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비소리(외 9수)
▣ 시 / 최화길
아버지(외 9수)
칭송에는 쪽걸상 신세지만
자식 사랑엔 암장입니다
매끄러운 성격이 아니여서
호랑이라 불리우신 우리 아버지
평생 그 독한 배갈 맛을 즐기며
줄담배로 근심은 혼자 태웠습니다
머리 한번 살갑게 쓸어주지 않았어도
깊은 속으로 우려주신 진한 차향기
내 머리 희기 전까지 까맣게 몰랐던
입이 비뚤어지게 쓴 맛이 다가섭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름 활 터시고 가셨지만
당신이 오르셨던 산마루엔 노을이 곱게 비꼈습니다
어머니
내가 울면 어머니는 아프셨습니다
내가 아프면 어머니는 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품을 나에게 다 내주셨습니다
내가 그 품을 떠나면서 비여버린 항아리
나의 체온 고이 간직한 그 품에서
된장은 숙성하고 김치는 익고…
머나먼 타향으로 엄마 체온은
한치의 차이 없이 송달되였습니다
아직도 철부지여서 무릎을 내주시는
자장가의 멜로디에 파도가 일렁입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하얀 메아리지만
내 가슴의 온돌은 아직도 따뜻합니다
아, 아 당신에게서 하늘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원천, 땅도 알았습니다
안해
나의 선택 존중하고 아껴준 사람
살다보면 험한 꼴도 보여주었건만
약점까지 껴안은 무던한 사람
꽃 한송이 안겨주는 랑만조차 모르는
무뚝뚝한 어둠에도 밝게 웃을 줄 아는
세상에 이런 녀자 또 있을지 의심 드는 사람
‘큰 애기’라 이르는 소박한 롱담에는
생명을 잉태하는 무궁한 크기 만큼
세상 끝까지 가도 다는 알 수 없는 사람
빛은 올올이 볼 수 없어도 밝고
공기는 만질 수 없어도 떠나서는 못사는
없는 듯 숨쉬는 생명의 기원이라 이르옵니다
남편
어느 한 위대한 녀성이 점지하여 얻은
평생 싫지 않은 자랑스러운 칭호
땡볕이 지지면 양산이 되고
폭우가 찌르면 우산이 되는 일
아홉을 주고도 주지 못한 하나로
평생 가슴 앓아야 하는 숙명
스스로 원하기에 원했기에
몸과 마음 다 태우는 피빛 노을이다
아들
사람들은 나와 판박이라 말하는데
성질머리 하난 나의 적수인 듯하다
사춘기 때는 내가 동을 가르키면
기어이 서쪽으로 빠지곤 했다
내가 자랄 때도 아버지와 저렇게 맞섰는지?
자신을 검토해도 답안이 없던 허허벌판
장가 가서 자식 하나 생기더니
어딘가 내 눈치 얼마간 아는 듯하다
아버지대 아버지라야 공언이 있는 건지?
아들이 알아줄가 하니 나는 할아버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들 키울 때보다
손주놈 키우는 재미 더 쏠쏠한 건…
이왕지사 어찌 됐든
래일의 배심 하나 두둑하다
며느리
나하고는 말도 잘 안 섞는
뚝뚝한 아들놈의 최고 선물
어쩜 아들놈이 타고 난 결함
미봉하려 우리 집에 온 천사
묘하게도 아들한테서 받은 서운함
비자루 챙겨들고 깨끗하게 청소한다
딱히 고운 데 없이 곱기만 하고
별로 신경 안 쓰는데 주고만 싶다
너로 하여 아들은 더는 무릎 아래 아니지만
너로 하여 아들을 빼앗긴 듯하기도 한데
그래도 그냥 벙글써 좋게만 생각되는 나
며느리 앞에서는 항상 바보상이 아닌지?
그럼에도 시름이 다 가셔진 듯
구름 한점 없는 하늘처럼 청정하다
딸
엄마 곱니? 아빠 곱니?
하는 동네분들 물음에
똑 부러지게
“아빠 더 곱다”고 대답한 딸이다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나는 아들의 눈에 난 딸바보
시집가던 날 끝내 참지 못하고
어느 모퉁이서 엉엉 방성한 딸바보
사위를 질투할 만큼 어리석은 딸바보
사위를 하늘 높이 받쳐올린다
내가 고와하는 절반이라도
우리 딸 고와해라고 공연히 설친다
평생 퇴직 없는 행복한 직업
살뜰한 딸 가진 아버지!
사위
오직 존중할 수밖에 없는
우리 딸의 자아 선택
기대 이상으로 나보다 더
살가운 놈 낚아올렸어요
밉다고 보자 해도 미워지지 않는
피 한방울 섞지 않은 자식
하기에 내 앞에서 남편 질책할 때면
은근히 사위편이 되는 못난 장인
속심이야 콩밭에 두고 있지만
남자의 자존은 구길 수 없는 일
남자 대 남자로 짝꿍이 되여
술 한잔 나누어도 편해서 좋다
손군
내 성씨 타고 난 손군은
밉게 놀아도 고운데
사위 성씨 타고 난 손군은
곱게 놀아야 곱다
물론 겉으로 보건대는
차이가 별로 나지 않지만
두 손군 데리고 밖에 나가면
오른쪽에 친손군 왼쪽에 외손군
애들에겐 꼭 같은 할아버진데
어쩜 그렇게 유치할 수 있냐구요
가볍게 웃을 일이 아니옵니다
내 마음이 깜쪽같이 나를 속여요
그렇다고 딸도 서운할 일은 아닌 것 같아
딸 시집 보내고 아들 장가 들어
할머니로 되는 그 날이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을 거니깐!
선생님
엄마의 회초리 이어받으신
피를 섞지 않은 ‘엄마’
사랑 깊이 감추는 지혜로
비뚤게 쓴 글씨 바로 잡아주시고
넘어진 연유 차근차근 풀어주시며
심지에 불을 달아 어둠을 밝혔습니다
래일을 살자면 날개가 필요하다며
자신이 아끼던 깃털마저 내게 주시고
내 몸에서 돋는 날개에 꽃을 피웠습니다
내 생애에 숨어 사는 꺼지지 않는 등불
파도에 기우뚱거릴 때마다 손잡으시는
당신은 나의 인생과 함께 약동하고 있습니다
《도라지》2021년 2기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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