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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레우물
김 혁
△ 우물은 끊임없는 자연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우물의 위치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물맛이 좋아야 복덕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물을 파거나 칠 때에도 반드시 길일을 택했다.
용두레우물은 두레박이 달린 두렛대가 설치된 우물로 이는 기중기와 같은 지레대의 원리를 리용한 것으로서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날 정도로 유래가 깊다.
함경북도나 평안북도와 같은 지방은 날씨가 추워 겨울에도 얼지 않은 물을 구하려면 깊은 지하수를 찾아야 했는데 긴 줄을 다루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용두레를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 룡정은 조선족들이 이주해온 력사가 아주 긴 고장이다. 19세기 7, 80년대에 조선사람들이 이주해와 살면서 이곳을 용드레촌이라 불렀다.
룡정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우물에서 룡이 날아 올라갔다고 하여 룡정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로고를 바친 곳의 길상을 기망(祈望)하는 개척민들의 흥감스러운 전설일테지만 여하튼 이 우물로 말미암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였다.
고증에 의하면 용두레우물은 1839년부터 1880년사이에 조선이민인 장인석과 박인덕에 의해 발견 되었다 한다. 이 우물은 일찍이 녀진족이 쓰던 우물이였다.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지자 두레박 즉 용두레를 해놓아 그때부터 용두레우물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 이름도 용두레촌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1934년 11월에 용두레촌의 리기성의 발의로 우물을 수선하고 약 2메터 높이의 비석을 세우고 비문에 <<룡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 새겼던 것이다.
광란의 문화혁명시기, 비석은 <<낡은 것을 타파한다>>는 사조에 의해 홍위병들의 손에 산신이 부서져 자취를 감추었고 우물도 메워져 버렸다. 그러다 1986년 룡정인민정부에서 애국주의 교육과 향토애교육의 차원에서 력사문물인 용두레우물을 수건하고 비석을 복원했다.
지금 룡정지명지우물터는 시민들의 휴식과 국외관광객들이 다투어 찾는 유람명소로 부상되였다.
▲ 용두레우물은 룡정의 상징, 이주민들의 애환의 상징물로 고착되였지만 이 유명 우물에 대한 관리는 미비한 점들을 보이고 있다.
우선 <<페부를 찌르는 시원한 천수(天水)>>같다던 그 소문난 우물의 물을 마실수 없다. 우물 아구리에 철판을 대고 자물쇠를 잠근 데서 사시장철 쌉스름한 물이 자작하게 괴여 있었다는 우물물을 볼수 없다. 그러니 진짜 우물보다는 그 무슨 무대세트를 방불케 한다. 관리자에 따르면 우물에 가로 막힌 돌 때문에 우물 밑에까지는 물이 직접 들어오지 못하고 거기에 가설한 지하 20메터 도관을 통해 스위치를 눌러야 우물에 물이 차게 된다고 한다. 그 절차가 번거로워 현재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시정건설은 해마다 진행되고있지만 룡정지명지 우물에 대한 관리와 개선작업은 확연히 뒤떨어진 상황이다. 따라서 우물주위가 트럼프나 화투를 치는 유한자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전락되여 살풍경이다.
<<민족의 력사에 대한 상식과 민속에 대한 리해가 결여하기때문>>이라고 룡정의 각계인사들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민족 문화의 발상지이고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책원지인 고도(古都) 룡정에서 룡정지명지우물이 가지는 의미는 한낱 갈증을 해소해주는 도구의 의미를 넘어 깊고 크다. 과학적인 규획, 원상태 복구와 보존의 원칙하에 보호와 중시 그 대책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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