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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제목을 정할 때 신경을 써야...
2017년 06월 09일 00시 37분  조회:2305  추천:0  작성자: 죽림


 아내가 시집올 때 자기 사진을 챙겨 가져왔다. 친구들과 학창 시절에 찍은 사진, 직장 생활을 할 때의 사진, 혼자 멋을 부리고 찍은 독사진… 사진과 함께 그 시절의 추억도 같이 묻어 있을 것이었다. 유치원 다닐 때 찍었다는 다섯 살 때의 흑백사진을 본다. 너른 마당 한가운데 작은 의자를 놓고 거기 치마 저고리를 입은 단발머리 계집애가 앉아 있다. 아마 검정 통치마에 흰 저고리일 것이다. 정면의 햇빛이 눈부신 듯 찡그린 얼굴은 동그랗다. 마치 우리 막내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 마당을 나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변소 가는 마당 한 구석에는 벽오동나무도 한 그루 서 있고. 어렸을 때부터 결혼할 무렵까지 아내는 죽 그 집에 살았었다. 꽤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어쩌면 또래의 동무들과 함께 마당에서 공기놀이도 하였을 법하였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벽오동나무 넓은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덮어주었다 

삼학년 아이들의 모의수학능력시험 감독을 하는 중에 문득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여분의 답안지 뒷장에 그것을 적었다. 시의 영감이 떠오르는 건 세상이 가장 고요한 어느 한 순간이다. 길을 걸을 때, 버스를 타고 창밖에 무심히 눈길을 주고 있을 때, 혹은 이른 아침의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그리고 숨소리 하나도 잡힐 듯 조용한 시험 시간의 교실에서의 어느 한 순간. 

집에 돌아와서 저녁에 그 시구를 꺼내 놓고, 거기에 벽오동나무를 배치해 보고 공깃돌 부딪는 소리도 넣어 보았다. 계절은 가을이 벽오동나무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시로 완성되었다. 썩 마음에 흡족한 시는 아니지만 더 이상 손대기가 싫었다. 

측간 가는 길을 비켜서 주춤 
키 큰 벽오동나무가 
굽어보고 있었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하늘엔 옥돌 부딪는 소리 
푸른 가을 

벽오동 넓은 이파리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덮어주었다 

아내는 요즘 
어릴 적 벽오동나무보다 
굵은 허리로 
짧은 가을 볕 낮잠이 달다 

이 시에 뭐라고 제목을 붙일까. 참 난감하였다. '아내'라고 하지니 너무 싱거워지는 것 같았다. '세월'이라는 제목도 떠올랐다. 그것도 별로 내키는 제목이 아니었다. '아내의 가을'이 괜찮을 성싶었다. 그 제목으로 홈페이지에 시를 올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이었다. 제목이 차라리 맨 아래에 붙는다면 그럴싸하겠지만. 

첫 연부터 셋째 연까지는 아내의 유년기이고, 넷째 연에 와서 아내의 현재로 반전을 이루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런데 제목부터 '아내의 가을'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처음부터 그 다섯 살 난 계집애를 아내의 어린 시절로 금방 눈치챌 것 아니겠는가. '아내의 가을'은 시상의 반전이 주는 즐거움을 싹 가시게 하는 제목이었다. 

'후문(後聞)'이라는 제목이 문득 떠올랐다. 감춰진 반전도 쉬 드러나지 않고 무난한 듯 보였다. 하지만 역시 딱 들어맞는 제목은 아닌 것 같았다. '벽오동나무가 있는 풍경', '낮잠' 등 이런저런 말들을 뒤슬러보다가 결국 '벽오동나무 후문(後聞)'을 생각했고, 조사 '의'를 끼워 넣어서 '벽오동나무의 후문(後聞)'으로 시의 제목을 고쳤다. 그리고 고친 제목을 홈페이지에 수정하여 올렸다. 별것도 아닌 시인데 제목 때문에 무던히 애를 먹은 시가 이 시 '벽오동나무의 후문(後聞)'이다. 

수필이나 소설에 제목을 붙이기가 시보다 쉽다고 하면 수필가나 소설가로부터 욕을 먹을까. 시 아닌 산문에서는 단순한 소재를 제목으로 정할 수도 있고, 주제와 관련시켜 상징적인 제목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편배달은 두 번 벨 울린다'라는 미스터리 소설이 있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아도 우편배달부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소설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이 좀 '별난'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작가 제임스 케인은 그렇게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잭 니콜슨이 주연을 맡고 나온다. 우리 나라에 수입된 그 영화가 상영되면서 당시엔 외설스런 장면이 문제가 되어 집배원들이 그 영화의 제목을 고쳐달라고 항의를 하였다. 급기야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로 영화 제목이 바뀌었다. 

제목이 없는 시도 있을까. 김영랑의 사행시(四行詩)들은 숫자로 번호만 매겨져 있지 별도의 제목이 없다. 따지고 보면 '사행시 1, 2, 3…'이 제목일 수도 있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는 사행시의 앞 구절을 편의상 제목인 양 붙여놓은 것일 뿐이다. 
그와 같이 시의 제목을 그 시의 첫 구절을 따다가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런 제목은 대체로 무난한 것이지 썩 좋은 제목은 아닐 것이다. 연작시의 제목 아래에 번호만 매겨진 시들도 종종 본다. 

그게 수십 편이 되면 앞에 나온 시들보다 뒤쪽의 시들은 본래의 연작시 제목이 지녔던 주제와 동떨어질 수가 있다. 연작시가 아니라도 똑같은 제목을 여러 편에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브 본느푸아의 시집을 보면 '돌'이라는 같은 제목의 각각 다른 시가 여러 편 들어 있는 걸 확인해 볼 수 있다. 제목이 먼저 주어지고 시를 쓰는 백일장과 마찬가지로 시보다 먼저 제목이 쓰여질 때도 있다. 습작 시절에 연습으로 나도 그런 시를 많이 써 본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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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小滿) ―윤한로(1956∼ )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헤,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
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 
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 교장선생

 


소만은 입하와 망종 사이의 절기, 보리 이삭 누렇게 익고 초목이 무럭무럭 자라 농촌 일손이 한창 바쁠 때다. ‘봄 끝물’, 여름 맏물. ‘베란다 볕’도 좋아 ‘미카엘라/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정답게 세례명을 부르는 걸 보니 미카엘라는 화자의 누이 같은 아내, ‘아버지’의 딸 같은 며느리.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아버지 ‘헤, 좋아라 애기처럼’ 웃으신단다. 육신도 정신도 ‘애기’가 된 연로하신 아버지, 하지만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몸을 씻는 게 영 내키지 않으셨을 테다. 그래 목욕하시자 할 때면 버럭 화를 내며 ‘땡깡’을 부리셨을 테다. 욕실에 모시는 일이 전쟁이었는데 오늘은 참으로 볕 좋은 베란다에서 ‘애기처럼’ ‘윤 교장선생’님, ‘따슨 물’에 몸 담그고 잠방잠방 물장난도 하며 웃으시네요. 미카엘라는 소만의 햇볕, ‘따슨’ 어머니의 손길로 노인의 몸을 어루만져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유일하게 남은 찬사가 ‘깔끔하다’일 날이 오리니. 방과 몸에서 나쁜 냄새라도 풍기면 가족의 천대를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노인이 많다. 노인이 되면 여태 주인으로 살아온 세계에서 이제 세입자가 된 듯 입지가 불안해진다. 그렇잖아도 어디에서고 존재감이 엷어지는데 가족조차 그가 없는 듯 있기를 원하기 쉽다. 다행히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같이 늙어 가는 사람이 많아서 이전 노인들보다 외로움이 덜한 노년을 보낼 테다. 그런데 노인은 외로울 뿐 아니라 신체도 취약하다. 머지않은 그날에 대비해서 무슨 호신술을 연마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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