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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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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를 천연덕스럽게 표현할줄 알아야...
2017년 10월 09일 23시 26분  조회:3160  추천:0  작성자: 죽림
예쁜

  
  
  
예쁜 발톱 
예쁜 이빨 
  
입술 가득 
예쁜 피를 
  
바른 
쥐가
고양이를 
  
먹는다
심장을 
시계가
예쁜 밤의 
예쁜 불알
함기석차분한 야식」 
  
  
예쁜이라는 시어가 거듭 나타나는 위 시에서 함기석은 예쁜에 담긴 일상적 의미를 뒤집고 있다시인은 입술 가득 예쁜 피를 바른 쥐가 고양이를 먹는 장면에 예쁘다는 말을 붙이고 있다입술 가득 피를 바른 쥐는 예쁜가예쁘지 않은가그 쥐가 고양이를 먹는 장면은 예쁜가예쁘지 않은가시인은 사람들이 예쁘다에 부여한 의미의 바깥으로 나오고 있다. “예쁜 발톱으로 쥐는 고양이를 잡고, “예쁜 이빨로 쥐는 고양이를 먹는다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시인은 천연덕스럽게 시로 표현한다. ‘예쁘다라는 말에 새겨진 맥락을 놓으면 쥐가 예쁘게’ 고양이를 먹는 세계가 상상 속에서 뻗어 나온다.


차분한 야식이라는 제목을 참조한다면야식을 먹는 주체는 쥐와 시계이다쥐는 예쁜 이빨로 입술 가득 고양이를 먹고 있고시계는 심장을 먹고 있다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이 시는 그러나 상상 속에서 표현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이해한다면 새로운 맥락으로 접근할 수 있다쥐가 고양이를 먹는 세계와 시계가 심장을 먹는 세계는 놀이 공간곧 상상 속 세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이미지가 이미지를 낳는다고양이를 먹는 쥐의 모습이 예쁘다면 쥐의 발톱과 이빨입술 가득 피를 바른 입술 역시 예쁠 수밖에 없다그것은 일종의 시적 쾌감이고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자가 느끼는 기쁨을 표현한다시계가 심장을 먹는 예쁜 밤도 예쁜 불알과 어울려 시간 속의 흐름-생성으로 변주되고 있지 않은가예쁜 밤에 펼쳐지는 예쁜 피의 세계는 이미지로만 구성되는 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기호들이 놀이하는 세계에서 함기석은 이미지를 통해 그 기호들의 놀이와 마주하고 있다. 그가 마주하는 세계는 구태여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는 이미지로 넘쳐나는 세계이다. 그래서 그는 의미에 대한 지나친 부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곳을 향해 갈 수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는 시어를 갖고 논다. 타성에 젖은 언어를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며 그는 언어의 바깥으로 끊임없이 탈주한다. 언어가 만든 규칙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쁘다’라는 말이 꼭 ‘예쁘다’라는 의미를 지닐 필요가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쥐가 고양이를 먹고 시계가 심장을 먹는 세계를 상상하며 시인은 의미에서 빗겨난 기호들의 놀이를 즐기고 있는 셈이다.


예쁜 밤에 이루어지는 상상은 시인을 무의식 세계로 이끌고 간다무의식은 언어로 미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가리킨다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대상들은 무의식으로 흘러든다언어=의식은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산을 덮은 채 아슬아슬한 의미 놀이를 벌이고 있다의미의 놀이는 명확한 규칙에 기반하고 있다규칙을 벗어난 주체는 놀이에서도 추방된다놀이를 즐기려면 규칙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서약을 지켜야 한다함기석은 이러한 약속을 스스로 어김으로써 입술 가득 피를 바른 예쁜’ 쥐와 마주한다예쁜 쥐는 상상 속에서 자기 증식하는 존재로 나타난다시인은 다만 예쁜 쥐를 상상의 세계에 풀어 놓을 뿐이다.


상상이 또 다른 상상으로 이어지는 함기석의 시 세계는 이 때문에 기하학적 추상으로 곧잘 건너뛰기도 한다구체의 반대편에 추상이 있는 게 아니다구체가 곧 추상이 되는 세계에 시인은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쥐가 고양이를 먹는 세계는 구체인가추상인가? “예쁜 불알이 움직이는 시계는 구체인가추상인가구체와 추상의 경계를 나누는 지점이 과연 있기나 할까구체적인 사물을 줄이고 줄이다 보면 하나의 점으로 모인다이 점은 구체인가추상인가상상은 이 점을 구체로도추상으로도 만들 수 있다입술 가득 피를 묻힌 쥐를 예쁘게도예쁘지 않게도 만들 수 있다함기석은 모든 일이 가능한 그곳에서 열심히 웃고 울고 떠들고 있다그에게는 상상이 곧 시 쓰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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