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난해성은 익숙한 것을 뒤집을 때 오는 건지도 모른다. 뒤집힐 때 낯섦을 느낀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래로 거의 같은 운율과 시법으로 쓴 시는 이제 식상하다. 익숙한 것일수록 사람들은 별 의식 없이 자동으로 인식한다.
우리 시단의 시를 보면 ‘수필 쓰면 되지 굳이 왜 시를 붙들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시인은 기존 언어질서를 파괴하려고 나온 자다.
노벨문학상(1948년)을 수상한 T. S. 엘리엇(1888~1965)이 22세 때 쓴 시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는 무명시절 숱한 잡지사에 투고했지만 난해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는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에즈라 파운드의 천거로 시카고의 잡지사 ‘포에트리지(誌)’를 통해 발표된다. 후에 ‘황무지’와 함께 위대한 작품으로 사랑받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이상은 진짜 시인이란 생각이다
. 여전히 독창적이고 긴장을 준다. 요즘 미래파의 시는 실험적이다. 그걸 나무라는 서정파 시인이 많은데 그건 잘못이다.
누구나 알아서 좋은 게 아니라 아무도 몰라서 더 좋을 수도 있다.
진정한 실험의 결과라면 좋을 수 있다는 게 형식주의자인 나의 생각이다.
누구나 이해하는 그런 의미로 와닿는 시적 세상은 인간을 크게 카타르시스시키지 못한다. 완성도가 높은 시일수록 독자를 ‘당황’시킨다. 시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 질서와 무질서와 혼돈의 경계에 서 있다. 시인은 질서도 봐야 하지만 카오스도 함께 거느려야 한다. 경계의 시인이 ‘미치광이’처럼 보일 때도 있다. 뻔한 생각에선 뻔한 시밖에 나오지 못한다.
이춘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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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와 지켜야 할 원칙 있다.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더 깊은 메시지 전달 가능…
극단적 미래파 詩는 사기”
나같이 50여 년 시를 쓴 사람조차
이해하기 힘든 극단적 미래파 시는 ‘사기’다. 시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예컨대 마누라가 도망쳤다고 해서 무단히 행인 납치소동을 벌이는 것처럼 난해하다. 그냥
주목을 끌어 자기를 내보이려는 행동이다.
‘사슴이 오늘 과수원에 갔습니다’ 혹은 ‘사슴 한 마리가 학교에 갔습니다’, 이 경우 사슴과 과수원, 나와 학교는 각각 등가성을 가진 단어들로 나를 사슴으로, 학교를 과수원으로 환치시킨 것이다. 이 문장은 비록 단어들을 등가성을 지닌 다른 단어들로 바꾸어 놓긴 했으나 아직 언어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가령 ‘사슴, 하늘, 나무, 달린다’란 문장을 보자.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등가성과 인접상이 배제된 언어들의 무분별한 공간적 나열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파 시는 마치 신을 배제한(혹은 타살한) 오늘의 물질문명이 결과적으로는 인간 그 자신조차 비인간화시키는 결과물로 보인다.
신사조에 사로잡혀 비록 난해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깨버려서는 안 되는 금기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더 이상 언어의 본질을 훼손한 언어, 소통 불능의 난해한 언어를 지향해선 안 된다.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이춘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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