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01월 27일 09시 30분 ]
시의 재료는 바로 시인 자신이다 / 김 경 주
어떤 죽음
죽은 그의 얼굴엔
젖은 신문이 흡착되어
그의 눈과 귀와, 그리고 코를
그 입을,
잘 염습하여
숨을 막고 있었다
죽은 그의 귀와 눈
시즙이 흐르는 입 속엔
썩은 텔레비전이, 텔레비전 애벌레가
살았다, 살아있었다
신문을 뚫고 기어 나왔다
졸시 ‘어떤 죽음’은 신문으로 얼굴을 덮어 둔 어느 노숙자의 주검을 본 순간 충동을 받아 쓴 시조이다. 그것은 평소 내 의식과의 돌연한 만남이었다. 그 노숙자는 아마 기아와 한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얼굴에 덮혀 있는 신문지 한 장 때문에, 그 죽음의 원인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언어 등에 의한 무차별적 공격성에 있다는 충동을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매스미디어 등의 언어에 의해 종속되고 오염되고 세뇌되어 휩쓸린다는, 그래서 개인의 생명력은 사라지고 신문이나 텔레비전만 얼굴 없는 대중(민중) 속에 살아있다는 평소의 고뇌가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풀리지 않고 있었는데 이 노숙자의 죽음을 보는 순간 부싯돌을 치는 것처럼 뜨거운 영감과 함께 풀려나온 것이다.
신문이 젖어 흡착되었다느니, 생명의 구멍들을 모두 막아 염습하였다느니, 시즙이 흐르는 입 속에서 텔레비젼이 기어나온다는 것 등은 물론 팽배한 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본디 온전한 생명력을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된다고 한다. 분별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많은 능력을 잃게 된다고, 그것이 곧 적응이라고 탈무드에서도 그리했듯이, 성경에서는 에덴의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분별심(선이니 악이니 하는)이 생겨 마침내 완전한 삶을 상실하고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불가에서는 알음알이와도 같은 분별심을 버리는 것을 해탈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분별심은 언어에 의해 발생하는 관념이다. 우리들은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삶을 표현하고 완성한다. 그러나 사실 언어 때문에 관념이 형성되고 모든 고통은 관념 때문에 일어난다. 언어가 없는 동식물이나 무정물은 사고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관념을 만들어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들이 만든 것에 종속되고 노예처럼 끄달리는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모두 행복 때문에 불행한 것이며, 그런 분별의 언어 장난으로 생사를 구별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신神 또한 인류가 만들어낸 환상의 지팡이이며 굴레가 아니던가.
시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삶을 표현하거나 완성한다. 그러나 시인이 표현하고 완성코자 하는 세계는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창조의 세계이다. 언어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많은 량의 언어를 소유하고 이용하지만 언어에 대한 믿음과 애착은 옛 사람들에 비해 빈약하다. 언어의 지시성, 도구성에만 의지하다 보니 언어가 가진 고유의 정서적 환기나 음악성 등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언어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어 언어의 객관적 일반적 지시성보다는 주관적인 창조성과 음악성을 믿고 있다. 시인은 언어의 내부에 켜진 불뿜는 이미지를 사냥하는 사람들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다. 이 불가분의 관계에 의해 시인은 언어에 종속되지 않고 언어와 함께 숨쉬고 살아가며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동반자가 된다.
언어는 인간과의 관계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언어를 사고의 통로라고도 하고 존재의 집이라고들 하는 것이다. 한 겨레의 언어는 그 겨레가 전 역사를 통해 이룩해 낸 온갖 사고의 집약이라고 일찍이 석학들은 설파했다. 그러므로 언어 속에는 의미가 갖는 지시성 외에 그 겨레의 얼과 문화와 정서, 역사적인 환기, 음악적 문양 등 독자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생명력이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미 언어가 만들어 놓은 상황에 대해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상황을 새롭게 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언어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내포적 의미를 확산시키는 작업이다. 언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일상적인 삶 또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언어의 일상적 의미 즉 지시성이나 도구성에 의존하는 신문 같은 기사 속에는 그것을 쓴 개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대량의 언어군이 우리 생활 속에 정보라는 이름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지만 우리는 그 정보에 대해 자신 있는 결단을 내릴 수도 없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오히려 상황은 더욱 혼미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신문에 사용되는 언어가 기업이나 권력 따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신문의 언어가 권력화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핍박당하고 있는가. 그들이 보도하는 뉴스는 사건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낸 그들의 상품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 속의 언어는 온갖 관념을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하는 죽은 언어이다. 사어의 바다에서 숨가쁘게 자맥질하는 시인은 이러한 현실이 괴롭다. 어떤 대상이 언어에 의해 종속되어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도 괴롭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외부현실을 내부적 현실로 받아들여 고뇌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 외부현실을 의식 속에 가열케 하고 성숙케 하여 새로운 내부적 현실로 발효시킨다.
말이 한참 돌아왔지만, 결국 시인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일상적의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내용을 형상화하여 설명이나 객관성을 벗어나 감각적으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시의 작법에 대해 소개해 놓은 대부분의 책들은 시를 쓰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소재, 제재, 모티브(동기), 테마(주제)의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 쓰기의 통일된 생명력을 분해하여 나열해 놓은 것으로서 마치 삶을 분해, 분석하여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일부분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는 없다. 삶이란 총체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시 또한 삶에 대한 이해와 주장이므로 이러한 방법은 시를 쓰는 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시를 써 보면, 의식화되어 있는 혹은 시인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어떤 강렬한 충동이(동기,주제) 어떤 대상이나 현실과의 돌연한 만남에 의해 구체화되고 형상화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시인의 내적 충격이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언어는 비로소 도구적 차원에서 승화되어 시적상황, 시적현실로 창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시인의 내적충격은 목적이나 본질에 앞서는 불가피성에 의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불가피성은 평소 시인이 쌓아온 경험과 사상과 철학과 사회현실 혹은 역사의식 같은 총체적으로 들끓고 있는 에너지에서 분출하게 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에너지가 늘 충만해 있는 긴장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백일장 같은 행사에서는 소재 혹은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시 쓰기를 강요하기 때문에 소재가 시를 쓰는 사람의 내적충동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실패할 수 있다. 화가들은 자기가 터득한 기법에 의해 언제나 어느 정도 수준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겠으나, 시인은 한 마디도 쓸 수 없을 수 있다. 시는 손끝에 의해 씌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문학의 꽃, 예술의 꽃이라고 특별히 지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언어이다. 그것은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 언어 안에 불씨처럼 박혀있는 상상력에 의한 영상의 환기 같은 것이다.
한 편의 시의 가치는 현실 속에 있는 외적인 사물이나 외적인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재는 시의 가치와는 관계가 없다. 시에 동원된 소재, 현실의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일단 시적 언어 속, 허구 속에서 해체 되거나 재조립을 본 언어의 관계 속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림의 재료는 물감이고 시의 재료는 언어이다. 화가는 물감으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인은 언어로 되어 있는 환등이요 꿈이다. 시인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말은 시의 재료가 바로 시인 자신이라는 뜻이다. 시인 내부에 몽롱하게 켜져 있는 의식의 등불이 대상(언필칭 '소재'는 촉매일 뿐이다)을 꿈속처럼 비추어 새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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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꽃 / 김춘수
꽃
김 춘 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집 <꽃의 소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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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김 춘 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김춘수 시집 <꽃의 소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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