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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해하고 있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옹호의 입장에 서서 문학과 철학사조의 관점에서 설명드립니다.
근대 문학사조에 보면 사실주의가 등장을 합니다.
사실주의의 무미건조함에 반기를 들고 등장한 것이 자연주의 입니다.
자연주의의 대표적인 한국 작품.. 아시죠?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입니다.
그 후 자연주의의 사실에 대한 과대한 부풀림에 반발로 등장한 사조가 바로 모더니즘 입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는 아주 쉽습니다.
여기 사과가 있습니다.
모더니즘 적으로 사과를 바라보면, 이 사과는 빨갛게 잘 익은 부분과 시퍼리 둥둥하게 덜 익은 부분이 있다. 일부는 반들반들 윤이나고 일부는 벌레가 먹어 썩어있다.
이렇게 바라보고, 이중에 빨갛게 잘익은 부분과 반들반들 윤이나는 것만 취하고 시퍼리 둥둥한 덜익은 부분과 벌레가 먹은 부분은 배격합니다.
즉,
모더니즘은 어떤 사물의 좋은 부분만 취합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이분법적 사고관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흑-백, 신-인간, 사람-동물, 남자-여자, 주인-하인...
이런식의 이분법적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중 좋은 것만 택합니다. 백, 신, 사람, 남자(이견이 많겠군요^^),주인...
철학적인 사조로는 실증주의에 해당되며 대표인물로 꽁트가 유명합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가 해당 되겠지요.(종교 욕하는 것 아닙니다...)기독교 역시 이분법적 사고관이 근간에 깔려 있으니까요. 신 - 피조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역시 이 모더니즘의 최악의 산물 입니다. 우등한 인자를 가진 사람(순수 게르만) VS 그외
모더니즘의 최후는 바로 전쟁입니다. 모더니스트들은 아까 얘기한 어떤 사물의 나쁜 부분 즉 이분법에서 하위계열에 속한 것을 배격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전쟁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핵폭탄이 터지고 인류는 깨닫기 시작합니다.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가.. 하고요.
물론 아직 못 깨달은 ...<<애>>같은 애들도 있지요.
그래서 나온것이 post-mordernism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사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빨갛게 잘익은 부분과 시퍼리둥둥 덜익은 부분, 반들반들 윤이 나는 부분과 벌레 먹은 부분, 모든 것이 사과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철학적으로는 야스퍼스,하이데거로 유명한 실존주의가 이에 해당합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나 노자 장자의 사상이 이에 해당합니다.
즉 모든 것의 존재함은 서로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함이다.. 이렇게 보는거죠.
예를 들어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있죠.
즉 Everything is Noting, Noting is Everything 입니다.
모든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모든 것이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구요?
이런 겁니다.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볼때 1+1 = 2 입니다. 그외의 경우는 다 배격하죠.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적 관점에서 볼때 1+1= 반드시 2가 아닙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인정하죠.
예를 들면, 공기방울 하나 더하기 공기방울 하나는 공기방울 하나 입니다. 즉 1+1 = 1이지요.
남자 + 여자는 남자,여자,애기 입니다. 즉 1+1 = 3입니다.
이렇게 보면 1=2이고 1=3입니다. 1=4 일수도 있고 1=100 일수도 있습니다.
즉 100을 everything으로 보고 0을 Nothing으로 보면 이제 Everything is Nothing, Nothing is Everything을 이해하시겠죠.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또다른 예를 들어보면,
나비의 날개짓이 전 지구를 흔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비가 날개짓 한것이 주변의 바람을 흔들리게 하고 그 흔들린 바람이 풀을 흔들리게 하고, 나무를, 빌딩을,땅을 흔들리게하고 전 지구를 흔들리게 하는거죠.
즉 모든 것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상은 적과 나를 구별하지 않고 있는 그 존재를 다 인정합니다. 즉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단절적 특징 말고 연계적 특징을 알려달라고 하셨는데... 그건...
모더니즘의 반발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공통점은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
문학에 관한 부분입니다.
사실주의 - 자연주의 - 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연결 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의 시조는 보통 자크 데리다로 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의견은 분분함)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이하게 중남미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옥타비오 빠스의 La Calle (거리에서)와 같은 시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시 입니다. 노벨상도 탔지요.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의 특징은 어떤 특정한 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장정일씨가 쓴 라디오란 시가 있습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라디오가 되었다." 후략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꽃만 라디오로 바꿔 쓴 것입니다. 모더니즘 적 관점에서 보면 이게 무슨 시냐고 할 수 있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런 장르도 다 수용합니다.
꽃이나 라디오나 그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꽃이라고 명명한 것이지 그것의 원래이름은 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너무 어렵나요?
여하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어떤 호칭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La calle라는 시도 이거리에 걷는 발자국 소리를 저 거리에서 듣는다... 머 이런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에 썼듯이 모더니즘적 사고로 보면 1+1은 2입니다. 바꿔예기하면 이 사물은 꽃 입니다. 꽃 이외의 단어는 다 틀린거지요.
하지만 장정일씨는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것을 라디오라고 불렀습니다. 왜?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꽃이라는 이름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른 것일 뿐이지요.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모든것을 수용하는 것) 1=2, 1=3, 꽃=라디오 입니다. 즉 모든것을 다 수용하고 accept하는 거죠.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점에서는 그것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의 이름이 꽃인지 라디오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꽃이란 사물의 이름은 우리가 지은 겁니다. 영어로는 Flower 스페인어로는 Flores 한국말로는 꽃 등등...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지, 그것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이 꽃이건 라디오건 중요치 않다고 말씀드린거구요. 그 본질 자체, 그 존재의 자체가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는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형식이나 틀이 없다고 말합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틀이나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것입니다.
참고로 탈구조주의, 다원주의,반권위주의등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 입장입니다.
[출처] penguinasa/ 포스트모더니즘|작성자 헌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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