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
2015년 07월 18일 20시 15분  조회:4315  추천:0  작성자: 죽림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1)

-시적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 


시는 일정한 거리에 오면 행갈이를 하고 신문은 행갈이 없이 계속 진행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다음은 행갈이의 보기.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이 시를 산문으로 표기하면 이렇다.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그리고 무릎까지 시려오면 부치지 못할 기인 편지를 쓴다. 
"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표기하지 않고 왜 행을 갈아가며 표기했을까?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리듬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리듬이 함축하는 의미 때문이다. 
" 손발이 시린 날은 / 일기를 쓴다"는 시행을 읽는 경우 무엇이 다른가? 
전자의 경우 우리는 중간에서 쉬지 않고 비슷한 속도로 리듬 없이 계속 읽어 나간다. 
예컨데 "손발이 / 시린 날은 / 일기를 / 쓴다"처럼 중간에서 쉬고 
동시에 이런 휴지에 의해 우리는 "손발이"와 일기를"을 강조하게 된다. 
이 두 부분, 특히 "손"과 "일"에 강세가 놓인다. 

한편 이런 읽기는 산문과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산문의 경우 의미는 "손발이 시린 날", 그러니까 추운 날은 일기을 쓴다는 사실, 
곧 하나의 정보뿐이지만 시의 경우 "손발이 시린 날"은 독립적인 의미를 띠면서 다음 행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행은 단순히 부사구의 기능, 말하자면 "일기를 쓴다"는 중심 문장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2연의 "무릎까지 시려 오면"과 대립되고, 
따라서 추위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시린 손발과 일기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가? 
손발이 시린 시간에 어떻게 일기를 쓴다는 말인가? 
물론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손발이 시리면 따뜻하게 녹여야지 무슨 일기인가?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아이러니이고 이런 표현이 시적 효과를 준다. 

요컨대 행갈이 때문에 "시린 손발"은 추위에 대한 감각, 삶의 추위, 가난, 고독을 의미하고 
"일기" 역시 자기 성찰, 자기 고백, 지기와의 만남 같은 여러 의미를 함축한다. 
이런 의미는 가슴이 시린 밤이면 시를 찾아 나서고(3연), 등만 보이는 사람을 
보이는 사람을 부르고(4연) 마침내 자신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서리꽃으로 인식하는(5연) 전체 시와 관계된다. 

중요한 것은 리듬 때문에 행갈이를 하고 이런 행갈이가 독특한 시적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 

그렇다면 리듬rhythm이란 무엇인가? 
리듬이란 흔히 율동 혹은 운율로 번역한다. 
그러나 좀더 세분하면 첫째로 율동이라는 일반적 개념, 
둘째로 운율이라는 문학적 개념, 
셋째로 음의 강약을 나타내는 박자라는 음악적 개념, 
나는 다른 책에서 리듬을 광의 율동 개념과 협의으의 운율 개념으로 나누어 살핀 바 있다. 
율동이란 주기적인 반복 운동이고 운율이란 시의 경우 소리에 의한 주기적 반복 운동을 뜻한다. 

따라서 광의의 개념인 율동은 시를 포함하여 일제의 우주현상, 자연현상, 생명현상에 두루 나타난다. 
율동은 좀더 부연하면 상이한 요소들이 재현하는 주기적 반복 현상을 말한다. 
우주의 경우 일출 / 일몰의 반복, 자연의 경우 바다는 썰물 / 밀물의 반복, 
생명의 경우 인간의 호흡이 그렇다. 
내쉼/ 들이쉼의 반복이 삶이고 이런 반복이 머추면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숨쉬기이고 숨쉬기는 호흡이 암시하듯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일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호흡은 숨결을 거느리고 그것은 숨쉬는, 호흡하는 속도나 높낮이를 뜻한다. 
요컨대 호흡과 숨결은 생명의 본질이고 시, 음악, 회화의 리듬도 비스한 의미르 띤다. 
시의 고향이 리듬이고 리듬이 숨결이라는 것은 이런 사정을 전제로 한다. 

시의 경우 리듬은 크게 정형시와 자유시로 나누어 살필 필요가 있다. 
정형시는 말 그대로 리듬이 일정한 형식을 소유하고, 자유시는 그런 형식에서 자유롭다. 
정형시의 리듬은 율격meter과 각운rhyme이 대표적이고 
자우시의 경우도 작운은 존재하고우리 시의 울격은 흔히 음수율, 음보율,로 나타난다 

자유시의 리듬은 정형시의 울격이나 일상어의 억양를 변형시킨 경우와 
리드의 단위로 이런 소리 요소를 포기하고 형태소, 
낱말, 어귀, 이미지, 어절, 통사 및 그 형식의 반복에 의해 성취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리듬의 단위를 소리에 두는 경우와 소리가 아닌 문법적 요소에 두는 경우이다. 
전자를 전통적 리듬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현대적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는 김소월, 박목월, 등이 후자에는 이상, 김수영 등이 포함되고, 
나는 자유시의 리듬이 보여주는 이런 양상을 다른 책에서 살핀 바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른 문제들을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리듬, 곧 형태소, 낱말, 어구, 어절, 이미지, 통사 형식의 반복에 대해서는 내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이미 발표한 <반복, 반복, 반복>에서도 말한 바 있다. 
물론 그때는 리듬이 아니라 시적 효과를 강조했지만 아무튼 반복이 문제이다. 
글쓰기도 반복이고 히쓰기도 반복이고 사랑도 반복이고 식사도 반복이고 감기도 반복이고 우울도 반복이다. 
반복이 삶이고 삶은 호흡이고 숨휘기이고 이 호흡과 숨결이 강조되면 리듬이 된다. 

먼저 어절의 반복에 의한 리듬의 보기. 



나는 

쿠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만져보고 싶었고 

모든 것을 

느끼고 싶었고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_ 체게바라,<쿠바>(이산하 엮음) 



어절의 반복이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반복을 말하고, 
이 시의 경우 '모든 것을 /만져보고 싶었고' 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내용의 반복이 아니라 ' -고 싶었고'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이 시의 내용은 아르헨티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쿠바로 건너가 카스트로와의만남을 계기로 게릴라 혁명 투쟁에 임한 게바라의 쿠바에 대한 
애정, 물론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반복되는경우도 있다. 다음은 문장의 내용이 반복되는 경우.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운동주, <8복 --마태복음 5장 3~12절> 


시인은 동일한 문장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반복하고 
한 행을 비운 다음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문장으로 시를 완성한다. 
완성인가? 
다시 생각하면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문장은 '슬플 것이다'가 아니기 때문에 
침묵을 내포하는 진술 형식에 가깝고, 
그러므로 앞에서 반복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 대한 아이러니의 효과가 강조된다. 
물론 이런 형식은 리듬과 함께 8복이라는 내용을 전제로 한다. 

이승훈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2)


    -자유시에도 운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형시뿐만 아니라 자유시의 경우도 각운rhyme에 의해 시의 음악성이 강조된다. 
각운은 흔히 낱말의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는 현상, 
한국어의 낱말은 일반적으로 초성, 중성, 종성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각운은 초성이 반복되면 두운alliteration, 중성이 반복되면 요운internal rhyme, 
종성이 반복되면 말운rhyme이 된다. 
각운이란 말은 운율을 맞춘다는 의미와 머리, 허리, 다리에서 다리가 되는 운, 
곧 말운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각운은 광의로 두운, 요운, 말운을 포함하고 협의로는 말운에 해당한다. 
물론 각운은 낱말과 낱말 사이에도 적용되고 시행과 시행 사이에도 적용된다. 
다음은 낱말과 시행 양자에 걸쳐 두운이 나타나는 경우.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려볼까 


- 김소월 <천리만리> 




먼저 낱말의 경우 1행에는 "말리지 / 못할 / 만치 / 몸부림치며"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낱말의 머리에 "ㅁ"이 반복되는 두운 현상이 나타난다. 
"만치"를 독립된 낱말로 읽지 않는 경우 1행은 "못할 만치 / 몸부림치며"가 되고 이 때는 "못할 / 몸부림"의 두운 현상 "-만치 / -림치며"의 요운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1행의 첫소리, 2행의 첫소리, 3행의 첫소리는 모두 ㅁ으로 시작되는 두운 효과를 준다. 
문제는 말운이고, 정형시의 경우도 우리시에는 말운 현상은 없고 운 대신 형태소나 낱말이 반복된다.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가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것은 무슨 사상의 깊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성 때문이고, 
그것도 두운과 요운 현상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중략)......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먼저 "하늘을 우러러"가 문제이다. "하늘을 우러러"란 무슨 뜻인가? 
정확하게 표기하면 "하늘을 쳐다보며"이거나 "하늘을 공경하며"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라고 표현한다. 
"쳐다보며". "공경하며"가 아니라 "우러러"라고 표기한 것은 무엇보다 요운의 효과 때문이다. 
"하늘을 / 우러러"의 경우 "-ㄹ-/ -ㄹ-"이 반복되므로써 요운 현상이 나타나고. 
따라서 "하늘을 쳐다보며"나 "하늘을 공경하며"가 단순한 의미 전달을 목표로 한다면 
이런 표기는 미적 효과를 목표로 하고 시가 예술일 수 있는 것은 이런 미적 책략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 점"도 문제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 
결코 부끄럼이 없기를" 혹은 "죽어도 부끄러움이 없기를" 이라고 말한다. 
혹시 일부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하는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서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말에는 시간을 알리는 경우나 점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아니면 "한 점"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그것도 한 점 부끄러움이라니? 
그렇다면 두 점 부끄러움도 있고 세 점 부끄러움도 있단 말인가? 
이런 표기는 앞에 나온 "하늘"과 관계되는 바. 
두 낱말 모두 첫 소리가 ㅎ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두운 효과가 있다. 
요운 현상은 2행 "부끄럼이 없기를"에도 나타난다. 
"-ㄲ-/-ㄱ-"의 반복이 그렇다. ㄲ과 ㄱ은 다르지만 이 시행이 경우 비슷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이 아름다운 것 역시 "-밤-/-별-/-바람-"의 요운 현상 때문이다. 
결국 윤동주의 <서시>는 사상이 아니라 소리 효과, 음악성, 
그것도 섬세한 운의 효과가 감동을 주고 그의 시가 명시인 것은 이런 예술성 때문이다. 

우리시에는 정형시든 자유시든 말운 현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각 시행의 끝이 비슷한 혹은 같은 소리로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말운은 아니지만 각 시행의 끝에 비슷한 혹은 같은 소리가 음으로써 미적 효과를 낳는 경우는 많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각운rhyme은 각 시행의 끝소리가 같은 소리로 조직되는 것이고, 
따라서 협의로는 말운을 뜻한다. 
그러므로 두운 역시 각 시행의 첫 소리가 같은 소리로 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 가운데 김소월의 시가 두운 현상에 적합하고 
윤동주의 경우는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운 현상 역시 각 시행 중간에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경우이고 
한 시행 속에 나오는 경우는 요운의 변형, 
혹은 자음조화consonance나 모음조화assonance로 읽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말하자면 "팔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는 자음조화, 
"마치 천리 만리나"는 모음조화로 읽을 수 있다. 
우리시의 경우 각 시행이 끝이 같은 소리가 오는 이른바 말운 현상은 없지만 비슷한 소리(?)가 오는 경우는 있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듯 눈엔 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말운의 정확한 보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시의 미적 효과는 각 시행의 끝에 비슷한 소리가 오기 때문이다. 
1행, 3행, 7행은 "끝없는 / 뻔질한 / 끝없는"의 ㄴ소리가 반복되고 
2행, 4행, 8행은 "-네 / -네"의 같은 모음이 반복되고 
5행, 6행,은 "듯 / 곳"의 ㅅ소리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런 소리의 반복은 말운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의 경우 각 소리들은 각 낱말의 종성에 위치하는 소리가 아니라 
낱말이거나 어미 활용에 속하고(끝없는, 흐르네,인 듯) 
굳이 종성에 위치하는 소리를 찾자면 "곳"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ㅅ소리를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소리는 운이 아니라 
"곳"이라는 낱말의 반복이기 때문에 말운이 아니다. 
여컨대 우리시의 경우 말운이 아니라 같은 어미나 낱말이 반복되고 이런 반복이 미적 효과를 준다. 


이승훈/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3) 
-상징과 이미지의 변주



1. 은유냐 상징이냐 

직유가 발전하면 은유가 되고 은유는 서로 다른 범주에 있는 두 사물을 
동일시하는 기법이라고 말한바 있다. 
직유가 상사성을 토대로 두 사물을 비교한다면 
은유는 비 상사성을 토대로 비유하고, 그런 점에서 
전자에 비해 신비한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시적 호소력이 크다. 
그러나 두 기법 모두 두 사물을 비교하고 비교되는 두 사물이 시에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예컨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갇혔네 
ㅡㅡ기형도,(빈집) 


같은 시행에서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는 직유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나는 장님처럼’은 직유이고 따라서 이런 형식은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 시행을 예컨대 ‘나 장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고 쓴다면 
은유가 되고, 직유의 형식에서 비교조사‘ㅡ처럼’을 생략하면 은유가 된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나는 장님처럼’이라는 말과 
나는 장님’이라는 말은 두 사물을 비교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다르다 전자가 문을 잠그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만 
후자는 그런 설명보다 ‘나’와‘장님’의 동일시가 강조되고 따라서 이때 
'나’는 ‘장님’이면서 ‘장님’이 아닌 이상한 특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기형도는 장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이렇게 쓴다면 그는 장님이고 장님이 아니다. 그리고 은유의 형식으로 시를 쓴다면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 아닌 다른 내용이 나오는게 좋다 
한편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의 경우 ‘빈 집’의 이미지는 이 시행만 놓고 보면 무엇을 비유하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취의 tenor 와 매재 vehicle 의 관계가 시행에 드러나지 않고 취의가 생략된 형식이 된다. 직유나 은유 에서는 취의와 매재의 관계가 드러나지만 
이런 이미지의 경우에는 취의가 생략되고 매재만 드러난다. 
이런 이미지를 상징 이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상징은 은유가 발전한 형식이고 그 의미는 하나가 아니고 분명치 않고 모호하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직유] t : v = 1 : 1 (나는 장님처럼) 
[은유] t : v = 1 : 1 (나는 장님) 
[상징] t : v = ? : 1 (빈 집) 


‘빈집’ 은 무엇인가를 의미하지만 이 시행만 놓고 보면 
그 내용,취의 하고자 하는 말을 알 수 없다. 그렇치 않은가?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라는 시행만 놓고 보면 
이 ‘빈 집’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분명치 않고 다만 전체 시를 찬찬히 읽을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이‘빈 집’이 무엇을 상징한다는 것은 
(상징象徵은 영어로 symbol이고 그리스어로 뜻하는 명사 symbolon 에서오고 
이 명사는 짜 맞춘다는 뜻의 동사 symballein 과 관계가 있다.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시작법, 탑 출판사,1988,201면 참고바람), 
그러니까 다른 무엇과 짜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 이미지가 어떤 관념을 지시한다는 것은 이 ‘빈 집’이 말 그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빈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엾은 내 사랑’ 을 의인법으로 읽어 
‘가엾은 내 애인’이 갇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든 애인이든 
‘빈 집’에 갇혔다는 말은 이상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의 경우가 그렇다. 
사랑이 어떻게 빈 집에 갇힐수 있는가? 
요컨대 은유와 비교하면 상징은 비유되는 두 사물 가운데 
취의가 생략되는 형식이고 또한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로 치환하면 


[은유] 이미지 : 관념 = 1 : 1 (장님은 나) 
[상징] 이미지 : 관념 = 1 : 다 (빈 집은 무엇?) 


와 같다.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1 ; 다’ 라고할 때 다는 다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말하자면 상징의 의미는 아무리 퍼내고 쏟아 붓고 
계속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다多는 다이고 다가 아니다. 
그런가하면 또한 다는 다da이다. 이 다는 디자인 dasein,현존재라는 의미의 
디자인의 접두사이고 현재 존재하는 나, 지금 여기있는 나의 의미를 강조한다. 
현 존재는 존재 sein 와 현da이 결합된 존재이고 그러므로 여기da가 중요하다. 
여기는 어디인가? 프로이트는 18개월짜리 손자가 혼자 노는 것을 관찰하며 
그 아이가 오/아를 반복 하는것에 주의한 바 있다. 
엄마가 없는 빈 방에서 아이는 혼자 실패 놀이를 하고 실패가 멀리가면 ‘오’ , 
실패가 돌아오면‘아’ 라고 소리친다, ‘오’는fort(저기),‘아’는 da(여기) 
라고 해석한 것은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쾌락 원칙을 넘어서”). 
나는 나를 멀리 던지고 그 나는 다시 돌아온다. 나를 던질 때 나는 돌아온다. 
무슨 말인가?그러나 나는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돌아온다. 
요컨대 반복이 있을 뿐이고 이 반복, 죽고 싶은 마음이 칼을 찾는다. 
칼은 날이 접혀서 펴지지 않으니 날을 노호하는 초조가 절벽에 끊어지려 한다’(이상,“침몰”). 
나는 지금 시작법 (그것도 알기 쉬운?)에 대해 글을 쓰는지 
1 ; 다’에 나오는 다에 대한 잡념에 시달리는지 잡념을 즐기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 다ㅡ 콤플렉스가 아니면 다ㅡ 강박증 인가보다. 
요컨대 현재는 없기 때문에 현 존재의 다da는 그런 無, 
불교식으로는 空 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무,공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두는 무엇이고 많다는 것은 무엇이고 다 da는 무엇인가? 
지난밤에는 밤새도록 비가오고 어두운 새벽 빗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갑자기 무섭고 서럽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 작은방, 지금 이글을 쓰는방, 
옛날에 딸애가 공부하던 방으로 와서 전등을 켜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돌아가 
다시 잠이 든 이런 행위는 무엇을 상징 하는가? 

2.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다시 요약하면 상징은 하나의 낱말, 어구, 이미지가 
복잡한 추상적 관념을 암시하지만 그 의미는 전체 시를 전제로 알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그 낱말이 나오는 시행에서는 생략된다는 것. 
따라서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상징은 은유보다 고급이고 
한편 은유보다 난해한 기법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기법이 나오고 
이런 기법, 말하자면 상징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에서 상징을 강조한 것은 19세기 말 상징주의 시인들이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보들레르 이다. 그는‘교감’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神殿, 거기 살아 있는 기둥은 
이따금 어렴풋한 말소리 내고 
인간이 거기 상징의 숲을 지나면 
숲은 정다운 눈으로 그를 지켜본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아득한 
어둡고 그윽한 통합 속에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울리듯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상통 한다. 
ㅡ 보들레르,[교감](정기수역) 


‘교감’ correspodence 은 ‘만물 조웅’ 으로도 번역된다. 
자연은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저희들끼리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다는뜻. 
이 시에서 보들레르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연이 주고받는 것들이다. 낭만주의자들의 경우 
자연의 시인의 정서를 환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치만 여기서는 ‘ 
신의 궁전’으로 노래된다. 신의 궁전 이기 때문에 
자연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이상의 세계, 
혹은 그런 세계로 갈 수 있는 수단이 되고 그런 점에서 자연은 신, 초월자, 절대자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상징의 숲’이 된다. 
시인은 이런 숲의 목소리를 듣는자 이고, 그 목소리는 만물 조웅, 곧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주고받는, 상통하는 것을 들을때 알 수 있다. 
만물 조웅은 향기(후각), 빛깔(시각), 소리(청각), 가 서로 통합 하는 것 
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감각의 교감이고, 교감의 세계가 된다. 
물론, 현대시를 쓰는, 혹은 쓰고자하는 분들은 
반드시 이런 상징의 미학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그 
러나 최소한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역사적 문맥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요컨대 상징을 강조하는 시들은 이 시가 암시 하듯이 
관념을 전제로 사물을 보는 게 아니라 
감각에 의해 사물을 보고 그 감각이 환기하는 혹은 암시하는 여러 관념들을, 
자신도 모르는 그런 관념들을 이미지로 전달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기형도의 경우 ‘빈 집’은 상징적 이미지 이고 그는 살아가면서 ‘빈 집’ 을보고 혹은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그 체험의 내용을 시로 노래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ㅡ 기 형도,[빈 집] 


그가 쓰는 것은 ‘사랑을 잃은 마음’이고 
따라서 ‘빈 집’ 은 이런 마음을 상징 한다. 
상징적 이미지는 시에서 반복되는 수도 있고 이 시처럼 변주되는 수도 있다. 
이 시의 경우 ‘빈 집’ 은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나’, 
그리고‘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로 변주된다. 한편 이런 마음, 
그러니까 ‘빈 집’이 상징하는 것들은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로 변주된다. 
이런 변주는 상징적 이미지가 보여주는 난해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적 책략이고 
따라서 상징을 강조하는 시인들은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를 선택하면 
그 이미지를 시에서 여러번 반복하거나 다양하게 변주 시켜야 된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한 시인이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혹은 상상력에 의해 
창조한 이미지를 개인적인 상징 이라고 부른다. 
상징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는바 
첫째는 개인적 상징, 둘째는 인습적 상징, 셋째는 원형적 상징이다 (좀더 자세하 것은 이승훈, 시론, 고려원, 1979, ‘상징의 유형’, 206ㅡ211면 참고바람). 
개인적 상징은 사물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 감각을 중심으로 그 내면성 혹은 상상의 세계를 강조하고, 이때는 그 의미가 모호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구조에 의해 
혹은 시 전체의 문맥에 의해의미를 암시해야 한다. 인습적 상징과 
원형적 상징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루기로 한다. 개인적 상징을 중심으로 
특히 그 상징적 이미지를 변주 하면서 
한편의 시를 완성하는 시들을 좀더 살피기로 하자. 


결국 그것은 제 몸 치근대는 바람 때문일 거야 큰 송아지만한 사 
냥개 절뚝절뚝 저녁 어스름 이끌고 날 찾아왔지 큰 채와 사랑채 
이음새 헛간에서 주먹밥을 나누어 먹던 한철을 잊을 수 없네 헛간 고 
요에 상처 아물고 주먹밥의 유순柔順에 길들여졌다 할지라도 어느 날 
훌쩍 사냥개 사라지고 텅 빈 고요만 비에 젖어 슬펐네 
ㅡ 강 현국,[가난한 시절4] 


이 시에서 ‘사냥개’는 ‘가난한 시절’을 상징한다. 
그러나 '사냥개‘ 라는 이미지에는 단순히 먹이를 사냥하는 동물 이라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공포, 사냥이 암시하는 야수성, 짐승이 짐승을 잡는 
아이러니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강현국이 노래하는 가난은 
단순히 배가 고프다는, 굶주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또한 이 시에서 그는 
사냥개가 ’절뚝절뚝 어스름 이끌고 나를 찾아 온다‘고 노래함으로써 
그것이 병든 가난, 어스름이 표상하는 무력감을 동반하는 가난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는 현재 ’컹 컹 컹 밀려오는 저녁놀‘을 본다/듣는다. 
그 가난은 밀려오며 무너진다. 말하자면 아직도 그를 지배하는 것은 
옛날의 가난이다. 그는 지금도 저녁놀에서 사냥개 울음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석탄을 적재한 무개화차들이 굴러가는 철길 너머에 저탄장이 있다. 거대한 재의 
무덤, 바람에 석탄 가루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흩어진다. 그것은 바람에 불려간다. 
검은 바람, 펄럭이는 검은 작업복, 탄부들이 움직이고 있다 
ㅡ최 승호[재] 

이 시의 경우‘재’는 석탄 가루를 표상하고 그것이 재라는 점에서 
죽음을 상징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불타고 나면 재가 된다. 
그러나 이재, 죽음은 이 시에서 일어나고 흩어지고 불려간다. 
물론 바람을 매개로 하지만 재의 이미지는 이런 변주에 으해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고 개인적 상징의 한 개를 초월한다. 
재라는 이미지가 이렇게 변주 됨 으로써 그 상징적 의미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시에서 ‘재’는 죽음을 상징 하지만 그 죽음은 바람에 의해 일어나고 
흩어지고 불려간다. 결국 재는 바람과 동일시된다. 
바람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바람이 있다.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털이 있다. 궁창이 열리고 
땅이 혼돈을 멈추었을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 
가장 나중에 완성 시킨건, 아무래도 털이다. 당신이 떠나고 
세상에서 가장 싼값으로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낡은 침대나 
주전자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털. 
ㅡ 원 구식,[털] 

이 시의 지배적 이미지는 ‘털’ 이지만 그 이미는 분명치 않고, 
따라서 상징이 된다. 무엇을 상징 하는가? 이 ‘털’은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점에서 쾌락과 관계되고, 따라서 머리털이나 수염이 아니라 
음모를 의미하고, 시인은‘당신이 떠난’ 방에서 낡은 침대와 주전자 옆에 떨어진 음모를 본다. 이 털은 육체에서 떨어진 것이므로 털로서의 기능이 없고, 
따라서 죽음을 표상 하지만 이 시에서는 꼼지락거린다. 살아있다. 
그리고 이 털은 대지의 풀에 비유된다. 말하자면 풀은 ‘땅의털’ 이다. 
도대체 정사가 끝나고 ‘당신이 떠난 다음’ 낡은 침대에 떨어진 털을 보는 것도 
이상하고 이 털이 살아 꼼지락거린다고 노래하는것도 이상하고 풀을 땅의 털이라고 노래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이렇게 이상한데 있고 
이상한 것이 진리이다. 상식, 기준, 표준이 깨질때 진리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털은 육체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고, 머리털은 신체 정상에서 자란다는 점에서 
정신적 힘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음모는 생식, 성행위를 돕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이 털은 그런 의미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 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상징한다. 죽은털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는 모두 상징적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변주와 함께 변주를 먹고 태어난다. 

3.인습적 상징을 이용하라 
이상에서 나는 상징의 세 유형 가운데 이른바 개인적 상징에 대해 말했다. 
다음은 이른바 인습적 상징. 말 그대로 이런 상징은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내적 필연성(개인적 상징)이 아니라 오직 인습, 습관, 사회적 약속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런 상징은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특성을 소유한다. 말하자면 한 시대나 한 사회에서만 공유하는 상징이다. 예컨대 십자가는 기독교 정신을 상징하고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태극기는 조국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상징은 
보편성을 띠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의 진리이고, 비둘기는 
구약의 문맥에서 평화이고, 태극기는 한국인들의(그것도 남한만의) 조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태극기를 보고 조국을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적 역사적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상징은 인습적으로 습관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난해하지 않고, 난해하지 않기 때문에 알기는 쉽지만 
한편 시적 깊이가 사라진다. 오늘 이 시대에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 한다고, 
비둘기를 보면서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없고, 그런 생각은 
과거의 인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치 않은가? 내가 사는 아파트 약방 앞 보도 블럭에는 언제나 비둘기들이 모여있다. 놀고있나 하고 가까이 다가가보면 
평화롭게 놀고있는 것이 아니라 모이를 찾느라고 정신이 없다. 
너희들이나 우리나 모두 먹고 살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이런 비둘기들은 
평화가 아니라 먹고 살기위한 고통, 싸움, 전쟁을 상징 한다.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유념할 것은 이런 인습적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 그 상징적 의미를 
시의 문맥에 의해 변형 시키고 변주해서 새로운 의미를 보여 주라는 것. 
다음은 비둘기라는 이미지를 인습적 의미로 사용하되 변주시킨 보기이다. 

비둘기들이 걷고있는 이 고요한 지붕은 
반짝거린다, 소나무 사이, 무덤 사이에서 
여기 공정한 ‘정오’ 가 불로서 구성 한다 
바다를,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를! 
산들의 고요를 오래 관조하는 
오 사색이 받는 보상이여! 
ㅡ발레리,[해변의 묘지](민희식, 이재호 역) 

시의 표제가 ‘해변의 묘지’ 로 되어있기 때문에‘이 고요한 지붕’은 ‘바다’를 비유한다. 그렇다면 ‘비둘기들’은 바다를 걷고 있는 비둘기로 읽을수 있지만 
바다에는 비둘기가 아니라( 물론 조금 미친 비둘기들은 바다에 떠 있을수도 있다. 김기림의{바다와 나비}에는 조금 미친 나비가 바다에 떠있음) 갈매기가 
많고 따라서 이 비둘기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고기잡이 배들의 하얀 돛대’를 
비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행은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 하나는 지붕/ 비둘기가 
바다/ 하얀 돛대를 비유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고요한 지붕을 비둘기가 걷고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 시행이 주는 시적 효과는 이런 이중 구조가 산출하고 
그것은 고요한 지붕(바다)에 하얀 돛대가 비둘기처럼 평화롭게 떠있다는 
독특한 의미를 낳는다. 물론 여기서 비둘기의 이미지는 평화라는 인습적 의미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비둘기는 비둘기 이면서 동시에 하얀 돛대이기 때문에 
이중적 의미를 암시한다. 요컨대 비둘기의 평화는 하얀 돛대의 평화가 된다. 
이 시의 전경은 소나무 사이, 무덤 사이에서 바다가 반짝이는 풍경이고 후경은 
하얀 돛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습적 상징은 그 의미를 이렇게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그 보기. 

쫒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었을까요. 
ㅡ 윤 동주.[십자가] 

4. 원형적 상징 

인습적 상징이 시대적 사회적 제약을 받고 그 의미가 사회적 인습에 의존 한다면 
이와는 달리 이런 시대적 사회적 제약을 초월하고 상징(이미지)과 관념의 관계가 보편성을 띠는 것이 있다. 이른바 보편적 상징 혹은 원형적 상징 원형 archetype 은 으뜸가는 이미지, 원초적 이미지라는 뜻으로 시인들, 화가들이 
수많은 이미지들을 생산 하지만 결국은 몇 가지 원형으로 환원 된다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들의 바탕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융에 의하면 이런 이미지는 
사회와 역사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무의식이 생산하고 그런 점에서 
집단 무의식의 산물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미지(상징)는 개인 무의식 
그것도 성적 욕망이 생산 하지만 그의 제자인 융에 의하면 집단 무의식이 생산하고 이런 보편적 상징은 옛날부터 현재까지 인류에게 무의식적으로 계승되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소유하는 인간적 꿈, 소망, 원망을 암시한다. 이런 소망은 지금도 계속된다. 예컨대 이 세계는 물, 불, 바람, 흙의 원형으로 
되어 있다거나 자연은 계절적으로 순환하기 때문에 인간도 다시 태어난다는 
재생 원형 등이 있고, 재생 원형은 결국 우리 인간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죽고 싶지 않다는 것, 이른바 불사不死,영원에의 꿈을 상징한다. 그런가 하면 
지상의 삶을 초월해서 하늘, 천상의 세계에 닿고 싶은 소망도 있고, 
이런 소망은 흔히 계단, 산, 나무, 탑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예컨대 이런 꿈은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 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 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ㅡ김 현승,[플라 타너스] 


같은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시의 중심적 이미지는 ‘플라 타너스’ 이고 
여기서 이 나무는 단순히 가로수를 의미 하는 게 아니라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있다’는 시행이 암시하듯이 하늘과 닿은 나무, 이른바 초월을 상징하고, 이런 초월은 지상으로부터 벗어나 신의 세계에 닿고싶은 인간의 꿈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시의 후반에는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는 시행이 
나오고, 이런 시행을 전제로 할때 인간의 꿈이 나무의 꿈이고 이꿈은 
신의 세계에 닿고 싶은 인간의 보편적 소망을 의미한다. 한편 인간 에게는 탄생, 
창조, 재생에의 꿈이 있고, 이런 꿈은 계절적으로는 봄, 하루의 수준에서는 
새벽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 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ㅡ 이 성복,[1959년] 


이 시의 경우‘봄’은 오지 않고, 그것도 여름이 되어도 오지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봄은 자연으로서의 봄이면서 동시에 이런 의미를 초월하고 따라서 
관념으로서의 봄이고(‘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이런 봄이 암시하는 것은 새로운 삶, 신생, 창조, 계몽 등이다. 말하자면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과 대비되는 삶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삶, 새로운 삶의 창조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노래한다. 



5.상징이냐 알레고리냐 

상징과 알레고리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두 기법모두 이미지를 보여줄뿐 
직접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취의가 생략되고 매재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과 알레고리는 다르고, 이 차이가 중요하다. 알레고리allegory 는 흔히 우유㝢兪, 우화偶話, 로 번역되고allegory는 그리스어로 
‘다른것’을 뜻하는 allos 와 ‘말하다’를 뜻하는 agoreuein 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알레고리는 어떤말 혹은 이미지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 한다는 
뜻이고, 우화가 암시하듯이 이런 말하기는 상징과 다른 몇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로 상징이 사물이나 이미지에서 출발해서 관념에 이른다면 알레고리는 
거꾸로 관념에서 출발해서 이미지에 이르는 과정을 밟는다. 
둘째로 상징의 경우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1 : 다 로 나타 난다면 알레고리의 경우엔 1 : 1 로 나타나며 시간적 
계기성을 띠고 그런점에서 연속성을 띤다. 
셋째로 상징의 의미는 모호 하지만 알레고리의 경우엔 분명하고 교훈적이고, 
넷째로 알레고리는 이 교훈적인 것과 관계가 있지만 실화성을 띤다는 것이다 
(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시작법, 탑 출판사.1988, 201-206면 참고바람). 
다음은 알레고리에 의한시. 


그는 들어왔다. 
그는 앉았다. 
그는 빨강 머리의 이 열병은 바라보지도 않는다. 
성냥불이 켜지자 
그는 떠났다. 
ㅡ 아폴리네르,[시](오 증자 역) 


‘그’는 시를 의미하고, 따라서 이 시는 시스기에 대한 시이며, 시쓰기 
혹은 시상이 전개되는 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노래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혹은 환각으로 나타난 시가 성냥불을 켜자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다음과 같은 시도 알레고리의 기법에 의존한다. 


태양신이라고 불리우던 루이14세는 
그의 통치 말기에 
종종 구멍 난 의자에 앉곤 했다 
지독히 어둡던 어느 날 밤 
태양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가 앉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ㅡ 프레베르,[일식](오 증자 역) 


루이 14세를 풍자한 시로 일종의 교훈이 있고, 설화성도 있고, 
이미지가 시간적으로 발전한다.

 

이승훈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8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843 시는 알면 재미있고, 모르면 재미없고... 2016-01-05 0 4005
842 과소평가 된 시인과 과대평가 된 시인 2016-01-05 0 4265
841 시는 시인의 령혼 2016-01-05 0 4017
840 시읽는 방법 2016-01-05 0 3843
839 아버지는 영웅 /// 영웅을 낳는 어머니 2016-01-05 0 3970
838 시인 김억과 그리고 등 등... 2016-01-04 0 6311
837 현대시 100년, 시인 166명, 시 700편 - 기념시집 2016-01-03 0 4741
836 시에서 이미지만들기 2016-01-03 0 4108
835 난해시와 초현실주의의 교주 - 조향시인 2016-01-03 0 5609
834 충동적으로 쓰고마는 詩는 아마추어들이 하는 짓 2016-01-03 0 4271
833 시에서 아방가르드를 꿈꾸는 시인은 고독자 2016-01-03 0 4220
832 천재 시인 李箱과 조선족 소설가, 시인 金革 2016-01-02 0 4626
831 超現實主義 = 超自然主義 2016-01-02 0 4017
830 캐나다시인들은 시를 어떻게 쓸가... 2016-01-02 0 4283
829 모든 것 없는 것, 없는 것 모든 것... 2016-01-02 0 4033
828 미래파의 형성 2016-01-02 0 4894
827 어느 할아버지 시평 - 김춘수 "꽃", 존재론적에 머문 詩 2016-01-02 0 4329
826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2016-01-02 0 5990
825 "거시기" 세글자면 모든 것 통하는 것... 2016-01-02 0 4265
824 난해시와 김지하 2016-01-02 0 4100
823 산문시(散文詩)와 그 례... 2016-01-02 0 3797
822 詩史에서의 미래파시인 2016-01-02 0 4997
821 해체시와 박남철, 황지우 /// 시적허용 2016-01-02 0 4297
820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공예디자인론 2016-01-02 0 3997
819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통점과 차이점 2016-01-02 0 4629
818 포스트모더니즘과 니체 2016-01-02 0 4054
817 난해시와 보들레르 2016-01-02 0 4264
816 난해시를 읽는법 2016-01-01 0 6309
815 왕초보 시짓기에서의 비법 2016-01-01 0 4287
814 난해시의 원조 - 산해경 2016-01-01 0 3802
813 난해시와 목장의 목동 2016-01-01 0 3596
812 난해시와 오세영 2016-01-01 0 3744
811 난해시와 김수영 2016-01-01 1 4019
810 난해시와 김춘수 2016-01-01 0 4320
809 난해시와 조영남가수 2015-12-31 0 4098
808 난해성과 현대성 2015-12-31 0 4229
807 난해시와 어설픈 평론 / 나와 나도 난해시가 좋다... 2015-12-31 0 4189
806 난해시와 신경림 2015-12-31 0 4464
805 난해시와 李箱 2015-12-31 0 4594
804 詩의 넋두리 2015-12-31 1 4114
‹처음  이전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