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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영화는 어느 때부터 태여났나?...
2017년 01월 27일 22시 19분  조회:4872  추천:0  작성자: 죽림

요약 1894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시작으로 영사기들이 등장했으며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현재와 같은 형식의 영화인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하자 에디슨은 무성영화의 표준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이후 뤼미에르 형제가 카메라·영사기·인화기를 일괄한 시네마토그래프를 개발함으로써 영화의 상영이 가능해졌다. 다양한 기술의 발달로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극장이 커짐에 따라 오디오 증폭기로 음향을 키워야 했고 필름식 음향장치를 개발함으로써 소리문제를 해결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층식 발색법을 활용한 대형영화 제작도 쉬워졌다. 현대 영화계는 텔레비전에 빼앗긴 관객을 유혹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영화계는 그 대안으로 대형영화 시네라마와 입체영화 3D를 개발 시험하고 있다.

개요

1894년 4월 14일 영화는 어느 발명가의 이론과학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그것이다. 이것은 1명씩 동전을 넣고 보는 '들여다보는 영화'였는데 약 15초 동안 실물과 똑같이 움직이는 사람과 물체의 필름을 구경할 수 있었다. 1895년말에 런던·파리·뉴욕에서 각종 영사기가 완성되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루이·오귀스트)는 파리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했다.

이것이 현재와 같은 형식의 최초의 영화였다.

곧이어 에디슨이 발명한 비타스코프가 1896년 4월 23일 뉴욕에서 공개되었다. 그해에는 미국 및 각국에서 여러 가지 영사기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흑백의 그림자로써 살아 있는 움직임을 재현시켜 보이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대하여 갑자기 높아진 대중의 강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거의 75년에 걸친 국제적 규모의 연구·실험·발명의 성과가 축적된 것이었다. 운동중인 물체의 광학적 특징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영국의 피터 마크 로제로부터 시작되어 존 허셀, 마이클 패어리 등에게 영향을 주어 여러 가지 실험·연구를 촉진했다.

유럽에서는, 벨기에의 조제프 앙투안 플라토, 오스트리아의 지몬 리터 폰 슈탐퍼 등이 운동의 위상을 나타내는 일련의 그림을 보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 1853년 오스트리아의 폰 우하티우스는 원반과 환동의 그림을 결합해서 스크린 위에 애니메이션을 영사했다. 플라토와 슈탐퍼의 연구는 조이트로프의 발명에 공헌했다. 이것은 회전하는 원통 틈새로 들여다보면 속의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치이다. 에밀 레노가 발명한 같은 원리에 의한 프락시노스코프는 더욱 정교한 것이었다.

그는 계속 이 기계를 개량했고, 1892년에는 파리에서 테아트르 옵티크('시각 극장')라는 이름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다. 이것은 운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수백 개의 그림을 연결해 15~20분 길이로 편집한 이야기 필름이었다. 1900년까지 레노는 이러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는데, 진짜 영화와의 경쟁에는 이기지 못하고 흥행을 중지했다.

사진

영국에서 로제가 시각적 성질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실용적인 사진기술의 연구가 진전되고 있었다.

1822년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조잡하지만 연속성 있는 사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루이 다게르의 협력을 얻어, 1839년에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라고 불리는 실용적인 사진술을 개발했다.

또 그해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벗은 근대 사진술의 기초가 된 네거와 포지티브에 의한 인화법을 개발했다. 1860년 미국의 콜먼 셀러스는 처음으로 사진을 조이트로프의 원리와 결합시키는 데 성공, 이듬해 키네마토스코프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따냈다. 이 방법을 응용하여 1870년에 헨리 레노 헤일은 파즈마트로프의 영사를 1,600명의 관객에게 공개했다.

1872년 영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기사 존 D. 아이잭스와 공동으로 셔터가 장착된 12대(후에 24대)의 카메라로 이루어진 1벌의 장치를 고안하여 질주하는 말의 움직임을 분석한 사진을 찍었다. 그후 셔터 장치가 개량되어, 1877년에는 동작이 빠른 피사체도 촬영할 수 있게 되어 노광(露光) 속도 1/2,000초라는 단시간에까지 이르렀다.

영화 발전상의 다음 단계는 고속의 속사 사진이 가능한 단일 카메라의 개발이었다(모션 픽쳐 카메라). 프랑스의 에티엔 쥘마레가 1882년에 발명한 '사진총'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성공한 최초의 것이었다.

사진총이란 라이플 총 모양으로 윤동(輪胴)에 인화지판을 끼우고 방아쇠를 당겨 연속적으로 노출시키는 장치였다. 그후 10년간 그는 조수 조르주 도메니노와 함께 일련의 실용 카메라의 개발을 계속하여, 1888년 크로노포토그래프를 발명, 이에 의해 매초 60매의 사진 촬영이 가능해졌다.

1885~95년 10년 동안에 전세계의 발명가들은 사진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일에 주의를 돌렸다.

영국의 윌리엄 프리스 그린을 비롯한 몇 사람은 1890년을 전후해 촬영기·영사기 등의 특허를 땄지만, 상업적 성공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에디슨은 조수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과 함께 띠 모양의 사진 필름 등의 실험 고안에 힘썼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딕슨은 조지 이스트먼이 1889년에 제조하기 시작했던 질화면(窒化綿)을 기초로 한 사진용 필름을 채용하여 1890년에 키네토그래프를 개발했다. 그후 에디슨이 그것을 다시 키네토스코프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대체로 높이 122cm, 너비 61cm 크기의 기계로 필름은 내부의 확대경과 광원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회전 셔터에 의해 화면이 순간적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필름의 길이는 50피트가 한도이고, 화상은 매초 48컷의 속도로 들여다보이는 구멍의 앞을 지나가는데, 1회 상영 시간은 13초가량이었다(프레임). 화면수는 뒤에 매초 16컷으로 줄었지만 이것이 무성영화 시대의 표준이 되었다(토키의 경우는 매초 24컷).

필름의 너비(35㎜)나 화면의 형상, 필름을 보내는 스프로킷(필름 구멍과 맞물려 필름을 움직이게 하는 원형의 톱니바퀴) 등도 대형 화면이나 대형 필름이 출현하는 1952년까지는 표준이었다.

키네토스코프는 실험실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1894년 4월 14일 처음으로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그것을 공개하는 축음기관이 개관했다. 가을에는 몇 대가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이윽고 유럽에서도 영화는 최종 발전단계를 맞이 했다. 에디슨의 발명이 계기가 되어 영국에서는 로버트 W. 폴이 포터블 카메라를 고안했고, 독일에서는 스크라다노프스키 형제가 비오스코프를 개발했다. 프랑스에서는 뤼미에르 형제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레노의 테아트르 옵티크의 투영화상을 결합시켜서 그것을 영사하는 시네마토그래프를 고안하여 1895년 2월 13일 특허를 받았다(오귀스트 뤼미에르루이 뤼미에르). 이것은 카메라·영사기·인화기를 일괄한 것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는 1895년 12월 28일 그랑 카페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의 탄생이었다. 이것은 즉시 유럽으로 퍼졌고, 이듬해에는 미국에까지 침투하여 에디슨의 경쟁 상대가 되자 에디슨 자신도 다른 발명가에 대한 대항 때문에 키네토스코프 영사기의 개발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드빌 레섬, W.K.L. 딕슨, 잔 릴로이, 유진 로스트 등도 각기 독자적인 카메라와 영사기를 발표했고, 1895년 토머스 아멧이 현대 영사기의 원리를 고안했다.

이것은 연속되는 영상을 정지시키고, 그동안은 영상이 움직이고 있을 때보다도 많은 광선을 받을 수 있는 몰타 십자형의 화면전송장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다 필름에 구멍을 내어 필름이 영사기 속을 통과할 때의 부담을 경감시켰다는 점에서 에디슨이나 뤼미에르의 영사기와는 달랐다(아멧 루프). 이것이 후에 비타스코프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6년 에디슨의 영사기로 공개된 것은 이 아멧의 기계장치이다.

초기 영화는 미국·유럽 모두 50피트의 필름을 사용했고, 상영시간은 1분이 채 안 되었다.

모든 발명에 전기의 응용을 생각하고 있었던 에디슨은 거의 피아노만한 전지로 움직이는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를 제작했고, 이것을 수용하기 위해 '죄수 호송차'라고 일컬어졌던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이것은 타르 칠을 한 종이를 바른 조그마한 스튜디오로, 거기에서 연예·서커스 같은 구경거리와 뉴욕의 인기있는 연극 따위가 상연되었다. 한편 유럽인은 비교적 가볍고 기동성있는 수동식 카메라에 만족했으며 어디로든 가볍게 떠나 무엇이든지 촬영했다.

따라서 초기 영화는 행진이나 열차의 도착, 도시의 군중 등 현장감이 강조되었다(기록영화). 이 특징은 영화의 특성과도 잘 어울려서 에디슨도 그뒤를 따랐다.

연예장의 구경거리의 하나로 등장한 영화는 영사기의 능력에 맞추어 필름의 길이는 1,000피트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연예나 구경거리 1편의 상연시간과 같았으며, 이 길이가 현재 1권(305m)의 기준이 되었다(릴).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단순한 움직임의 신기함만으로는 싫증을 내게 되었기 때문에 제작자는 보다 야심적이고 이색적인 소재를 찾게 되었다.

최초로 이야기를 가진 영화(스토리 영화)가 상영된 것은 1897년 호라만이 전문 배우와 본격적인 세트를 사용하여 제작한 3권짜리 수난극일 것이다. 파리에서는 조르주 멜리에스가 카메라 트릭을 주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환상적인 상상력을 구사하여 도처에서 인기를 얻었다. 영국에서는 1900년 직후 이른바 '브라이튼파'의 활약이 활발해져 즉각 창조적인 영화 제작에 진출했다.

그러나 스토리 영화의 진정한 탄생은 1903년 에디슨 회사의 에드윈 S. 포터가 감독한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로 시작된다. 고작 8분 정도의 1권짜리였지만, 거기에는 현대의 편집기술의 싹이 보였고, 그 급속한 인기상승에 의해 여기에 니클오디언(5센트 극장)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대열차강도〉는 영화의 예술·산업의 2분야에 있어서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소리

영화 초기부터 발명가는 영사에 소리를 접합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에디슨은 처음부터 카메라는 축음기를 위해 제작한 부수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레온 고몽이 1900년 이전에 콩스탕 코크랑이나 사라 베르나르 등의 명배우가 출연하는 단편 토키 영화 연작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영상에 축음기의 음성을 일치시키려고 한 것이다. 또 이것은 많은 발명가들이 생각했던 바였는데, 에디슨도 1권짜리 토키를 몇 편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로스트가 필름에 직접 녹음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내고 전시했다.

1912년경 영화 흥행은 니클오디언의 단계를 끝냈다.

극장이 커짐에 따라 토키 영화는 소리의 증폭 문제에 직면했다. 그러나 로스트의 기계나 초기의 축음기로는 홀 구석구석까지 퍼질 만한 충분한 음량을 낼 수는 없었다. 이 결함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리 디 포리스트가 개발한 셀레늄 진공관을 사용한 오디오 증폭기에 의해 해결되었다(진공관 검파기). 제1차 세계대전 후 필름에 소리를 옮기는 방법이 개발된 데서부터 문제는 해결되었고, 거기에서 뒷날의 폭스 무비턴이 생겨났다(포노필름). 한편 바이타폰을 사용한 디스크식 부분 토키인 〈돈 주앙 Don Juan〉이 1926년에 워너브러더스사에 의해 발표되었고, 이듬해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에 의해 영화계는 일약 토키 시대로 돌입, 얼마 후 디스크식 음향장치는 필름식 음향장치로 대체되었다.

1930~52년은 기술혁신시대로 일컬어지지만 영화의 음성기술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1952년 시네라마의 등장은 스피커를 스크린 뒤로부터 해방시켰고, 해저드 리브스가 개발한 7채널 방식에 의해 보다 충실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1953년에 등장한 시네마스코프에는 경제적 이유로 퍼스펙트 A. 사운드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색채

채색되어 움직이는 화상에 대한 탐구도 영화시대 이전부터 시도되고 있었다.

20세기초까지는 필름의 화면마다 손으로 채색을 했는데, 프랑스의 파테사는 1905~30년경 반자동으로 인쇄해넣는 방식(형치법[stencil system])을 채택하고 있었다(스텐실). 1906년 영국에서 찰스 어번, G. 앨버터 스미스가 2색법의 키네마컬러의 특허를 땄는데 촬영과 영사 때 렌즈 앞에 빨강과 녹색의 회전 필터를 붙여 그것을 통해 발색시키는(필름 속도는 1초에 32컷)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색채는 매우 불완전했다. 1915년 허버트 캘머스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연구 팀에 의해 개발된 테크니컬러(선명한 색채)는 3색분해법에 의한 컬러 사진 재판법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의 〈숲속의 아침〉(1932)은 그 방법에 의한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거기에 루벤 마물리언의 〈베키 샤프 Becky Sharp〉(1935)는 예술적인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로서 주목을 받았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9)의 흥행 성공으로 컬러 영화 시대의 도래가 확실해졌다.

테크니컬러에 이어 다층식 발색법에 의한 미국의 코닥컬러, 독일의 아그파컬러, 이탈리아의 퍼라니아컬러가 실용화되었다. 다층식 발색법은 촬영이 간단하기 때문에 이스트먼 코닥과 안스코 계통은 표준형일 뿐만 아니라 대형영화의 제작도 용이하게 했다.

와이드 스크린(대형화면)

1947년에 최전성기를 누렸던 미국의 영화 산업도 1948년말경부터 관객을 텔레비전에 빼앗기자 영화계는 그 타개책으로 1952년 대형영화 시네라마와 입체영화 3D(three dimensions picture)를 개발했다(영화관, 영사막). 3D 영화는 관객이 색안경을 껴야 했으므로 흥행에 실패했고, 오래지 않아 사라졌지만, 3벌의 필름을 이어 합친 만곡된 대화면과 6개의 사운드 트랙으로 완전한 입체음향을 재현시킨 시네라마는 그 입체적인 박진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1952년에는 20세기폭스사의 대형영화 시네마스코프도 발표되었다. 이것은 세로 대 가로의 비가 1 대 2.3의 스크린으로 3개의 입체음향장치를 가졌으며, 제1회 작품 〈성의(聖衣) The Robe〉(1953)의 대성공 이후, 순식간에 미국은 물론 유럽·아시아에까지 보급되었다. 얼마 후 시네라마와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효과를 노린 비스타비전에 기타의 여러 방식이 서양 여러 나라에 등장했다.

또한 〈오클라호마! Oklahoma!〉(1955)는 70㎜ 필름을 사용한 토드 AO(Todd-AO) 방식의 첫작품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이래 표준이었던 35㎜로부터 영화용 필름의 크기는 대폭적으로 바뀌었다. 이어 테크니컬러가 개발한 테크니라마를 비롯하여 갖가지 대형화면이 등장했으나, 모두가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비스타비전(1954), 토드 AO 등의 원리를 기초로 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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