 우린 사년전에 연해주에서 만난적이 있소.》
《여기는?》
《난 이근호라 하는데 집은 평양에 있고 만주로 건너온지는 몇달밖에 안됩니다. 백일세날 이 친구를 면목알게 돼서 따라왔지요. 난 교장선생하구는 면목이 없습니다. 찾아온건 다름아니라...》
이근호(李根浩)가 해석을 하려는데 서일이 나타났다.
《아니이거 김성이 아닌가!》
서일의 얼굴에 저으기 놀램과 반가움이 너울쳤다. 계화하고도 물어봤다. 이달문하고도 물어봤다. 그들은 다 그가 로씨아에서 건너왔을 때 보고는 여직 한번도 다시만나본적이 없어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했던 것이다. 서일은 이동호군수하고도 물어봤는데 그도 본적없고 모른다니 대체 어떻게 된거냐 잘못된거나 아닐가 걱정했는데 오늘 이렇게 제발로 찾아온 것이다.
《중머리를 안했구만.》
서일은 그가 연해주에서 혼쌀먹던 일을 상기하고 놀림쪼로 웃었다.
《인제는 일진회놈으로까지는 의심받지 않습니다만...》
김성이 하던 말을 중둥무이하고 현천묵을 힐끗 쳐다봐서 모두웃었다.
김성은 만주일판을 한번 돌고 귀국하여 원산에서 교편을 다시잡고있다가 경술국치를 당하니 계속있을 멋이 없어서 다시금 만주탈출을 계획한 것이다. 그는 동창생을 찾아 순천에 갔다가 동창생은 찾지 못하고 가던 날이 장날이라 마침 올 2월 6일 순천장거리에 들어섰다가 거기서 백일세사건(百日稅事件)을 목격하게 되였고 그 사건에 직접 말려든 이근호의 위급한 사정을 보고 그를 구해내느라 함께 월경하다보니 어느덧 금란지교(金蘭之交)로 된 것이다.
김성이 목격했다는 순천장거리 백일세사건(百日稅事件)이란 대체 어떤것인가? 선생들은 중국신문에 간단히 보도된 것을 보았을 뿐 상세하게는 모른다.
서일은 아예 이날밤 덕원리마을 주민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이근호가 그들앞에서 순천장거리 백일세진상을 낟낟이 말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이틑날에는 학교에서 집회를 열어 모든 사생이 그의 보고를 청취하게 함으로써 국내의 형편의 일단을 알겠끔했다.
일제는 상인을 착취하기 위하여 조선의 전국 각지에 소위 백일세라는 장날(市日)을 정해서 세금을 강제로 수금하고 있었다.
올 2월 6일(음력 1911년 12월 19일)이였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장날에 백일세를 받기 시작하여 물의가 비등하면서 민심이 말라들던 차에 모두들 <<불란서가 안남(웬남)을 병합할적에 일천세(一千稅)를 받았다더니 일본놈은 백일세를 받으니 우리 나라는 빨리망했지 별수 있는가.>>하고 주고받았다. 민심이 이같이 들끓고있을 때 최봉환, 전응빈, 이학응 등 여러 사람의 주동으로 아침부터 전 시민이 철시를 단행하는 한편 정오때 장보러 온 수백명을 선동하였다. 흉맹한 군중이 노도와 같이 군청에 쓸어들자 군수는 좋은 말로 타일러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의 앞에서 백일세의 징수를 규탄했다. 이럴 때 일본인 재무주임 야사와가 위협으로 해산시키려고 렵총으로 공포를 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저놈이 사람을 쏜다며 왁 달려들어 렵총을 빼았아 산산히 부수었거니와 그를 뒷뜰로 끌고가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사태가 이같이 험하게 번지자 이를 목격한 일본거류민중의 목수와 상인 수십명이 각기 자기 짐에 있는 렵총을 들고 나와 발포했다. 이에 군중들은 더욱더 격노하여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일장의 격투를 벌리였는데 일본인이 사상자 16명을 내고 한인측도 15명을 낸 것이다.
《군청직원을 모조리 때려죽이자!》
용기충천한 군중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군청에다 불을 질렀다.
군청직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는데 성이 남궁(南宮)인 직원은 미처 내빼지 못하고 붙들려 그만 매맞아 죽고말았다.
경찰에서는 주동분자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이근호는 붙잡힐 것 같아 내빼려던 차 마침 만주로 다시오는 김성을 만나 따라온 것이다.
김성과 이근호는 굴레벗은 말모양으로 속박없이 남만각지를 거진 다 돌다싶이했다. 그들은 윤세복(尹世復), 윤세즙(尹世葺) 형제와 이원식(東厦) 이 봉천성항인현(奉天省桓仁縣)의 현성내에다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였는데 교포들은 생활이 곤궁하여 자제를 공부시킬 형편이 되지 않길래 부득불 학교당국에서 기숙비와 옷까지 해입히거니와 지어는 학생가족의 생계비까지 보조해 주면서 교육을 권장(勸獎)하고있더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서일은 물론 명동학교의 선생모두를 감격하게 했다.
김성이 용정촌에 들려 보니 이명언(李明彦)이라는 분이 방금 건너와서 동명중학(東明中學)을 세웠더라면서 이름을 돌려놓은 명동학교(明東學校)는 왜 중학교라는 간판을 걸지 않느냐 이만하면 교사도 훌륭하겠다 학생수도 많은데 능히 될게 아니냐했다.
이에 여러 선생들은 여기도 중학반이 이미 설치됐고 간판은 모든 것이 구비되는 그때에 가서 달아도 될게 아니냐했다.
원산학교에서 일어를 가르쳤던 김성은 본래 력사를 잘알기에 력사교원으로 덕원리에 남고 이근호는 유하현으로 갔다.
유하현제2구3원보추가가(柳河縣第2區三源堡鄒家街)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는 지난해에 50여명의 첫기 졸업생을 배출하고는 국제적인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인적기 희소한 곳을 찾아 삼원보(三源堡)에서 동쪽으로 약 80여리 지점에 있는 통화현제6구합니하(通化縣第6區哈泥河)로 옮겨가 자리잡고는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개칭하였다. 이 학교는 지금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후에 중학반은 지방중학에 인계함)
이근호가 중광단(重光團)이 창립됐다길래 와보니 아무하는것도 없이 그저 명의뿐이니 자기는 차라리 전문군사를 공부할 생각이라며 그리로 간 것이다.
《지금 데라우찌총독은 국내의 학교들을 몽땅 학생군영으로 만들고있습니다. 교복이라 하여 학생들에게 단체복을 입게 하고 선생들께는 금테를 두른 모자에 경찰복같은 검정옷을 입히는데 아예 칼까지 차고 교단에 오르게 되리라는 소문이 나돌고있습니다. 어쩌자구 그 모양인지. 참!》
김성이 하는 말이였다.
《거야 빤하지. 관리도 아닌 교원에게 경찰복을 입힐 때야 위협적으로 학생을 다스리게 하자는 수작이지 뭐. 이런걸보고 군국주의라 하는거야.》
《채칙쥐고 짐승을 부리듯 칼을 차고 위압하면서 학생을 배우게하다니 원. 데라우찌는 지독스러운 개자식이구나!》
명동학교 선생치고 격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선은 아직 내지(일본)와 사정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교육은 특히 그 힘을 덕성(德性)의 함양과 국어(일본어)의 보급에 힘써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자질과 품성을 구비하여야 한다. 만일 공리(空理)를 말하고 실행을 멀리하며 근로를 싫어하고 안일에 흐르며 경조부박(輕佻浮薄)의 악풍에 빠지는것과 같은 일이 있다면, 이것은 교육의 본지를 배반할 뿐 아니라 마침내 자기 일신을 그르치고 그 루(累)를 국가에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실시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시세와 민도에 맞게 함으로써 양선(良善)한 효과를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은 데라우찌의 담화였다. 아주 명백한바 그는 조선민족에게 리성(理性)이 발달할 수 있는 교육기회를 주지 않으므로써 창조성을 싹트지 못하게 하려하고 있었다.
《잔인한 그 군벌은 “민심수습”이라는 명의하에 무단정치로써 우리 민족의 배일감정을 탄압하느라고 지금 혈안이 되여 날뛰고있는것이오. 언론, 집회, 결사 일체를 금지했고, 여러 선생님들도 들은바와 같이 이제는 관리가 아닌 교원에게 까지 경찰복을 입히고 칼을 채울때야 순진한 학생에게 파시스교육을 하는게지 뭐겠소. 그자의 교육방침이란건 일본신민화(日本臣民化)로서 우리 민족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이른바 <민도에 맞게> 반항을 모르는 선량한 노예로 만들어버리자는것이요. 그런즉 우리 민족가운데 고급지식인이 나오게 할까? 두고 보오만 절대 그러지 않을것이요.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고 우리 민족을 우민화(愚民化) 하여 저들의 부림을 잘 받는 하급관리나 사무원이나 근로자로 양성하는데 국한시키고말것이요.》
서일은 이같이 말하고나서 이어 데라우찌는 왜서 일본어와 일본력사를 배우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글과 역사를 잊게 하고 조상을 잊게 하여 저들 일본의 조상을 우리의 조상으로 만들자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온것이다, 식민지 교육이란 바로 이런것이니 여러 선생님들은 잊지 말고 학생들에게 단군황조를 받들어 모시게끔 교육하야한다고 했다.
학교 교원들 중 방금온 김성을 내놓고는 모두가 대종교도였다.
그런즉 덕원리는 명실공히 대종교마을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날 사생 모두가 총동원하여 겨울철 화목(火木)준비를 했다. 말이 학생이지 반수이상이 끌끌한 청년이였다. 거의가 정처없어 이곳 저곳 유리표박(遊離漂迫)을 하다가 중광단(重光團)에 들겠다고 찾아온 의병이다. 한데 집단가입식이 따로있다니 그것을 기다리느라 어디든 가지 않았다. 자급자족(自給自足)이란 구호가 나붙었다. 여기에 있으려면 일을 해야함을 각오해야한다. 그들은 저마끔 도끼와 바오리를 갖고 삭정이주으러 산으로 갔고 어린 학생들은 반급선생의 지도하에 낫을 가지고 나무라러 갔다. 덕원리는 마을밖에 새와 쑥이 쌔쿠버려 자기만 부지런하면 화목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약육강식 이 세상에
유식함이 힘이란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한자두자 배워가세
젊은이들이 서일과 같이 산을 오르면서 노래불렀다. 수준정도가 부동했다. 이 학생들 가운데는 반무식자도 적지 않았던것이다.
강대를 한짐씩 걸머지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우리 배달민족의 력사에서 어느 왕이 국토를 제일 많이 넓혔는가 하는 물음을 내놓아 모두들 제 나름대로 짚어갔다. 그러다가 누군가 광개토왕이라고 면바로 짚어냈다. 하지만 광개토왕이 누군가며 눈을 꺼무럭거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제 민족의 력사마저도 깜깜이니 답답한 일이였다.
《광개토왕은 본명이 담덕이요.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승하하신 후에 시호를 그같이 지으신거요. 광개토(廣開土)란 땅을 넓힌다는 의미지. 그이는 재위 23년간에 남북으로 령토를 크게 넓히여 만주전역과 한강이북을 장악하고 신라를 도와 왜군을 궤주(潰走)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니 그야말로 동방천하를 패도로써 제패하신 명실상부한 성왕이시오.》
서일이 알려주었다.
《패도로 제패했다?...그렇다면 그게 침략사상과 뭐가 다릅니까?》
학생 하나가 질문했다.
《패도를 쓴다해서 침략사상이라할 수는 없는겁니다. 광개토왕께서는 동맹국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면 대왕자신이 친정을 하여 형제국을 원조하여 주는 정치를 시행하였던것입니다. 례를 들면 대왕께서는 신라의 나물니왕으로부터 연합군이 침략해온다는 말을 듣고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백제와 왜군을 격멸하여 위급한 신라를 구원했지요. 그러면서도 대왕께서는 백제와 왜국을 병합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던것입니다.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중국의 패도사상과는 든본적으로 달랐으니까요. 광개토왕께서는 부국강병의 고구려를 건설하여 열국이 모두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데 패도의 목표가 있은겁니다.》
《아무튼 패도를 하자면 강병책을 써야겠지요?》
《강병책을 쓰는게 뭐가 나쁜가. 필요하다면 써야지. 속담에도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 말의 어원을 볼 것 같으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찬양하는 음부경(音符經)에 부국강병이라는 낱말이 있는데 그걸 풀이하면 나라가 부유하고 그 병사까지 막강하면 능히 천하를 태평스레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인겁니다. 한즉 강병책이야말로 패도정치를 펼치는데 있어서 불가분의 철칙이 되지 않겠는가, 특히 지금의 세상에서.》
서일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이 곧 의논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한국은 우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소졸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강병책이 나라를 구원한다는것조차도 전혀 몰랐던가봐.》
《우습지. 더러운것들이 당나귀타고 추풍월색이나 읊을줄을 알았지 뭐야. 언제...》
《무력사용은 불상스러운 짓이라 하여 꺼렸으니 그랬겠지.》
《그러니 무지해두 한심하게 무지했지 뭐야.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력을 쓸데는 써야 옳을게 아닌가. 약육강삭(弱肉强食)의 세상에 추풍월색(秋風月色)이나 읇조리면 안녕(安寧)할까, 우리 나라는 그래서 남한테 먹히워 망하는거야. 허니까말이여 강병책은 나라를 영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거야. 안그래?》
《그렇잖구. 왕도의 사상이 뿌리박고 강병책을 썼더라면야 왜놈이 함부로 군사를 끌고 침입했을까. 국모를 죽이는 일도, 임금이 외국공관에 숨어 지내는 일도 없었을거다. 수치가 뭔걸 알았다면 남한테 나라가 다 먹혀 온 백성이 집잃은 개같이 나헤매지는 꼴이 되지는 않았을거다.》
《처참한 꼴이야, 처참한 꼴. 생각하면 분해서 원.》
그들은 이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자면 오직 피흘리는 투쟁이 있을 뿐 다른길은 더 없다는 것으로 의논을 끝맺았다...
며칠안되는 사이에 학교 운동장 한쪽에 산같은 나무가리가 생겨났다.
널직한 운동장에서 솜과 넝마로 둥글둥글 하게 만든 커다란 뽈이 거센 발에 채이여 이쪽 저쪽 굴러다니고 있었다. 일을 그토록 하고서도 외려 기운이 나서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
서일은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현척묵이와 말했다.
《이렇게 지내기만하다가는 무료끝에 따분함과 실증을 못이겨 나중에는 뺑소니를 칠 자도 생겨날거다. 》
《나도 그 생각이 들었어. 무기조법마저 다 잊고말거라니까.》
《숙사도 교실도 비슷하게 준비됐겠다, 식량도 화목도 별문제없는거니 확대모집을 시작해볼까, 여기가 려관구실을 하지 않게.》
당전에 중광단원수 크게 확대시키지 못하는 원인이라면 다른것이 아니였다. 인원수가 급속히 많아진 후에 봉착될 숙식(宿食)을 비롯한 일체의 공급준비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준비도 없이 서둘러 취하는 행동이 왕왕 자신을 곤궁에 처넣고마는 것이다. 허다한 의병대가 그래서 오래견지못하고 백성만 괴롭히다가 자멸된게 아닌가.
그러지를 말아야 했다.
학교 숙사생들이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다하고나서였다. 전에 신돌석의병대에 있었던 한 젊은이가 그의 죽음이 한심하도록 처참했던 것을 말해서 여러사람을 비분에 잠기게 했다.
네해전인 1908년 11월 18일이였다. 적의 포위토벌이 심해감과 아울러 그자들의 온갖 회유책을 물리친 신돌석은 부하장병들의 정상과 시기가 불리함을 숙고한 뒤 다음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자기의 의병을 일시 해산시키고는 자신도 가족을 동반하고 산중에 은거한 다음 영덕의 눌곡(訥谷)으로 옛부하였던 김상열(金相烈)을 찾아갔던것이다. 김상열형제는 신돌석을 반가히 맞아 밤에 소를 잡고 술을 권하여 못다한 옛정을 되새기는체 하면서 언제 한번 편히 쉬지도 못하고 혈전에 시달린 그에게 독주를 먹이였다.
신돌석이 독주에 취하여 깊히 잡들었을 때 김가형제는 도끼로 그를 내리쳤다. 신돌석은 도끼를 맞고도 벽을 차고 밖으로 10여장 상공으로 세 번 뛰여 담장밖 10여보되는 땅에 떨어졌다. 그런것을 김가형제는 달려가 도끼로 다시쳤다. 구국거성(救國巨星)은 이렇게 간악한 배신자의 손에 못다 한 한을 남기고 참담하게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소식이 항간에 퍼지자 량심있는 동포치고 슬픔에 이를 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즉 격전과 고초를 함께 겪어온 젊은 의병들의 심정이야 더 말할것있는가!
여기 모인이들 중 어떤 사람은 重光團가입식을 언제면 하는가, 왜 오는족족 받아주지는 않는가 하면서 무료함에 회의까지 품었다.
마침 계화가 그러는 것을 발견하고 서일을 찾아 말했다.
《글이나 읽으라며 오래기다리게하는건 득책이 아닌가 보오.》
서일은 그러잖아 만나려했다면서 현천묵이와 의논이 있은걸 말했다.
이때 이홍래는 고향으로 되돌아가 손잡고 일을 할 수 없었다.
이틑날 현천묵이 채오, 량현과 함께 왕청현밖의 다른 지방을 맡고 서일과 계화는 현내를 맡아 일제히 모집사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이전에 구군대에 있었던 망명군인들을 찾았다. 임무를 자진해 맡은 최오와 량현은 과연 적극적이였다. 제 사람을 다 찾을 궁리였다. 그들이 입버릇같이 말하는 제 사람이란 바로 자기들 처럼 총잡고 싸운 경력이 있는 자를 가리키는건데 그들은 마치 로련한 감정군이 알갱이로 부서진 유리쪼각속에서 다이아몬드를 골라내듯이 용케도 알아냈다.
이때의 동포사회는 과연 복잡했다. 맨먼저 월경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 자리잡고 거주하는 극빈한 농가와 국법에 걸린 망명객들, 을사조약(乙巳條約), 칠협약(7協約), 합병(合倂)이후에 국권회복운동을 해보려고 온 애국투사들, 그외에 협잡배, 모리간상배, 건달과 왜놈의 첩자들... 이런 기회에 불순분자가 얼마든 대오내에 잠입할수 있었다. 그러기에 한 사람 한 사람 면담해보고 의심스러우면 까근히 캐보고 받아야했다. 그리고 모집자측에서 내놓은 한가지 특별한 전제조건을 받아들이여야했으니 그것인즉은 무릇 어떤한 사람이건간에 중광단에 들겠거든 우선 대종교도가 돼야한다는 것이였다.
모집기간은 불과 20여일밖에 안되였다. 그럼에도 그사이 응하는 자가 많아 이미 가입한 인원까지 합치면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발족이였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 한 생명과 청춘을 바치리라, 가슴속에 열혈이 끓는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탄원해 나선것이다.
추석이 지나 한달만인 10월 25일, 이날은 공기도 맑고 해살도 밝은 유난히 좋은 날씨였다. 덕원리마을은 명절기분에 푹 잠기였다. 명동학교의 널다란 운동장은 아침부터 모여드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덕원리와 부근의 마을은 물론 멀리서까지 대종교도들이 모여든 것이다.
한데 섭섭하게도 조성환을 볼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의 7월, 일본총리대신 가쯔라 다로오가 만주시찰을 오는 기회에 암살하려 계획했다가 그만 미연에 발각돼 북경에서 체포되여 거제도로 1년간 류배를 간 것이다.
명동학교 널다란 운동장거의를 1,000여명의 단원들이 렬을 지어 차지했다. 그외의 자리는 립추의 여지가 없이 군중들이 빼곡히 메웠다.
일동이 숙연히 지켜보는 속에서 서일, 현천묵, 계화, 채오. 량현 등 다섯사람은 단군대황조의 신위를 모시고 백두산쪽을 향해 먼저 제를 지냈다.
그리고 나서 서일은 우렁찬 목소리로 重光團이 창립되여 1년 7개월만에 원래의 10명대오가 백배로 되어 거족적인 첫걸음을 떼였음을 선포했다.
와! 기뿜의 함성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團長에 서일, 그와더불어 묵, 계화, 최오, 량현이 중견인물이였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