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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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외 1 수)
2015년 05월 03일 17시 37분  조회:2539  추천:5  작성자: 허창렬

 
(외 1 )


풀ㅡ
풀이 선다
알몸으로 꿋꿋이
하늘아래 우뚝 선다
시퍼렇게 창을 갈아 들고
옷깃을 스치는 바람의 여린 살갗
쓰억쓰억 베여가며
풀이 스스로 일어 서려고
날마다 몸부림친다
쓰러질듯이 아파오는 두 무릎
꼬옥 감싸 안고
풀이 냇가나 물가에 이르러서는
돌담아래나 바위쪽으로
슬며시 돌아 앉는다
 
눈섭마저 파아란
새싹이 되여서부터
얼키고 설킨 땅속을 들여다 보며
풀은 일년 사시장철
울고싶지 않은 날이 어데
또 있으랴?
풀은 할머니의 흘러간 옛말에도
파르르 파르르
어깨 털며 서럽게 운다
 
잔뜩 흐리고 비바람 세찬 날일수록
밤 뻐꾸기 울음소리
줄기차게 따라 울다가도
바람이 잠잠하고 어이없이 고독한 날이 되면
맨발 맨손으로 일어 서려고
모지름을 쓴다
풀이 나를 닮은걸가?
내가 스스로 저 풀을 닮아가는걸가?
풀은 봄우뢰소리보다
방앗간 지난 참새들의 고함소리에
더욱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쓰러질듯이ㅡ 넘어질듯이ㅡ
벌판에서나 강변에서나
벌떡벌떡 자리를 차고 힘 있게 일어선다
 
냇가에 다달으면
하얀 발목, 하얀 종아리 서슴없이 걷어 올린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헤프고 싱거운 우리들의 눈물만큼이나
투명한 밤이슬속에서는
수많은 벌레들의 울음소리 찌르륵 찌르륵 따라 울다가도
유행가 노랫말처럼 따스한
해볕아래에 서면 사람들처럼 깔깔깔
웃으며 손벽을 쳐댄다
풀은 오늘도 위태위태하게 넘어졌다가도
바람이 어깨 흔들면 수줍은듯이

우쭐우쭐 일어 선다

 
별이 없는
 
별 없는 밤이면
서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 한뭉테기
탁상우에 꺼내놓고
차례대로
순서대로
그 이름 목이 메여
다시 불러봅니다
 
랭보며
말라르메며
발레리며 괴테며
쉐익스피어며
단테, 그리고 김소월
불우한 저항시인
윤동주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골고루
죄다 불러봅니다
 
조금 더
많은 성좌와
그 유별난 별 자리들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노라면
죽었어도 아직 살아 있는
그들의 이름들이
얼음우에 박 밀듯이
좌르륵 좌르륵
세상에 쏟아져 나옵니다
 
내가 부르기전에
그들은 언제나
관속에 조용히
누워 있다가도
내가 부르면 그들은 어느새
시집 한권씩 나눠들고
잠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 섭니다
 
그러고는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들을 하지요
<<시인이 가난하다고
나라마저
사랑하지 말라는 법이
어데 있나?
가난하였기에
나라도 가정도 목숨보다
더욱 시를
사랑하였노라>>고ㅡ
 
그들이 우는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별 없는 밤이면
그들은 이제 나의
별이 되려 합니다
구름과 안개 말끔히 치워놓고
나는 그들이 앉을 자리에
방석을 차례대로
하나 둘씩 더 깔아 드립니다
 
<<죽으러 왔기에 나는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한다!
ㅡ산다는건 얼마나 아름다운 고독인가?ㅡ>>
그들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의 좌우명을 읽어봅니다
별 없는 밤이면
나는 아예 나를 까맣게 잊고
그들은 먹물을 풀놓은듯한
나의 캄캄한 앞길에
말랑말랑한 등불을
하나 둘씩 조심스레
다시 밝혀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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