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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7.
서일은 여러날을 지나서야 비로서 라철조교가 세상을 떠남으로 하여 허허롭게 비여가면서 들뜨던 기분을 바로잡을수 있었다. 홍암대종사의 죽음은 그에게 그같이 충격적이였던 것이다.
(일을 더 많이 해야겠구나. 그이가 갔으니 채하지 못한 일이야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 된게 아닌가.)
비관해서도 절망해서도 아니되였다. 더구나 맥을 놓을수는 없었다. 교세확장이 곧바로 세력확대라고 여긴 서일은 이전보다 더 열심스레 포교를 했다. 부지런하면 성적은 있기마련이라 대종교입교자수가 과연 더 늘어났다.귀신이라도 웃고 울릴만한 그의 열렬한 구변에 감화되여 지어는 하루사이 1,300여명이나 한꺼번에 입교하는 기록을 창출하기까지 했다. 서일은 이같이 교세확장을 위해서 몸을 내번지는 한편 새해인 1917년이 돌아오자 대종교리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전부터 연구해온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진리훈(眞理訓)강해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는바 5월에 이르러 마침내 “회삼경(會三經)”을 집필해낸것이다. 그가 심혈을 몰부은 이 저서는 유불선삼교(儒佛仙三敎)를 포함한 원칙에서 불문의 묘법과 유교의 이학(易學)과 도가의 현리(玄理)를 종합한, 그야말로 종교철학을 집대성한 경전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것이다.
제2세 도사교(都司敎) 김헌은 아직 만주로 건너오지 않았다. 서일은 그가 만주로 오기전까지는 총본사의 어떤 일들은 자진하여 백순 등 년세많은 도형들과 함께 해야했다. 거기다 중광단의 사업도 중요해서 절대 방임할 수 없으니 그의 몸을 어느 한쪽에만 둘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러니 그야말로 석마간에서 연자매를 돌리는 당나귀모양으로 열심스레 돌아쳐야했다.
서일은 여러날만에 왕청으로 가게 되었다. 한데 도보로 늦게 떠나다보니 용정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다. 그가 여기서 밤을 지내고 래일 다시떠날 작정을 하고 박찬익(朴贊翊)의 집을 찾아가 문꼬리를 잡는데 뜻밖에도 집안으로부터 “三一神誥”에서 진리훈(眞理訓)의 한 대목을 읽는 소리 또렷이 들려오는것이였다.
《 <...마음은 성품에 의지한 것으로서 착하고 악함이 있으니 착하면 복되고 악하면 화가 되며, 김은 목숨에 의지한 것으로서 맑고 흐림이 있으니 맑으면 오래살고 흐리면 일찍 죽으며, 몸은 정기에 의지한 것으로서 후하고 박함이 있으니 후하면 귀하고 박하면 천하게 되느니라.>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가만히 엿들어 보니 어디서 한번 딱 들어본 목소리라 자연히 귀바퀴를 더 세우리게 되는데 이번에는 박찬익이 응대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은 길흉의 집이요 기운은 생사의 문이요 몸은 정욕의 그릇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착함과 맑음과 후함은 한얼님도에 순종함이라 그러므로 복이 되며 악함과 흐림과 박함은 한얼님 도에 거스름이라 그러므로 앙화가 되는것이다>고 해석했으니 과연 명철한가 보네. 한얼님의 도에 순종함과 거스름의 차이를 명백하게 밝혔는데 모를것이 뭔가?》
누군가 삼일신고를 들고와 난해점을 풀이해달라해서 박찬익이 그한테 서일이 지난해에 집필한 저서를 갖고 해석해주고있음이 분명했다. 서일은 박찬익이 전해에 이상설과 이동휘 두 선배님을 만나봐야겠다며 로씨아로 가느라 왕청에 들렸을 때 이교성에게 명령하여 중광단의 무장인원 10여명으로 그를 호위하여 우쑤리 국경을 무사히 넘게했던것이다. 한어구술능력이 그 누구보다 뛰여난 박찬익은 대종교의 보배였다. 그는 올해도 로씨아에서 돌아오자 당지 정부가 일제의 사촉에 못견디여 대종교일에 간섭하려 함에 선 듯 나서서 교섭하여 박해를 못하게 막은 것이다. 하여 서일은 지우에 대한 고마움이 늘 식지 않는것인데 오늘은 다른 사람에게 이 백포종사가 지은 저작을 해석하여 깨닫게 하고있는 것이다.
《어험!》
서일은 먼저 인기척부터 내고나서 문을 뚝 떼고 집안에 들어섰다.
《아니 서형아니시오! 범 제소리하면 온다더니 하하하...》
박찬익은 소탈하게 웃으면서 일어나 서일의 손을 잡고 구들에 끈다.
집안사람 모두 일희일경이다.
방금전에 진리훈의 한 대목을 읽던 목소리의 임자가 서일을 알아보고는 넙적 엎드려 절을 올리는데 서일이 다시 드는 그의 얼굴을 여겨 보니 지난해 해림일대에 시교를 갔다가 만나 일장의 대화가 있었던 젊은이라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삼사생이라했지?》
《예! 제가 바로 삼사생이올시다. 상교님께서는 강녕하십니까.》
《나야 늘 무사하지. 건데 여기는 어떻게 돼서?...》
박찬익이 청년먼저 입을 열어 알려주었다.
《이 젊은이는 서형을 꼭 만나볼 일이 있어서 화룡에 가는 중이라나. 여기 시교당에 들린걸 내가 날이 이미 저물어 먼길 가기는 틀렸으니 밤을 자고 래일떠나라고 집으로 모셔온걸세.》
그는 여기서 두사람 다 묘하게 만났으니 아마도 한얼께서 돌보시는 모양이라며 웃었다.
《방금 나하구 이 젊은이는 <삼일신고>를 놓고 얘기를 벌린거요. 내가 말했지. <삼일신고>는 다른 글과 다르니 반드시 한구절이라도 등한시 보지 말것이요 또한 <신리대전>이나 <회삼경>은 다 <삼일신고>의 뜻을 풀어낸 것이니 이 역시 한번 지극히 열람할 필요가 있다고말이요.》
박찬익이 이어서 하는 말이였다.
서일은 아 그런가하고나서 청년을 향해서 대체 무슨 요긴한 일이 있길래 먼길을 마다하고 떠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칭 삼생이라 하는 청년이 숙이였던 고개를 다시들며 말하는것이였다.
《선생님의 고명하신 말씀을 오래듣지 못해 비린 띄끌이 맘구멍을 가리움을 깨닫지 못하여서입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 사이 이전과 같이 다시금 대화가 시작되였다.
서일이 물었다.
《그동안에 수양하는 자미가 어떠하오?》
《<삼일신고>는 글도 매우 무겁고 뜻이 또한 깊어서 우리 뭇사람의 육안으로는 마치 움집속에서 한울을 보듯 참대통으로 별을 헤는 듯 하니 그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을 잘 알수 없는지라 어찌 하루 아침 저녁에 그 자미를 얻으리오까! 더구나 이미 보았던 제자서의 리론이 먼저 <마음지경(心境)>을 차지한 까닭에 서로 틀리는 점이 많아서 그 시비곡직을 가리지 못할새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 백번 생각해도 의혹을 풀지 못하겠나이다.》
《한울에 구름 없는 때가 적고 바다에 바람 없는 날이 드므니 바람, 구름이 한번 움직이매 변화가 무궁하여 우뢰소리는 우루룩 번개불이 번쩍할 때나 모진 물결이 왈칵달칵 솟는 물멀미가 출렁출렁할 적에 한울과 땅은 얼굴을 잃고 해와 달이 빛을 감추었다가도 문득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그치면 온 한울이 유리같고 사해가 거울 같아서 삼라만상이 다 그 가운데 나타나거니 마음으로 진리를 깨달음도 또한 이러한지라 대저 두 물체가 있은 뒤에 크고 작음을 알며 두 리론이 있은 뒤에 옳고 그름을 가리나니 인간의 싸움은 평화의 터전이요 마음의 번뇌는 깨달음의 근본이지.》
《고명한 리론을 감복치 아님은 아니오나 다만 길고 짧음은 재는 것이 밝아야 쉽게 알고 옳고 그름은 살피는 것이 밝아야 빨리 가르거늘 저는 본래 <슬기구멍>이 어두워서 재고 살피는데 그 방법이 서투른지라 바라옵건대 어리석은 무리를 위하여 넓으신 덕량과 크신 변론으로써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회회교의 리론들을 참조하시와 그 길고 짧음과 옳고 그름을 밝혀서 깨우치시면 후학중생에게 주시는 행복이 그 얼마나 크오리까!》
《교문의 리론에 대하여 그 시비와 장단점은 마땅히 저의 마음가운데 재고 살피어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사랑도 미움도 없으며 기림도 헐음도 없겠거늘 만일 혀끝으로 날리여서 입밖에만 나오면 필경은 송사를 일으키나니 그대가 유교를 보지 못하였는가? 다른 교는 이단이라 하여 좌도니 요술이니 배척이 심하였고 또 기독교를 보지 못하였는가? 딴 파를 열교라 하고 우상이니 악마이니 론박이 많았었다. 그리하여 불교에는 락당, 독당의 다툼과 기독교에는 신교, 구교의 싸움이 일어나서 필경은 피물이 땅에 차고 비린내가 한울에 닿은지라 그 독균이 우리 겨레에 전염되어서 지난날 남인, 로논과 오늘날 목사, 신부가 서로 갈라서서 형제끼리 원쑤되여 동지로서 대적이 되니 그 당파는 날로 늘어나고 이 사회가 더욱 어지러움은 또한 가리울 수 없는 사실이였다. 오직 도교의 방달과 불교의 청정은 다른 교에 비유할바 아니로되 오히려 현리, 단전의 파와 선종, 교종의 문을 따로 세웠도다. 이 여러 교문은 다 세계적인 종교로서 이렇듯 페단이 있음을 보면 그 리론의 돌출은 모두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데서 일어나는것이라 내가 항상 이것을 미워하며 싫어하는 바이어늘 이제 그대가 나로 하여금 이 일을 밟으라 하니 그것은 나의 뜻을 모르는 말이로다. 만일 그런 말이 나의 입에서 한번 나오면 유교에서는 반드시 이단으로 지목할 것이요 불교에서는 나를 방불자라 할지며 기독교에서는 나를 악마로 부를지니 부질없이 남에게 꾸지람을 살 까닭도 없거니와 더구나 우리 대교를 믿는 이는 각교문의 서적을 널리 보며 다른 교인들을 달리 보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이것을 하며 내가 어찌 이것을 할까!》
삼사생은 이를 곰곰히 듣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이 전직하신 달론이오나 어떤 교문을 물론하고 그 교리는 반드시 한울에 근원하야 리론을 세운 바이며 또 앞날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진리, 공법으로써 말씀하면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들의 보신바와 말씀하신 바가 낱낱이 만고에 고칠 수 없는 진리, 리론이 될것 아니라 다만 그네들의 먼저 깨달으신 바를 뒷사람에게 보이실 뿐이며 또 여러분 성철께서 한갓 만고를 범위하야 진리만으로써 강론하신 것 아니오 그 당시의 일을 걱정하신 리론도 또한 많은것이라 가령 뒷사람이 성철의 지으신 경전을 평론함에도 한갖 그 사람의 자격이 높고 낮음을 평론함이 아니오 오직 그 말씀이 진리에 합하고 어김을 평론하는 것인즉 무엇이 옳지 아니하오리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조용히 숨을 돌려쉬고나서 계속 이었다.
《어떤 교문에서나 학문도 상식도 다 불족한 무리들이 다른 교의 진리에 대한 리론을 연구해 볼 생각은 없고 다만 여러분 교조들의 행장만을 평론하여 아무의 인격은 낮으니 누구의 공덕이 높으니 하는 것이 곧 당파를 일으켜서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나쁜버릇이러니와 선생님은 희랍철학의 연원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푸라톤은 쏘크라테스의 제자이오 아리스토텔레스는 푸라톤의 생도로되 그 학술, 리상이 서로 반대되는 곳이 많고 또 아저씨의 말씀에 <내가 진리를 사랑함은 내가 나의 스승을 사랑함이로다> 하였나니 이제 만일 성철들의 끼치신 리론을 깊이 강구하여 진리를 더욱 밝힌다면 이는 곧 성철을 사랑함이라 그 무엇이 옳지 아니하오리까? 한갖 남의 헐음과 기림을 따라서 두려워하거나 기뻐할것이 아니오 오직 자기의 행한 일을 돌려 생각도 하고 그 평론하는 이의 자격을 살필지니 가령 내가 잘못한 일에 기림을 받음은 기쁠것이 아니며 내가 잘한 일이면 헐음을 받더라도 두려울것이 아니오 또 나를 허는 이가 나쁜 사람이면 기뻐할것이 없는지라 이제 선생님은 대교를 거듭 빛내시고 중생을 널리 건지시는 무거운 책임을 가지셨거늘 그 아득한데에서 헤매고 함부로 지껄이는 무리의 망녕된 평론에 거리끼여서 여러 교문의 리론이 옳고 그름과 얻고 잃음을 판정하지 않으시면 어찌 진리, 공법에 어김이 아니오리까? 만일 여기에 대하여 말씀을 싫어하시면 본래 천성이 어리석고 더욱 진리에 아득한 저의 무리로서 세 번은 고사하고 한뉘로 생각하여도 깨닫는 길을 얻지 못하리다.》
이에 서일을 사례의 뜻으로 말했다.
《나의 사양한 뜻은 혹시 여러분 성철께 득죄할까 조심함이러니 그대의 정직 또 쾌활한 말씀이 족히 사람으로 하여금 흥감케 하도다. 그대는 과연 달사라 여러 교문에 온갖 리론의 옳고 그름과 얻고 잃음을 이미 마음 가운데서 마르재었거늘 어찌 구차히 나의 말씀을 기다리오?》
《묵은 뿌리는 한호미자욱에 끊을 수 없으며 오랜 병빌미는 한 장 뜸쑥으로 뗄 수 없는지라 저의 뇌속에 얽힌 제자서의 횡설수설이 이미 묵은 풀과 오랜 병을 이루었으니 어찌 쉽게 빼어버리오까? 원컨대 선생님은 괴로움을 사양하지 말으시고 깨닫는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서일은 귀담아 듣고나서 말했다.
《그대의 간청함이 이와 같으니 내가 비록 아는 것은 없으나 어찌 한결로 막으리오.》
삼사생은 크게 기뻐 다시 절하고 사례하더니 시 한수를 지었다.
先來爲主後來實 酬酌紛紜勢不均
雖物佛皆平等覺 於天耶豈獨生身
吾吾甭甭心猶妄 是是非非理卽眞
也識鏡明廑蓋處 姸蚩自現有誰嗔...
《아니, 백포형님! 형님께서 이 젊은이와 하는 얘기를 곁에서 조용히 듣노라니 우선 이 아우도 은연중 배우게 되는 점이 많구료! 대단합니다! 이제 방금 하신 말씀을 다른이들도 들어보게 할 수는 없을까?》
《어떻게? 나더러 그걸 설파하러 돌아다니라는거요?》
《아니지 그걸 글로 내놓으면야...》
《그러잖아 나도 전에 한번 생각이 있은거요. 이제 정력과 시간이 허락이 되는대로 문장을 만들어볼가하오.》
서일은 박찬익의 충고를 받고 보니 머리가 다시금 트이는 것 같았다. 그는 삼사생청년과 두차례 나눈 대화를 서문으로 간이한 문답식으로 수진성도(修眞成道)의 묘체를 깨닫게 하는 공법을 설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세상을 본 대종교의 경전인 <<삼문일답>>은 바로 이같이 배태(胚胎)한 것이다.
그날밤 박찬익은 자기 집에 들린 서일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자리에 누워 잠이 들기 전에 자기는 길림에 가서 조소앙, 여준, 김좌진 등을 만나 그곳에다 대한독립의용군을 조직할 일을 상의하고 돌아왔노라면서 그곳 길림성의 성덕승문내(城德勝門內)에 정주(定住)하고있는 한 마음씨 좋은 어른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는 올해 나이가 50인데 성은 윤씨(尹氏)고 이름은 복영(復榮)이라 한다. 윤복영은 해평(海平)사람으로서 28살때에 외부주사(外部主事)로 임명되면서 부터 사주팔자가 벼슬살이를 하게 되였는지 백천군수, 해천군수, 령광군수, 안악군수 등 여러 군수를 내내 지내다가 종당에는 싹 다 버리고 그만 만주로 건너와 독실한 대종교도로 되었거니와 남북만주에 왕래하는 인사(人士)는 만나는 족족 자기 집으로 청해 류숙시키면서 구국방략을 담론하기를 즐기기에 인품좋고 덕성높은 그를 세간에서는 동도주인(東都主人)이라 부르고있다는거다.
량반이였건 유생이였건 벼슬아치였건 선지선각자치고 자기 민족의 교에 가입하지 않은 이가 대채 몇이나 될가? 과연 많이도 참가했다!
《우리 중광단에만도 량반, 유생이 많거니와 군수로 있다가 의병으로 되신 분도 있잖소. 그야말로 존경스러운 어른들이지. 조국의 광복을 선위에 놓고 자신의 영달을 초개같이 던지면서 눈보라이는 이 만주까지 와서 와신상담하는 그런분들이 어쨌든 몹시 장해보인단말이요.》
서일이 말했다. 뜻을 세움에 부귀빈천을 가를가, 입지(立旨)를 바로세우면 참인간으로 된다면서 출신이 빈한하다하여 못나게 스스로 자비하거나 크게 위축되여본적이 없는 그의 가식없는 내심의 발로였다.
서일은 왕청에 돌아오자 우선 그사이 중광단의 형편부터 알아보았다. 채오와 량현은 전과 다름없이 별문제없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계화와 최익항은 경제난이 심각하게 대두한다면서 그것을 연구화제로 내놓았다.
《의연을 함에 교인들의 자발성과 적극성을 우리가 믿지만은 내내 그에만 의존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 보오. 인원수가 날따라 많아져가는것과 대등하게 지출도 많아지고 있으니 농사 하나에만 매달려서는 어림도없는거요. 생각해보오 그게 대체 얼마나 보탬이 될까말이요. 하니까 내 생각은 우리들 자체로 당장 어떤 벌이구멍수를 뚫지 않고는 아니되리라는거요.》
계화의 말이였다.
최익항역시 꼭 같은 생각이라 맞장구를 치고나서 방안 한가지를 내놓는것이였다.
《우리가 품을 좀만 팔면 이곳에서 여러가지 약재들을 캘 수 있으니 없는것은 구입해서라도 약방을 하나 차리는게 좋을 것 같으오. 그런다면 병을 고치는 겸 얼마간의 수입을 얻을수 있으니까.》
최익항은 지금 계화를 도와서 중광단 경리부의 일을 보고있었다.
그의 방안에 귀가 솔깃해진 서일은 낯색을 고치면서 량미간을 모았다.
《약국을 차리자면 우선 제약사가 있어야지.》
《그에 대해서는 크게 념려할 것 없소. 내가 한사람 알고있지. 김치권이라구 하는 사람인데 올해 나이 마흔여덟살이요. 그가 경성에서 제약공부를 한적이 있다누만. 지금 용정서 처자 세식구가 집을 잡고 남의 겯방살이를 하고있는데 합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허드렛일로 그 날 그 날을 살아간다면서 믿천이 좀이라도 있으면 약국을 꾸려볼텐데 하더란말이요. 전일 용정에 갔을적에 나를 만나서 하는 소리였소.》
이에 서일은 최익항의 제의를 채납하고 구체적인 연구를 했다.
그래서 약 한달만에 용정거리에 <<동인약방>>이라 간판을 내건 약방 하나가 생겨난 것이다. 표면상 김치권개인이 차린것이지만 실상은 대종교에서 군자금을 다소나마 해결하기 위해서 꾸려 놓은 약방이였던 것이다.
돌집속에 감춘 글이 다시나온 날
거룩하신 한아배빛 달같이 빛나
어두운 밤에 헤매이던 우리 무리가
대종교문 밝은 곳에 즐겨 놉시다..
따스한 봄기운이 감도는 총본사. 어디선가 “중광가” 노래소리 들려온다.
서일이 고경각에서 새 저서를 집필하느라 한창 골몰하고있는데 며칠전에 총본사를 떠나 로씨아에 건너갔던 백순도형(白純道兄)이 이동녕과 이회영, 여준 등 여러분을 모시고 돌아왔다. 반가운 손님들이였다. 이회영, 이동영 두분은 전에 한번씩 만나본적이 있지만 여준은 아주 초면인데 그들은 다가 지난 3월 2일 노령연해주의 니코리스크에서 사망한 부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의 장례식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였다. 떠날때는 기차를 타고 중동철도로 해서 갔지만 올때는 총본사에 들려 볼 목적에 편리한 기차도 타지 않고 일부러 도보로 훈춘땅을 고행하였노라 그들은 말했다.
《참 오래간만입니다. 다시만나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서일은 이회영과 이동녕에게는 이같이 인사의 말을 하고나서 처음대하는 여준을 향해서는 국궁재배하면서 그대의 존함을 많이 들어 이미 알고있습니다만 그저 마음속으로만 존경할 뿐이였는데 오늘 이렇게 가까이에서 직접 만나고 보니 꿈같다면서 이번의 상봉을 영광으로 여기노라했다.
《오, 그런가! 피차 그런 감정이니 언녕 만났어야 옳았지. 하하하!...》
여준은 소탈하게 웃었다.
이해의 나이를 보면 이동녕 하나가 48세였고 이회영은 50세, 백순은 53세며 여준은 55세니 실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는 로장(老將)으로서 의례 뭇사람의 애대를 받게되는 자격자요 대종교도들이였다.
대방에서 이켠을 대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심중에 서일은 전도유망하거니와 지극히 귀중한 존재로 자리잡아온 것이다. 올해 37세. 나이는 어려도 그 지식과 재능의 월등함은 풍편에 듣던바와 같았던 것이다. .
《서선생은 구국방략에서 핵심은 무엇이라 생각하오?》
여준이 문득 따지듯이 물는 말이였다.
《건 아주 명백하지요. 오로지 육탄혈전뿐이지요.》
《육탄혈전뿐이라! 그렇지! 천만번 지당한 소리요!》
여준은 낯색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일의 주저없는 명랑한 대답에 이회영도 이동녕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여준이 입을 다시열어 중광단의 실태에 대해서 이것 저것 캐묻는것이였다.
서일은 그에게 자기가 창립한 중광단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상세히 소개했다. 중광단은 대종교의 민중항일단체로서 그 구성원을 보면 거의가 망명한 의병과 구군대 병사들이요 지금은 수자가 1000명이 넘으며 몇개 지방에 나누어서 지부를 두고있다는 것, 표면으로는 권학을 하고있지만 실지는 애국교육과 항일교육이 위주면서 군사훈련을 겸하고있다는 것, 대원중 따로 선발된 500명은 지금 왕청에 있는 명동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수료하고있다는 것 등을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차 중광단에 기마부대와 더불어 보병을 보완해주는 치중병까지 창설할 목적인바 그 실제적인 준비로써 지금 말 500여필 까지 사들이여 사양하고있다는 것 까지 알려주었다.
《오, 그런가!》
모두들 듣고는 젊은 단장의 원견성있는 담략과 지략에 감탄했다.
《대단하오, 과연 대단해! 여지껏 이같이 실적을 쌓아 올린 이가 그래 어디있는가말이요. 듣기만해도 기운이 솟는구만! 모두들 아니그렇소? 서선생, 계속 힘을 써주오. 서선생이 결심한 그대로 중광단을 꼭 필승불패하는 무력으로 잘 키워주시오. 우리의 영광스러운 독립군으로!》
여준은 격동되여 이같이 당부하기까지 했다.
다른이들도 꼭같은 심정이였다.
《두고보시오만은 이 서일은 여러 선배님들의 기대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겁니다.》
서일은 이같이 신심을 표달했다.
한편 그러면서 그는 방금 작고한 이상설을 머릿속에 다시그리였다. 을사조약체결직후 성묵이, 박기호와 같이 서울에 올라갔다가 종로에서 목격한 그 일이다. 전날 자결순국한 민영환이 쓴 <<국민에게 고하는 글>>을 손에 들고 반은 울음섞인 목메인 소리로 내리읽던 맨상투바람에 흰명주옷을 입은 사나이, 그 모습이 눈앞에 우렷이 떠오른다. 살아서는 뭘하나 땅치고 통곡하면서 자기도 자결하려다 못하고 피투성이 된채 인력거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가던 40대의 그 사나이가 바로 이상설이 아니였는가! 만국회의에 까지 갔던 일로 불출석 사형판결까지 받은 사람, 더더구나 그 일로 하여서 살아 고향땅을 다시밟을수도 없게 되었던 이상설이다. 한데 그가 과연 광복의 날을 보지도 못하고 이국타향에서 생을 마치고만단말인가?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 둘 곳조차 없어 몸을 우노라.>>
이상설이 로씨아에서 지었다는 시구(詩句)가 새삼스레 다시금 떠올라 서일은 읊었다. 이 시를 지을 때의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죽음이 오늘까지 이역땅에서 의지를 닦아온 많은 애국지사들의 운명으로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서일은 자기를 찾아온 이들을 다시보았다. 초면인 제일 년장자 여준선생은 지금 신흥학교의 교장직을 맡고있으면서 윤기섭, 김창환, 양규열, 성준용, 이장녕 등과 혁명청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있었다. 여준과 이회영, 이시형형제 그리고 이상설은 소년시절에 동문수학(同門修學)을 한 학우였다고 한다.
성균관 교수에 있었던 이상설은 자기가 관장으로 추대되자 여준을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추천하였으니 그들 사이 유별한 정분을 알수있겠다.
<<단기 4231(1898년) 무술추(戊戌秋) 9월에 이회영, 이상설, 여준 등 세선생이 작반하여 남산 홍엽정에 올라가 난간에 의지하여 사방을 돌아보니, 가을회포가 강개하여 공연히 옛일을 생각하고 현실을 론하려 하니 우심이 불붙는 듯 하도다. 주상(主上)이 등극한 이래 병인양요이니, 임오군변이니, 갑신정변이니, 동학란이니, 청일 전쟁이니, 을미사변이니 하는 등등의 변란이 거듭 발생하여 백성은 고통과 공포속에서 위험과 치욕을 고루 겪었다. 그런데 란세(亂世)에 충량(忠良)이 난다더니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양재(良材)가 나타나지 않았고 세기적 쇄국주의와 천박한 식견과 우매한 리상에 잠겼으니 어찌이러한 풍조로써 극렬해지는 20세기에 우리민족이 조국을 지킬 수 있으리요, 이때를 당하여 우리 2천만동포는 맹연히 깨닫고 분연히 일어나 민지(民智)를 선도하고 정치를 혁신하며 문화를 발전시키고 풍기가 선명하여져서 자유와 독립이 확보되여 세계렬강과 더불어 어깨를 겨누게 된 연후에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가기(可期)할지라.>> ( 李觀稙 著 <友堂 李會榮先生實記>의 글이다)
포악무도한 일제침략자와는 오로지 육탄혈전의 대결이 있을뿐이라는 서일의 주장에 그들은 일치동감하면서 이제는 각기 흩어져 있는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의 의지를 하나로 묶는 것이 중요하다고 의견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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