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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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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 - 시에서 비움의 미학
2016년 03월 12일 03시 24분  조회:4288  추천:0  작성자: 죽림
당신의 품속에서 완상하는 것들과… 2 . 1

-이시환의 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 삼각산이 시원하게 보이는 집에 살면서 매일 아침 그것과 대면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그의 안부를 묻는 것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날은 반쯤 구름에 둘러싸인 채로, 어느 때는 비구름에 가려져서 자취를 감추고, 어느 때는 그 옆에 두 채의 솜을 틀어 두었는지 흰 구름 덩어리와 함께 나타나곤 한다. 그도 아닐 때는 종일 비구름에 가려 볼 수 없는 채 하루가 지날 때도 있다. 그 속에서 느끼는 것은 자연도 인간처럼 어느 한 순간도 똑같은 모습을 취하지 않고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인수봉을 바라보고 계곡을 따라서 3, 40도 경사진 산을 오르다 보면 진달래능선에 이른다. 그 능선의 등산길에 봄에는 길 양쪽으로 진달래가 만발하여 두 줄기 꽃불 속으로 걸어가곤 한다. 진달래능선에서 마주 가깝게 보이는 인수봉의 위용은 이 삼각산이 과연 수도의 북쪽 영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철마다 변화되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인간의 삶은 하나의 티끌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말없이 전해오는 저들의 침묵일 게다.

침묵 속으로 산길을 따라 걸으면 답답한 마음도 다 정화가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장마철에는 계곡에서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이 고요한 산의 침묵을 깨지만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생기를 찾는다. 물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물관이 잘 도는 것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원해진다. 봄이면 피는 진달래, 개나리, 철쭉, 황매화, 복숭아꽃을 비롯하여 땅바닥에서 낮게 피어있는 오랑깨꽃, 할미꽃이나 까마귀발의 흰 꽃은 청초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산에서 생텍쥐페리의 동화 속 어린 왕자와 비행사를 만나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와 카라마죠프네 알료사를 만나고, 『광장』의 이명준을 만난다. 그들은 자연의 인수봉과 꽃들과 얘기하는 새에 우리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사막에서 러시아의 시골마을과 유형지 시베리아를, 이명준이 타고 있는 동중국해에 떠 있는 타고르호에 이른다. 이들은 사랑을 위하여 몸을 던진 이들이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을 위하여 자기 몸을 던질까. 참으로 무서운 영혼들이다. 인생을 불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던 작가들의 혼이 이 주인공들에게 투영되어 있음을 가늠해 본다. 마지막 비행으로 몸을 던진 생텍쥐페리, 자신의 다시 얻은 삶을 소설에 바친 도스토예프스키, 디아스포라의 고독한 영혼인 최인훈, 이런 것들이 머리를 스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인 것 같다. 분단과 산업화 과정에서 이향(離鄕)을 하였던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이 거대한 도시 서울이다. 한강의 기적 뒤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는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위무 받고자 하고, 잃어버린 것들과 잊혀져간 것을 위하여 조사(弔辭)를 바쳐야 될 듯하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그런 과정이 없었으면 안 되었을 거라고, 그 과정의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보니 여전히 성장 이데올로기만 대세인 이 세태를 보면 우리는 아직도 부재의 미학을, 부재의 철학을, 비움(kenosis)의 삶을 실천하기에 역부족인 듯하다. 비움은 사랑의 표현이다. 비움을 산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에는 비움의 미학이 있다. 비움은 너와 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너와 나」를 읽어보자

 

네가 울면 나도 울고

네가 웃으면 나도 미소 짓는 것이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나으면 나도 나아지는 것이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너와 내가 하나 되고

너와 내가 한 몸일 때

우리는 사랑, 우리는 자비.

 

-2005. 01. 31.00:13 「너와 나」전문

 

이 시는 두 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벌판을 배경으로 하여 인쇄되어 있다. 벌판에 선 두 나무는 서로 의지하며 지낸다. 벌판에서 불어오는 비바람도 눈도 같이 맞으며 여름의 뙤약볕을 쐬면서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내왔을 것이다. 저 멀리 나무숲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두 그루이되 한 나무이고, 한 나무이되 두 그루의 나무이다. 이 수묵화 같은 사진을 통하여 시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시인은 안배하였을 거라고 생각된다.

벌판은 광야이다.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광야로 피투된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을 머물러 어미의 피로 사람 모습을 갖추고 산도(産道)를 통해 안에서 밖으로 피투되면서 인간에게는 넓고 커다란 광야가 기다리고 있다. 그 광야는 인간이 건너 가야할 곳이다. 광야를 넘어 피안(彼岸)으로 들어가듯 피안을 가기 위해 광야의 여정은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삶의 피투성이 지닌 본질이다. 광야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 너와 내가 서로 사랑과 자비로 살아간다면 광야의 삶이 수월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던가? 신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40일 동안 이른 아침에 내려주는 일용한 양식인 만나에도 -한 때 쫓기는 자들로 광야에 온 그들에게 만나는 신이 내린 달콤한 빵과도 같았다- 물리기 시작하고 서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방탕, 불륜의 생활 끝에 다다른 것이 우상숭배였다. 자신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준 자신들의 신(神)을 저버렸던 것이다. 한 때의 감사와 신에 대한 사랑의 빛나던 맹세는 그야말로 빛을 바래고 이방신을 섬긴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래 지녀야할 인간의 모습을 저버린 것이다. 인간의 창조 목적에 전혀 부합되지 않게 전도된 것이다. 삼라만상을 사랑으로 거느리고 서로 사랑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도록 지어진 인간이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 영적 타락의 결과는 자기가 믿었던 신을 배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오다가 어떤 기회에 그것을 배반하면 그는 스스로 타락하여 영혼의 밝은 등불이 꺼지고 만다. 하느님은 너와 내가 만나 하나의 투명한 전등을 밝게 비추어주길 바라며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두 개의 밝은 등불이 하나가 되고 우리가 되어가는 것을 노래하였다. 이 빛은 바로 광야의 거친 삶을 비추는 자량(資糧)이 되는 빛이다. 그 자량은 바로 사랑과 자비이다. 시인은 제3부의 시장에 자신의 탯줄인 어머니에 대한 산문과 시를 실었고 그 어머니의 사랑, 너와 나의 사랑, 우리의 사랑 또는 자비를 노래하였다. 시인이 늘 가까이 하는 차를 소재로 한 시 중의 절편인 「용정차를 마시며」에서도 시적 화자는 차를 너로 부르면서 차를 마시며 머무는 그 고요와 침잠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는 「벗들에게」에서도 차를 마시는 그의 작업실과 대립적인 ‘가시 돋친 말들과 眞意를 숨기고 있는 말들이 무성하여 늘 살얼음을 걷는 것’ 같고, ‘是非를 가리고 善惡을 구분 지으려는 억지가 난무’하는 바깥 세상에 대해, 멀리 길림성 화룡에서 문우가 보내온 명차[茗茶:작설차의 한 가지임]와 웅장한 성(城)을 이룬 한 편의 시에 빠지는 기쁨과 안온함으로 바깥세상을 잊고자 한다.

시와 차는 그에게 바깥세상으로부터 ‘귀를 닫아’ 버릴 수 있는 그만의 장치인 셈이다. 「함박눈」에서는 어머니의 포근한 품 속 또는 자궁에서의 기억, 차, 벗, 너와 나, 우리가 어우러져서 아주 느리게 풍성하게 묵직하게 내리는 함박눈을 완상하면서 시인의 옆에는 한 잔의 차와 창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연상 시키도록 이 3부가 연관성 있는 시들로 짜여져 있어서 낮으며 깊고 풍성한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사랑과 자비는 느린 것이다. 어떤 통계나 수치, 타산을 구하는 세상의 반대에 있다. 느리기에 다 품어갈 수 있다. 느리게 풍성하게 내리는 함박눈처럼, 어머니의 품 또한 그렇다. 이시환 시인은 이 점을 안배한 것이다. 이 다섯 편의 시가 상호 연관을 맺으면서 서로 포섭되는 상태이다. 그러면서 차에 녹아들고 함박눈으로 두터운 이불을 덮는 것이다. 마치 연인들이 서로 깊이 몸을 나누고 도타운 한 이불을 덮어 씨앗을 품고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느낌의 시편들이다. 열락의 끝에 오는 안온함을 감지하게 한다.

제4부는 <부처님의 바다>라는 산문에 이어「금편계곡에서」, 「너와 나-금편계곡에 부쳐」, 「금편계곡의 혼」, 「구름바다」, 「황룡동굴」, 「장가계를 빠져나오며」, 「동해와 서해」, 「바다-그리운 이에게」의 8편의 시가 실려 있다. <부처님의 바다>에는 부처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크고 작은 생명체를 강물로 빗대고 있고, 그 강물이 흘러 들어가는 곳인 바다를 여래의 세계로 빗대고 있다”고 시인은 독자에게 소개하여 준다. 강물과 바다를 통해서 유와 무의 존재를 제자 카샤파에게 설명하는 부처님의 탁월한 수사적 표현능력에 대해 시인은 감탄한다. 여기에서 바다는 부처가 깨달은 여덟 가지 도(道)를 의미한다.

 

누가, 눈먼 내 소맷자락을 잡아끄는가?

낯선 그대 손길에 이끌리어 한 걸음 두 걸음

더딘 발걸음을 옮겨 놓으면 놓을수록

어느새 이 몸에도 초록빛 물이 들어

물가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가 되고 마네.

 

누가, 벙어리가 된 내 귀에 속삭여대는가?

가도 가도 끊기지 않을 물길 따라

이미 나도 흐르기로 했네, 흘러가기로 했네.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저 깊은 하늘에 이르는,

숨 쉬는 물이 되기로 했네, 구름이 되기로 했네.

-2004. 12. 24. 22:37 「금편계곡에서」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금편계곡에 매료되어 한 그루 나무가 된다. 물론 금편계곡이 낯선 그대일 것이다. 그러나 제2연에 오면 계곡의 물길 따라 시적 화자는 자신도 흐르기로 했다고 하여 부처가 말한 ‘강’이 되고자 하고, 그 강은 흘러서 하늘에 이르러 숨 쉬는 물이 되고, 구름이 되기로 한다. 그 구름은 또 비가 되어 강물이 되고 바다로 이른다. 이와 같은 자연의 순환 속에 시인은 강물에서 바다로 흐르듯 부처의 바다로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금편계곡이 여인네가 되어 시인의 소맷부리를 잡아끌고 들어가기도 하고, 시인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는 등 활유법을 써서 정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쯤에서 한 사나흘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밤낮없이 흐르는 소리를 듣노라면

눈을 감아도 저들의 알몸이 보이고,

그 알몸 속 투명한 영혼의 옷자락도 보이리라.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저들이 내게 건네는 말소리 들리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들리고,

저들의 숨을 죽이는 숨소리마저 들리리라.

 

이젠 내가 뒹굴던

호남평야 끝자락 허허벌판에 서 있어도,

배회하던 서울 시내 칙칙한 뒷골목에 서있어도,

멀리 아프리카 초원이나 사막에 서있어도,

그 어디에서든 나는 듣는다, 너의 속삭임을.

발뒤꿈치를 종종 따라다니는 너의 숨소리를.

 

-2005. 01. 02. 11:45 「너와 나-금편계곡에 부쳐」부분

 

구름인 듯 안개인 듯 끼인 깊고 깊은 금편계곡은 마치 꿈길을 걷는 것과 같이 몽환적이다. 그 가운데에 고요하게 물소리가 들린다. 시인이 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듯이 독자들로 하여금 몽환의 세계로 이끌어 흐르는 물소리를 듣게 한다. 심심유곡의 암벽이 펼쳐진 구름인 듯 안개인 듯한 것에 가려 있고, 시인은 독자들에게 사진을 통해 완상 기회를 준다. 그 물소리의 속삭임과 숨소리가 얼마나 기억에 각인 되었던지 여행지에서 돌아온 일상의 공간에까지 침투한다. 물은 그 어떤 장벽 속에서도 흐른다. 기억의 벽도 부수고 시간과 공간의 벽도 부순다. 시인과 독자의 벽도 부순다. 그 부수는 품새가 부드럽고 몽환적이며 자연스러운 침투성을 가진다. 이 시에서 시인은 그것을 의도한 듯하다. 그 강물은 물론 부처의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 될 계곡의 물이다. 그래서 「금편계곡의 혼」에서 시인은 “아니,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게 아니라/나는 무언가에 이끌려 들어간 것이리라.”라고 말한다. 자연에 자연히 포섭되어 이끌려 들어가고 그것을 완상하는 시인은「구름바다」에 이르면 자연과 서로 번롱(翻弄)한다.

 

비행기 창밖으로 내다보는

저 뭉실뭉실한 구름바다

 

마치 어머니의 손길이

햇솜을 막 펼쳐놓은 듯

 

그 위로 뛰어내려

마냥 뒹굴고 싶어라.

 

오늘은 이곳

천자산(天子山)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그가

 

마치 비단 치맛자락을 갈아놓은 듯

나를 유혹하네.

 

저 거룩한 왕국의 침대로

저 황홀한 침실의 왕국으로.

 

-2005. 01. 02. 20:29 「구름바다」전문

 

뭉실뭉실한 운해를 바라보며 시인은 어머니의 손길을 느낀다. 가슴이 아슴해진다. 햇솜을 막 펼쳐 둔 듯한 운해에 뛰어내려 어린 아이처럼 뒹굴고 싶어진다. 이것은 여행 중 비행기 창밖으로 본 구름의 풍경이 어린 아이와 같은 무구하고 어머니와 아이가 한 몸일 때의 상상계(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들인다면 오늘 천자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운해는 제5연에서 한 여인이 되어있다. 시적 화자는 한 어엿한 남성이 되어 비단 치맛자락을 펼친 여인에게 유혹을 느낀다. 그 유혹에 이끌리어 “저 거룩한 왕국의 침대로/저 황홀한 침실의 왕국으로.” 몸을 던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지막의 제6연이 세속 남녀의 침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친다면 이 시는 더 이상의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 ‘거룩한 왕국의 침대’나 ‘황홀한 침실의 왕국’에서 알 수 있듯이 밥국(法國)의 침상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된다. 그 이유는 그가 금편계곡의 물이 강물이 되어 법해 즉 부처의 바다로 이른다는 것을 의도하고 시편들을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계곡, 운해, 강물, 바다가 이시환의 시에서는 여성이미지로 표현되어 있고, 특히 계곡이나 「황룡동굴」에서의 동굴 등은 여성의 자궁으로 비유되어 그 생명력으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나를 너를/일으켜 세우시라./일으켜 세우시라.”라고 부르짖고 있다. 이 여성은 늘 시인이 바라보는 바다이다. 「바다-그리운 이에게」를 읽어보자.

 

바람 속에 자그만 집을 짓고

하루 종일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네.

 

일 년 열두 달을 지켜보아도

한 번도 같은 얼굴을 보이지 않는 바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너의 눈빛이 참으로 맑으이.

 

-2004. 11. 7. 12: 24 「바다 -그리운 이에게」전문

 

시인은 한밤중에 시를 쓰기 위하여 바람 속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한다. 바람과 바다는 우주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 자그만 집의 창밖으로 바다를 늘 바라보지만 한 번도 같은 얼굴로 보이지 않는다. 우주처럼 바다도 변화무상하다. 이 바다를 시인은 친구처럼 연인처럼 생각한다. 어느 때보다 눈빛이 맑은 날의 바다에 대한 시이다. 맑은 날 정오를 지난 시간대의 투명한 햇살 속에서 바다의 빛은 다정한 연인의 맑고 고운 눈빛이다. 그리운 마음속의 님의 눈빛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것처럼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운 님의 눈빛을 생각하는 시이다. 바다는 너와 나를 이어주는 것이며, 그 바다는 우리를 품어주는 곳이다. 여기엔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서로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런 자연의 무아지경이 시인을 이끌어가고 있는 시편들이 이 시집에는 단단히 엮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장가계를 빠져나오며」에서 ‘침묵, 침묵을 지키리라.’라고 다짐한다.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

바다가 솟아올라

높고 깊은 산이 되었는가.

 

실로 오랜 세월,

안개에 가리우고 구름에 덮이어서

알몸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던 네가,

 

오늘 비로소 한 마리 거대한 地鬼가 되어

꼬리는 깊은 산정호수에 두고,

머리는 구름 밖으로 내민 채 꿈틀대는구나.

 

나는 분명 그런 너를 보았으나

보지 아니한 것으로 하리라.

가슴 속에 다 묻어두고 내가 죽는 날까지

침묵을, 침묵을 지키리라.

 

내 입을 여는 순간,

네가, 네가 굳어버린 돌산 숲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리라.

 

-2004. 12. 28. 23:14 「장가계를 빠져나오며」전문

 

중국여행 시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4부의 시 중에서 장중한 느낌의 이 시는 장가계를 소재로 하였기에 독자들로 하여금 이국의 비경의 시세계로 이끈다. 상전벽해라 하여 이 지구의 오랜 지질학적 연대에서 빙하기 어느 때에 바다가 산이 되는 그 태고의 시간대까지 시인의 상상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하여 눈앞에 보이는 굽이굽이 펼쳐진 거대한 규모의 돌산 숲이 마치 천년을 땅 속에서 살다가 비상하는 지귀에 비유하여 ‘꿈틀댄다’라고 하여 동적 이미지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한 너의 비밀을 침묵하겠다고 하였다. 말을 하는 순간 돌산 숲이 될까 두려워서이다. 자연의 비경에서 시인은 무언의 경지에 놓인다. 어떤 아름다운 말로 장식을 한다 해도 이 무언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말이 필요가 없어진 장가계의 비경이 단순히 풍경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너’라고 부름으로써 의인화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뒤에 놓인 아포리즘 1에서 “내가 일평생 시를 짓는다 해도/그것들은 살아있는 한 그루 나무만 못하다”라고 말했듯이 인간의 그 어떤 창조도 조물주의 창조에 비하지 못함을 시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말해주고 있다.

 

누구 누구는 휘파람을 불며

푸르고 푸른 동해로 간다지만

나는 나는 서해의 저녁으로 가네.

시름을 배고 누워 있는 그대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서글픔이 밀려오지만

말없는 그대 우수 속엔

내 생명의 탯줄이 숨어 있네.

 

누구누구는 콧노래를 부르며

살포시 다가와 곁에 앉은 서해로 간다지만

나는 나는 동해의 아침으로 가네.

긴 다리로 서 있는 그대와 마주서노라면

그대 젊음이 나를 주눅들게 하지만

오만한 그대 기백 속엔

젊음이란 싱그러움이 넘치고 넘치네.

 

누구는 동해로,

누구 누구는 서해로들 간다지만

나는 나는 동해도 서해도 아닌

누워 있는 바다의 우수(憂愁)가 아니면

서 있는 바다의 젊음에게로 가네.

서 있는 바다의 아침이 아니면

누워 있는 바다의 저녁에게로 가네.

 

-「동해와 서해」전문

 

제1연에서 시적 화자는 서해의 저녁으로 간다고 한다. 다른 이들이 동해로 갈 때 그는 서해의 시름과 우수와 서글픔과 침묵 속에 들어있는 ‘나’의 생명의 탯줄을 마주하러 가겠다고 한다. 바다는 어머니이다. ‘나’는 어머니와의 기억, 어머니와 한 몸이었을 때를 기억하며 서해로 가는 것이다. 바다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며 거대한 여인, 어머니의 자궁이다. 그 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한 몸이 된 탯줄로 ‘나’의 생명이 영글었기 때문이다. 제2연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다른 이들이 서해로 간다지만 ‘나’는 동해의 아침으로 간다. 제1연의 서해가 시름에 겨워 누워 있는 바다라면 제2연의 동해는 젊음으로 일어서 있는 바다이다. 제1연이 노년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한다면 제2연은 장년의 ‘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동해바다의 싱그런 젊음은 나를 주눅들게 하지만 그 젊음의 기백을 품으러 나는 가겠다는 의미이다. 제3연에 와서는 다른 이들은 동해로 서해로 간다지만 ‘나’는 동해도 서해도 아닌 누워있는 바다의 우수나 서있는 바다의 젊음에게로 간다고 하여 그것은 서 있는 바다의 아침과 누워 있는 바다의 저녁에게로 가겠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댓구는 ‘동해/서해, 누구 누구/나, 늙은 어머니 혹은 나를 잉태했을 때의 젊은 어머니/장년의 나, 누워있는 바다/ 서있는 바다, 바다의 아침/바다의 저녁, 동해-젊음/서해-우수’, 이렇게 상반된 시적 화자의 정서가 제3연에서 붕괴되어 그저 ‘누워있는 바다의 우수/서 있는 바다의 젊음, 서있는 바다의 아침/누워 있는 바다의 저녁’으로 가겠다고 화합하는 정서로 변화되어 있다. 바다는 시인에게 생명의 우수와 젊음의 기백을 부여해 주며, 누워 있는 서해의 저녁바다에는 한 때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와 노년의 고단한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서 있는 젊은 동해 바다는 장년이 된 시인의 모습이 겹치고 있어 ‘바다/어머니’의 태속에 장년의 내가 젊고 서 있는 바다로 겹쳐지듯이, 말없는 바다는 시인에게 생명과 젊음, 기백, 용기, 결기를 부여해 주고 있는 시라 하겠다.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바다가 법신의 부처이기에 그 바다에 8가지 도[八正道]가 충만해 있어 시인은 그 부처의 바다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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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품 속에서 완상(玩賞)하는 것들과

-이시환의 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붉은 사과를 하나 집는다. 여름 내내 햇빛을 온몸에 받아 저리 붉을 대로 붉어진 사과를 한 입 베어 먹는다. 사각 소리를 내면서 이빨이 박힌 사과의 과육이 한 점 떨어져 나가고, 팽팽한 사과의 몸 한 군데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사과가 품은 팽팽한 생기가 허물어져 간다. 천천히 씹는다. 사과즙이 혀를 적시고 입 안을 적신다. 속으로부터 올라온 불쾌한 느낌이 사라지고 상쾌해져가는 입 안과 머리에 사과 한 입이 기여를 한다. 꼭꼭 씹어서 넘긴다. 또 한 입을 베어 먹고 나니 사과는 반쯤만 남을 지경으로 작은 사과다. 이제는 붉은 껍질보다 아이보리색 과육이 절단해 놓은 절개지의 땅처럼 많이 드러나 희고 누렇다. 이 얇은 껍질을 둘러쓰고 사과는 어떻게 자신의 속을 보호할까? 위도 창자도 없고 머리와 가슴과 팔다리도 없는 사과는 그냥 안에 씨방만 만들어 두 개의 까만 씨앗을 감춘 채 깊은 잠 속에 빠진 채 갑자기 나에게 먹힌 것이다. 사과가 눈을 떴을 때 사과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 아니, 사과는 이미 농부의 손에 나뭇가지에서 꼭지를 분리시켰을 때부터 죽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사과의 이력은 이 꼭지가 말해준다. 꼭지가 사과와 나무가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사람의 배꼽이 태아기를 기억 시켜주듯 -너는 그냥 나와서 직립보행을 하는 짐승이 아니야, 너는 한낱 어머니의 탯줄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을거야- 말이다. 그 의미는 사과가 꼭지를 통하여 사과나무에 붙어있지 않았으면 이렇게 작건 크건 간에 한 알의 열매로 맺어 익을 수 없었으리라. 그것처럼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많은 열매들은 꼭지가 나뭇가지에 붙어있었기에 탐스럽게 익는다.

그런데 사람의 열매는 무어란 말인가. 아기가 10달 남짓 어미 배 속에서 탯줄로 엄마와 꽁꽁 연결되어 어미의 피의 양분을 먹고 배아에서 태아가 되어 몸체가 생기고 눈과 귀, 코와 입이 생기고 팔 다리와 손과 발이 생기리라. 10달을 꼬박 어미의 몸을 반쯤 피로 먹고 난 태아가 신생아가 되어 자궁을 열고 나온다. 이게 사람이다. 그 때 나올 때 어미와의 탯줄은 더 이상 필요 없어서 소독한 가위로 땡강 잘린다. 이제부터 너 스스로 빨아먹고 우물우물하여 삼키고 물어서 씹어 먹고 베어 먹고 하여 살아가라고. 태어난 아기는 어미의 돌출한 젖꼭지를 빨아 양분을 먹는다. 그러다가 이유식을 하고 미음을 먹고 밥알을 조금씩 넘기다가 밥을 먹게 된다. 그러면서 어미와 연결 되었었던 과거의 태아기의 추억을 잊으면서 배꼽을 잊고 만다. 한 때 없어서는 안 되었던 배꼽을 잊어버리고 왜 이런 게 복부의 중간에 뚫린 듯 흉한 채로 남아있는가 생각되는 것이다.

사과는 타원형의 씨방과 윗부분의 꽃이 진 자리와 아래 부분의 가지에 붙어있던 꼭지 부분을 남긴 채 나에게 완전히 죽는다. 이로써 사과의 일생은 끝이 난 것이다. 사람의 위는 모든 죽은 것들을 채워 넣는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나 차를 마시고 밥이나 빵에다 계란 후라이나 찌개 정도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고기를 먹고 저녁에는 또 무엇을 죽여서 먹을까?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죽은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도 살아있던 것들도 결국 죽여서 먹는다. 어미의 몸을 먹었던 태아기 외에는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기꺼이 죽어준(?) 동식물을 먹고 살아간다. 아니다. 인간이 먹기 위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 동식물들을 먹고 인간은 살아간다고 정확히 말해야 한다. 동식물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그들은 인간에게 반역을 한 적이 없다. 기꺼이 죽어가 준 것처럼 말이 없다. 한 때 어미의 몸이 아니었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인간은 동식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인간이 태어나면서 빨아먹고 우물우물 삼켜먹고 베어 먹고 씹어 먹고 하면서 자연과 동식물, 우주의 삼라만상들을 거느리는 영리한 짐승이 된 것이다.

나에게 완전히 죽은 사과는 배속에서 으깨지고 뭉개어지고 죽처럼 되어 창자로 보내질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붉은 사과는 없어졌다. 한여름의 뙤약볕을 받고 한 때 빛나던 그 붉고 탱탱한 사과는 지상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사과의 과육을 뺀 나머지, 뼈대 구실을 하고 새로운 씨앗을 품은 씨방과 꼭지와 꽃이 있었던 자리만 남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던져질 것이다. 내가 먹은 사과여, 나에게 먹힌 사과여, 미안하다…. 너의 사랑과 역사와 붉은 껍질과 싱그런 과육과 달콤하고 시큼한 과즙과 너의 꼭지와 꽃이 진 자리였던 너의 부끄러운 곳과 아아 이렇게 다 먹어버리고도 뻔뻔한 인간을 용서해다오. 너의 그 모든 것을 고마워하지 않고 마구 베어 먹고 깨물어 먹었던 나를, 한 알의 작고 붉은 사과여 가을의 열매 중의 열매여!

 

작은 한 개의 사과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어떻게 비교될까? 대개는 이 지상에 살면서 먹고 사는 일에 매어달리며 때로는 탐욕도 부리고 때로는 지치거나 깨어지고 부수어지면서 인간은 동식물의 그것보다 가열찬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동식물처럼 먹여주는 대로 입혀주는 대로 살 수는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의미는 스스로 생활해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독립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인간은 얼마나 고단한가? 이것이 동식물과 인간의 다른 점 중의 하나일 게다. 너나없이 경쟁에 밀려 쫓기고 쫓기거나 달려가고 달려가다 보면 지치게 되는 법, 또 어느 정도까지는 쉼 없이 달리고 쫓은 결과 이르렀지만 더 이상은 안 되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치거나 나가떨어진다. 이게 우리네 삶이다. 그러면서 어느덧 머리에는 흰 빛이 한 가닥씩 번쩍하면 노인이 되었구나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란 무어란 말인가, 한 알의 작은 사과의 생보다 더 나을 게 없다. 어쩌면 쫓아가고 달려갔기에 더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많이 일군 사람은 그걸 일구느라 갖은 고생 했는데 다 놔두고 가야하니 기가 막히고, 적게 일군 이는 그거라도 일구느라고 지친 것이다. 세상은 많이 피폐해졌다고 아우성 치고 그렇게 아우성들만 치고 아우성의 물결이 범람하여 감에도 세상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인간이 욕망하는 한 세상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문제들은 늘 있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하여 신들에게 의지하거나 하층민들을 수단화하여 거대한 성을 쌓고 유지해갔다. 현대에도 비슷한 구도이다. 상실감과 박탈감에 쓸쓸해하다가 늙고 병든 이들, 기가 막히는 세상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는 이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그 위로를 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그런 세상과 길항하면서 시인 자신도 그것을 겪었으며 그런 이유로 자연과 대화하고 신과 대화하다 보니 묵상과 관상의 생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까지 모두 16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첫시집『안암동일기』(1992)를 시작으로,『백운대에 올라서서』(1993),『바람서설』(1993),『숯』(1994),『추신』(1997),『바람소리에 귀를 묻고』(1999),『벌판에 서서』(2002),『우는 여자』(2003),『상선암 가는 길』(2004),『백년완주를 마시며』(2005),『애인여래』(2006),『눈물모순』(2009),『몽산포밤바다』(2013),『대공』(2013), 한영대역시집『Shantytown and The Buddha』(2003)『佇立廣野』(2004)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업은 근 20여 년이 넘는다. 그의 시작들은 주로 자연과 신, 생명, 사랑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것은 시인이 『상선암 가는 길』의 자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현실세상의 부조리함과 적대감에서 탈출하거나 초월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였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사로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워질 때마다 나는 명상과 침잠을 거듭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그는 ‘내 한 몸에 생태가 전혀 다른 두 그루의 나무를 키워오면서 현실 비판적인 시와 그를 초월하려는 듯한 관조와 직관에서 나오는 선시에 가까운 시들을 써왔던 것’이라고 자신의 시의 경향을 말해주고 있다.

이시환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인 『백년완주를 마시며』는 첫째, 관조와 직관 속에서 자연과 시인이 한 몸이 되어 서로를 완상하는 시풍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인과 자연의 친화 속에서 빚어내는 한 편의 노래나 교향곡이 되겠다. 둘째, 교감 하는 너와 나의 사랑의 노래, 셋째로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들(노숙자 시편인 「신문지 한 장의 무게」)의 눈물이 담겨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길항하던 세상에 대해 포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체득하였기에 ‘사랑은 나의 기쁨’이면서 ‘사랑은 우리의 생명’이므로, “서로 서로 사랑하세”(「사랑(노랫말)」)라고 주장한다. 이 시집에는 그 전의 시집과는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전체 8부로 이루어진 시장(詩章)에 각 부에는 독자들을 배려하여 그가 주간하는 『동방문학』에 문예시평으로 써온 산문들 가운데 8편이 실려 있어, 산문은 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시는 산문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효과를 의도한 시인의 안배가 돋보인다. 그리고 시인이 명상생활을 해오면서 사유세계의 끝머리쯤에서 건져 올린 아포리즘을 독서과정에서 잠시 쉬어가라는 의미에서 22편을 실어놓았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산문과 시,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시집인 셈이다. 그리고 수묵화나 담채화 느낌의 사진이 시집 속에 펼쳐져 있어서 비교적 두꺼우나 독자로 하여금 편안히 쉬면서 그의 산문과 시, 아포리즘의 세계로 몽환적으로 불러들여 침잠케 하여 자연물을 만나고 벌판, 바람, 눈, 구름, 계곡으로 빠져들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한 권의 시집을 이렇게도 풍성하게 엮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이 체재는 시인의 독자를 배려한 특별한 의도요 정성이라 여겨진다. 한 권을 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졸음이 올 정도로 시인의 문맥 속으로 빠져 이완이 되고 몽환 계곡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문장이 지닌 논리의 냉철함과 정연함도 다 잊은 채 그냥 녹아들어버려 힐링이 된다.

이 시집은『상선암 가는 길』을 펴내고 채 1년도 안 되어 쓴 40여 편의 시를 묶은 것이다. 즉, 그가 관상의 생활로 일관한 2003년부터 시작하여『애인여래』가 쓰여지고(2003년) 수정 -주로 2005년, 서시「나의 독도(獨島)」는 2006년 6월경- 을 하게 되는 시간 동안 약 3년간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 세 시집이 연관되어『상선암 가는 길』과 『애인여래』의 중간지점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시집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와의 집중적인 대화를 위해서『상선암 가는 길』에서는 홀로 침묵 속에서 떠나고(여행) 자연물을 통해서 내적 대화를 하기 시작하다가 『애인여래』55편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이 시집에는 아무래도 쉬어가게 하는 길목이 되는 셈이다. 이 시의 쉼터에서 그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침잠과 몽환을 통한 자연물과의 완상이다. 그러나 침잠과 몽환은 역시 집중되어질 여래의 품이다. 『애인여래』가 여래의 진리에 대하여 여래와 대화를 나누며 묻고 답하는 식의 선문답 형식의 시들이 주류를 이루어 다소 추상적이거나 논리적이고 관념적이거나 이치를 따져보는 시인 나름대로의 지성으로 이루어진 시편들이라면,『백년완주를 마시며』의 세계는 침잠과 완상을 통한 관상의 깊은 정감이 흘러 넘치는 가운데 독자들을 유인하고 있다고 하겠다. 시인은 자서에서 “시가 저절로 쓰여졌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라고 하여 그 때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시가 태어나는 배경에 대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시를 썼지 독자들을 위해 쓴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을 위해서 특별히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시의 모양새를 다듬고, 그들의 관심과 소망과 정서를 담아내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나는 뜻이다. 솔직히 말해, 이 점에 관한 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나는 철저하게 내 안의 세계에 스스로 머물면서 세상과 세계를 바라보되 일신상의 안위를 추구한, 그야말로 소승(小乘)이란 기둥에 기대어 살아온 셈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 시집은 충분히 독자를 배려하는 의미에서 묶어낸 시집임을 밝히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자기 안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었던 자신을 성찰하며 성문, 연각과 같은 실천이 없는 소승의 기둥에만 기대어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1부 산문인 <백년완주를 꿈꾸며>에서 “맑기가 수정 같고, 향기가 그윽한 난향과도 같은, 그 달콤함이 오래오래 머무는 백년완주와 같은 시를” 쓰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시는 ‘만남의 기쁨을 안겨주는 시’이다. “거침 바람을 일으키는 부드러움 속에 숨은 불길 같은, 아니 그 불길 속에 숨어 있는 부드러움의 섬세함”을 지니는 시를 시인은 소망한다. 이런 시를 얻기 위하여 그는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침잠과 관상의 생활에 스스로 깃들고자 한 것이다.

「겨울비」에서는 시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광야를 택한 시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오늘같이 할 일 없는 날엔

예술의 전당 대신 마른 겨울 들판으로 가자.

오늘같이 무료한 날엔

사람소리 들리지 않는 허허벌판으로 가자.

눈발이 비치는가 싶더니

빗방울이 어깨를 적시고,

빗방울이 눈썹을 적시는가 싶더니

싸락눈이 머리를 희끗하게 덮는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가자.

그곳 마른 풀섶 더미 위로,

그곳 쌓인 낙엽 위로,

그곳 내가 걷는 길의 고적함 속으로

저들이 곤두박질치며 부려놓는,

짧은 한 악장의 장중한 화음을 들어보시라.

저들끼리 밀고 당기고, 질질 끌고 잡아채며,

점점 세게, 아주 여리게,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소생하는,

허허벌판에 부려지는 화음이 범상치가 않구나.

죽어가는 한 세상을 부여잡고

그리 통곡을 하는 것이냐?

이 들판 저 산천에

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냐?

싸락눈이 섞여 내리는 겨울비가

부려놓은, 오늘의 짧은 한 악장의 화음이

절뚝이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네.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네.

 

-2005. 01. 26. 18:23 「겨울비」전문

 

참으로 장중하고도 엄숙함과 결연함을 느끼게 하는 시이다. 겨울비라는 시제에서 전달되는 의미가 심상치 않고 희희낙락하는 예술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내림과 동시에 무겁고 결연하며 그런 예술에 대한 반역이기까지 하다. 이 시에서는 ‘예술의 전당’과 ‘겨울들판/허허벌판’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예술을 관람하는 장소인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허허벌판과 같은 광야로 사람들을 이끌어낸다. 예술의 전당과 같이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배부른 예술작품이 되기보다 절뚝이는 시인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세워줄 예술이 태어나는 겨울비 내리는 광야로 나가자고 한다. 예술의 전당이 이미 박제화 된 예술을 소비시키는 곳이라면 겨울들판/허허벌판인 광야는 예술이 생산되는 곳이며 상업주의와 결탁되어 있는 자들이 기획하여 향유케 하는 사치품이 된 예술이 아니라 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예술을 꿈꾸기 위해 광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푸른 세상을 꿈꾸고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고자 한다. 그에게 예술의 전당은 무가치한 것이며 더 이상 푸른 세상을 세울 수 있는 예술의 전당이 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 대신 그는 진눈깨비나 싸락눈이 섞여오는 궂은 날씨의 광야로 가서 죽어가는 세상을 통곡하는 겨울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하며 겨울비의 화음을 통해 소생되는 예술의 소리를 들어보길 원한다. 죽은 예술이 광야에서 다시 소생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는 시인이 이 시집의 제일 첫머리에 둔만큼 그가 의도하는 예술의 지향점과 그 자세를 읽을 수 있는 시이다.

광야란 무엇인가? 사막과 진배없는 불모지 아닌가? 왜 시인은 자신을, 독자들을 그곳으로 유인하는 것인가? 이집트인들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압제 아래 고통의 신음을 할 때 야훼 이레(앞길을 예비하시는 야훼)의 하느님은 모세를 통하여 갈대바다라 불리우는 홍해를 건너고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40년의 거칠고 힘든 광야 생활을 하게 했다.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에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시련 속에서 정금과 같이 단련되었듯이 예술은 정금과 같이 관련되는 과정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이시환 시인은 이것을 꿰뚫어보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광야를 선택하고 홀로 외로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광야에서 시인이 들은 것은 겨울비의 통곡하는 울음소리만이 아니다. 그는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도 듣는다. 「바람의 演奏」를 읽어보자.

 

내가 낮잠을 즐기는, 낮에도 캄캄한 수면실의 출입문틀과 유리문

사이의, 그 좁은 틈으로 끊임없이 바람이 지나며,

아니, 허공(虛空)이 무너지며 소리를 낸다.

문이 열리는 정도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지만 일 년 열두 달 위험스럽게 다가오는

벌떼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이 안과 저 밖이 내통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이곳뿐이랴.

저 외로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도, 그 외로움이 모여있는

숲과 숲 사이에서도, 넓고 좁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도,

높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골목에서도,

평원에서도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틈에서도,

하늘과 땅 사이 그 깊은 틈에서도

나는 바람의 연주를 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를 듣는다.

 

-2005. 02. 01. 15:48 「바람의 演奏」전문

 

이 시는 예술의 전당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음악연주를 듣고 관람하는 특수화된 공간 보다 거친 광야나 그와 비슷한 일상의 공간으로 시인은 독자를 유인한다. 시인 자신이 늘 잠깐 쉬기 위하여 들어가는 수면실을 오가며 문과 문 사이에서 일어나는 바람, 외로운 나무와 나무사이, 숲과 숲 사이, 크고 작은 빌딩과 빌딩 사이, 높고 낮은 지붕과 지붕 사이, 크고 작은 골목 사이, 평원에서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바람의 연주를 듣는다. 시인은 박제화된 예술을 관람하는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음악연주가 아닌 자연계의 바람의 연주를 들려주고자 독자들을 인도하여 허허벌판과 같은 자연계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도 바람의 연주를 듣게 한다. 이렇게 가시적인 공간에서 바람의 연주를 듣는 것만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틈, 하늘과 땅 사이 깊은 틈,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람은 연주되어 은밀히 잇고 그 좁은 틈으로 대공이 무너지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바람의 거대한 실체를 감지한다. 바람은 그야말로 만물을 소생시키는 거대한 힘을 가졌으며 시인은 광야와 다름없는 일상의 공간에서 바람의 연주를 통해 바람이 지닌 생명력을 독자들이 감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있는 시이다. 바람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도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틈을 메워주고, 하늘과 땅 사이의 깊은 틈도 메워준다.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연결시키면서 그 틈을 메워준다.

 

사람이야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자그마한 섬 가운데 섬에 나는 와 있네.

 

온통 노오란 유채꽃으로 뒤덮인

이곳 가장자리에 홀로 앉아

나는 손에 들려 있지도 않는 차를 마시고

또 마시네.

 

그런 나의 이마 위에는

높푸른 하늘이 내려와 있고,

그런 나의 발부리에는

넘실대는 파도소리 머물고,

그런 나의 손끝에는

이 세상을 한 빛깔로 누이며 지나가는

바람도 있고,

그런 나의 가슴에는

저들을 다시금 끌어안는

포근한 햇살도 있네.

노오란 유채꽃이 가득하여 이룬 섬

그 한 가운데에 있는 낮은 흙무덤이 되어

나는, 정오 한 때를 장강(長江)에 흐르는 세월처럼

길게 길게 누리며, 멀미를 하듯 기우뚱거리는

이 고적한 섬이 된다.

 

-2005. 3. 24. 12:24 「유채꽃밭에서」전문

 

시인은 자신의 아포리즘 6에서 “나의 경전은 내가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저 산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자연은 그에게 말씀이요 진리의 법신(法身)인 것이다. 이 시는 유채꽃이 만발한 섬에서 시인은 무르익은 봄을 즐긴다. 이 즐김은 박제된 예술에서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물인 공간에서다. 온통 노랗게 물든 섬의 봄, 유채꽃, 높푸른 봄하늘, 넘실대는 파도, 손끝의 바람, 따뜻한 햇살, 유채꽃이 이룬 노오란 섬 한 가운데 있는 낮고 붉은 흙무덤과 가시적인 자연물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의 마음은 차를 마신다. 비가시적인 마음으로 마시는 차는 모든 봄의 풍경들을 한층 더 고즈넉하고 안온하고 깊고 부드럽게 만든다. 그러면서 해가 길대로 길어진 초봄의 유채꽃 노오란 빛깔 속에서 시인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이 풍경과 하나가 된다. 거기에는 차의 역할이 크다. 그 시간이 봄의 길어진 해만큼, 장강의 흐르는 세월처럼 길게 길게 누리며 시인은 자연의 풍경들에 둘러싸여 그 품에서 오래오래 누리고 또 누린다. 그러면서 눈앞의 섬과 같이 자신도 고적한 섬이 된다. 자연은 이시환 시인에게 여래의 법신이었던 것과 같이 시인은 그 품에서 길게 길게 풍경과 하나 되는 완상의 시간 속에 있다. 그것은 섬이 혼자이듯 시인이 홀로 거기에 머물렀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시야말로 1부 산문의 소재가 된 백년완주와도 같이 달콤한 시의 세계를 창출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겨울비」는 그와는 상반되는 시적 정서를 가지고 있어서 두 시가 대조를 이룬다고 하겠다.

제2부는 지인이 준 담채화에 대하여 그 풍경에서 여성의 자궁과 만물을 낳는 우주의 자궁을 간취하여 언제나 텅 비어 있으면서 꽉 찬 ‘谷神곡신’을 그려내었다고 보고 자연스럽게 제2부 첫머리에 「상선암 가는 길」을 배치하였다. 상선암 가는 길 계곡에 있던 크고 작은 바위들을 스승 삼아 묵상의 여정을 시인은 하며 정갈하고 고요하게 만발한 목련꽃 속에서 적요의 미를 창출하고 있다.

 

“아니,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막 부화하는 새떼가

일제히 햇살 속으로 날아오르고

 

흔들리는 가지마다

그들의 빈 몸이 내걸려 눈이 부시네.

 

-2005. 04. 14. 00:53 「목련」전문

 

이 시는 시인의 재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적요의 세계를 소동의 세계에 대비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아간 새떼와 빈 나무에 걸린 날아간 새떼의 빈 몸을 각각 목련꽃에다 은유하였기 때문이다. 또 식물을 동물로 치환하고 있어 정적인 식물이미지가 동적이미지로 치환되고 있다고 하겠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기 전에 목련꽃들이 막 부화하여 날아가는 새떼로 비유되어 그 비상의 동적 소란과 그들의 빈 껍질에 비유한 목련꽃의 적요를 느끼게 하는 시이다. 정→동→정, 동→정→동(바람에 꽃을 단 목련가지가 흔들리기 때문에 동으로 봄)으로 이어지는 이 시의 구도는 자연물인 목련꽃의 개화를 시인의 감성으로 새롭게 표현해낸 뛰어난 작품이다. 짧은 시구절에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빈 껍질이 주는 공허감이 ‘눈이 부시네’ 라고 하여 상쇄되고 있다. 목련꽃과 부화하는 새떼, 비상하는 새떼, ‘그들의 빈 몸’은 새알의 껍질로 목련꽃으로 비유된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실내에서 바깥의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아니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창문을 여니 막 부화한 새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목도하기까지 짧은 순간이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피기 시작한 목련꽃은 이 새떼들의 비상과 그들의 빈 몸인 가지에 붙은 빈 몸인 껍질로 보인다. 그러니 시적 화자는 하늘로 날아가는 새떼와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그들의 빈 몸인 껍질을 바라본다. 동시에 한 대상 안에 내재된 두 개의 영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햇빛 속으로 날아간 하얀 새떼들의 모습이나 하얗게 걸린 껍질이나 둘 다 쓸쓸할 수도 있는데 시인은 그 감정을 상쇄하고자 한다. 이 모습도 ‘쓸쓸함과 공허감/따뜻함, 동적 이미지, 눈부심’과 같은 두 개의 정서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슬프거나 공허하거나 외롭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감정인 것이다. 양가적인, 복잡 미묘한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고 있는 느낌의 시이다. 그래도 이 시는 생명의 힘찬 비상을 노래하는 데에 시인은 역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껍질을 깨고 나온 새떼들의 치열한 생명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겨우내 추위 속에서도 죽지 않고 잘 버티어 내어 환한 꽃등을 밝힌 목련꽃의 생명력과 껍질을 깨고 부화한 새가 일치되기 때문이다. 「조약돌」에 오면 이런 정서의 충돌이 일원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의 돌멩이 속에 내재한 생명력을 간취한다.

 

작은 조약돌 하나 손에 꼬옥 쥐고서

지그시 눈을 감으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너의 숨소리 들려오고,

 

아득히 먼 때로부터

너의 심장이 고동치는 체온이 전이되어 오네.

 

밤하늘의 별과도 같이

바닷가에 무리지어 네가 있음으로

 

세상은 비로소

살아숨쉬는 것들로 가득차 있고,

 

그것으로 세계가

한 덩어리임을 알려주네.

 

-2004. 11. 2. 11:20 「조약돌」전문

 

발끝에 채이며 별 의미 없이 나뒹구는 가치 없는 조그만 돌멩이도 시인의 손이 쥐어지면 이렇게 우주의 비밀을 듣게 된다.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들여오는 너의 숨소리나 아득히 먼 때로부터 심장이 고동치는 돌의 체온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주 큰 바위의 기억이다. 작은 돌멩이는 큰 바위가 오랜 세월의 풍화를 거쳐서 현재의 조그만 조약돌이 된 것이다. 돌멩이 보다 더 작은 조약돌의 역사는 큰 바위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인은 그 바위가 놓여있었던 곳과 그 시간을 묵상하며 완상한다. 바위였을 때부터 조약돌이 되기까지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며 그 속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이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되었으므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완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에는 밤하늘에 흩뿌려놓은 듯한 별처럼 바닷가에 무리 지어 조약돌이 있다. 밤하늘의 별은 무엇인가? 바로 영원을 의미하고 천상적인 이미지이다. 한 개의 보잘 것 없는 조약돌을 천상의 별과 같은 동격으로 승격시키고 있다. 그런 조약돌은 시인에게 세상이 살아 숨 쉬는 것들로 가득차고 그것으로 세계가 한 덩어리임을 일러준다. 시인이 길항한 바로 그 세상이 살아 숨 쉬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세계가 한 덩어리라고 조약돌이 일러줌으로써 시인과 세상의 불편한 동거의 고뇌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세상이 부조리나 욕심 덩어리로 가득 차서 시인에게 모욕적일 때 시인은 자연을 만나러 떠나왔다. 떠나온 그 자리로 자연은 다시 돌아갈 수 있게 시인의 불화한 마음을 회복시켜주고 있는 시이다. 이러한 완상에는 느림의 미학이 탄생하는 자리이다. 「함박눈」에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고 새로운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속도의 전쟁이라 불리는 ‘지금-여기’ 우리네의 세태와는 정반대의 정감이 펼쳐지고 있다.

 

소리 소문 없이 기척도 없이

눈이 내리네, 함박눈이 내리네.

아주 느리게 아주 태평하게

눈이 내리네. 함박눈이 내리네.

 

달리던 차들도 느릿느릿 움직이고,

분주하던 사람들의 손발도 느긋느긋해지네.

 

소리 소문 없이 기척도 없이

눈이 내리네. 함박눈이 내리네.

 

아주 느리게 아주 넉넉하게

따뜻한 사람들 품으로, 포근한 지상으로.

 

눈이 내리네. 함박눈이 내리네.

펄펄 아주 느리게, 아주 태평하게.

 

-2005. 01. 18. 13:19 「함박눈」전문

 

더러는 살면서 함박눈이 많이 내려쌓여서 집과 일터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들이 끊겨서 홀로 자신의 집에 머무르며 묵직하면서도 소담스럽게 내리는 굵은 함박눈을 바라보면서 그 눈을 완상하는 시간이 현대인에게 필요하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과 통신해야 되는 현대인들은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홀로 된 것은 죽음이나 진배없이 생각되는 영적 어린 아기이다. 어울려야만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강요하듯 하는 이 움직임들은 무엇인가?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인간을 오히려 홀로 설 수 없게 한다. 독립성이 없는 인간은 영적으로는 어린 아기이다. 그 많은 사막 교부들은 자신의 가족과 세속을 등지고 신을 만나기 위하여 사막으로 불편한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고 불리움을 받았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선택은 언제나 눈물겹다. 소중한 한 부분을 버려야 하기에. 그러나 현대인은 그 선택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걸 다 가진 채로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가 되어가고 왜소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포근한 지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다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이 열린 것이다. 마음을 돌린 것이다. 그것은 함박눈이 시인에게 아주 느리게 태평하게 내려왔기 때문이다. 함박눈처럼 ‘빨리 빨리’가 ‘느리게 느리게’가 되면 우주와 동식물, 우주와 인간, 동식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먹이사슬에서 오는 모든 경계나 경쟁, 관계의 거미줄에 묶여 파닥이는 고단함도 편해진다. 함박눈은 바로 가장된 평화의 무장을 해제하고 사람과 사람, 하늘과 땅, 만물 사이의 틈을 소리 없이 메워주고 채워준다. 몽고어로 ‘뽀레뽀레’란 말은 ‘느리게 느리게’라는 의미이다. 완상이란 느림의 미학에서 나오는 것이며, 관조에서 더 깊이 침잠했을 때에 얻어지는 법락의 경지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는 완상의 경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어 느림의 미학으로 이끌어 감으로써 문학적 치유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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