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세계적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20세기 초의 혁신적인 예술경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아방가르드 혹은 전위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성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되어 비이성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화,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예술운동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였다. 공통적인 미적 특징은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거부,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옹호 등이다. 한편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중남미에도 전파되었고 많은 중남미 시인들이 직접 유럽을 왕래하며 독자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전위주의 시운동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칠레의 비센떼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creacionismo), 호르헤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울트라이즘(ultraísmo),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루이스 요렌스 또레스(Luis Lloréns Torres)의 빵깔리스모(pancalismo), 도미니카의 도밍고 모레노 히메네스(Domingo MorenoJiménez)의 뽀스뚜미스모(postumismo), 콜롬비아의 레온 데 그레이프(León de Greiff)가 주도한 '로스 누에보스(LosNuevos)' 그룹, 쿠바 시인인 마리아노 브룰(Mariano Brull)의 순수시, 페루의 알베르또 이달고(Alberto Hidalgo)의 단순주의(simplismo), 멕시코 시인 마누엘 마쁠레스 아르쎄(Manuel Maples Arce)의 에스뜨리 덴띠스모(estridentismo) 등이 있다. 중요한 아방가르드 시인들은 다음과 같다.
(1) 비센떼 우이도브로(1893.-1948.)
칠레의 유복한 가정 출신으로서 1916년에 파리로 가서 아폴리네르, 피에르 르베르디, 트리스탄 차라, 막스 야콥 등 유럽의 아방가르드 시인들과 교유하였고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918년에는 마드리드로 가서 스페인어권 최초의 아방가르드 시운동이라 할 수 있는 창조주의를 주창하였고 많은 스페인 시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대표작은 1931년에 쓰여진 『알따소르(Altazor)』이다. 창조주의는 자유로운 형식의 측면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언어의 일관성을 무시한다는 면에서는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순수한 은유로써 경이롭고 환상적인 그의 시 세계를 창조했다.
우이도브로는 특히 "장미를 노래하지 말고 시 속에서 꽃피게 하라. 시인은 작은 신이다" 라고 외치며,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케 하는 자족적인 시를 주장했다.
(2)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 1892.-1938.)
20세기 중남미 시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간주된다. 젊은 시절에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시적 안목을 다졌다. 1918년 모데르니스모의 영향이 엿보이는 『검은 전령들(Los heraldos negros)』이란 시집을 내며 1922년에는 『뜨릴세(Trilce)』를 발표한다. 『뜨릴세』는 표현법, 이미지, 구어체 언어, 연금술적 언어기법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밖에도 고어, 교양어, 속어, 기교, 토착어 등을 사용하면서 시적 가치률 창조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 그치질 않고 현실을 조각 내어 조망함으로써 각 시행마다 끊임없이 사상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뜨릴세』는 전통과 결별한 아방가르드 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후 유작들이 『인간적인 시(Poemas humanos)』와 『스페인,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다오(España, aparta de mi este cáliz)』에 편집되었다. 마지막 시집은 스페인 내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시들이다. 바예호는 창조주의를 주창했던 비센떼 우이도브로와는 반대로 현실참여적인 문학을 지향하였다. 실제 삶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소련 여행을 하기도 했으며 투옥된 경험도 있다.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보르헤스는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작품활동은 시를 통해 시작하였다. 1918년 제네바에서 마드리드로 온 뒤 울트라이즘 시인들과 접촉하였고 1921년 아르헨티나로 귀국하여 이 아방가르드 시운동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곧 아방가르드 운동과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지와 메타포의 중시, 간결한 표현 등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정(Fervor de Buenos Aires)』(1923.)에 남아 있다. 이후 소설만큼 주목받지 못하지만 작가는 『정면의 달(Luna deenfrente)』, 『산 마르띤 노트(Cuaderno San Martín)』, 『그늘 예찬(Elogio de la sombra)』, 『심오한 종족(La razaprofunda)』, 『기호(La cifra)』 등 적지않은 시를 썼다. 「은총의 시(Poema de los dones)」라는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그의 시는,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간결함과 힘 그리고 관념성을 본질적인 요소로 가지고 있다.
(4) 빠블로 네루다(Pable Neruda, 1904.-73.)
15세 때 『셀바 오스뜨랄』이란 잡지에 한 묶음의 시를 투고하였고 1921년 봄에는 산띠아고에서 매년 열리는 백일장에 「황혼일기」로 당선되었다. 1923년의 「황혼일기」와 그 이듬해의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를 시작으로 그의 시집이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 두 권의 시집은 작가의 청년기적 작품으로 후기 모데르니스모 단계에 속한다.
특히 1924년 발표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는 진부한 사랑의 테마를 참신하고 독창적인 기법으로 다루어 새로운 시풍으로서 네루다주의의 시작을 예고했다. 네루다이즘은 한마디로 19세기말 모데르니스모 시인인 니카라과의 루벤 다리오의 달콤한 멜로디 경향에서 탈피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시집은 오늘날까지도 스페인어로 쓰여진 가장 아름다운 시집으로 인정되고 있다. 네루다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은 바로 전통과의 투쟁의 산물이며, 각각의 시집은 바로 새로운 표현체계를 발견하고자 하는 끝없는 탐색의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인간과 역사를 떠나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바로 개개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견디기 힘든 아픔과 함께 납득할 수 없는 동시대의 구체적인 사회 모순 현상들의 원인까지도 깊이 있게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지상의 거처(Residencia en la tierra)』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시집으로서 이성을 배제하고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도입했다. 세계를 해체해 보는 시각을 견지했으며 외부적인 현실을 답습하는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했다. 자유시는 연금술의 언어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비교법, 이미지, 수사법, 그림자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심장'의 시각에서 사물을 투영하는 몽상적인 상징법이 특징이다.
스페인내전은 네루다를 신비주의적 시인에서 정치적 시인으로 변모시켰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대찬가(Canto General)』(1950.)는 열다섯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아득한 신세계의 신화적 기원으로부터 최근의 각 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변천사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대서사시이다. 이 시는 후반부의 「마추삐추의 정상(Altus de Machu-Picchu)」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칠레에 대한 찬양,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칭송, 그리고 무력과 돈으로 억압하고 군림하는 자들에 대한 거부를 읽을 수 있다. 아메리카에 대한 네루다의 사랑은 『일상의 것들에 바치는 송가(Odas elementales)』(1954.)와 『일상의 것들에 바치는 새로운 송가(Nuevas odas elementales)』(1956.)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음시는 『대찬가』중에서 「아메리카, 나는 네 이름을 그냥 불러보는 것이 아니다(América, no invoco tu nombre en vano)」의 일부분이다.
네루다는 또한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상원의원을 지냈고 1970년 공산당 대표로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사회주의 연합세력의 단일 후보직을 양보했다. 이후 프랑스 주재 대사를 지내던중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한림원에서는 "근원적인 기운의 약동으로 대륙의 운명과 꿈에 생기를 주는 시"라고 수상동기를 밝혔다. 네루다는 1973년 삐노체 장군의 쿠데타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이었던 아옌데 대통령이 실각한 후 곧 암으로 타계한다. 유고집으로는 『회고록 : 나의 삶을 고백한다(Memorias : Confieso que he vivido)』 있다.
(5) 호세 후안 따불라다(José Juan Tablada, 1871.-1945.)
모데르니스모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곧 그것을 유치하다고 간주하고 결별하였다. 정련된 기법으로 울트라이즘 시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뭐니뭐니해도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일본의 시형식인 하이쿠를 중남미 문학에 도입한 것이다. 그는 하이쿠를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 형식의 시를 쓰기도 했다. 「수박(Sandía)」이라는 다음 시는 유연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시이다.
(6) 검은 시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경향은 원초적인 문화의 재평가였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시를 '검은 시(poesía negra)'라고 명명했다. 중남미에서 검은 시는 스페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시를 낳았다. 1930년경 쿠바,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도미니카는 흑인들의 검은 혼을 그들의 리듬, 춤, 음악, 역사, 미신을 통해 표출하는 중심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검은 시가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시인과 작품으로는 루이스 빨레스 마또스(Luis Palés Matos)의 『검은 춤(La danza negra)』, 쿠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시에 담은 니꼴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의 『군인들을 위한 노래와 관광객을 위한 소리(Cantos para soldados y sones para turistas)』, 『송고로 꼬숭고와 다른 시들(Sóngoro cosongo y otros poemas)』, 『완벽한 소리(El son entero)』, 흑인적인 요소와 정치적 요소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맵시있게 나는 비둘기(La paloma de vuelo popular)』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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