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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불능의 시는 난해한 시가 될수밖에...
2017년 08월 17일 02시 20분  조회:1748  추천:0  작성자: 죽림


3. 

  무의식을 전경화시킨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난해한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소통 불능의 시가 될 수밖에 없다. 무의식은 규율․규범에서 벗어나있는 욕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사회 경제적 여건에 따라, 성장 배경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들을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게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무의식의 전경화’이다. 프로이트 이래 ‘욕망’은 가려져서 나타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꿈에서는 압축과 전치로, 시를 꿈의 대체물로 본다면 시에서는 은유와 환유로. 의도적 난해시가 오늘에 와서 처음 시도된 것도 아니다. 크로스 리딩에 의한 병렬양식의 시, 몽타주, 콜라주들의 시들이 이미 20세기 초 서양에서 시도되었다.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에서 이미 자유연상에 의한 통사구조 및 문법파괴가 있었다. 李箱 또한 난해시를 썼다. 이형기는 그의 대표적 시론중의 하나인 「소란한 無人島」에서 “시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난해시”를 쓰고 싶다고 하였다.8) “소란한 無人島”는  정지용의 시 「海峽」에서의 한 구절이었다.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라 속 같이 

  소란한 無人島의 角笛을 불고 




이형기가 주목한 것은 바로 “소란한 無人島”였다. 이형기는 소란한 無人島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의 본류는 사실 현대적 실험시들이 아닐 것이다. 시의 본류는 전통적 서정시일 것이다. 전통적 서정시들은 유의미시들이다. 소통이 가능한 시들이다. 그리스의 수사학, 로마의 수사학들에서 중요한 항목들이 inventio, dispotio, elocutio, memoria, actio 등이었다. inventio는 주제 및 제재와 관계있고, dispotio는 구성과 관계있고, elocutio는 오늘날의 수사법들과 관계있다. memoria는 기억술로 번역된다. actio는 연설 행위 자체와 관계있다. 이를테면 독자의(혹은 관객의) ‘파토스를 건드리느냐, 에토스를 건드리느냐’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이중에서 주목하는 것이 memoria이다. 기억하게 하는 것이 수사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였다. 이를테면 시에서 행을 들쭉날쭉하게 하는 것이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산문에서 문단을 나누는 것도 기억하기 쉽게 하여서였다. 현대에 와서 이것은 독서 행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요한 구절에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는 것도 메모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디카詩는 전통시의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계승’이라고 한 것은 일단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그림으로 전달될 때(혹은 그림과 같이 전달될 때), 이미지로 전달될 때, 가장 잘 전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자시’에서 행을 들쭉날쭉하게 만든 것도 회화를 의식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계승한다’고 한 것은 ‘시적 형상’에서 받은 인상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적 충동은 보통 일회적이다. 그 일회적 순간을 위하여 ‘시인은 산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회성은 즉시 메모해두지 않으면 금방 휘발된다. 메모해두더라도 일회성이 주는 ‘일회적 아우라’는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일회적 시적 충동이 - 이상옥의 말을 빌면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이 - 디카를 통해 영원히 보존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회적 아우라를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때마다 매번 다르게 생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앞에서 디카詩로 인용한 「고성 가도(固城 街道)」, 「빈집」, 「낙조」 등을 계속해서 다르게 재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다.  





4.  

  앞에서 ‘시를 묘사적 이미지의 시와 서술적 이미지의 시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묘사적 이미지의 시에 더 가까워보인다고 하였다. ‘묘사는 ‘객관적 묘사’이고 서술은 ‘주관적 서술’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진(술)은 객관적 묘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디카詩는 전통시의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하였다. ‘계승이라고 한 것은 일단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소통은 ‘그림으로 전달될 때’(혹은 그림과 같이 전달될 때), 혹은 이미지로 전달될 때, 가장 잘 전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견해들을 역사(미학)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들이 재현의 미학을 추구하였다면 표현주의는 추상의 미학을 추구하였다. impressionismus는 말 그대로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 예술이었다. 외부가 중심이 되는 예술이었다. expression‎!!!ismus는 말 그대로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예술이었다. 내부가 중심이 되는 예술이었다. 표현주의에서 현대 예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촬영한 장면들을 언어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묘사적 언어이든 서술적 언어이든)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미학에 더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또한 자연주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주의는 사실주의 양식이 극대화된 것으로서 순간문체의 예술, 시간확대경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볼 수 있다. 디카로 ‘촬영하고 싶은 욕구’에 주목하는 것이다. 욕구의 내면에 주목하는 것이다. 디카 사진을 표현주의처럼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 예술로 보는 것이다. 이것의 예로 앞에서 주관적 서술의 구체화로 본 절창 「낙조」를 들 수 있다. 문자시 「낙조」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 사진 「낙조」의 구체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객관적 묘사의 시가 될 수도 있고, 주관적 서술의 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통적 서정시의 영역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고, 현대적 실험시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도 있다. 절대적 이미지 시를 파생시킬 수도 있고, 무의미시를 파생시킬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극명한 예로 이상옥은 이상범의 디카詩 「용광로-선인장에게」를 들고 있다. 




  무쇠가 끓을 때 기능장은 빛을 읽는다 

   

  녹인 무쇠 쏟을 때의 그 순한 무쇠 빛깔 




  쇳물도 무르익으면 고요하고 고요하다 

  ― 「용광로-선인장에게」 전문 (디카 사진 생략) 




이상옥은 이 시를 두고 “선인장 꽃 속에서 용광로 쇳물 속의 절정의 고요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사물에 감추어진 시적 형상을 직관으로 읽어내거나 혹은 선험으로 읽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9) 이상옥의 이 말은 물론 ‘시적 형상의 포착’이 ‘선험적인 것’[혹은 무의식적인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한 것이지만 이상옥의 이 말을 시적 형상에서 채취한 ‘문자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시적 주체인 시인에 의해서 묘사적 이미지의 문자시뿐만 아니라, 서술적 이미지의 문자시도 가능하다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무의식에 의한 선험적인 문자시도 가능하다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유기체적 예술작품’의 부인 가능성이다. ‘전체로서의 부분’의 부인 가능성이다. 디카 사진은 대부분 현실의 한 단면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디카詩는 그렇다면 파편적 예술작품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때) 디카詩는 소통 부인의 디카詩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도 주체로서의 시인을 말할 수 있다. 현실의 한 단면에서 파편적 예술작품을 반영해낼 수도 있고, 아름다운, 혹은 구조적인, 유기체적 예술작품도 만들어낼 수 있는 주체로서의 시인을.  

  또 하나의 문제는 비록 이상옥 교수가 동일성의 개념으로 보아달라고 했지만 시의 사진(혹은 회화)에 대한 종속성․의존성이다. 문학의 위기․시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하게 된 것은 영상매체의 승승장구가 주요 이유였다. 디카詩가 문학의 위기․시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혹은 문학의 영상매체에 대한 의존성을 심화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아니면 하이브리드의 시대정신에 부응해서 문학을, 시를, 다채롭게 하고 풍요하게 해서,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시를 다시 대중에게 가져가는데 공헌할 것인가. 시의 대중화에 공헌할 것인가. 시의 소통을 윤활하게 하는데 공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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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덕수․이상옥 대담, 「디카詩의 전위성」, 실린 곳: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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