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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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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애송시 2
2015년 06월 16일 21시 36분  조회:5861  추천:0  작성자: 죽림
서정주.1915년 전북 고창 출생. 호는 미당. "시건설"에 (자화상)을
발표하여 시작 활동을 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시인부락' 동인으로 이른바 대담한 육욕과 천민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시의 한 봉우리를 이룬 그는 생명파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화사집" "뀌촉도"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등이 있으며, 그밖에 많은 저서가 있다.

     동천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화사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무등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문둥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꽃밭의 독백

     --사소단장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 오고,
  네발굽을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치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귀촉도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 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 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머리털 엮어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봄

  복사꽃 피고, 뱀이 눈 뜨고, 초록 제비 묻혀오는 하늬 바람
  위에 혼령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
  면서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대낮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아편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임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부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닳아...

 

  석용원.1931년 경북 영주 출생. 한국문협이사. 한국 크리스챤문협회장이며
숭의여전에 출강하고 있는 그는 기독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풍자, 비판하는 한편, 인깐화에의 염원이 강력히 풍기는 작품을 쓰고 있다.
시집으로 "잔" "밤이 주는 가슴" "야간 열차" 등이 있다.

     겨울 명동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은 그대로 하늘에 계십시오.
  우리는 이대로 땅에 두십시오.
  땅 위는 때로 아름답지요.
  날이 날마다 좁아져 가는 한국의 서울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은 남산탑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는 없어도
  우리 명동은 은하를 이루고
  그 사이를 낮과 밤이 미끄러집니다.
  태양은 볼 수 없지만
  아직은 하늘 조각이 펄럭입니다.
  성당도 예스럽게 잘 있읍니다.
  밤이면 진짜 사람의 아들딸들이
  서로 비비고 부딪고 따뜻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청년이
  머리 길고 수염 긴 제자들을 거느리고
  밤이 밤마다 최후의 만찬을 베풀다가
  심각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예언하는
  참 좋고 참 행복한 사람들
  모두가 이 땅 위에 있읍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목마를 타고
  멋장이 시인 박 인환과 더불어
  한 잔의 술을 기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멋있읍니까.
  우리는 이대로 땅에 두십시오
  당신은 그대로 하늘에 계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설의웅.함남 이원 출생. 성균관 대학교 국문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현대시학"을 통해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소나기" "그대 떠난 자리"
"설의웅 시집"이 있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한국의 민속문화에 뿌리를 둔
토속적인 시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외갓집 있는 마을의 풍경

  개암도 까며 산에서 외갓집 마을을 굽어보면 초가집 몇 채 숲과 어우르고
있었다.

  바랑 멘 중이 오르내리는 외딴 산길 큰절 마을 뒤에 있고 오일장 서는
읍이 앞에 있다.

  숲머리 돌아나가는 강물에 노을 조각 저녁 가을걷이 끝낸 외삼촌이
흥얼흥얼 장에서 돌아오고 큰절 재 올리는 종소리 마른 풀 향기에 실려오는

  개암도 까며 산에서 외갓집 마을을 굽어보면 발 밑 땔나무 가지에 앉은
고추잠자리 야윈 가을 볕 꼬리를 서운히 물고 있었다.

 

  설창수.1926년 경남 창원 출생. 호는 파성.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2년
수료. 동인지 "등뿔"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탈 주지적
정신주의를 추구하여 작품활동을 해왔다. 시집으로 "개폐교" 외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현재 한국문학협회 이사장으로 있다.

     동백칠칠조

  차마 이대로서야 피도 지도 못하는
  몸짓들 가쁜 정을 가눌 수가 없구나

  기름 똑똑 진 갈매 눈보라도 이겨서
  꼭꼭 야문 봉지가 홍갑사 나부 댕기.

  차마 이대로서야 풀도 맺도 못하는
  열두발 삼단 머리 깎고 중이 될까나.

  아낙네 품은 원한 오월에도 서리온다.
  깊은 밤 잠꼬대로 불러주랴 내 이름.

  속 태워 고인 기름 알알히 맺혔다가
  옥비녀 화촉동방 새낭자에 풍기자.

 

  성찬경.1930년 충남 에산 출생. "문학예술"을 통해 문단에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이며 시집으로 "화형둔주곡" "벌레소리송" 등이 있다. '제1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 고유의 서정적 비유에 대한 그 표현과
시조적 변형태로서 시종일관하여 동서를 결합하는 시경향을 갖고 있다.

     나사.1

  길에서 나사를 줍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암나사와 숫나사를 줍는 버릇이 있다.
  예쁜 암나사와 예쁜 숫나사를 주으면 기분 좋고
  재수도 좋다고 느껴지는 버릇이 있다.
  쭈그러진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투박한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큼직한 숫나사도 쓸 만한 건 물론이다.
  나사에 글자나 숫자나 무늬가
  음각이나 양각이 돼 있으면 더욱 반갑다.
  호주머니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하고
  슬슬 돌려서 나사를 나사에 박는다.
  그런 쌍이 이젠 한 열 쌍은 된다.
  잘난 쌍 못난 쌍이
  내게는 다 정든 오브제들이다.
  미술품이다.
  아니, 차라리 식구 같기도 하다.

 

  성춘복.1936년 경북 상주 출생. 성균관 대학교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1958)한 그는 '제1회 월탄문학상' 및 '동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성균관 대학 강사로 재직 중이다. 예술원 전문위원, 한국 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이며 세계 시인회의 한국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있다.
시집으로는 "오지행"(1965), "산조"(1970), 장시집 "공원 파고다"가 있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지적 서정성을 노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흐트러진 강줄기를 따라 하늘이 지쳐 간다.

  어둠에 밀렸던 가슴
  바람에 휘몰리면
  강을 따라 하늘도 잇대어
  펄럭일 듯한 나래 같다지만

  나를 떠나보내는 언덕엔
  하늘과 강 사이를 거슬러
  허우적이며 가슴을 딛고 일어서는
  내개만 들리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밤마다 찢겼던 고뇌의 옷깃들이
  이제는 더 알 것도 없는 아늑한 기슭의
  검소한 차림에 쏠리워
  들뜸도 없는 걸음걸이로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면,

  강물에 흘렸던 마음이
  모든 것을 침묵케 하는 다른 마음의 상여로
  입김 가신 찬 스스로의 동혈을 지향하고
  아픔을 참고 피를 쏟으며
  나를 떠나보내는 강으로 이끌리워
  되살아 오르는 게 아닌가.

  강 너머엔
  강과 하늘로 어울린
  또 하나의 내가 소리치며
  짙은 어둠의 그림자로 비쳐간다.


     굳은 손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리워하다가
  드디어 서러운 자만이 갖는
  그런 손으로 헤매어다니다가

  미진 돌개바람마저 발을 묶는
  그리 멀지 않은 곳,
  무릎 일으킬 힘도 없는 너겁으로
  나를 세우게 된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빈 손이고
  길은 먼 데 있어
  네가 내 곁이 아님을
  내가 아무 의미 아님을
  깨우치게 되어도

  꼭 닫아 건 창 밖으로
  마구 팔매질 해대는 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근심만 쫓던 너의 열어젖힘 앞
  난 또 신명을 다할 수 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명으로 그리워 하다가
  이내 사그라질 검정의
  굳은 손으로나마
  너를 빌고 있으마

 

  송선영.1936년 전남 광주 출생. 본명은 태홍. 광주 사범 졸업.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출신으로 '전남도 문화상'을 수상(1974)
했다. 시집에는 "겨울 비망록"이 있다. 현재 국민학교 교사.

     강강수월래

  어쩔거나 만월일레 부푸는 앙가슴을
  어여삐 달맞이꽃 아니면 소소리래도...
  목뽑아 강강수월래 청자허리 이슬어져

  얼마나 오랜 날을 묵정밭에 묻혔던고.
  화창한 꽃밭이건 호젖한 구렁이건
  물오른 속엣말이야 다름없는 석류 알.

  솔밭엔 솔바람 소리 하늘이사 별이 총총
  큰 기침도 없으렷다 목이 붉은 선소리여.
  남도의 큰 아이들이 속엣말 푸는 잔치로고.

  돌아라 휘돌아라 메아리도 흥청댄다.
  옷고름 치맛자락 갑사 댕기 흩날려라.
  한가위 강강수월래 서산 마루 달이 기우네.

 

  송수권.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1975)했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이 있는 그의 시
특징은 특이한 시적 구조로서 토착 정서를 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장시 "동학란"을 "금호문화"에 연재중.

     산문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매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즘믐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 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뭇돌 속에 비쳐옴을


     지리산 뻐꾹새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몸을 더 넘겨서야
4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중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름 끝에
  비로서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소리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송영택.1933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현대문학"에
(소녀상)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서정을 바탕으로 하는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독문학 번역에도 힘쓰고 있다. 시집으로 "가난한 산책"이
있으며 현재 서울대 문리대 강사로 있다.

     소녀상

  이 밤은
  나무잎이 지는 밤이다.

  생각할수록 다가오는 소리는
  네가 오는 소리다.
  언덕길을 내려 오는 소리다.

  지금은
  울어서는 안된다.
  다시 가만히 어머님을 생각할 때다.

  별이 나를 내려다 보듯
  내가 별을 마주 서면
  잎이 진다. 나무잎이 진다.

  멀리서
  또 가까이에서...

 

  신경림.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문학예술"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농촌의 현실을 통한 인간의 정서를 노래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인
중의 한 사람. '제1회 만해문학상'과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고,
수상시집으로 "농무"와 "새재"가 있다.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건 우리뿐.
  올해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기선. 1932년 함북 청진 출생. 호는 범석.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문학예술"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초기에는 관념의 세계를 노래하다가 이를 현실 인식의 방향으로 전환하여
시를 쓰고 있다. 시집으로 "맥박" 외에도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역설의 꽃

  낙엽은 그냥이 아니다.
  또 그냥 웃고
  보는 것이 아니다.
  가을에 찾아오는
  영원한 꽃이다.
  역설의 꽃이다.
  공간을 은밀한 울음으로 뛰어다니는
  움직이는 꽃이다.

  우리들의 죽음도
  그냥이 아니다.
  인간의 뒤안에 남기는
  현재는 찾아오는 꽃이다.
  잔인한 역설의
  꽃이다.

  우수의 다레기에
  독하고 아프게 피고 있는
  고통의 알깐 꽃이다.
  시간을 바람에 끓이는 
  새로운 고전의 꽃들이다.

 

  신달자.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70년 (빨래)
(발) (에렙베타)로 문단에 나왔다. 주요작품으로는 (일기) (미로) (미인계)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을 통해 조화할 수 없는 인간의 외로움과 숙명적인 
상실을 노래한 여류시인이다.

     뒷산

  외로울 적에
  마음 딥답할 적에
  뒷산에 올라가 마음을 벗는다.
  나무마다 하나씩 마음을 걸어두고
  노을을 받으며 드러눕는 그림자
  돌아갈 것이 없는 빈 몸이다.
  무겁게 끌어 온 신발의 진흙덩이
  서리 감겨 살을 에는 하루의 바람
  모두 모두 부려놓는
  울먹이는 내몸이다.

 

  신대철.1945년 충남 홍성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하면서 왕성한 시작활동을 한 그는
현대인의 내면정황을 포착하는 유니크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무인도를 위하여"가 있고 현재 국민대에 출강하고 있다.

     눈

  자운영꽃이 꼭꼭 숨어 핀 풀숲을 헤맸어. 자운영꽃 같았어. 풀뱀이었어.
풋고추 같았어. 고추밭이었어. 빨간 고추만 골라 땄어. 고추를 씹다 보니
뱀이었어. 혹시 불꿈은 꾸지 않았어? 불을 움켜쥔 채 사람들이 쫓기지
않았어? 불만 버리라고 그러지 않았어? 불만 버리면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
불만 버릴 순 없다고 그랬지. 손가락이 타 뜰어가도 불을 놓지 않았어.
온몸에 불이 붙었어. 지글지글거리는 불덩어리였어. 불을 보고 싶어. 불을
키우는 아이를.


     사람이 그리운 날.3

  눈 쌓이지 않는 산모퉁일 몇 개 돌아 들면 이름 안 붙여진 계곡에 이름
안 붙여진 산 속이 있고 지리 모르는 길가엔 스스로 묻히려고 산 속에 드는
풀꽃들,파헤쳐진 애장 몇, 산 속엔 가을에도 인간은 살지 않았구나.

  산이 키운 한 인간을 버리고
  인간이 키운 한 인간을 버리고
  한 인간을 찾아

  떠도는 눈, 눈발.

 

  신동문.1928년 충북 청주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초기에는 전쟁의 파괴적인 요소를 노래하는 앙가지망의 시를
발표. 그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제1회 충북뭉화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풍선과 제3포복"이 있으며, 현재 지방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틈틈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내 노동으로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 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까.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쓿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떤 것이 언제인데.

 

  신동집.1924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시집"대낮"을
출간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존재와
내면의식의 추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아세아 자유문학상' '한국 현대
시인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서정의 유형"
"제2의 서정" "모순의 물" "들끓는 모음" "빈 콜라병" "새벽녘의 사람"
"귀환" "송신" "세 사람의 바다" 등이 있다.

     목숨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어라.
  너랑 살아 보고 싶어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어라.

  억만 광년의 현암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한많은 시공이 지나
  모양할 수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는 살아서 돌아서라.


     눈

  아주 너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마다 내 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는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 대신 내가
떠나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
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신동춘.1931년 평북 정주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 데뷔. '제6회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어느날"
"집념아후" "거리에서 가설까지"와 수필집 "내 마음 열으시옵고" 등이
있다.

     꽃은 제 내음에

  꽃은 제 내음에
  밤내 잠 못 이루고

  나무는 해 저무도록
  제 그늘을 떠나지 않네.

  사랑이사 아쉬움일레
  오래 곁하여

  여운은 여울지어
  메아리로 흘러라.

 

  신세훈.1941년 경북 의성 출생. 중앙대 연극 영화과 및 동국대 대학원
수료. '조선일보' 신춘문예(1962) 출신이고 현재 '시인 회의' 동인이며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다. 시집 "베트남 엽서" "강과 바람과 산"이 있고
'제3회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잠실 밤개구리

     --잠실 연작시

  잠실 밤개구리가 운다.
  밤새도록 밤새도록 운다.
  울음숲을 이루며 잠실잠실
  실실실 잠실...
  아파트가 더 들어서면
  고향을 잃어버린다고 운다.
  비 맞은 인디언 물귀신처럼 운다.
  아스팔트가 덮히면
  변두리 산으로 쫓겨나
  숨 다할 거라고 무한정 밤을 운다.

  잠실 밤하늘을 원망이라도 하듯
  순하디순한 흙값이 금값임을
  허공천에 대고 원망이라도 하듯
  잠실 개구리가 새워새워 운다.
  금구렁이들이 자꾸자꾸 몰려들면
  이제 울 수도 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울음시위와 울음화살로는
  마른 번갯불로 빛나는 그림자 앞에서는
  울어봐도 다 소용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여름밤 인디언 물귀신처럼 그리 슬피 운다.

 

  신중신.1941년 경남 거창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 "고전과 생모래의 고뇌" "투창"과 수필집
"가난한 영혼을 위하여"가 있다. 그는 주변의 아픔과 고뇌에 대한 정감을
갖고 이를 표출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회색 그림자

  깊은 밤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
  땅 속으로 잦아들 듯 사라져 가는 회색의 그림자
  지난 일에 대해서 입 다물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렇게 해야했을 것을 늘 그만큼의
  미진을 깨우쳐
  혼자 밤을 향해 가는 사내.
  손에 든 아무것도 없어
  짐스럴 것 없는 허탈이 달무리로 걸리고
  언젠가 어린 것에게 사다 준
  완구쯤은 기억해 내기도 하며
  여윈 목덜미 어둠으로 묻혀 간다.

 

  안장현.1928년 경남 김해 출생.동아대학교 국문과 졸업. 시집으로 "내
가슴에 흐르는 샘"과 수필집으로 "사랑은 파도를 넘어" "달에게 묻는다"
등이 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

  끝내 함께 미칠 수 없는 마음이 부른 곳.
  그곳이 정신병원이다.

  미친 놈이라고 욕하지 말라.
  누가 미친 놈인가는 언젠가의 세월이 가름하리라.
  세상이 지표를 잃고 미칠 때
  함께 미칠 수 있는 사람
  함께 미칠 쑤 없는 사람
  밤을 앓는다.

  진실로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은 가고 사월에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아 돌아가지만
  꽃은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것.
  말할 수 없는 분노와
  가슴의 피가 뭉쳐 꽃핀 그곳--

  그러나 지금도 어느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이웃과
  사랑을 위해
  잠들지 않고 밤을 앓는다.

 

  안혜초.1941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1967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다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가 시집 "귤, 레몬, 탱자"
"달속의 뼈"와 수필집 "사랑아,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까 있다. 현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국제 한국 펜클럽회원이다.

     달속의 뼈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이즈음에 이르러선
  밤으로 낮으로
  이따금씩 달 생각이
  떠오르고
  비바람에 닳고 닳은
  저 둥그러운 되쏘임 빛
  얼기설기 드러나보이는
  계수나무 뼈.

  눈물의 뼈
  원망의 뼈
  분노의 뼈
  인고의 뼈
  용서함의 뼈
  잊지못함의 뼈

  이도 저도 재가 되어가는
  가쟁이 뼈 가운데서
  맨 마지막으로
  삐걱대고 있는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의 뼈.
  감사함의 뼈.

 

  양명문.1913년 평남 평양 출생. 호는 자문. 시집 "화수원"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는 언어의 섬세하고 연약한 기교미를 배척하고, 솟구쳐
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직접적으로 토로함을 특징으로 한다. 시집으로
"화수원" "송가" "화성인" "푸른 전설"과 시선집 "이목구비"등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명태

  감푸른 바다 바닷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은행나무 산조

  은행나무 그늘엔
  노오란 음부들이 떨어진다.

  은행 이파리들에다
  내 귀여운 어휘들을 적어 본다.

  적어 놓은 어휘들은
  제법 노오란 발음들을 한다.

  도라지, 말화부리, 살구씨,
  도토리, 소금쟁이, 송이버섯
  돌개바람, 귤, 토끼똥,

  무서리 내린 마가을 저녁
  소북히 쌓인 은행 이파리들은

  졸지에 일어난 돌개바람에 실리어
  하나씩의 음부로 도옹동 떠
  저녁 노을에 화음하면서...

  나붏나불 납신거리며 도동실 뜨는
  하늘하늘 하느작이는 노랑나비 떼

  허덕이는 기억을 시원히 털어 버리고
  마가을 하늘로 팔을 벌리며 솟아오르는

  아, 은행나무의 서글픈 산조!

 

  양성우.1943년 전남 함평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업. "시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 "발상법" "겨울 공화국"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등을 간행한 그는 진정한 민족현실의
발견과 그것에 기초한 민족의 화합에 기여하는 시들을 쓰고 있다.

     기다림의 시

  그대 기우는 그믐달 새벽별 사이로
  바람처럼 오는가. 물결처럼 오는가.
  무수한 불면의 밤, 떨어져 쌓인
  흰꽃 밟으며 오는
  그대 정든 임. 그윽한 목소리로
  잠든 새 깨우고,
  눈물의 골짜기 가시나무 태우는
  불길로 오는가. 그대 지금
  어디쯤 가까이 와서
  소리없이 모닥불로 타고 있는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총창뿐인 마을에 과녁이 되어
  소리없이 어둠 속에 쓰러지면서
  네가 흘린 핏방울이 살아 남아서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 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골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진흙의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네가 죽꼬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 끝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혹은 군화 끝에 밟히는
  끈끈한 눈물로
  잠시 머물다가 갈지라도
  불보다 뜨거운 깃발로
  네가 어느날 갑자기 이 땅을 깨우고
  남과 북이 온몸으로 소리칠 수 있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엄동설한에 재갈물려서
  여기저기 쫓기며 굶주리다가
  네가 죽은 그 자리에 과녁이 되어
  우두커니 늘어서서 눈 감을지라도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 그리고
  증오가 아니라 포옹으로
  네가 일어서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이 저주받은 삼천리에 피었다 지는
  모오든 꽃들아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양왕용.1943년 경남 남해 출생. 경북대사대 국어교육과 졸업.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의 시재는 대부분 바다와 관련된 것이 특색이며 작품은 내면
세계의 분석과 관념의 구상화, 서정시의 감각화로 집약된다. '에스프리'
동인이며 현재 부산대학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연구실에 재직.

     남강

  대나무 숲은
  강물 찍어내고 있다.
  도동쪽에서
  이른 봄 아침부터 늦가을 저녁까지
  들리던
  황소의 울음도
  강물 찍어내고 있다.
  다리 아래 떠 있는
  또 하나의 다리.
  판문점 댐 공사
  아직 멀었지만
  평거의 무우밭에는
  서리가 내렸는데
  강물은
  모래알 깨물고 있다.
  온 시가가 불 밝히는
  그 하늘의 한 주간
  곡마단의 나팔
  어울리지 않게 울려도
  강물은
  모래알 깨물고 있다

 

  양치상.만주 출생. 서독 뮌헨 뮬러 디자인 전문학교 수료.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1978)한 그는 섬세하고도 정감에 찬 육성으로 이미지를
심리속에 변형시켜 시 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목화바구니

  구름 조각
  머물다 간 언덕받이에
  달빛이 치마를 벗는다.

  분이의 목화바구니엔
  늘
  흰구름이 머문다.

  파도 울어
  지샌 지금
  녹슨 대리석 기둥에
  낡은 교회 종소리를 갈며
  바람은
  바람은 서로 기운다.

 

  오규원.1941년 경남 삼랑진 출생. 동아대 법과를 졸업.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이후로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그는
일상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시각적 청각적 이미들로 가득찬,
그러면서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자나가는 삶의 뒷 모습까지도 예리하게
파헤쳐나가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 "순례" "사랑의 기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땅에 쓰여진 서정시"와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이 있다. 현재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한 잎의 여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야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같은 슬픈 여자.


     봄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웃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오세영.1942년 전남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가 있고 '시협상' '녹원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서정에 토대를 두고 사물 탐구를 통해 삶의 존재론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봄

  봄은
  성숙해 가는 소녀의 눈빛
  속으로 온다.

  흩날리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봄은
  피곤에 지친 춘향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

  눈 뜬 저 우수의 이마와
  그 아래 부서지는 푸른 해안선

  봄은
  봄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의
  가장 낮은 목소리로 온다.

  그 황홀한 붕괴, 설레는 침몰
  황혼의 깊은 뜨락에 지는 낙화.


     너 없음으로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 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 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으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오순택.1942년 전남 고흥 출생. 조선대학 중퇴. "현대시학"에 시가
추천되어 시작활동을 한 그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인간 본연의 심층을 노래
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법' 동인이며 시집으로 "그 겨울 이후"가 있다.

     그 겨울 이후

  겨울 나무들이 기다리고 있었지.
  프로스트 마을처럼
  채과를 마친 가지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지.

  따다 남은 과일 한 알마저 또렷이 보인 과일나무 곁에서
  우리는 오래오래 포옹했지.
  철근같은 팔뚝에 조여지는
  쿵쿵 뛰는 가슴.
  진한 꽃물이 들었는가.
  빛나는 눈썰미 깨끗한 눈가에
  한 알 이슬이 어리었지.

  (망가져도 좋아요.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황혼녘 종소리에 놀라 깨어나는
  빼마른 풀잎들의 귀를 밟으며
  우리는 돌아왔었지.

  그때 엄지손가락만한 굴뚝새 처마 끝에 숨고
  순박한 호롱불 방문마다 켜지면
  그윽하게 번져가는 겨울밤의 정수.
  그 밤의 풍요를.
  입가에 가느런 웃음 머금고
  참귀목 통나무 귀 만큼
  감미한 향기 스스로의 안에 가득 채웠지.

  곰곰히 생각했지 고개 나직이
  가장 고운 꽃을 꺾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란는 것을.

  아직은 갈구해야지
  나의 이 집중이 뿌리를 내릴 때까지 견디어야지.

  그러나 제신이여.
  천부의 재능을 가슴 깊숙히 싹트게 하시고
  묵중한 목소리로 다스리소서.

  그해에도 가장 고운 눈이 오는 저녁에
  우리는 얼마나 핳일이 많았는가.
  할일이 많았는가.

  겨울 나무들은 기다리고 있었지.
  프로스트 마을처럼
  남은 과일 한 알마저 팥빛 반점 또렷이 보이면서.

 

  유경환.1936년 황해도 장연 출생.연세대 정외과와 믹국 하와이 대학을
연수. "현대문학"과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그는 반주지주의를
표방하는 시인으로 "생명의 장" "산노을" "새가 그리는 세월" "누군가 가는
땅을 일구고" 등의 시집을 갖고 있다. 현재 '에세이 80년대' 동인.

     나비

  나래를 쳐라 나래를 쳐, 청산가는 나비 훨훨훨 벌 지나 남빛 강 건너 또
계곡을 날고.

  나래 아프면 청무우밭 쉬고 나래 지치면 절벽을 찾고 나래 부러지면 남빛
강에 떨어져  죽고...

  나래... 그 부드러운 나래 한 쌍으로 하늘치며, 하늘로 거슬러 오르는
나비의 꿈, 눈부신 햇덩이 훈장으로 붙이고 하늘로 녹아 버릴 나비의 가슴.

  비바람 가려서 달밤을 날고 달밤을 나를 땐 전설 꽃무늬, 노을 속 지날
땐 불꽃무늬, 남빛 강 건널 땐 청동무늬, 모래처럼 쏟아진 별무리 밤하늘이
흘리고 간 나비의 유언.

  끝없는 잠, 숨 죽은 밤 하늘 어디서든지, 반드시 고운 여인 하나
죽어가리라는  어지러운 춤, 하늘에서 흩뿌리는 눈물 하늘에 흐느끼는
나비의 시.

  뉘 시켜서 아니라 스스로 그 작은 목숨 걸고 나래치는 아름다운 넋
풀잎에 이슬지듯 소리도 없이 남 몰래 나래치며 사라질 너, 너에게 끝
있음을 노래 부르고 나에게도 끝 있음을 노래 불러라.

  나래를 쳐라 나래를 쳐, 청산가는 나비 훨훨훨 벌 지나 남빛 강 건너 또
계곡을 날고 청산에 불 붙으면 나래에 불 당기고 불보래 속에서 나래를
쳐라.


     초설

  겨우 발자국 묻을 만큼
  가는 초설 나부끼는 골목에

  아들아이 신자국 칫수가
  얼마나 자랐는지

  한 뼘에 한 치나 모자라던 기억에서
  옆으로 웃는 송곳니 귀엽던

  고무신 한 켤레 사들고 온 적 없는
  이 아버지의 허실이

  초설의 골목길 들어설 때
  아버지의 사계를 돌아본다.

 

  유안진.1941년 경북 안동 출생. 미국 풀로리다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문채' 동인으로 활동중. 시집으로
"달하" "절망시" "물로 바람으로" "그리스도 옛 애인" "날개옷"과 수필집
"그대 빈 손에 이 작은 풀꽃을" 등이 있다.

     청년 그리스도께

  숱한 남성을 짝사랑한 후에
  가을숲이 되어버린 내 머리터럭
  흙먼지만 날리는 사막같은 가슴

  그 어디쯤서
  그대는 발견되었는가

  내 미처
  보아도 보지 못하던 눈
  들어도 깨우치지 못하던 귀
  그 누가 열어주어

  아아 한스러운
  이 몰골
  이 형색

  그대 어찌
  이제사
  내 앞에 뵈었는가

  청년 그리스도
  나의 사랑아.

 

  유영.경기도 용인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했고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사물의 본질을 역사의식으로 파악하여 시로
승화시키는 작품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일월" "천지 서"와 논술저서
"밀톤의 서사시 연구" "타골의 문학", 산문집 "나의 대학의 오솔길" 등
많은 저서를 갖고 있다.

     수박을 먹으며

  이 물신한 수박의 살은 안토니오에게 손을 잡히고 홍조를 띠던 그 옛날
크레오파트라의 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야무진 씨앗은 내 하라버지이 하라버지 또 그 하라버지의 사복에
시달리던 머리털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려청자 같은 이 껍질은 중국 땅에 웅비하던 저 고구려 무사의
근육이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물신한 단맛에서 봄 여름 내내 손길이 끊일 길 없던 어느 산골
아낙네의 따스한 입김이 서린다.

  아낙네 옆에서 풀을 뜯던 갓난아이의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빛을 더하고 맛을 돋구고 부피를 가늠하던 조화의 안간힘이 땀이
혓가에 서린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단물에서 신의 피가 번진다.

  그리고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이 각기 선물을 들고 수박으로 뛰어들던
고함소리가 들린다.

 

  유자효.1947년 부산 출생. 서울대 사대 불어과 졸업. 그의 시는 감성을
적절히 객관화하고 지적으로 절제된 작품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현재
KBS 뉴스센터 기자로 재직중이며 시집으로 "성 수요일의 저녁"이 있다.

     가을의 노래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녁
  철새들이 남겨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

 

  유재영.1948년 충남 천원 출생. 1973년 "시조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그는 서정적인 시보다는 역사의식에 기초한 현실인식을 단아한 시적
구조로 형상화하는 시를 쓰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한
방울의 피"와 4인 시조집 "네 사람의 얼굴"이 있다.

     유랑의 섬

  언제부터인지 내 몸 한구석
  이름 없이 떠도는 유랑의 섬 하나
  때때로 온 몸을 한 자루 피리로 울리다가
  시름시름 은유로 돌아눕는 꽃!
  어느 봄날 무슨 까닭인지
  내 몸의 은유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 죽임마저 가루가 되어
  저문 강물로 돌아올 때
  누군가 내 가슴 변방에 불을 놓고 있었다.

 

  유정.1922년 함북 경성 출생이며 일본 죠오지 대학을 중퇴했다. 1941년에
일어로 쓴 시집 "춘신"을 간행한 그는 평이한 언어와 일상적인 소재를
통하여 생활적인 감정을 시화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으로 "사랑과
미움의 시" 외에 작품 다수를 발표.

     램프의 시.1

  날마다 켜지던 창에
  오늘도 램프와 네 얼굴은 켜지지 않고
  어둑한 황혼이 제 집인 양 들어와 앉았다
  피라도 보고 온 듯 선듯 선듯한 느낌
  램프를, 그 따뜻한 것을 켜자
  얼어서 찬 등피여 호오 입김이 수심되어 갈앉으면
  석윳내 서린 골짜구니 뽀얀 안개 속
  홀로 울고 가는
  갸날픈 네 뒷 모습이 아른거린다
  전쟁이 너를 데리고 갔다 한다
  내가 갈 수 없는 그 가물 가물한 길은 어디냐
  안개와 같이
  끝내 뒷모습인 채 사라지는 내 그리운 것아
  싸늘하게 타는 램프
  싸늘하게 흔들리는 내 그림자만 또 남는다
  어느 새 다시 오는 밤 검은 창 안에--


     램프의 시.5

  --내 갱생의 등불인 아내 추임에게

  하루해가 끝나면
  다시 돌아드는 남루한 마음 앞에
  조심된 손길이
  지켜서 밝혀놓은 램프
  유리는 매끈하여 아랫배 불룩한 볼류움
  시원한 석유에 심지를 담그고
  기쁜 듯 타오르는 하얀 불빛!
  --쪼이고 있노라면
  서렸던 어둠이
  한 켜 한 켜 시름없는 듯 걷히어간다

  아내여 바지런히 밥그릇을 섬기는
  그대 눈동자 속에도 등불이 영롱하거니
  키 작은 그대는 오늘도
  생활의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다
  얼빠진 내가
  길 잃고 먼 거리에 서서 저물 때
  저무는 그 하늘에
  호호 그대는 입김을 모았는가
  입김은 얼어서 뽀얗게 엉기던가
  닦고 또 닦아서 티없는 등피!

  세월은 덧없이 간다 하지만
  우리들의 보람은 덧없다 말라
  굶주려 그대는 구걸하지 않았고
  배불러 나는
  지나가는 동포를 넘보지 않았다
  램프의 마음은 맑아서 스스롭다
  거리에
  동짓달 바람은 바늘같이 쌀쌀하나
  우리들의 밤은
  조용히 호동그라니 타는 램프!


     조그만한 무덤 앞에

  흰 나무패 눈에 아픈
  임자 무덤 앞에 손을 짚으면
  잊은 줄만 믿었던
  슬픔이 파도처럼 밀리어 오오

  임자 하얀 손이 여기에 있소
  임자 푸른 눈동자가 여기에 있소
  되살아 오는 가지가지 말씀
  몰래 홀로 앓다가
  몰래 홀로 눈 감은
  임자는 지금도
  먼 파도 소리에 홀로 귀 기울이고 있소이까

  수풀 속에 소소로이 흔들리는 들국화
  들국화 들국화
  시월달 산바람에 마구 휘불리우는
  연보라빛 가녈픈 네 모습을
  오오 누구라 마음하여 나는 불러 볼 건가

  임자 앞에 꺾고저
  이 산허리 어느 비탈 어느 그늘에나
  구름처럼 들국화만 피어 있음에
  난 다시금 눈물이 솟아... 뜨거운 눈물이 솟아...

  흙내음새도 새로와 가슴 막히는
  임자 조그마한 무덤 앞에 얼굴을 묻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순결하리라 맹세하는
  나요
  유정이요


     진눈깨비

  가는 곳곳이 길은 막다르고
  가슴 속은 하늘처럼 어둡다
  미친개같이 다랍게 고픈 배
  배꼽까지 젖는 대로 어는데
  염치 없이 양뺨을 흘러내리는
  차고 짠 이것은 무슨 진눈깨비냐
  그날 내 멱살을 잡고 쪼주하시던
  아버지 당신의 불덩이 같은 눈초리
  되살아오는 그런 이픔을 안고
  오늘 또 바람 쌀쌀한 경상도 거리
  흙탕길을 자꾸만 미끄러지며
  아아 내 나이 서른 하나
  이렇게 얼굴과 손이 추해졌으니---

 

  윤삼하.1935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대 사범대 및 동대학원 영문꽈 졸업.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1957).
시집으로는 "소리의 숲"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전남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홍익대 영문꽈 교수로 재직중이다.

     겨울의 첨단

  한겨울 얼어붙는 가슴
  갈라놓는 날선 바람
  잔가지 잔뿌리들을
  더욱 움츠리게 하는 강바람이여
  빙판 위를 굴르던지
  거친 들판 질러서 가다오.

  잿빛 하늘도 쏟아지게
  흰 눈이나 펑펑 내려다오.
  처마밑에 쌓이는
  눈의 나랫소리
  새벽이 와도
  정갈한 눈의 마음.

  이 겨울의 첨단에서
  아둥그러진 노래들은 거두어다오.
  아직 얼음에 덮힌 개울가
  가시나무에 물이 오르는
  봄은 까마득 보이지 않고
  저만치 앞서가는
  외로운 절기여

 

  이가림.1943년 만주 출생. 성균관대 문과대 불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파리 제3대학에서 수학.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1966)
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강렬한 현실의식으로 시의 특성을 살리고 있다.
시집으로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가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불문학과 부교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어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반도의 눈물

  기러기여,눈물나게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푸른 하늘에서 소총에 맞은 기러기여
  울어다오 자유의 이마가 깨어져
  반절의 지도보다 커다랗게 피가 얼룩지는 것을.
  보이지 않는 저정의 뒤뜰에서는 날마다
  더러운 무소들의 싸움이 들려오고
  딴 아픔 딴 목소리의 털보들에게 밟혀
  젊은 보리들의 배에 실려 팔려 간다 모르는 곳
  캄캄한 자본의 구렁으로 죄수들처럼
  아아 모가지여, 저당 잡힌 모가지여

 

  이건청.1942년 경기 이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국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 "망초꽃 하나" 등이 있다. 현재 한양대 국문과
조교수로 있다.

     망초꽃 하나

  정신병원 담장 안의 망초들이
  마른 꽃을 달고
  어둠에 잠긴다.
  선 채로 죽어버린 일년생 초목
  망초잎에 붙은 곤충의 알들이
  어둠에 덮여 있다.
  발을 묶인 사람들이 잠든
  정신병원 뒷뜰엔
  깃을 웅크린 새들이 깨어
  소리없이 자리를 옮겨 앉는다.
  윗가지로 윗가지로 옮겨가면서
  날이 밝길 기다린다.
  망초가 망초끼리
  숲을 이룬 담장 안에 와서 울던
  풀무치들이 해체된
  작은 흔적이 어둠에 섞인다.
  모든 문들이 밖으로 잠긴
  정신병원에
  아름답게 잠든 사람들
  아, 풀무치 한 마리 죽이지 않은
  그들이 누워 어둠에 잠긴
  겨울, 영하의 뜨락
  마른 꽃을 단 망초.


     추운 벌레

  마른 풀섶에서 울고 있는
  푸른 벌에의 다듬이는 밤새도록
  허공을 향해 흔들린다.
  저들에게 지상의 추위는 너무 가깝다.

  저들의 노래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수목들은 몇 개의 잎을 남기고
  들판의 잡초들도 풀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서 있다.

  살아 있는 저들을 위해서 나는
  귀를 열고 다가선다.
  저들의 작은 알들이 겨울을 지날 때까지,
  저들의 슬픔이 별빛에 닿을 때까지.

 

  이경남.1929년 황해도 안익 출생. 평남사범대학 재학중 6.25를 만나
인민군에 응소, 군관으로 출동했다가 귀순했다.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한
그는 서정적인 정념에서 출범한 사회참여적인 상황시를 써왔다.

     강 건너 얼굴

  나의 시야를 가득히 채워 오는
  너에 대해서 나는 안다는 것은
  꽃의 의미를 모르는 거와 같다.

  --사금파리에 맺히는 이슬 방울
  --새벽창에 어리는 별의 속삭임.
  그리고, 강 건너 살을 꽂은 무지개의 호선

  내가 너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너의 동자와 너의 움성과 너의 미소가
  우물 가득히 찰찰 넘치는 하늘이 되어
  나의 시야를 덮쳐 오고 있다는
  이 어쩔 수 없는 하나의 실재뿐.

  아아 내가 너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저 꽃들이, 저마다 피고 지는 의미를 모르듯이
  내가 나를 도무지 모르는 거와 같다.

 

  이경순.1905년 경남 진주 출생. 호는 동기. 우라와시 코오호쿠치과의전
졸업. 유학시절부터 해방전까지 '혹우회'에 가담, 사상운동지 "니힐"에 
관여하다가 '조선일보'에 시를 발표. 동인지 "등불"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한 그는 특유의 개성을 살려 시의 발상과 표현에
모던한 감각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시 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생명부" "태양이 미끄러진 빙판" "기중기" "낙엽송" 등이 있다.

     구름은 흐르고 뻐꾸기는 우는데

  우울한 날에
  내 홀로
  뒷산마루에 앉았노라면

  뻐꾸기는 산에서 살자고
  울음을 우는데
  구름은 하이얀 테이프를 던져 주고
  바다로 흘러간다.

  산에서 살자니
  구름의 손짓이요
  바다로 가지니
  뻐꾸기 울음을 어이하리?

  눈물로 기름진 밭이랑에다
  청춘의 씨앗을 묻어 놓고
  권태의 맨트가 휘날리는 거리에서
  우울한 츄잉검처럼 씹어 본다.

 

  이광웅.1940년 전북 이리 출생. 원광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하여, 참뙨 지식인으로서 살며 시를 써온 그는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시집으로
"대밭"이 있다.

     달

  네 눈꺼풀 안쪽에 고인 달빛
  네 눈꺼풀 안쪽에 고인 달빛

  약질의 내 체구에 떨어져 부서질 때,
  이빨이 시리고
  피가 얼고 그리던 달빛

  손 안에 받아 보려 한들 이 무슨 헛짓거리랴.
  눈사태같이 부서져 내려 앞 길을 차단하는
  눈사태같이
  차디찬 달빛
  네 눈꺼풀 저쪽에 고인 달빛

 

  이근배.1940년 충남 당진 출생. 호는 사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신문' '경향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뜽단했으며 '신춘시'
동인으로 활동했었다. 그의 작품은 언어의 감각이 선명하고, 현실의식이
내면에 흐르고 있어 이미지의 승화를 보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등이 있다.

     냉이꽃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부침

  잠들면 머리맡은 늘 소리 높은 바다
  내 꿈은 그 물굽이에 잠겨들고 떠오르고
  날 새면 뭍에서 멀리 떨어진 아아 나는 외로운 섬

  철썩거리는 이 슬픈 시간의 난파
  내 영혼은 먼 데 바람으로 밤새워 울고
  눈 뜨면 모두 비워 있는 홀로 뿐인 부침의 날.

 

  이기반.1937년 전북 전주 출생. 아호 월촌.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자유문학"지의 추천을 받아 등단. '전북문학상', '한국예술총회장상' 등을
수상. 시집으로 "고향에의 기도"외 다수가 있으며 산문집 "은하의
모래알들", 논저로 "한국현대시연구" "문예창작론" 등 다수가 있고 현재
국제 펜클럽, 한국현대시협, 한국문협 회원이다. 그의 시세계는 뜨거운
인간애와 넘치는 향토애에서 우러난 서정을 기독교적 신앙의 조화로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산 넘어 저 노을이

  하늘에 뜬 바다
  빠알갛게 속 태우다
  살갗도 노오랗께 에이다가
  하이얗게 아픔을 쓸어낸 그 자리
  누구도 열지 못한 시원의 우주인가.

  머나먼 수평에 뜬
  씨줄 날줄을 청실 홍실로 엮는
  뜨거운 시의 가슴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순정을 앓다가
  끝내는 벗어 보인 알몸같은 것.

  무변의 공간
  그득히 출렁이는
  베토벤의 음정마저
  신비의 층계를 오르내릴 때
  산산이 부서지는 심장의 파편들이
  저승으로 침몰하는가
  이승으로 부상하는가

  하늘에 뜬 바다
  산 넘어 저 노을이
  오늘을 살라 먹고 내일을 잉태하는
  그 머나먼 나라
  하이얗게 개벽하는 꿈밭에
  꼬옥 둘이서만 태어나고 싶다.

 

  이기철.경남 거창 출생. 영남대 문리대와 동대학원을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는 "낱말추적"(1974) "청산행"
(1982)이 있으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경향은
차면서도 거칠고 투박한 현실을 온유의 정신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감응력이
주축이 되고 있다. 현재 영남대학 교수로 재직중.

     이향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산란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 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 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리를 듣는 2급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눈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를 불러모우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몇 권의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홀로 누운 조부의 산소를 한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너의 시를 읽는 밤엔

  너의 시를 읽는 밤엔 마을의 불빛 꺼지고
  동촌을 지나는 바람이 들깨꽃 잎새들을 땅으로 지게 했다.
  세상은 고요하고 자성은 더디게 찾아와서
  잠들어야 할 밤에 잠들지 못하는
  나의 마음 속을 찢어 놓았다.
  질경이 잎새가 뼈만 남기고 하얗게 선화지처럼 바래지는 날
  나는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개념만 무성한 대학 노-트를 가방에 넣고
  또 하나의 패배를 가꾸기 위하여
  대동과 만촌동을 기계처럼 오고갔다.
  작년의 겨울땅을 얼리고 녹인 이 바람도
  물여뀌 잎새는 피었다 지고
  떨어질 것 다 떨어져 흙이 되는 가을에도
  은화와 지폐는 나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관습은 허위와 껍질로 튼튼하게 잠겨 있어
  질타의 물을 끓이며 풀리는 고뇌의 가마솥에 앉으면
  참으로 헛된 일에 몸 바친 부질없는 시간들이
  후회와 자책으로 밀려오지만
  자책은 또 다른 새벽을 오게 하고
  그러나 모든 사람 다 잠들고 나면
  누가 이 가을 빈 들에 남아
  쥐똥열매라고 불러 줄 수 있을까
  너의 시를 읽는 밤엔
  들판 가운데 초가 한 채가 무너지고
  미처 귀소하지 못한 저녁새 한 마리
  참담한 별빛 하날 하늘에서 따 내렸다.

 

  이봉래.1926년 함북 청진 출생. 일본 닛꼬오 대학 문학 수학. 해방 이후
"신세대" "예술신보"에 시를 발표. '후반기' 동인에 참가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한 그는 40여편의 영화제작도 했고 시집으로 "이봉래시선"
"영광의 신"과 평론집 "수직의 사상"이 있다.

     단애

  밤이면 갈증처럼
  기억의 피부 속에
  매몰되어 가는
  바다

  어느날 바다는
  으스러진 기억을 적시며
  남아 있는 땅 속으로
  돌아갈 때
  그것은
  치욕의 화석으로
  굳어 간다.

  무너져 내리는
  밤의 밑바닥에
  깔리고 쌓인
  모래알보다 작은
  인내의 거품
  억만 낱알의 거품을 물고
  이쪽과 저쪽에서
  밀려오는
  피 묻은 바람

  그날밤
  바다는 피로 얼룩진
  거울 속의
  자화상이었다.

  나는 서반아의 투우처럼
  거울 속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거울은 닫혀진 문이었다.
  나는
  바다를 찾아
  문의 둘레를 달렸다
  번득이는 칼보다
  더 광채나는 거품을
  입에 물고

  다음날 나는
  피묻은 바람 속에서
  허물 벗는 배암처럼
  남루한 피부를
  비수로 도려 낸다

  아
  풍선처럼
  날아가는 화석의 바다
  기억의 활 시위를
  하늘에 겨냥하면
  문에 반사되는
  금빛 태양

  나는 달리고 있다
  단애와 같은
  거울 속을 달리고 있다
  무량의 거품 속을
  피붙은 바람처럼
  넘어지며 일어서며
  마냥
  달리고 있다.

 

  이생진.1929년 충남 서생 출생. 국제대학 영문꽈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그는 시집 "나의 부재" "바다에 오는 이유" "한국현대
시선"과 자살한 예술가의 생애를 분석한 "나의 길을 가련다"가 있다. 현재
보성고교에 재직.

     그리운 성산포

  2.설교하는 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이성교.1932년 강원 삼척 출생.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인 그의 시경향은 소박한 서정으로 전통성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산음가"
"겨울바다" "보리 필 무렵" "눈온날 저녁" 등이 있다.

     해바라기 피는 마을

  아무도 오지 않는 마을에
  해바라기 핀다.
  갇혀 있는 사람의 마음에도
  노오란 햇살이 퍼져
  온 천지가 눈부시다.

  지난 여름
  그 어둠 속에서
  열리던 빛
  눈물이 비친다.

  이제 아무 푯대없이
  휘청휘청해서는 안된다.
  바울처럼 긴 날을 걸어서
  까만 씨를 심어야 한다.
  해바라기 피는 마을에.

 

  이성부.1942년 전남 광주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전남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강인한 생명력의 시인인 그는, 황토색 짙은
육성으로 절망 속에서도 사랑을 줄기차게 노래하는 원숙한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이성부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외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울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전라도.2

  아침 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짐승도 예술도
  아직은 만나지 않은 아침이여 전라도여
  그대 심장의 더운 불, 손에 든 도끼의 고요
  하늘 보면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꿈속에서만 몇 번이고 시작하던
  내 어린 날, 죽고 또 태어남이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아니어라.

  사랑이어라.
  광주 가까운 데서는
  푸른 삽으로 저녁 안개와 그림자를 퍼내고
  시간마저 무더기로 퍼내 버리면
  거기 남는 끓는 피, 한 줌의 가난

  아아 사생아여 아침이여
  창검이 보이지 않는 날은
  도무지 나는 마음이 안놓인다.
  드러누운 산하에는
  마음이 안놓인다.


     누룩

  누룩 한 덩어리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어머니

  1
  오랜만에 하나뿐인 이 아들 만나도
  말씀 못하시네, 도무지 말씀을 못하시네.
  모진 하늘이 또 어머니의 가슴에
  들어와 박힌 것일까?
  허물어진 흙담 너머로
  주먹밥을 건네 주시는
  손길은 뜨겁지만,
  그 손길은 걱정스레 말을 품었지만,
  어머니의 입 어둠처럼 닫혀져서
  말씀을 못하시네.

  이 집도 마을도 남은 가슴도
  이제는 모두 내 것이 아니구나.
  무슨 큰 무서움 하나를 
  저마다 저마다 지니고 선 이웃 사람들,
  나를 보아도 큰 눈을 뜬 채
  손 붙잡지 못하는 사람들,
  겁에 질린 얼굴들.

  2
  밤이
  그 큰 아가리 벌려
  마을 삼키기 기다려서
  나는 다시 정거장 가는 길을 벼와 함께 걸었다.
  대낮에만 불타던,
  나를 키운 그 넉넉하던 논길이
  한밤에도 불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벼 모가지를 뽑아
  낟알을 맛보아도
  내 어깨에는 가만히 가만히 힘이 솟았다.

  어머니, 전 잘못을 범한 게 아니예요.
  땅과 하늘에 한번도 부끄러워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어머니.

  오늘 새벽 왼종일 느린 기차에 시달리고
  고향에 내렸을 때,
  고향은 그 첫마디를 돌아가 돌아가라고
  내게 소리쳤었다.
  다급한 목소리 떨리면서
  한 손으로 나를 숨기고
  다른 한 손으로 나를 떠다미는,
  고향은 이미 제 몸을 잃고 있었다.
  우리집 흙담에 다다를 수 있었음은
  내 발걸음을
  그래도 남도의 발이
  숨 죽이며 대신 걸어 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그러나 다시 돌아갑니다.
  서울행 표를 사되, 서울로도 갈 수는 없읍니다.
  결코 저는 죄지은 게 아닌데...

  3
  아직도 따스한 이 주먹밥엔
  반쯤 목맺힘이 섞여 있다.
  이십년 전에도 삼십년 전에도
  눈물로 밥을 뭉쳐,
  급할 때마다 만드시던 어머니를 나는 기억한다.

  왜놈 순사를 때려 죽였다는 삼촌과
  징용에 나가시던 아버지에게
  만들어 주시던 주먹밥을 나는 기억한다.

  어머니는 하나 뿐인 아들에게마저
  또 이것을 만들어 주시었다.
  거리에서 피투성이로 끌려갔다는 삼촌과
  흰 상자로 돌아온 아버지를
  나는 끝내 다시 뵈일 수가 없었다.

  느린 기차는 이 밤에
  나를 붙잡아 데려가는 것일까?
  우리들은 모두 이대로
  하나씩 하나씩 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기차는 밤을 찢어 밤의 고요를 찢어
  나아가라고 소리치고 또 재촉하지만,
  나는 어떻게
  나를 더 감출 수가 없구나.
  더 어떻게 누구를 찾을 수가 없구나.
  혼자로도 혼자를 거느릴 수 없구나.

  4
  나주 배를 씹어도 나주 배 이미 슬픔 되어
  내 목마름 참으라 한다.
  물이 없고 다디단 시원함도 없고
  그냥 굶주림을 먹으라 한다.

  내가 비로소
  어머니의 주먹밥 꺼내어
  그 아픔 입맞추었을 때,
  내 창자 속 깊이 어머니가 가꾸던
  세월 스며들었을 때,
  젖과 꿀이 나를 채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다른 힘으로 태어났을 때,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마음을 열어 빌고 또 비는
  어머니의 저 굳센 모습을.
  기차는 달리고, 가야할 길은 잃었으나
  나타날 길은 결코 멀지 않음을.
  밝아오는 새벽의 흙투성이 얼굴을,
  힘모아 싸우다가 싸우다가
  죽어서도 이겨 나오는 사람들을.

  5
  어머니의 마음은 저렇게 참 많이 있구나.
  남모르게 마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울먹이는 발길에도
  숨고싶은 몸에도
  그리하여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안간힘에도
  어머니의 마음은 참 많이 있구나.

  두려움 무릅쓰고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어둠을 뚫어 사슬을 끊어
  나아가는 젊음 곁으로
  피끓는 사람들의 곁으로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이성선.1941년 강원도 고성 출생. 고려대 농과대학 졸업.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의 합일된 세계를 꿈꾸며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곳에 이르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으로 "몸은 지상에 묶여도" "하늘문을
두드리며" 등이 있으며 현재 양양 깡현중학에 재직하고 있다.

     나무 안의 절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가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꽃구름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이성환.1930년 경기도 시흥 출생. 동국대학을 거쳐 경희대학 대학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구름은
울지도 못한다"가 있다.

     그믐달

  그믐달은
  마을에 상여 떠나기를 기다려서
  저 혼자 어둠을 기대고 드러누웠다

  몸은 비록 머얼리 떨어져 있으나
  나 어린 상주의 울음 대신
  그믐달은 조용히 머리를 풀어 띄웠다.

  산설고 낯설고 바람 잔 뜰안
  허전한 어느 비인 항아리 안에
  남 몰래 소나기로 내려왔다가
  이윽고 다다른 목숨
  재 너머로 조용히 일러 보내고

  그믐달은
  상주가 잠이 들기를 기다려서
  부엉이를 여지없이 성 밖에 두고 싶었다.

 

  이수복.1924년 전남 함평 출생.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서정시는 전통시의 한 전형으로 평가되며, 최근에는 언어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건전한 미를 창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시집으로
"봄비"가 있다.

     봄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익.1942년 경남 함안 출생.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과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떼뷔한 그는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이미지와
관념, 정감이 교묘하게 조직된 시를 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집으로
"우울한 샹송" "야간열차" "슬픔의 핵"이 있다. 현재 KBS 라디오국에
재직하고 있다.

     우울한 샹송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말

  말이 죽었다. 간밤에
  검고 슬픈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노동의 뼈를 쓰러뜨리고
  들리지 않는 엠마누엘의 성가 곁으로
  조용히 그의 생애를
  운반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
  그를 덮는 아마포 위에
  하늘에서 슬픈 전별이.


     봄에 앓는 병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 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늦게서야 병이 오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현신하여
  지금
  나의 사방에 가득했는데
  아아, 이 즐거운 시절
  나는 누워서
  지난 겨울의 아픔을 병으로 앓고 있노라.


     가을 서시

  맑은 피의 소모가 아름다운
  이 가을에,
  나는 물이 되고 싶었읍니다.

  푸른 풀꽃 어지러워 쓰러졌던 봄과
  사련으로 자욱했던 그 여름의 숲과 바다를
  지나
  지금은 살아 있는 목숨마다
  제 하나의 신비로 가슴 두근거리는 때.

  이 깨어나는 물상의 핏줄 속으로
  나는 한없이 설레이며
  스며들고 싶습니다.

  회복기의 밝은 병상에 비쳐드는
  한 자락 햇살처럼
  아, 단모음의 갈증으로 흔들리는 영혼 위에
  맺힌 이슬처럼.


     안개꽃

  불면 꺼질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히 서려 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변의
  꽃.

  무데기로
  무데기로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형상이 되어
  설레는 느낌이 되어 다가오는 그것은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


     호롱

  골동품 가게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호롱을 하나 샀다,
  어느 초가의 안방이나 사랑채
  한 모서리에
  밤마다 소중히 모셔졌을 이 빛의 도구를
  국수 한 그릇 값으로 나는 가져왔다.

  지금은 쓸모없는 퇴기처럼 버려진
  골동 중에서도
  대접이 서자 같은
  이 고전의 기물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마음 한가운데 보드라운
  희열의 물살이 이는 것은,

  아, 누군가
  가물대는 이 호롱의 불빛을 이마에 쓰고
  터진 식구들의 옷가지를 땀땀이 기웠을
  그런 아낙과
  이 호롱 아래서 조용히 책장 넘기며
  불빛 따라 희미한 새벽의 여명 속으로 건너갔을
  한 꿈의 소년과
  이 호롱의 불빛으로 잠 못 이루는 해수의 밤을
  혼령처럼 앉아 지샜을 그런 노인과
  이 호롱 아래서 잠든 아이들 얼굴을 지켜보며
  나즉이 두런대던 근심어린 대화의
  한 부부와
  이 호롱의 불빛에 부끄럼과 갈증을 느끼며
  칠흑 어둠 속으로 자지러들던 초야의
  한 신혼과...

  아, 어쩌면 그들은 내 부모였고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모
  아니면 내 이웃들의 선친이었을 그런 가까운 사람들의
  그립고 눈물겹고 간절한 사연들을

  호롱,
  이 침묵의 유물은
  가만히 뿜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훈.1942년 춘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연세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는 주지적 경향, 특히 초현실주의적
경향의 시들을 쓰고 있다. 시집으로 "사물 A" "환상의 다리" "당신의
초상"과 시선집 "상처"가 있다. '제2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 현재 한양대
국문과 부교수로 재직중이다.

     지난날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새벽닭 울 때마다
  삶은 노엽고 원통했다

  해질무렵 귀머거리로
  바다에 귀 기울여도
  바다는 언제나 말이 없던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한사코 불빛 식어가던 방에서
  그대 고운 손
  차마 잡을 수 없었던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그대 눈물 고인 눈을
  어떻게 잊으랴 통곡 뒤의 산들을
  산 아래 마을들을 밤마다
  그대 손이 켜던 램프를

  어떻게 잊으랴 이른 새벽
  눈길 밟고 도망치던 삶
  도망치던 맨발의 날들을
  소리도 없는 날들을
  이렇게 또 다가오는 날들을


     당신

  고양이처럼 삵고 싶어라
  엎드려 있고만 싶어라
  고운 피 흘리는 마음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어디로 가고만 싶어라
  이 어두운 마음
  밝아오는 해이고 싶어라
  아무리 채찍이 갈겨도

  그리움은 끝나지 않어라
  당신 얼굴에 입맞추고 싶어라
  하아란 돌이고 싶어라
  파아란 구름이고 싶어라

  모조리 버리고 오늘
  바쁘게 명동을 걸어가면
  바람부는 왕십리를 걸어가면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언제나 다른 나라에 계신
  당신 고개 한번 끄덕이면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암호

  환상이란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읍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 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읍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읍니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역은 총에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커다란 하나의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서 당신도 당신의
몸부림을 봅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읍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읍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부는 밤에 환상이란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이영걸.1939년 만주 신경 출생. 한국 외국어대 영어과 및 고려대 대학원
영문과 수료. 미국 세인트 루이스 대학에서 영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시문학"으로 데뷔한 그는 한국의 역사와 자연을 노래하면서 전통적
회화성을 적절히 결합하여 시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귀향" "목단강" "이 드넓은 산야"가 있다.

     한가위.1

  우련한 능선들은
  안개 속에 이어지고
  길 옆 코스모스
  바람에 나부낀다
  언제부터 내려오는
  한가위 명절인가
  묵직한 호박 덩어리
  저 아래에 누워 있다
  고향 잃은 사람들의
  그리움도 간절하리
  버얼겋게 익은 벼는
  가을비에 젖고 있다.


     땅 속 깊이 노래를

  귀뚜라미...

  해마다 이맘때면
  놓치지 않고
  귀중한 한때를
  노래하지만

  그리운 옛 시인의
  노래 속에 자리잡고
  무수한 사람들의
  가슴도 울렸으니

  찬바람 대지를
  휘몰아 칠 땐

  땅 속 깊이 노래를
  묻어 뒀다가 해바라기
  환하게 머리 쳐들
  무렵이면 이렇게
  또 한 번 맑은 노래
  뽑아내니 밤 하늘
  흩뿌리는 무수한
  별빛처럼

  너희들의 노래는
  이어지리

 

  이영순.1921년 충북 영똥 출생. 호는 파륜. 동경 제국대 경제학부를
다니다가 학병으로 입대, 해방 후 귀국. 장시집 "연희교지"를 발간했다.
현재 국제 펜클럽 한국지부 중앙위원.

     크리스마스 이브

     --죽음이 없는 사랑의 밀어라기보다
     부활이 없는 사랑의 믿음이랄까...

  쌓이는 눈 위로 더러 울고 있는 자
  눈 멎는 눈 위로 더러 웃고 있는 자
  눈 녹는 눈 위로 더러 담담한 자
  대체 이 밤의 깊은 뒤에 어떤 취미의 의상으로 외출을 서두는 밤의
방향일까
  이 시간 가슴소리 나란히 당신은 팔목에 꽃과 과일을 담은 바구닐 끼고
  이 시간 발소리 나란히 나는 옆구리에 눈들 뜬 채 죽어가는 칠면조
날개와 암탉이 목에서 피가 흐르는 중국상자를 들었지만
  ... 말갛게 풀리는 이 눈물의 종은 어느 벌판의 휘인 가슴에서 쫓겨온
사랑의 못자국일까
  비인 사랑의 자리일까

 

  이우석. 1942년 경북 상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자유문학"
신인상과 '서울신문' 신춘문예,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 현대적
감각과 한국적인 이미지 재현에 주력하고 있는 시인. '신년대'와
'목마시대' 동인이다.

     휘파람

  나는 늘 휘파람을 불면서
  입을 오무리고 걷는다.
  오무린 입속에 봄 바람이 일어
  버들개지가 푸릇 푸릇 싹을 띄운다.

  휘파람은 늘 입속에서
  버들개지의 대롱을 타고 밖으로 나온다.
  나와 흡사한 사람을 나는 가끔 본다.

  파밭을 지나면서
  그것은 오히려 더욱 싱싱히
  파잎을 타고 나오는 닐리리 닐리리
  소리.

  검은 커튼을 드리우고
  깊이 방에 묻혀 있는 날
  봄 볕을 타고 흐트러지는
  수많은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휘파람은 입속에 있는
  가장 가벼운 침방울을 흔들어
  홀홀 날려 보내는
  일상인 것이다.

 

  이운용.1938년 전북 진안 출생. 전북대 한남대 대학원 조선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학중. "현대문학"지에 시가 추천 완료, "월간문학"에 문학
평론 당선으로 등단(1969)했다. 객관적 현실의 병적 증상에 대한 비판과
시적밀도를 간직함으로써 체질이 강한 시를 창출하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이 가슴 북이 되어" 외 4권의 시집이 있으며 저서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고독" "김현승 시연구" 등이 있다.

     이 가슴 북이 되어

  이 가슴 울리지 않는 북이 되어
  한 천년쯤 두들기면 소리 날까요?
  멍들어 시펄시펄한 세월
  먹피를 사발로 퍼내면서

  한 주일 내내 두들겨 맞고
  미사에 나가면
  우리 하느님도 날 미워하시는지
  악기소리가 안 난다고 짜증이고
  소리 나면 곱지 않다고 윽박지르니
  북이여, 나의 가슴이여
  둥둥둥 둥둥둥 울려만 다오.

  곤장을 맞으면 몇 개가 더 부러져야
  이 가슴 북이 되어 울릴 것인지
  억울한 울음에도 소리 나지 않고
  혼자 코먹은 눈물 훌쩍이는 나의 북이여.

 

  이원섭.1924년 강원 철원 출생. 호는 파하. "예술조선"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동양적 자연미의 재발견, 참신한 본연의 경지 등을
보여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한시 번역에도 탁월하여 역시집 "당시"
"시경"은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시집으로 "향미사"가 있다.

     향미사

  향미사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원을 그어 내 바퀴를 삥삥 돌면서
  요령처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나는 추겠다. 나의 춤을!
  사실 나는 화랑의 후예란다.
  장미 가시 대신 넥타이라도 풀어서 손에 늘이고
  내가 추는 나의 춤을 나는 보리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풀 한 포기 살지 않은 이 사하라에서
  누구를 우리는 기다릴거냐.

  향미사야.
  너는 어서 방울을 흔들어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죽림도

  세상과 멀어
  세상과 멀어
  봄이온들 제비조차
  안 오는 곳이었다.

  사철은 푸르른
  죽림 가운데서
  죽처럼 마음만을
  지켜 사는 곳이었다.

  어찌 슬픔인들
  없을까마는
  북두같이 드높이
  위치한 곳이었다.

  세월조차 여기에는
  만만적하여
  한 판의 바둑이
  백 년인 곳이었다.


     바다

  나로 하여 너와 함께 있게 하라
  끝없이 짙은 네 외로움 속에
  지나가는 기러기가 흘리고 간
  핏방울처럼 꺼지게 하라

  임께서 나를 찾아 오시는 날은
  네 치마자락 안에 얼굴을 묻고
  슬픈 노래 부르듯 타신 뱃전에
  고요히 고요히 바서지리라

 

  이유경.1940년 경남 밀양 출생. 외국어 대학교 불어과 졸업. "사상계"를
통해 데뷔한 그는 버려진 것들에 대한 모든 것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장 진실하게 받아들이며 인간의 고뇌를 즐겨 표현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밀알들의 영가"(1969) 등 다수가 있다.

     형제의 울음

  싸움을 하고 울면서 돌아온 아우의
  어깨를 싸안고 나는 속으로 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매일처럼 싸우고 돌아오는 그의
  소망과 꿈을 풀어내지 못하는
  형인 나의 무력을 탄식하면서
  나는 지금 울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아... 아우의 어깨나 싸안고 상처에
  약이나 바르는 일
  아침이면 밥상이나 차리게 하는 것

  (겨울 바람이 사납게 골목을 지나고 시팔 세상은 무지하게 춥다)

  내 어린 날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지고 울면서 오진 않았는데
  오늘 울면서 돌아온 아우를 보고
  내가 왜 속으로 울기만 하는가
  대신 싸우지도 못하고 아우의
  어깨나 싸안고 약냄새 속에 내가
  왜 자꾸 목이 메이는가


     배반

  내 이름 불러주는  아이 하나 없다
  여자도 그 잡년의 사랑도 없다
  하남 벌은 지옥에 처박혀
  바람에 휩쓸리고 있다
  논길들이 쫓겨 다니고
  벌레껍질들이 부질없이 흩어지고
  (대낮에도 오가는 사람 없길래 길에 뿌연 오줌 깔기고 코를 풀고 이까짓
언 땅)

  내 어린 날 더러웠던 아이들 자라
  다시 더러운 아이들 낳고
  잡년들 늙어서 앓아 눕꼬
  지금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하남벌에 돌아와 한숨쉬는
  내 십 년의 배반

 

  이석.1925. 경남 함안 출생. 본명은 순섭. 서울 대학 사대 중등교원
양성소 졸업. "현대문학" 출신으로 "하초" "남대문" 등 시집이 있고
'목마시대'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현재 경기여고 교사.

     개나리

  삼월의 태양
  둥그런 미소
  어릴적 본 동화의 그림

  노오란 개나리
  맨 먼저 소원을 풀고

  햇살이 간지러워 못견디는 나무들
  몸살이 난다

  오늘 하루
  따스한 햇볕을 먹고
  놀놀하게 낮잠을 잘까.


     서시
        --사연

  방 안에서 살빛이 낡고
  문 밖에서 바람을 느끼는 날
  몇 번 더 불같은 아픔을 견디어야
  썩돌이 숨트는 노래를 부르릿까

  오늘도 저 하늘 뜬구름에게
  마지막 열망을 던져보는
  서글픈 하루

  어찌하여 지금은
  시와 술이 서로 의리를 끊고
  그날의 징소리에 입맞이 쓸까

  저 먼 하늘
  누런 햇볕 속에 반짝이던
  백마의 흰 갈기
  그 빗질하는 바람을 타고
  오늘을 살았는가

  그 시정 어느 거리
  황폐한 웃음 인족에 좇기어
  절며 뒤퉁거리는 닭이 되어
  중도 속도 아닌 시인이 되어
  오늘 오늘을 살았는가

 

  이인해.1945년 함남 북청 출생. 본명은 범사.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1975)한 그는 지나친 기교주의, 소재주의, 실험주의를 배제한
삶과 모든 사물들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면서 이것들을 담담한 이야기로
감성화시키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사랑법"이 있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산에 오르면 알리라.
  오르고 싶은 곳 산봉이 솟았고
  쉬고 싶은 곳 나무 그늘이 있음을.
  그 그늘에 잠시 쉬고 있노라면
  바위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개울.
  그때, 그대의 시선은 자유롭고, 알리라.
  오솔길에 아무렇게 펴있는 풀잎들도
  저마다 한 몫으로 살아 있음을.

  그러나 나는 아직 아지 못한다.
  오솔길에 풀 한포기 흔들리는 까닭을.
  풀 한포기 되어 보지 않고서는
  풀 한포기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바람 한자락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풀 한포기 흔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바람이 지나가면 풀 한 포기 흔들리고
  바람이 지나지 않아도 풀 한 포기 흔들린다.

  바위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개울
  흘러서 어디 가는가.
  물 한방울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물 개울의 흐름도 알지 못한다.
  물개울로 흘러 보지 않고서는
  저 강의 물방울들 모임도,
  바다를 떠돌아보지 않고서는
  바다의 출렁거림도 알지 못한다.
  내가 물 한 방울이 되지 못하는데도
  바다는 밤늦도록 출렁거린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학자들의 책을 밤늦도록 읽는다.
  밤 새워 읽은 뒤
  내 방종의 뜰에 핀 꽃 몇 송이
  자기를 키운 가지를 떠나
  옆으로 툭 불거졌다.
  옆으로 툭 불거진 엉겅퀴는
  바람이 웬만큼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는 것은 거짓의 풀잎, 거짓의 바람,
  나는 웃는다.
  그때, 낙엽이 웃음처럼 지고
  내 방종의 뜰에도 겨울이 왔다.

  밤에 오는 눈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먼 곳에서
  누가 눈을 눈이라고 하였는가.
  아직도 비가 오지 않았는가.
  밤새워 눈이 와도 녹아버리고
  내가 찾은 한 마디의 말
  아침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아직도, 비가 오지 않았는가.

  겨울은 그러나 어김없이 왔고
  이 겨울 나뭇가지를 떠나 방황하는 새
  비로소 처음 추위를 느낀다.
  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내 한 때 방종의 뜰에도
  겨울 짧은 해 빨리 지고
  밤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속으로 제 몸을 감추기 시작할 때
  나는 무엇을 조금씩 알아가는가.
  그러나 산에 오르면 알리라.
  오르고 싶은 곳 산봉이 솟았고
  쉬고 싶은 곳 나무 그늘이 있음을.

 

  이제하.1938년 경남 밀양 출생. 홍익대에서 조각과 회화를 전공하다가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시,
소설, 동화 등을 발표하여 뚜렷한 개성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창작집
"초식" "새" "기차, 기선, 바다, 하늘"과 시집 "저 어둠속 등빛들을
느끼듯이"가 있다.

     단풍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처럼 뒤채며 살려던 목숨이
  어째 볼 수도 없는 허공에서 아으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붙어 닢닢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상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에서 하늘 끝까지
  되돌아 아뜩 아뜩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군데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잽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노을

  1
  장돌뱅이 차림을 하고 꼭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저기만큼 걸어가고 있어,
  어릴 적 동뫼로 산소 가던 일, 할아버지
  상여 뒤를 따라가던 일들을 거푸 생각하며
  낯이 붉어 재개재개 따라 언덕 마루
  까지 와 보면 거기 고운 자줏빛으로
  텅 비어 있는..... 텅 비어 있는...

  2
  처음에 말씀이 있었읍니다
  저 푸른 하늘은
  그 님의 맑으신
  말씀입니다

  어머니 날 낳으셨지만
  어머니 또한 그 하늘의
  따뜻한 말씀
  세월이 자꼬자꼬 흘러가면은
  그리운 여자는 허리 그늘에
  긴 강을 두르고, 새끼들 머리 위론
  포장이나 치고
  나 죽으면 아무데도 안가겠어요
  어굴한 누님의 설운 이웃의
  숨결 어리어 떠도는 공중의

  나도 자줏빛 한 덩이
  말씀이 되어
  그때처럼 멀 멀
  밀리겠어요

 

  이종욱.1945년 경북 예천 출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년서 '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 구원의 소명을 완수
하려는 깊은 열망에 가득 차 있는 젊은 시인 중의 한 사람. 시집으로
"꽃샘추위"가 있다.

     꽃샘추위

  살아서 갚을 빚이 아직 많다
  새벽 공기를 돌려야 할 집이 아직 많다
  두드려도 울리지 못하는 가슴이 아직 많다
  죽어서도 물음을 묻는 무덤이 아직 많다

  우리 발에 올가미가 걸릴 때
  우리 목을 억센 손이 내리누를 때
  마주보는 적의 얼굴
  가거라
  한치도 탐하지 말라
  몇점 남은 우리 몸의 기름기를
  겨울의 마지막에 아낌없이 불을 당겨
  겹겹이 쌓인 추위 녹일 기름을
  한치도 탐하지 말라

  우리의 머슴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가져가거라
  마주잡는 손과 손을 갈라놓는 찬바람
  꿈에까지 흉측한 이빨자국 찍고 가는 찬바람을
  씨 뿌린 자가 열매 거둘 날이 가까왔다

  번개가 번쩍이는 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안다
  갚을 빚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안다
  식중독으로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
  우리는 하늘의 뜻을 버렸음을 깨닫는다
  무덤 속에서 살아 있는 불꽃과 만난다

  바람이 셀수록 허리는 곧아진다
  뿌리는 언 땅 속에서 남 몰래 자란다

  햇볕과 함께 그림자를 겨울과 함께 봄을
  하늘은 주셨으니


     돌

  화산의 입 안에서 지글지글 끓어오르다가
  우리와 더불어 닳고 있다
  장마에 씻겼다가 햇볕에 마르다가
  천둥번개 삼키고 심장이 튼튼해졌다

  돌 하나 품속에 간직하라
  차고 단단한 목소리 하나
  차고 단단한 슬픔 하나
  꼿꼿이 자랄 것이다
  한가닥 마른 번개 번쩍일 것이다
  영생불로의 바람 한자락 펄럭일 것이다
  곧게 내리꽂히는 햇살 한보자기 풀어놓을 것이다

  돌을 던져라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곳을 향해
  거짓된 침묵의 심장을 향해
  돌은 돌아온다
  빛은 이미 오래 전에 어둠을 꿰뚫었으나
  아직껏 거두어 가지 못하고 있다
  어둠 속에 불끈 버티고 선 돌
  뼈와  꽃도 숨기고 두 눈 부릅뜬 돌

  돌 하나 꿈 속에 간직하라
  차고 단단한 목소리 하나
  돌을 던져라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곳을 향해

 

  이중.1935년 경남 마산 출생. 숭실대학 영문과 졸업.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은 그는 전후의 단말마적인 아픔을 종교적인 경건성으로 극복하여
시화시키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시' 동인이며 시집 "땅에서 비가
솟는다"를 출간했다.

     타락사초

     --사도행전편

  1
  내가 동정을 잃었을 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가을의 향기 아닌
  가을의 무게
  나의 비밀과
  나의 키 높이와 몸무게와
  마취된 현기와
  그래서 더욱 두려운 것은
  가을의 무게
  내가 동정을 잃고 난 새벽에는
  개도 안 짖더라
  그째도
  나는 곧 이어 잠이 들었지

  3
  어느 날
  쮜틀에 잘못 걸린 내 왼손 엄지손톱
  보랏빛 피멍이 들었다
  오래 앓다가 새 손톱이 났다
  어느 날
  한밤에 깨어나 전등을 켜고
  쥐를 잡았다
  도망치다 피 토하고 죽어가는 쥐의 머리
  그날 그때부터
  탄해를 배운
  아무나 붙안고 탄해하고픈
  나의
  머리

  13
  굶지 않고 살아가는 자의 시를
  굶어 죽어가는 자에게 바치다
  굶어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음향-- 가녀린-- 들리던가-- 에
  굶지 않고 사는 시인은
  시계를 보다
  일어서다
  울음없다

  15
  팽이는 돌다가 멈춘다
  그 곁에서 나는 울고 있다
  무너지는 성 아래 수레는 멈추어라
  구심의 오늘은 가고
  우리는 이미 중력을 잃은 마을의
  고아들이 아닌가?
  팽이는 돌면서 멈춘다
  그 곁에서 울고 있는 나의 목덜미에
  하얀 물쭐기
  솟구치다
  바다로 솟아라

  17
  미래는 오는 것인가?
  흰 장미처럼 부서져
  유아들의 가슴에서 스러지고 마는 것인가?
  아득한 날에 쌓인 패총
  그 곁에서 내가 눈물로

  미래를 달리던 외론 벼랑에서도
  미래는 오지 않았다
  뜨물 속에 버려진 보석같이
  하수도로
  미래는 바다에서 스러지고 마는 것인가?
  난파 속에 산 혼은 어디 가고
  죽어도 웃음만 도는 그 혼은 어디 가고
  구걸의 하루 해도 또 어디로 가고
  흰 장미는 그 외론 영으로
  지각도 연착도 없이
  끝내 아니 오고
  마는 것인가?
  ...
  이름 없는 구름들의 무게에 매달려
  어디서 웬 새
  미지롭게 날아오듯
  종일을 짖다가 가고 마는
  개처럼 오는 것이다
  개에게는 먹이를
  새에게는 모이를
  카이자에게는 절대의 이름을
  절대에게는
  앉을 자리 없이 떠도는
  당신의 손끝까지 비어 있으시라
  미래는
  빈 의자에 방울지는 12월의
  빗방울처럼
  낮게 머리 위로
  오는 것이다

 

  이창대.1930년 함남 영흥 출생.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사상계"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새로운 정서를 새 형식에 담아 현대시의 정립을
모색하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무서운 유희"
"전망대"가 있고, '60년대 사화집' 동인이며, 현재 홍익여고 교사로 있다.

     애가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숨 막히는 이별은 말하지 않으리.
  여기로 불어오는 바람
  서러웁고
  저기서 울리는 종소리
  외로와도
  가만히 견디며 들으리라
  커다란 즐거움은 아픔 뒤에 오는 것.
  흐르는 강가에 가슴은 설레어도
  말하지 않으리라 이별의 뜻을.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나에게 잠들게 하라
  너의 그림자를.

 

  이추림. 1933년 전북 고창 출생. 본명은 동주.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1962년 장시집 "역사에의 적의"로 문단에 데뷔. 전통적인 가치관의
부정, 문명 사회 역시가 저지른 악의 고발, 절망, 고독, 죽음 등의 감정을
토로함으로써 언어를 카타르시스화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바다처럼

  E선 위릃 부는 바람처럼 가늘어서 좋습니다
  불길 위를 부는 바람처럼 더워서 좋습니다
  나무 위를 부는 바람처럼 자라서 좋습니다
  물 위를 부는 바람처럼 부드러워서 좋습니다
  바위 윌 부는 바람처럼 되돌려 주셔서 좋습니다
  구름 위를 부는 바람처럼 눈 부시어서 좋습니다
  하늘 속을 부는 바람처럼 모가 없어서 좋습니다
  노랠 수놓는 우아한 새 같은 당신
  모래 윌 부는 바람처럼 바람이 많습니다
  얼음판 위를 부는 바람처럼 당신은 맑습니다

 

  이탄. 1940년 충남 대전 출생. 본명은 길형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하여 '월탄문학상'과 '한국시협상'을 수상했다. 시집 "바람 불다"
"소등" "줄풀기" "옮겨 앉찌 않는 새" "대장간 앞을 지나며"가 있고 현재
외국어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구름

  관운장은 마량하고 바둑을 두고
  화타는 관운장의 팔에 스민
  독을 뽑는다
  관운장은 돌을 놓고 한잔하고
  화타는 살을 헤쳐내고
  뼈를 본다 푸르딩딩한 뼈, 독이 번진 뼈
  화타는 독을 제거하고
  관운장은 돌을 놓고 한잔한다
  아 이젠 팔이 가볍구나

  조조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피래미 등에도 묻어있고
  독전이 빗방울처럼
  추녀끝에서 떨어진다

  팔 또는 어깨
  심장
  위에 떠 있는 구름
  화타의 걸음

  헤르만 헤세의 구름도
  수염처럼 날린다.

 

  이태극. 1913년 강원 화천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한국일보'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한 그는 국문학도로서의 고유한 시가 형식인
시조에 심취 창작에 전념하기 시작. 저서로 "꽃과 여인" "고전국문학 연구
논고" 등이 있다.

     삼월은

  진달래 망울 부퍼 발돋움 서성이고
  쌓이던 눈도 슬어 토끼도 잠든 산 속
  삼월은 어머님 품으로 다사로움 더 겨워.

  멀리 흰 산이마 문득 다금 언젤런고
  구렁에 물소리가 몸에 감겨 스며드는
  삼월은 젖먹이로세, 재롱만이 더 늘어.


     낙조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둥둥 원구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큰 바퀴 피로 물들며 반 남아 잠기었다.
  먼 뒷섬들이 다시 환히 열리더니,
  아차차, 채운만 남고 정녕 없어졌구나.

  구름 빛도 가라앉고 섬들도 그림진다.
  끓던 물도 검푸르게 숨더니만
  어디서 살진 반달이 함을 따라 웃는고.

 

  이태수. 1947년 경북 의성 출생. 영남대 철학과 졸업.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보다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인. 시집으로 "그림자의
그늘" "우울한 비상의 꿈"이 있다.

     낮달로 슬리며

  서녘에 슬리는 낮달
  섶나무 그늘에 내려와
  푸새들과 흔들리는 푸새들의 꿈.
  여름 한낮의
  멎은 바람 가슴에 안기어
  땀 흘리는 한동안
  잠시 보이는 안개꽃, 지는 꽃보라.
  섶나무 뿌리만하게 발 뻗는
  나의 꿈, 뜬구름.
  풀섶에 묻히고
  낮달로 슬리는 내 이마의 그늘.


     옛꿈을 다시 꾸며

     --아우에게

  자라봉이 걸어온다.
  발목이 조금 삐인 채 다가서는
  산자락의 당나뭇가지에는
  우리가 걸어둔 눈물과 몇 개의 낱말들이 눈을 뜨고
  그때 날려보낸 모습 그대로의
  멧새 한 마리 파닥이며
  옛집의 처마밑을 선회하고 있다.
  눈을 들어라. 우리는 이제
  턱수염이 거칠어지고
  꿈도 몇 번씩이나 뒤집어 꾸게 되었지만
  그때는 옛날, 옛날엔 꿈이 컸다고 투덜대는
  그런 나이가 돼 버렸지만, 고향도 등졌지만
  눈을 들어라.
  시멘트 벽에 기대어 서서 자주 자주
  한숨 쉬고, 눈물을 훔치고
  이제 우리는 더 커진 눈으로 떠돌며
  아파해야 하는 철도 들었지만
  꿈은 아직도 왜 고향 하늘만 맴돌고 있는지.
  하늘 보기가 왜 이리도 어려워만 지는지.
  그러나 눈을 들어라. 오늘 나는
  옛집의 낯선 불빛 앞에 서서
  자라봉을 끌어안고 있으니,
  우리가 걸어두었던 눈물빛과 몇 개의
  낱말들을 부여안고
  하늘 저켠, 흘러가는 구름에 떠 흐르는
  희미한 꿈조각을 더듬고 있으니,
  눈을 들어라.
  언제나 우리는 헛돌고 있을지라도
  헛돌지 않을 날을 꿈꾸며
  밤을 건너면서, 옛꿈을 다시 꾸며...

 

  이하윤. 1906년 강원도 이천 출생. 호는 연포. 일본 호오세이 대학
졸업. 1930년 "시문학" "문예월간"을 주관하면서 해외 문학을 소개했고
서정시를 발표했다. 시집으로 "물레방아" 등이 있으며 정선된 언어와
부드러운 서정성이 주조를 이루어 애상적인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들국화

  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넓은 들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나는 이 땅의 시인을 사랑합니다.
  외로우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꽃처럼
  빛과 향기 조금도 거짓 없길래
  나는 그들이 읊는 시를 사랑합니다.

 

  이향아. 1941년 충남 서천 출생. 경희대 및 동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전공.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황제여" "동행하는
바람" "눈을 뜨는 연습" "물새에게" 등이 있으며 '문채' 동인. 현재
호남대학 교수.

     음미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한 모금의 차는
  발톱으로 흘러가고 코끝으로 흐른다.
  발톱으로 가서는 내가 딛고 나설 땅이 된다지만
  코끝으로 간 것은 울음만 된다.
  울음이 부서지면 산그늘로 숨지만
  내 하늘을 채우고도 되레 남는다.
  백자같이 너그러운 한낮
  수정같이 도도한 밤
  풀길없는 갈증으로 남는다.

  내가 마신 한 잔의 커피로는 안 될 것이다.
  발톱에서 코끝으로 오르는 파란만장한 질곡을
  귀먹은 아우성을
  내 철 없는 열증을
  나는 안다.

  어림도 없는 것이다.

 

  이형기. 1933년 경남 잔주 출생. 동국대 불교과 졸업.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 초기의 전통 서정시에서 전환하여 최근에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보려는 시를 쓰고 있는 것이 특징.
시집으로는 "돌베개의 시" 등 다수가 있으며 현재 부산산업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시협상' '부산시문화상' 등 수상.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비 오는 날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년환각

  자라서 늙고 싶다
  나는 한 그루 수목같이

  먼 여정이 끝난 곳에
  그늘을 느린 나의 추억

  또 어느듯 하루 해가 저물어
  그곳에 등의자를 내려놓고 쉴 때--

  눈을 감고 있으면
  청춘의 자취 위에 내리는 싸락눈
  표백된 비극의 분말

  --그러나 나는
  겨울날 단양한 양지짝에
  누워서 존다

  육중한 대지에 묻힌
  사랑과 미움

  내 가고난 다음 천년쯤 후에
  자라서 무성한 가지를 펴라


     종전차

  멀리서 삐걱거리며
  종전차는 간다.
  마즈막 기대가 실려 간다.

  내 가슴에 역력한 차바퀴
  여인아
  그곳에 눈물을 쏟으라

  약한 자의 침실에는
  달이 비칠 것이다. 오늘밤
  자비의 명월이

  다사롭고나. 오히려
  생활에 찌든 검은 손등을
  어루만지는 자비의 월광

  아아 인생의 희비는
  가벼운 싸락눈이다.
  또 그처럼 무심한 은혜다.

  어디에서고 내가
  팔을 벼고 누웠는 창 밖을
  가는 종전차.


     나의 시

  나의 시는 참으로 보잘 것 없다.
  먼 길을 가다 말고
  잠시 다리를 쉬는 풀섶에

  흐르는 실개천
  쳐다보는 흰 구름

  또는 해질 무렵 산허리에 어리는
  저녁 안개처럼 덧없이 가볍다.

  아, 보랏빛 안개 서린 희노애락
  먼 길을 가며 보는 강산풍경...

  일모와 더불어 귀로에 오르는
  내 이웃들의 단란을 빌고

  외로운 사람의
  불을 끈 창변에
  서늘한 달빛같이 스미고 싶다.

  여류한 세월에 물같이 흐르는
  흘러서 마지 않는 온갖 인연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싶다.


     호수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들길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서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송가

  나는 아무것또 너에게 줄 것이 없다
  다만 무력을 고백하는 나의 신뢰와
  그리고 이 하찮은 두어 줄 시밖에.

  내 마음 항아리처럼 비어 있고
  너는 언제나
  향그러운 술이 되어 그것을 채운다.

  정신의 불안과 그보다
  더 무거운 생활에 이끌려
  황막한 벌판
  또는 비내리는 밤거리의 처마 밑에서
  내가 쓰디쓴 여수에 잠길 때
  너는 무심코 사생에 주었다
  토요일 오후의 맑은 하늘을.

  어쩌면 꽃
  어쩌면 잎새
  어쩌면 산마루에 바람소리
  흐르는 물소리

  아니 이 모든 것은 전체와 그밖에
  또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토지와
  차운 대리석!

  아 너는 진실로 교목같이 크고
  나는 너의 그늘 아래 잠이 든
  여름철 보채는 소년에 불과하다.

 

  이활. 1925년 함북 온성 출생. 경성교보 졸업. "신천지"에 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엔솔로지 (현대의 온도)를 비롯, '다이얼' 동인으로서
초창기 다다이즘에 심취 그 계통의 많은 시를 발표하였다. 현재는 함석헌
선생과 함께 노장사상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장미원 저택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낙서가 된 앗시리아의 벽화

  애정에 괸해서
  이야기한 기억이 없는 일력 밑에서
  달은
  거울 속에 부서지는
  지구의 반란과 마주 서 있다.

  홍소처럼
  무너진 교당의 유적 위에
  달을 불러다 놓고
  그가 저지른 범죄를 심문하기 위하여
  '메피스트'는 시의 여백에서
  그를 고문하는 시인이었다.

  그때도
  실상은
  꾸겨진 얼굴을 그대로 포장하고
  달은
  하늘에 목을 걸고 있었다.
  옷을 베낀
  '브르똥'의 진실처럼.

 

  이희승. 1896년 경기 광주 출생. 호는 일석. 이화여대, 서울대 교수 및
성균관대학원장을 지냄. 시조집으로 "박꽃" "심장의 파편"과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 "소경의 잠꼬대" 및 "역대 조선문학 정화" 등의 저서가
있다.

     추삼제

     벽공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를
  드리우고 있건만.

     낙엽

  시간에 매달려
  사색에 지친 몸이

  정적을 타고 내려
  대지에 앉아보니

  공간을 바꾼 탓인가,
  방랑길이 멀구나.

     남창

  햇살이 쏟아져서
  창에 서려 스며드니
 
  동공이 부시도록
  머릿속이 쇄락해라.

  이렇듯 명창청복을
  분에 겹게 누림은.

 

  이희철. 1930년 전북 장수 출생. 호는 오천. 충남대 졸업. "문학예술"을
통해 데뷔(1956)하여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시집 "종점부근"이 있다.
현재 중앙여고 교사로 재직.

     낙엽에게

  떨어져 가야 하는 까닭을
  다시 알고 싶다.

  마치 층계를 내려가는
  얼마나 오랜 순간이기에
  나의 눈이 머물러 있는 공간을 지나는지
  알고 싶다.

  공간은 너의 뒤에서 하나 둘 제 위치를 마련하고
  텅 빈 배경을 이웃한
  어디쯤 나는 있는가.

  낙엽이여
  나를 부르지 말라.
  나의 안에서 넘치고 있는
  엄숙한 가을을 향하여
  참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마련된
  기도의 말씀으로
  떨어져 오라.

 

  인태성.1933년 충남 예산 출생.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이며
"문학예술"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잔잔한 관조속의 날카로운
이성을 감각적으로 노래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시집으로 "바람 설레이는 날에" 외에 작품 다수를 발표.

     투우

  내닫는 검정소 무딘 발굽 아래
  긁히는 땅거죽 먼지를 올린다
  붉은 보자기 겨냥하는
  세운 두 뿔, 속력을 달아 휙휙휙
  훌렁대는 바람막 찢기는 소리

  겹쳐드는 벽과 벽
  공기는 숨구멍 틀어막는 투박한 마스크
  설치고 치받아 끊일 새 없이
  이승 저승을 가름하는 극한선 위로
  몸뚱이를 반반씩 걸치면서 넘나든다

  날쌘 몸짓 소리 없는 비명
  그늘에 숨어 덮쳐오는 그
  어둠을 꿰어 한 형체를 뭉쳐 내려는 그 그
  그 아픈 숨결 돌틈으로 끼어 잦아들어
  죄어드는 힘줄은 전신을 묶는 듯

  두 도가니는 절절 생목숨을 끊이지만
  곤두서는 서릿발이 살갗을 선뜩인다
  밀물 썰물이 마주 당기고 밀치다가
  차고 뜨겁게 솟구쳐 부서질 때
  후두둑 끊기는 듯 이어지는 마음의 사슬

  나간 넋을 불러들여
  불에 불을 붙이는 눈
  캄캄한 표적을 번갯날이 잡는다
  죽음은 막 추상 속에서 뛰쳐나와
  바위 덩어리 되어 나뒹군다

  쾅--무너지자 이내
  막판을 뒤덮는 더 크다란 그림자
  삽시간에 하늘이 땅이 휑하게
  함성을 쓸어내고 숨소릴 누르는 관중
  손아귀에 승리를 틀어쥔 그는 비틀거린따

  공허가 찌르는 칼을 받으며 비틀거린다
  하아얀 낮달이 팽팽팽 어지럽게 돌아
  쩡기 걷히는 눈에 장막을 치는 뽀오얀 안개
  둘러 솟은 산들도 점점 나직이 가라앉는 듯
  외치는 높은 물결도 꿈속처럼 귀에 멍멍하다

 

  임강빈. 1931년 출생.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관조하는 자연과 사물과의 친근감을 승화시키는 시들을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당신의 손" "동목" 등이 있다.

     코스모스

  하얀 창 앞에
  마구 피어 오르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다.

  바다 앞에
  날리운 모닥불 같은 것으로
  스스로 전율에 이어 온
  사랑

  여기 아무도 반거할 수 없는
  하나의 지역에서
  가을의 음향을 거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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