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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2017년 10월 13일 23시 52분  조회:5227  추천:0  작성자: 죽림

훈민정음은 조선의 4대임금인 세종대왕(1418-1450)때 만들어진 문자로 2017년 10월9일은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반포된지 571년이 되는 날이다.
한글은 세계적으로 과학적 우수성을 인정받은 우리 고유의 문자 체계 이다. 세계적으로도 문자를 가진 민족들은 많이 있으나 한글과 같이 만든 목적이나 만든 사람, 반포일이 명확한 문자체계는 없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들어 그 서문을 직접쓰고 집현전학자들에게 명하여 예의(언해본)와 해례본을 만들어 그 목적과 원리를 담아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 중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을 처음 만들고 한자로 훈민정음의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책자인데 그 존재가 세상에 나타난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1930년 경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였던 김태준은 제자로 부터 경북 안동의 한 가문에 훈민정음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직접 가서 '세종실록'의 기록과 그 실체를 비교 확인 한다. 김태준은 서책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이렇게 한 가문에서 보관할 서책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리고 당시 조상으로 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조선의 거부로 꼽히고 있었던 간송 전형필을 찿아간다. 당시 23세에 대학생이었던 간송은 한국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해외, 특히 일본등으로 헐값에 넘어가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리하여 수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인사동의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가치가 있는 그림, 자기, 불상, 고서적 등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돈이 되는 대로 수집하였다. 뿐만아니라 민족적 보존가치가 있는 경우 일본 등지로 넘어간 문화재라도 다시 되사와서 서울의 보화각에 있던 간송문고(지금의 간송미술관)에 보관하고 당시의 많은 학자들과 왕래하면서 그 가치를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많은 학자들로 부터 '세종실록'에 훈민정음의 사용 설명나와있는 책을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글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를 설명한 책인것 같다는 얘기와 아직 훈민정음과 관련된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니 그 책을 꼭 찿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들었던 차에 한 국문학자로 부터 안동에 '훈민정음'이 나타났는데 확인해보니 진품이 틀림없는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간송은 담판을 위해 안동으로 급히 내려간다. 직접 확인 한 후 상대는 당시 기와집 한 채값을 요구하였으나 이 보물의 가치는 기와집 열 채로도 모자란다고 생각한 간송은 기와집 열채 값 만원을 주고 구입하게 된다. 지금 화폐로는 약 30억원정도의 가치라고 한다. (최근 국립 문화재청의 문화재적 가치 평가는 1조원이다)

그리고 간송은 광복이 될 때까지 그 존재 여부를 공개하지 않았다. 당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열을 올리던 일제의 눈에 띄었더라면 영원히 일본 천황궁의 지하에서 잠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로소 한글의 과학적 발음 원리등이 담겨있는 매뉴얼이 세상에 공개되었고 그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발음원리등이 불분명했었고 문서적근거가 없었다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이 세상에 알려지고 난 후 수년에 한두번 간송미술관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일반에 공개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공개 초기 훈민정을 해례본 간송본을 직접 눈으로 본 초기의 학자들은 가슴이 벅차 그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국보 70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요즘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1호로 지정하기 위한 논의를 국회에서 진행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필자도 동참하고 있다) 일제말기 조선총독부에서 지정한 국보1호 남대문보다 그 민족적 가치나 영향력으로 볼 때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 이다.

그리고 최근 간송미술관과 교보문고는 의기투합하여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을 오백년전의 전통 고서 방식 그대로 재현하고 현상복제라는 방법으로 복원하여 한정 복제본 삼천권을 만들어 일반에 판매하는 행사를 진행하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보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소장할수 있는 절호의 좋은 기회다. 게다가 기와집 몇 채가 아니라 기왓장 몇 개값이면 구입이 가능하다. 곧 품절될 것을 확신하였으나 아직 몇 권의 기회는 남은듯하다. 서두르시라....

 

참고 : 간송 전형필,  네이버 블로그 중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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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서울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에 와세다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고서,고서화를 취급하던 서점]을 인수하고, 우리민족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문화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스승이었던 춘곡 고희동과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34년에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매입하여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으며,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웠다.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는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회이다.

     

    1962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화포장 과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의 수집품들을 연구정리하기 위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개편되었고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1971년부터 간송미술관의 이름으로 봄과 가을 일년에 두차례 일반공개를 하고 있다. 간송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194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소재되어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김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세종이 광산김씨 문중에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만 만원에 판매하였다. 최초 판매가로 천원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문화재의 가치를 정확히 치르는 것으로 유명했던 전형필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거간 노릇을 한 김태준에게 천원을,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격으로 만원을 치렀다. 당시 천원이면 좋은 기와집 한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학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던 한글 창제 원리가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해 밝혀졌다. 후에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1997년 10월에 대한민국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기도 하였다. 거간 노릇은 한 김태준과 이용준은 사회주의자로, 판매한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광복 후 김태준은 일련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되었고, 이용준은 월북하였다고 한다.

     

    존 개츠비로 부터 사들인 국보급 고려청자 20점은 모두 사십만원에 사들였는데 원래 제시한 가격은 오십만원 이상이었으나 전형필 선생의 문화재 사랑에 감동하여 판매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들이 전형필의 소장품들을 모두 가져가려하자 포장을 맡아하던 소전 손재형과 혜곡 최순우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못가져가도록 하였고 뜻대로 되지 않자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부러뜨리기 까지 하였다고 한다. 전형필 또한 피난을 가지 않고 보화각 근처 빈 집에 숨어 소장품이 훼손될까 노심초사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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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2월 일본 신문에는 일본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민족 문화를 되찾은 간송의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일본에 살다가 영국으로 귀국하려던 변호사 존 개즈비(John Gadsby)가 당시 자신의 소장품을 팔고자 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이 직접 일본에 건너가 협상을 벌였던 것이다.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간송의 애국적인 태도에 감동해 개즈비의 청자와 백자들이 간송에게 양도되었고,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소장품들이 고국인 한국으로 가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의견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간송은 공주에 있던 2백석지기의 농장을 팔았는데, 당시 개즈비의 소장품으로는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형 뚜껑 향로, 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국보 제74호 청자 오리 모양 연적, 국보 제270호 청자 모자원숭이 모양 연적, 보물 제238호 백자 박산형 뚜껑 향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일본에 유출된 국보 제135호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을 파격적인 고가에 다시 사왔고, 1768년에 심사정이 그린 촉석도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산 가격만큼의 거금을 들여 보수를 다시 맡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간송의 소장품에는 회화, 도자, 금속 공예, 불교 조각, 전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 2011년 3월에는 12점이 국보로, 12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가 되었고,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송의 활동에 깊게 관여하였던 오세창은 1938년에 우리나라 최초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현 간송 미술관) 지석에 “서화는 심히 아름답고 옛 골동품은 자랑할 만하다. 이곳에 모인 것들은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에 남은 주교로 고구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라는 글을 남겨 간송이 모았던 소장품의 가치를 알려 주었다.

     

    간송의 소장품은 우리 문화의 정수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간송의 뜻과 업적, 열정을 대변해 주는 것이며,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대변해 주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간송 미술관의 소장품은 연중 봄·가을 두 차례 특별전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간송 전형필이 되찾은 우리문화유산)

     

    1.청자 기린형뚜껑 향로

     

    종 목 국보 제6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높이는 20㎝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이 꿇어 앉아있는 모습을 한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윗부분이 넓게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고 짐승모양을 한 3개의 다리가 떠받치고 있다. 몸통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었고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가 배치되었으며, 그 위에 뚜껑을 덮도록 하였다. 뚜껑 한복판에는 뒤를 돌아보고 있는 기린이 조각되어 있고, 기린이 앉아있는 자리의 옆면에는 번개무늬가 돌아가며 음각되었다. 기린의 머리에는 뿔이 돋아있으나 부러져 있는 상태이고, 목뒤의 부분은 곱슬곱슬하게 표현하였다. 눈은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점을 찍었다. 구조상 향의 연기는 벌려진 기린의 입을 통하여 뿜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

     

    비취색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향로 전체를 품위있게 감싸고 있다.12세기 전반기에 비취색의 청자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이와 같이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본뜬 상형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2.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종 목 국보 제6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전기의 청자 정병으로 높이 37.0㎝, 밑지름 8.9㎝의 크기이다. 원래 정병은 불교에서 모든 악을 씻어 버리는 의식에서 사용하던 용기의 하나로 중국을 거쳐 전해진 서방 양식이었으나, 고려에 와서 가장 세련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물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으로 청아한 담록색 계통의 비취색 유약에 백토(白土) 상감만으로 새겨진 버드나무와 갈대, 연꽃, 원앙새 1쌍을 회화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병 목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꽃을 하나씩 상감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8각으로 기품있게 만들어 병 목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았다. 물을 넣는 아가리는 둥근 어깨 한쪽에 아담하게 붙어 있는데, 원래 뚜껑이 있었으나 없어진 상태이다.

     

    대체로 초기의 상감청자는 유약이나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어 있고, 청아한 비취색 유약이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색인데, 이러한 바탕 위에 상감무늬가 곁들여졌던 만큼 한층 더 장식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정병 또한 이러한 초기 상감청자의 하나로 매우 정제되고 세련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3.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종 목 국보 제6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매병은 중국 송나라 매병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12세기경에 이르러서는 고려만의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이러한 고려 매병의 양식은 이 작품에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의 크기의 매병의 아가리는 작고 낮으며 밖으로 살짝 벌어져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가리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둘렀으며 굽 위로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통 전면에는 구름과 학을 새겨 넣었는데, 흑백상감한 원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원 밖에는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새겼다.

     

    학의 진행방향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도자기 표면이라는 일정한 제약을 넘어 사방으로 공간을 확산시켜 짜여진 구획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듯하다. 이같은 표현상의 변화 추구와 함께 문양처리의 능숙함에서 고려 도자기의 우수함과 고려인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다.

     

     

    4.훈민정음

     

    종 목 국보 제7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시 대 조선시대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5.동국정운 권1,6

     

    종 목 국보 제7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6.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

     

    종 목 국보 제7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시 대 삼국시대

     

    커다란 하나의 광배를 배경으로 중앙에 본존불과 양 옆에 협시보살을 배치하고 있는 삼존불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불상 전체 크기에 비해 크고 높게 표현되었다. 미소를 띤 갸름한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으며, 어깨와 가슴은 약간 좁은 듯 하지만 둥글고 강인하게 처리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정면으로 V자형 옷주름이 있으며, 좌우로는 새의 깃같은 옷자락이 뻗치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고 손끝이 위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고 손끝은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 손가락 2개를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

     

    양 옆에 배치한 협시보살은 광배의 끝에 매달리듯 표현하였으며, 세가닥으로 올라간 보관을 쓰고 있다. 신체 표현은 본존불과 비슷하지만, 앞면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옷주름과 손모양이 다르다.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가는 선으로 장식한 광배는 끝이 뾰족한 배 모양으로, 본존 주위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도드라지게 새기고 그 안에 연꽃무늬, 덩쿨무늬, 인동초무늬를 새겼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바닥이 밖으로 퍼진 원통형이며 연꽃이 새겨져 있다.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의 양식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불상은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글에 의해 백제 위덕왕 10년(56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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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성 이씨 대종회 기자회견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원소장처에 대한 입장을 안동의 진성 이씨 대종회에서 밝히고 있다.ⓒ 권기상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국보 제70호)의 원소장처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다.

안동의 진성 이씨 대종회는  2월 23일 안동시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원소장처는 진성 이씨 주촌(周村·두루)종택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 1월 24일 안동시가 주최하고 (사)유교문화보존회가 주관한 '훈민정음 해례본 복각 전시 및 학술대회'에서 박 모 중학교 교사가 "해례본 간송본 원소장처는 광산 김씨 긍구당 고택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들은 "박모씨의 주장은 기존학설과도 배치되고 문화제청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훈민정음의 원 소장처는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이한걸(회양당)이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 모 교사가 해례본 발견 후 65년이 지난 뒤에 그것도 이한걸의 3남, 광산김씨 긍구당 고택의 사위인 이용준이 북한에서 사망한 지 1년 뒤인 2005년부터 사위를 도둑으로 몰아가는 명예훼손까지 하며 10여 년째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뒤에 어떤 배경이나 숨은 의도가 있는지 조사가 필요하다."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 해례본 원소장처는 진성 이씨 두루종택 진성 이씨 주촌(周村·두루)종택 후손인 이재갑 교육학 박사가 원소장처에 관련한 자료들은 설명하고 있다.ⓒ 권기상
이와 함께 대종회 측은 가문에서 내려오는 해례본의 소장과 양도와 소실 과정, 문화재청의 낙장 복원 관련 자료 등을 소개하며 주장을 뒷받침 했다.

그리고 "안동시는 위 사건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은 주촌(두루)문중 및 진성 이씨 전 종친에 대하여 명예 회복 차원에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주촌(두루)마을에서 추진하는 '훈민정음 해례본 원소장처 기념사업'을 지원해 줄 것을 건의한다."고 말한 후 "원소장처에 대한 논란을 중단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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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원소장처 ‘진실게임’

광산김씨 14대 종손, 진성이씨측 주장 반박 “이용준이 처가 긍구당서 빼돌려 훼손·매도”

2017.03.28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국보 제70호)의 원 소장처 논란이 격화되고 있다.
안동의 광산김씨와 진성이씨 문중이 서로 원래 자신들의 문중 소장품이라고 주장, 양 문중간 다툼이 일고 있는 것.
간송본은 안동 서예가 진성이씨 이용준이 1939년을 전후해 간송 전형필에게 거금을 받고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광산김씨 긍구당(肯構堂) 14대 종손 김대중(84)씨는 28일 안동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해례본 간송본은 1940년 초까지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긍구당이 원래 소장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달 진성이씨 대종회가 안동시청에서 한 기자회견 내용을 반박한 것이다.

당시 진성이씨 대종회는 “해례본 원소장처는 진성이씨 두루(周村ㆍ두루) 종택”이라며 “일부 학계에서 이용준이 처가인 광산김씨 긍구당 고택에서 해례본을 몰래 가져온 뒤 팔아먹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성이씨 모든 가문 역사를 부정ㆍ왜곡하고 명예와 자부심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긍구당 측은 이날 회견에서 “해례본 간송본 원소장처는 광산김씨 긍구당 고택인데 이용준이 처가에서 책을 가져온 뒤 긍구당 장서인(藏書印)이 찍혀 있는 표지 등을 찢어 훼손한 뒤 매도했다”고 강조했다.

또 “진성이씨 측 선조인 이정(李禎)이 세종대왕에게서 직접 해례본을 하사받았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이정이 최윤덕 장군 막료로 여진 정벌에 참여해 이룬 군공(軍功)으로 논공행상에서 판관 벼슬을 받고 13년이나 지나 훈민정음이 반포된 만큼 진성이씨 주장은 맞지 않다”고 했다.

이어 “연산군 언문탄압 때 앞 2장을 찢은 뒤 보관했다는 진성이씨 측 설명도 해례본 대부분이 한자(漢字)로 돼있는 데다 한글 탄압을 피해 한자가 쓰인 책장을 찢은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해례본은 한자로 훈민정음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을 풀이한 것으로 예의(例義)와 해례(解例), 정인지 서문 3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간송 전형필은 6ㆍ25 때 오동나무 상자에 해례본 1권만 넣고 피난을 떠났고 잘 때도 베고 자는 등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김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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