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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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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위하여...
2017년 08월 17일 02시 55분  조회:2358  추천:0  작성자: 죽림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위하여 / 강은교


(1)단어 하나가 떨어져 온다. 가령 한밤중 같은 때라든가 새벽 무렵 같은 때 나는 손을 벌려 그 단어를 받는다. 책상 한 귀퉁이에 늘 놓여져 있는 붉은 색 바구니에 나는 그것을 집어넣는다. 하긴 요즘은 그런 순간이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은 말하자면 아주 재수가 좋을 때이다. 

그러니까 한때는 상당히 재수가 좋았다. 늘 단어가 공중에서 떨어졌고 나는 그것을 받느라 바빴었다. 내 바구니도 쉴새없이 자기의 등을 열고 그것들을 제 몸속에 집어넣느라고 애를 먹곤 했다.
때로는 단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단어가 줄줄이 이어져 마치 하나의 작은 마당이 내려오는 것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물론 아주 재수가 좋을 때이다.

떨어져 내리는 것이 하나의 흐릿한 이미지만일 때도 있다. 어떤 동사라든가, 또는 어떤 명사도 아니며 어귀도 아닌 희미한 어떤 그림 같은 것, 그것은 아주 낯선 어떤 것일 때도 있고, 낮에 보아 두었던 어떤 상황의 변형된 그림이거나 또는 지난 어떤 꿈속의 흐린 그림이거나 또는 오래 전에 읽은 어떤 신문 같은 것의 얘기들 속에서 나의 공중으로 옮겨온 그런 것들이다.

어느 날, 나는 나의 그 붉은 색 바구니의 뚜껑을 연다.
단어 하나가 잡혀 온다.
어귀 하나가, 또는 이미지 하나가 잡혀 온다.
그것은 나의 원고지 위로 올라온다.
이리저리 그것을 끌고 다닌다.

항상 내 오른손의 능력이 보잘것없음에 툴툴대면서 또는 절망하면서, 
그것들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할 때까지, 또 몇 개를 더 꺼내 온다. 그것들이 저희끼리 무슨 대화인가를 하도록 지켜본다.
아, 말이 없는 말을 하여라, 너희 스스로 정하여라. 그림을 그려라, 너희 스스로, 너희 스스로.


(2)이런 방법도 있다. 사진 찍기다.
나는 사진사이다. 사진사는 피사체가 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객관적 거리의 감각을 주는 이 방법과 아주 내 마음에 든다. 사진만 잘 찍어 놓으면 사진 속의 인물들 대상들은 스스로 말하리라. 그리고 그것은 또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의 참여의, 어쩌면 가장 비이기적인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매일 사진을 찍는다.
학교엘 가면서, 시장에 가면서, 강의하면서, 신문을 보면서, 밥을 먹으면서, 짧은 여행지에서, TV뉴스를 보면서 나는 가능한 한 그날 만난 모든 상황들, 인물들을 선명히 사진찍기를 바란다.
여자들의 사진을 찍고, 대자보들과 흐린 날씨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고, 또는 리어카에 누워 있는 배추들과 상인을 찍고, 덤프트럭을 찍고, 도시의 거리에 엎드려 있는 운동화, 아기고무신,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찍는다.

사소한 모든 것들, 작은 것들을 찍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필름째로 내 단어 바구니의 한 켠에 넣어둔다.
그것들의 원고지 위의 인화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지곤 한다.

제일 먼저 인화하려고 점찍었던 것이 제일 나중에 인화되는 수도 있고, 개중에는 아직 손대지 않은 것 ― 아니 손대지 못한 것도 있다. 인화할 계기가 오지 않은 것이다. 더 좀 묵혀야 한다. 하긴 그러다 그것들의 빛이 아주 바래버릴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내 바구니에 단어와 함께 쌓인 현실의 필름들이 많으면 나는 괜히 희망에 쌓인다. 마약 같은 희망에 말이다.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필름들을 밤새도록 들여다보고만 있을 때도 많다. 그런 날은 단어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밤만 보내 버린다.
버릇이다. 아, 참 쓸데없는 버릇이다.

(3) 그러고 보니 들여다 보기도 많이 했구나.
아파트의 옥상에서 하루 종일 아파트의 뒷켠에 펼쳐져 있는 어느 대학교의 숲을 들여다보던 때가 생각난다. 그후에도 며칠 더 나는 숲을 들여다보러 옥상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때 시를 한편 쓰기는 했다. 동요같은 시를.
그러나 들여다보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눈을 깜빡거린 다든가 하는 식의 우리는 그렇게 사물을 철저히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육안으로는 말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곳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때는 할 수 없다. 의식적으로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나쁜 상태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깊은 강물 같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애쓰면서, 나는 그 강물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내 생각의 가지에 맞는 어귀라든가 단어 하나가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낚싯줄에 무엇인가 걸려 올라온다. 그러나 그것은 개펄의 흙덩이거나 라면 봉지거나 무슨 병조각 같은 것일 때가 많다. 좋은 게 걸려 올라오면 내 바구니에 담을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서서, 그 생각을 자꾸 말하고 싶어 안달한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나의 그림을 위하여 ― 그럴 때 나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림을 의식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내가 써보고 싶은 생각을 하나하나 백지 위에 풀어 놓는다. 길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그림을 달아나지 않도록 책상 앞에 붙인다. 온힘을 다하여 그림에 매달린다. 용을 쓰며 턱걸이를 하는 학생처럼.

이런 때 나는 정말 비참하다. 눈물이 흐른다. 그러면서 사전을 찾는다. 별로 성공한 기억은 없지만 비상탈출구 같은 것이 될 때는 있다. 단어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단어와 껴안는다. 그리고 얼른 내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그러다 그것이 내가 그전에 많이 쓴 낯익은 단어임을 알아버리고 다시 슬픔에 빠지긴 하지만, 그래서 기껏 그린 그림이 내가 이미 많이 그렸던, 그래서 익숙해진, 상투화된 그림임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밤은 행복하다. 

(4)그것이 어떤 단어들의 집합이거나 구절들의 집합이거나 서툰 필름이거나 그것들이 그래도 괜찮게 이어지도록 나는 끝없이 소리내어 읽는다. 단어들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가도록 나는 끝없이 중얼거린다.
말하지 않으면 말할 때까지, 그것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종이 위에 설 때까지 내 바구니는 그럴 땐 열어 두어야 하리라. 소외감을 느끼는 단어는 스스로 바구니 속으로 다시 들어가리라. 

그렇게 나는 오늘도 부질없는 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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