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5월 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그해 2월에 있은 미국·영국·소련의 3국 정상 얄타회담에서 이미 독일의 처리방법을 결정한 대로 프랑스까지 합하여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되었다. 이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수뇌회담에서 나온 ‘포츠담선언’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에 당분간은 중앙 정부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정치·경제적 통일성의 유지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非)나치화, 즉 민주화에 있어서는 4개국이 제각각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점령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1946년 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함으로써 1947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km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이 장벽을 쌓은 후로는 브란덴부르크문을 통해서만 허가를 받아 왕래가 허용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에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동 · 서 베를린 경계선 약 45.1킬로미터에 걸친 콘크리트 벽으로, 1961년에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과 동독 마르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축조하였다. 오랜 기간 동 · 서 냉전의 상징물로 인식되어 온 베를린 장벽은 동유럽의 민주화로 1989년 11월 9일에 철거되었다.
1989년 12월 25일, 세계적인 음악가 레오나드 베른슈타인(LeonardBernstein)이 지휘하는 가운데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가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악보에는 ‘환희’가 들어갈 자리에 ‘자유’가 들어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단일팀이 아니라 서독과 동독 그리고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혼성팀이었다. 이들은 모두 오랜 세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서독과 동독,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이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이 쌓기 시작한 장벽은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주변 동독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콘크리트로 축조된 장벽을 따라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되었다. 동독 정부는 이 장벽을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방어벽’이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 서독 정부는 브란트(WillyBrandt)가 베를린 시장 시절 만들어 낸 어법에 따라 ‘수치의 벽’이라고 일컬었다. 이름이야 어떻든지 세계인들은 베를린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이 장벽을 떠올렸고, 이 장벽은 철의 장막으로 여겨졌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 명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100명에서 200명가량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1)
베를린장벽 건설은 소련의 흐루쇼프(NikitaKhrushchev)가 동독의 사회통일당 제1서기 울브리히트(WalterUlbricht)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8월 12일 자정 동독군과 경찰이 전격적으로 국경을 폐쇄하고, 철조망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장벽의 길이는 43킬로미터였고, 서베를린 외곽 장벽은 156킬로미터에 달했다. 갑작스러운 조치와 더불어 동독 주민 대부분의 서독 방문이 불가능해졌고, 이산가족까지 생겼다. 서베를린은 적대 국가에 둘러싸인 섬이 되어 버렸다. 브란트 시장을 비롯한 서베를린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사태의 진행을 막지는 못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철조망이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동독 장교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고 있다.
1962년 6월에는 이미 축조된 장벽에서 100미터 이내에 있던 건물이 철거되고, ‘죽음의 지대(DeathStrip)’로 불리던 무인 지대가 만들어졌다. 1965년에는 다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지고, 1975년에는 통일 때 붕괴된 형태의 장벽이 세워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량된 ‘제4세대 장벽’이다. 높이는 3.6미터, 폭은 1.2미터였으며, 감시탑은 116개소, 벙커는 20개소에 달했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횡단할 수 있는 장소는 모두 아홉 곳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와 침머 거리(Zimmerstraße) 구석에 있던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Charlie)다. 연합국 소속 요원과 외국인만 통행할 수 있던 이 검문소는 오늘날 베를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RonaldReagan)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Gorbachev)에게 동유럽 진영의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징표로 베를린장벽 철거를 촉구했다.2) 그러나 이때만 해도 레이건 자신을 비롯해 장벽의 붕괴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사건은 갑자기 찾아왔다.
1989년 9월 헝가리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동독 주민 1만 3000명 이상이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동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고 서독 대사관을 찾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뒤이어 동독 내에서 대대적인 대중 시위가 일어나자 동독의 최고 지도자 호네커(ErichHonecker)는 사임했다. 그런데도 시위는 더 확대되어 갔고, 많은 주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고자 했다. 호네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크렌츠(EgonKrenz)는 사태 완화를 위해 난민들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황이 와전되고 급기야 서독 방문이 즉각 허용될 것이라는 언론의 오보까지 발생했다. 이에 고무된 많은 동독 시민이 무력해진 국경 경비대를 뚫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베를린장벽 붕괴는 공식 연표에는 1989년 11월 9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무튼 이때를 기점으로 시민들은 해머와 곡괭이를 가지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동독 정부도 추가로 국경 초소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포츠담 광장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포함되어 있어 상징적 의미가 더욱 컸다. 동서독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린 것은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기지 않은 12월 22일이었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서베를린 시민을 포함해 서독 주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장벽 철거를 시작한 것은 다음 해인 1990년 6월 13일이었다. 다음 달 1일 동독이 서독 통화를 수용하면서 국경에 대한 통제도 공식 종료되었다. 장벽 붕괴의 논리적 결과인 통일은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고, 역사의 기념물로 남기기로 결정한 약간의 구간과 감시탑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1991년 11월까지 철거되었다. 오늘날 포츠담 광장에 남은 장벽은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다 남한과 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것을 보았어.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괜스레 눈물이 나더라고. 정말 빨리 통일이 되어서 저런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처럼 서로 갈라져 있다가 통일이 된 독일 국민들은 얼마나 기뻤을까?
제3세계의 등장 - 미국도 싫고, 소련도 싫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29개국 지도자들이 모여서 1회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했어. 이들은 오랫동안 식민 지배에서 신음했던 나라들이었지. 그래서 강대국 중심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고 서로 단결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느새 세계가 동·서로 나뉘어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거야. 이들의 선택은 동·서 어디와도 동맹1)을 맺지 않겠다는 ‘비동맹 중립’이었어. ‘제3세계2)’를 선택한 거지.
1961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 등이 1차 ‘비동맹 회의’를 열고 미국,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지 않은 모든 국가의 결속3)을 다짐했어. ‘제3세계’의 탄생은 동·서 진영4)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 이들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거든. 물론 이들이 강대국에 맞설 정도의 힘은 없었지만 이들의 협력은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질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어. 비동맹 회의 참가국이 계속 늘고, 국제 연합에 가입하는 나라가 늘면서 총회에서의 영향력이 점점 세지기 시작했거든.
공존의 시대 -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다
미국과 소련, 동행의 길로 들어서다
쿠바 위기를 넘기면서 미국과 소련은 극단적인 대결을 삼가고, 각자 자기들의 체제5)를 유지하면서 함께 행동하는 사이로 바뀌었어.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흐루쇼프는 자본주의 세력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하며 새로운 외교 정책을 펼쳤어.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체제를 헐뜯으면서도 각자의 진영 내에서 제일 맏형 역할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이였던 거야.
각자의 편을 향해 ‘너희들 마음대로 하다간 쟤들이 우리를 무너뜨릴 거야. 그러니, 이 형 말을 들어!’ 이런 식이지.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핑계로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였고, 소련은 미국에 맞서기 위해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짓밟았어. 그러나 미국, 소련 둘 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
양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1960년대부터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두 개의 진영을 형성한 것이 마치 건전지의 양극과 같다고 해서 냉전 체제를 ‘양극 체제’라고 해. 하지만 점차 극이 여러 개로 변화하는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어. 다극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거야.
첫 번째 변화는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거야.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일찍부터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라를 운영했고, 1956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어. 또한 1960년대에는 중국이 소련과 국경 문제와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 차이로 대립하다 중국이 제3세계의 지도자로 등장했어. 두 번째 변화는 유럽의 경제가 회복되면서 ‘유럽 공동체(EC)’가 만들어지고, 경제 면에서 미국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세 번째 변화는 제3세계의 등장이야. 네 번째 변화는 프랑스가 미국과 따로 가겠다며 나토를 탈퇴하고,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고 나선 거야. 마지막으로 일본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지.
다극 체제로의 변화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해. 이런 현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1969년 미국의 닉스 대통령은 ‘미국은 아시아 국가 내에서 벌어지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어.
더 알아보기 세계의 외교를 바꾼 스포츠
공산권의 중요한 나라인 중국과 미국이 스포츠를 계기로 은근슬쩍 화해하기 시작했어.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중국과 미국이 같은 탁구 대회에 참가한 거야. 우선 중국이 자본주의국가인 일본에 가서, 나중에는 미국이 중국에 가서 탁구 대회를 했어. 스포츠를 계기로 정치권도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제 세계는 화해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거야. 우리나라도 북한과 정치적으로는 계속 대립하면서도 남북한 단일팀을 만들어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어. 스포츠 정신은 정말 위대한 것 같아.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 - 동유럽에 분 자유화 바람
바웬사의 대통령 당선
1970년대부터 동유럽 사람들은 정부와 당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불신은 커져만 갔어. 군사비에 막대한 돈을 써서 경제가 말이 아니었고, 소련의 간섭도 계속되었거든. 조선소 전기공에서 대통령이 된 폴란드의 바웬사는 1980년 정부와 공산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연대’라는 노동조합을 만들었어. 동유럽 중 공업화가 가장 잘 진행된 체코슬로바키아는 자본주의국가의 기술을 도입하기로 했고, 헝가리는 기업의 자유를 강화했어.
경제 개혁을 시작으로 정치에도 자유화 바람이 불었어.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어. 루마니아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이를 탄압하려는 공산당 정부가 대립하면서 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결국 독재자였던 차우셰스크를 몰아냈어. 한번 일어난 자유화 움직임은 결코 꺾이지 않았지.
드디어 1989년 폴란드에서는 동유럽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바웬사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같은 해 헝가리에서도 자유 선거를 했지. 결국 동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당 일당 독재가 폐지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한 거야. 새롭게 정권을 잡은 것은 대부분 공산당이 아니었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약속했어.
더 알아보기 프라하의 봄이 뭐예요?
196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면서 이것이 정치의 민주화 요구로 발전하면서 공산당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개혁이 추진되었어. 결국 1969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서기장이 된 두브체크는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사람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추진할 것을 약속했어. 드디어 그동안 공산화로 인해 얼어붙었던 나라에 봄이 온 거야. 그러나 소련은 이런 개혁을 소련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진압했어.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지. 이 민주화 운동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해.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연방 분리에 합의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어.
베를린 장벽 붕괴 - 무너지는 장벽, 하나의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의 통일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지면서 동독 주민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장벽을 뛰어넘었어.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경비병에게 발각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어.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던 서독과 동독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국제 연합에도 가입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는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했어. 마침 1980년대 동유럽에서 불어 온 개혁과 자유화 바람이 독일의 통일에 힘을 실어 주었어.
그러나 동독 정부는 그 변화를 모른 척했고, 여기에 실망한 동독 사람은 200만 명이나 서독으로 탈출했고, 9월에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지. 결국 독재 정권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동독 정부는 자유 총선거를 통해 서독과 통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어.
마침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문이 활짝 열렸어. 문을 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저마다 망치와 삽을 들고 나와 장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어. 벽이 무너지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고 웃으며 기쁨을 나누었어. 다음해 1990년,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마침내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되었지. 나뉘어진 지 41년 만이야.
동독 사람 토르스텐 뢰셔의 통일 적응기
“저는 원래 바이올린 만드는 기술자인데, 동독에서는 볼 수 없는 이름난 바이올린을 만져보고 싶어서 서독으로 왔어요. 제가 동독에서 일했던 ‘무지마’라는 곳은 2,000여 명의 종업원을 둔 국영6) 대기업이었는데, 통일 후 민영화가 되면서 종업원이 150명으로 줄어들었어요. 공장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모두 서독 출신이었어요. ‘기업의 구조 조정7)은 돈에 눈이 먼 서독 사람들의 떼돈 벌기 수작’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어요.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고향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길몽이 실업자라는 악몽으로 둔갑했다고 한탄했어요. 우체국 직원이셨던 저희 부모님 역시 일찍 퇴직하도록 강요받다시피 했고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라는 아버지가 하나에서 열까지 다 챙겨줬어요. 노동은 신성한 의무였으니 실업은 아예 존재할 수 없지요. 물론 최저 생계를 보장하는 대신 끊임없는 통제와 감시가 따랐지요. 그런데 이곳에 오니 바이올린을 만드는 것 이외에 경쟁이라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파는 것도 신경 써야 해서 힘들어요. 예전의 동독에서는 만들어서 품질 검사에 합격만 하면 됐거든요.
통일이 되어 오시8)(동독인)로 베시9)(서독인) 세상에서 살면서, 삶을 꾸리고 책임지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지금 제가 사는 비스바덴에서는 동독인이라고 업신여김을 받진 않지만, 왠지 정이 좀 없는 것 같아요. 동독 사람들은 인정과 여유가 넘치거든요. 그러나 이건 동독인과 서독인 간의 이해 부족이라기보다는 지방마다 나타나는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통일 이후 동독은 서독 사람들이 들어와 싼 값에 공장을 사고는 많은 사람을 해고해서 실업자들은 점점 늘어만 갔어.
서독은 동독을 자신들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부었지만, 동독은 늘어가는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지역이 되었어.
더 알아보기 독일 통일에서 배우는 교훈은?
독일 통일은 너무 짧은 시일 안에 이뤄지면서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어. 화폐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망하는 동독 회사가 아주 많았고, 이에 따른 실업 문제는 가장 큰 문제였지. 두 지역의 물가, 화폐, 체제 때문에 준비 과정이 꽤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거든. 통일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믿은 거야. 이를 통해 진정한 통일을 이루려면 체계적인 준비가 필수라는 걸 알 수 있어.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마음의 장벽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거야. 서로를 인정하기 쉽지 않았거든.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단 걸 알 수 있지.
개혁 개방 정책 - 고르바초프가 몰고 온 개혁
1986년 소련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어.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터키와 이탈리아, 독일까지 방사능10)에 오염되는 엄청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대피하라는 명령이 늦게 내려져 많은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았어.
바로 한 해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개혁을 결심했어. 첫 결실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었어. 그동안 모든 권력이 일부 공산당에게 집중되고, 국민들에게는 자유가 없었거든. 그런데 개방 정책으로 국민들이 자기 의견이나 생각을 말이나 글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부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어. 당시 소련은 미국과의 지나친 군비 경쟁으로 하루가 다르게 경제가 나빠지고 있었어.
고르바초프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일부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이상 소련은 살아남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실시했어. 그동안 정부가 은행과 회사, 공장 등을 소유하고 통제했는데, 개혁 정책 실시로 보통 사람들도 기업이나 은행을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어. 또한 그동안 서로 앙숙처럼 지내던 미국과 핵무기를 줄이는 조약을 맺고, 자본주의 국가들과도 서로 친한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어.
1990년 대통령제 도입 후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혁 개방 정책을 폈어.
독립 국가 연합의 탄생 -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되어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몰타 섬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냉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어. 또한 1991년에는 무기를 서로 줄이기로 결정했어. 그런데 그즈음 미처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어.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킨 거야. 그때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개혁 세력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쿠데타 세력에 맞서 싸우면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어.
이 사건으로 공산당 세력은 완전히 약해지고 옐친이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어. 옐친은 고르바초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개혁을 원했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소련을 만들고 싶어 했어. 결국 1991년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11개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하고 따로 ‘독립 국가 연합(CIS)’을 결성하면서 마침내 소련은 해체되었어. 1922년 탄생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거야.
읽을 거리 러시아에만 있다. 레닌-코카콜라, 맥-레닌?
코카콜라와 햄버거는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동시에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다시피한 음식이지.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면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 곳곳에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음식들이 자리잡았고, 이 과정에서 공산권 문화의 상징인 레닌을 이용한 광고가 많이 등장하고 있어. 자본주의를 뒤엎으려고 했던 레닌이 자본주의의 상징에 쓰이는 것을 알면 레닌의 기분이 어떨까?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 장벽 붕괴 - 하나 되는 독일, 해체되는 소련 (세계사 개념사전)
독일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냉전의 상징이었던-의 양쪽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벽을 무너뜨렸다. 28년 전, 이 벽을 건설한 동독 공산정권은 베를린 장벽이 동독 국민들을 보호하는 "반파시스트 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에 속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동독 국민들이 대규모로 보다 풍요로운 서독으로 이주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서독은 동독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지난 세월 동안 몰래 벽을 넘어 탈출한 사람들도 있고, 벽을 넘으려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있지만, 베를린 장벽은 굳건하게 동독 체제를 지켜주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이러한 안정도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변화를 간절하게 갈망하던 동독 시민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개혁이 결국 공산정권의 붕괴로 귀착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공산당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의 뒤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시민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고, 이는 결국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헝가리를 통한 탈출이 쇄도하였다. 당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천 명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향했다. 1989년 10월, 동독을 살리려는 절박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서 에곤 크렌츠로 교체되었다.
크렌츠 정권은 점점 악화되는 위기 상황을 놀랄만큼 무능력하게 대처했다. 서방으로의 여행 규제를 완화할 것이라고 공표했으나, 세부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공개되지 않았다. 장벽이 개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수천 명이 검문소로 몰려들었다. 질서가 무너진 군인들은 군중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동독 정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1990년 10월, 동독이라는 국가 자체도 명운을 다했다.
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독일 ‘베를린 장벽’ 조각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린 예술가에게 1500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9단독 조정현 부장판사는 서울시가 그라피티(Graffiti⋅낙서처럼 그리는 거리예술) 화가 정태용(29)씨를 상대로 배상금 3000만원을 요구한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정씨는 서울시에 배상금 15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
정씨는 지난해 6월 6일 오후 11시 30분쯤 서울시 중구 청계2가 베를린광장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조각 양면에 스프레이로 그라피티와 자신의 브랜드 이름을 그려 넣었다. 이 사건은 정씨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서 알려졌다.
해당 베를린 장벽 조각은 한국의 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에서 독일 베를린시가 실제 장벽의 일부를 2005년 서울시에 기증한 것이다.
분단된 독일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의 양면은 대조적이다. 공산진영인 동독 쪽 벽은 깨끗한 반면, 자유진영인 서베를린 쪽 벽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독일인들의 그림과 낙서가 가득하다.
서울시는 예산을 투입해 훼손된 베를린 장벽을 복원하고, 정씨에게 복구비용과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지난 2월 정씨에게 배상금을 2000만원 지급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지만, 서울시와 정씨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지난 4월 수원지법 형사12부도 공용물건을 손상한 혐의로 기소된 정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모든 그라피티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 도의감에 반하는 행위로 위법성이 인정된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항소심 재판부도 원심을 유지했다.
청계천 '베를린 장벽'에 그림 그린 예술가, '1천 500만 원' 배상 판결
/이소현 /2019.09.19
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독일 베를린 장벽 조각 위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린 예술가가 서울시에 1천 5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9단독은 서울시가 그라피티(Graffiti⋅낙서처럼 그리는 거리예술) 작가 정태용 씨를 상대로 제기한 배상금 3천여만 원 규모의 소송에서 "정 씨는 서울시에 배상금 1천 50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정 씨는 지난해 6월 6일 서울시 중구 청계2가 베를린 광장에 전시된 베를린 조각 양면에 스프레이로 그림과 글씨를 그려 훼손했습니다. 이 베를린 장벽 조각은 지난 2005년 독일 베를린시가 한국의 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로 서울시에 실제 장벽의 일부를 기증한 것입니다. 서울시는 사건 발생 후 900여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장벽을 복원하고 정 씨에게 관련 비용과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지난 2월 법원은 정 씨에게 배상금을 2천만 원 지급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지만, 서울시와 정 씨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조정이 불발됐습니다. 정 씨는 공용물건 손상 혐의로 형사재판에도 넘겨져 지난 4월 1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정 씨는 불복해 항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뉴스 픽' 입니다. (사진=연합뉴스)
출처 :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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