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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의 말
요즘 우리 문단에는 난해시가 범람하고 있다. 난해시가 아니면 현대시가 아니라는 생각도 만연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시를 난해하게 쓰는 것이 유행인 것 같고 심지어 어떤 시 창작교실에서는 시는 난해하게 써야 한다고 부추긴다고 한다. 시 창작지도서에서 당당히 아예 시란 아무 것이나 쓰면 모두 시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았다. 과연 그런 것일까.
현대에 들어 시가 난해해진 것은 다만 우리나라만의 추세는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범세계적인 트렌드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 성격이기도 하다. 따라서 난해시를 무작정 배척하거나 폄하해서 될 일은 아니다. 그 장점은 살리되 단점은 배격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는 왜 현대에 들어 난해시가 이처럼 기승을 부리게 되었을까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한다.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요한 것 가운데는 사회사(역사)의 문제가 가로 놓여 있다. 근대(혹은 현대)의 사회구조라는 특성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구조란 그것을 탄생시킨 사회구조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니까 한 마디로 시(혹은 예술 전반)의 난해성은 근대라는 사회구조의 어떤 특성이 문학적(예술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 사회구조의 어떤 측면이 이처럼 시의 난해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역사가 대개 세 시기 즉 고대(古代), 중세(中世), 근대(近代)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학계의 통설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토대(경제) —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는 사회 역사철학의 관점에서 고대는 경제적으로 노예경제, 정치적으로는 신정정치, 중세는 경제적으로 장원경제, 정치적으로는 봉건주의, 그리고 근대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오늘의 문화예술이란 본질적으로 현대라는 역사성(歷史性) 즉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라는 사회구조적 특성 위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특성은 시의 난해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고대나 중세가 이 세계를 수직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데 반하여 — 경제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토대한 — 근대는 그것을 수평적으로 인식하려한다는 명제로 귀납될 수 있다. 이는 달리 세계를 시간의 축으로 보느냐 혹은 공간의 축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세계에 대한 수직적 인식이란 이 세계를 선조적, 시간적(linear form)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며 수평적 인식이란 병렬적, 공간적(spatial form)으로 파악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수직적으로 — 선조적이나 시간적으로 — 인식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이 세계란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예정한 길을 따라, 달리 말해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우리는 그것을 섭리(Providence — 기독교적 세계관의 경우) 혹은 정도(定道 — 동양적 세계관의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를 이성의 분석적,합리적, 비판적 사고가 아니라 어떤 운명적인 힘이나 절대적 권위 혹은 선악과 같은 가치관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간의 운행이 지닌 필연성은 삶의 중요한 규준이 되며 그에 따라 군주(君主=왕)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 신분계급이 사회 구성의 기본 원리가 되는 봉건 왕정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예컨대 똑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떤 자는 왕이나 귀족이 되고 또 어떤 자는 평민이 되어 전가 후자를 지배하는 사회체제는 과학적, 이성적 사유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 시기는 이를 권위나 어떤 신성성(神聖性Divinity)이나 선악과 같은 가치관으로 합리화 하고자 했다. 가령 ‘내가 왕이 된 것은 신으로부터 그 권위를 위임 받았’기 때문이라거나 심지어는 ‘내 자신이 바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 계몽주의 세계관과 그에 토대한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같은 세계관은 일시에 깨져버렸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시대는 세계를 이제 수직으로서가 아니라, 수평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된다. 이성적, 합리적, 비판적 사유의 관점에서 보니 세계란 그것을 구성하는 각개 기능적인 요소들의 합리적 구조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계는 더 이상 어떤 절대적 힘이나 섭리가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근대는 섭리나 정도 혹은 선악과 같은 가치관이 추방되고 그 대신 이성적 합리주의와 효율성을 전제로 한 과학적 기능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사회구조 역시 왕, 귀족, 평민 농노 등으로 조직된 수직적 신분사회 대신 모든 구성인들의 지위가 동등한 수평적 민주사회로 전도되었다. 예컨대 오늘의 시대가 추구하는 기본적 가치관은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생각 즉 인권이다. 이제 그 누구도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지도자를 왕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평등한 인민이 자유롭게 투표하여 자신의 대리자를 선택할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계를 어떤 절대적인 힘의 구현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의 구조적 결합체로 보는 관점은 간단히 공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근대를 수평적,병렬적, 공간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역사주의가 퇴조하고 그 대신 구조주의가 등장하였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 공간성까지도 파괴하는 해체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수직적, 시간적으로 보지 않고 수평적, 공간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에서는 왜 시(더 아나가 모든 예술)가 난해해질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문학의 매재라 할 언어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언어 역시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질서 위에서 구현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은 ‘나’,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네게의 어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네 어귀들을 연결시키는 원리즉 어순(語順 order of words)이라고도 하는 통사론적(統辭論的 syntax) 질서는 간단히 말해 시간적이다. 왜냐하면 화자가 ‘학교’를 발음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나는’, ‘오늘’은 이미 발음이 끝나 사라져 버렸음으로 과거에 해당하고(더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은 대과거 ‘오늘’은 소과거), ‘갔습니다’는 아직 발음되지 않은 상태 즉 앞으로 발음해야 될 어휘임으로 미래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 그러니까 선조적 질서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이의 등가적(等價的) 문장을 성립시킴에 있어 ‘나’라는 위치에 올 수 있는 단어는 꼭 ‘나’ 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대신에 ‘너’, ‘당신’, ‘우리’, ‘그’, ‘학생’, ‘선생님’……등과 같은 단어도 올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를 등가성(equivalence)을 갖춘 어휘들이라고 한다. 예컨대 우리는 이 문장에서 ‘너’, ‘당신’, ‘우리’, ‘그’, ‘학생’, ‘선생님’ 과 같은 단어는 사용할 수 있지만 엉뚱하게도 ‘돌멩이’, ‘유리창’, ‘칼‘과 같은 따위의 단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등가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오늘’이나 ‘학교’ ‘갔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 대신에 ‘어제’ , ‘내일’, ‘아침’, ‘저녁’……등이, ‘학교’대신에 ‘공원’, ‘극장’, ‘역전’, ‘백화점’……등이, ‘갔습니다’ 대신에 ‘왔습니다.’ ‘찾았습니다.’…… 따위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이 문장에 동원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 가운데서 그 중 ‘나’,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의 네 단어만을 선택해 문장을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많은 단어들 가운데서 이렇듯 유독 한 특별한 단어들만을 선택해 문장을 만드는 원리는 공간적이다. ‘학교’, ‘공원’, ‘극장’, ‘역전’, ‘백화점’…… 등은 일종의 수평적 배열인데 이 중에서 화자가 ‘학교’를 선택할 경우 — 내가 만일 ‘학교’에 있다면 ‘공원’이나 ‘극장’엔 있을 수 없으므로 — ‘공원’, ‘극장’, ‘역전’, ‘백화점’…… 등은 폐기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공간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 존재는 동시에 여러 공간을 점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 살펴본 언어의 두 가지 질서는 근대에 들어 그 평형이 깨져버렸다. 근대 의식에 민감한, 혹은 근대 의식이라는 강박관념에 편승코자하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기존의 통사론적 논리 즉 선조적, 시간적 원리를 따르지 않고 앞 다투어 수평적, 공간적인 질서의 언어를 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배태한 사회구조를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분명 이 세계를 수평적 공간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근대의 세계관이 문학의 언어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전통적으로 시가 산문과 달리 공간적 원리의 언어질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시대가 수직적, 선조적인 세계 인식에서 수평적, 공간적 세계인식으로 전도되니까 시 역시 이 같은 시대의식에 편승하여 기왕에 지녔던 일반적 특성까지도 거부한 채 하나의 극단을 치닫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즉 더 적극적, 더 궁극적으로 아예 시간적, 선조적 질서까지도 폐기시켜 언어라고도 볼 수 없는 어떤 단말마적 기호 차원으로까지 내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소위 현대를 표방한 시들은 통사론적 질서나 등가성 자체를 무시한 단어들의 무작위적 배열을 일삼아 그같은 언어의 아노미적 현상을 서슴없이 시라 부르게까지 되었다.
예컨대 하나의 문장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 각개 어휘들이 지닌 통사론적 상호 인접성(contiguity)에 의해서 성립된다. 앞에서 예를 든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진술의 경우 ‘나’,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네게의 어귀는 그들 상호간에 어떤 인접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호 연결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똑 같은 등가성과 인접성을 지닌 다른 어휘들과 상호 교환이 된다. 그러나 “나는 사슴 강물 갔습니다”라는 진술이 있다 하자. 이는 경우는 다르다. ‘사슴’과 ‘강물’이라는 단어는 ‘나’나 ‘갔습니다’라는 단어와 아무런 인접성을 지니지 못해 상호연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래서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시인이 시를 쓰면서 그 문장의 논리를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와 같은 형식을 취하지 않고 “나는 사슴 강물 갔습니다”와 같은 형식을 취한다면 독자들은 아마 그 의미를 전혀 해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언어의 공간적 질서 지향이 그 자신을 지탱해주는 토대 자체를 깨버리고 이제 막다른 곳까지 갔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의 시가 필연적으로 난해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산문: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
전통적인 시: “사슴이 오늘 과수원에 갔습니다” 혹은 “사슴 한 마리가 학교에 갔습니다.” 이 경우 ‘사슴’과 ‘과수원’, ‘나’와‘학교’는 각각 등가성을 가진 단어들로 ‘나’를 ‘사슴’으로, ‘학교’ 를 ‘과수원’으로 환치시킨 것이다. 즉 ‘사슴’은 ‘나', '과수원’은 ‘학교’의 은유가 된다. 이는 공간적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비록 단어들을 등가성을 지닌 다른 단어들 바꾸어 놓긴 했으나 아직 선조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난해시: “사슴, 하늘, 나무, 달린다”. 우리는 이 같은 형식의 문장에서(우리의 상식적인 관점에선 문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 내면화된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등가성과 인접상이 배제된 언어들의 무분별한 공간적 나열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예 언어의 선조적 질서까지도 폐기시켜버렸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의식이 이 세계를 수평적, 공간적으로 인식한다는 선입관 내지 강박관념에 쫓기어 시 조차 무작정 이를 따라 아예 언어의 통사론적 질서나 등가성을 무시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필자로서는 승복하기 힘든 명제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 사회성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 일찍이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 언어라 할 때 그 언어의 기본적 속성에는 분명 그것이 지닌 시간적, 혹은 선조적인 논리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사회성이라는 것은 언어를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 즉 시간적, 선조적 원리와 공간적, 병렬적 원리 중에서도 그 전자가 지닌 기능에 보다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선조적인 질서와 공간적, 병렬적 질서가 등가성에 의해 조화를 이룬 언어에서 일방적으로 전자를 배제한 오늘의 문학은 마치 신을 배제한(혹은 타살한) 오늘의 물질 문명이 결과적으로는 인간 그 자신조차 비인간화시키게 된 결과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비록 근대적 세계관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우리가 비록 난해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깨버려서는 안 되는 금기와 지켜야 할 금도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수직적, 시간적 질서 대신에 수평적, 공간적 질서의 세계관을 지향하게 된 것은 그 어떤 절대적 당위성 때문이 아니다. 중세라는 인간 억압사회에 대한 근대인들의 각성과 안티테제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같은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삶 혹은 건설해야 할 이상적 세계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수직적인 원리와 수평적 원리의 조화로운 질서를 구현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그 어느 하나를 폐기시키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그것은 신이 없는 인간의 세계나 인간이 없는 신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과 신이 공존과 조화를 이루는 바로 그러한 세계이다. 그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문학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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