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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 - 물이미지
2016년 03월 12일 03시 07분  조회:4341  추천:0  작성자: 죽림

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

-①물 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하나의 사물에 또는 자연물에 시인의 눈길이 멎는다. 시인은 왜 그 사물에서 눈길을 멈추는가. 왜 그는 그 사물에다 시선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다가 응시하다가 관조하다가 묵상하다가 관상을 하는가? 이 모든 시선의 단계는 시인의 사유와 결합되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 사유가 그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올 수도 있고, 시인이 늘 꿈꾸는 것을 만들어내어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귀로 완상한다. 시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바로 이때가 아닐까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지각되어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오랫동안 기억이 된다. 마치 어린 시절의 특정한 한 때의 사건이 우리들 머릿속에 하나의 영상이 되어 박혀있는 것과 같이 잊는 일이 없이 계속해서 첨가되면서 변형을 거듭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그것이 무의식이나 전의식,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고 알지 못하는 어떤 사물을 통해서나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그것이 돌출되어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갑자기 그 낯선 기억이 변형된 채로 돌출되어 나올 때는 불가해하거나 두렵거나 공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프로이드가 늑대아이의 정신분석을 정초한 것은 소년의 어린 시절에 목도한 부모의 정사 모습이 변형되어 나와서 신경증을 일으킨 예이다. 이미지와 정신분석의 관계는 분명히 어떤 연관성을 가질 것이며, 알게 모르게 늘 무엇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듯이 하나의 쇠사슬에 연결된 고리와 같다.

이미지에 관한 사전적인 정의를 알아보면 사고, 상기(想起), 상상 등의 체험에 있어서 대상을 생각하여 묘사할 경우, 직관적 내용을 수반하여 대상의 모습을 심상(心像), 표상상(表象像), 혹은 이미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과연 이미지라고 불리는 특유의 심적 존재가 인정될 것인지 어떨지, 이미지 체험은 지각이나 사고라는 체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크게 나누어져 철학, 심리학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전통적으로 그리스 이래 이미지의 <화상논리(畵像論理)>라고도 부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미지는 대상의 사상(似像:닮은 형상)을 주는 ‘그림’과 같은 것이고, 상상체험이란 이 심적인 ‘그림’을 ‘마음의 눈’으로 ‘본다’, 내지는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플라톤에게 이미지는 참실재(眞實在)인 이데아의 ‘사상’인 감각적 사물의 ‘사상’이기 때문에 참실재에서 이중으로 멀어진 가장 가치가 낮은 위치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뒤집어 말하면, 이미지에 구비되는 실재에서 해방된 ‘자발성’ 내지는 예술적 ‘창조성’이 주목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미지 즉 ‘표상상(판타스마)’은 오류를 유인하는 것인 한편 상기나 사고에 있어서 중요한 인지적 역할을 가진다고 한다. 이미지는 공통감각의 작용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상상체험은 사고와 감각(지각)의 양자로부터 구별되어, 양자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상상은 우리들의 의지에 의존하고 대상에 대해서 감정적인 거리를 가질 수 있는 점이며, 그와 같은 것이 없는 사고 내지는 판단으로부터 구별되어,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 또는 거짓일 수 있는 점에서 항상 참으로 간주되는 감각으로부터 구별된다.(『영혼론』3.3 「기억과 상기에 관하여」) 그러나 이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사고와 상상, 감각과 상상의 구별과 연관의 규정은 많은 불명확한 점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미지 체험이 사고와 질적으로 다른 체험임을 인상 깊게 제시한 사람은 데카르트이다. 예를 들어 천각형의 이미지를 만각형으로부터 구별하여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음에 대해 천각형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삼각형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과 같이 쉽게, 그리고 명확하게 할 수 있다(『성찰』6). 이 데카르트의 견해에 대하여 사고와 상상의 구별을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이미지를 심적 활동의 중심에 놓은 사람이 영국의 경험론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흄에 의하면 지각에 있어 주어지는 감각인상과 상기나 사고에 있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관념’과의 사이에는 ‘선명함’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며, 그리고 모든 사고는 이 관념의 조작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합리론자와 경험론자는 사고와 상상의 구별에 관하여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으나, 이미지를 ‘심적 화상(畵像)’으로 보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리고 이 견해가 그 후에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언어분석과 현상학의 관점에서 이미지에 관한 철학적 사유는, 20세기가 되면 심리학에서는 내관(內觀)이라는 방법이 부정되고 행동주의로의 전향이 생겨, 그것과 함께 이미지는 심리학에서 추방되게 된다. 이 행동주의적 방향을 취한 분석 철학의 흐름 속에서도 이미지는 존재하여 오히려 그 <화상이론>은 철저히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 흐름의 대표자인 라일에 의하면, 통상의 눈으로 보는 것은 심적 눈으로 ‘보는’ 것과 구조적으로 완전히 다른 활동이고, 양자는 카테고리적으로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지를 그린다는 체험은 오히려 ‘~인 척하다(pretending)’라는 행위와 유사한 것이다. <화상이론>에 대한 비판은 체험 내재적 입장을 취하는 현상학 속에서도 제출되었다. 후설에서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계승한 사르트르는 이미지체험에 있어 대상이 나타나는 방식의 특질에 정위함에 따라 이 체험의 지향적 구조를 해명했다. 그러나 상상으로는 대상에 관하여 미리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새롭게 알 수는 없는 점에서(사르트르는 이 상상의 특질을 ‘준관찰-quasi-observation’이라고 부른다), 또 상상에 있어서 대상은 지각세계에는 부재 내지는 비존재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상상체험의 이 지향적 성격은 대상의 무화(無化 néantisation)}라고 불리운다. 상상과 지각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물적 존재든지 심적 존재든지 이미지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고 이미지란 오히려 대상의 특유한 현현 방식 내지는 대상에의 특유한 ‘관계 방식’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해서 사르트르는 라일과는 완전히 다른 루트를 통하여 이미지에 관한 유사한 테제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20세기에는 이미지의 <화상이론>은 심리학에서도 철학에서도 철저하게 비판받게 되었다. 그러나 심리학에서의 <인지적 전회(轉回)>를 거친 후인 1970년대가 되면 <화상이론>의 일종이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이미지논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화상이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코스린에 의하면 심적 이미지에 해당하는 것은 컴퓨터의 화면에 묘사된 디스플레이와 같은 것이고, 그것은 축적되어 있는 정보에 기반을 두고 그 때마다 대상의 공간적 성질에 대응하도록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마음, 내지는 뇌 속에서 문자 그대로 의미로 컴퓨터의 화면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문제는 기능적이고 공간적인 매체 상의 <기능적 화상>이다. 코스린들이 이와 같은 <화상이론>을 제출한 가장 큰 이유는 여러 가지 실험 결과 이와 같은 특수한 <심적 표상>의 존재를 지지하고 있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차원 공간입체의 방향을 달리한 두 개의 그림을 보이고, 피험자에게 그것들이 같은 입체 도형인지 아닌지를 물으면, 입체 회전 각도와 답으로 요구하는 반응시간이 비례관계가 되는(<심적 회전mental roration>이라고 불리는 실험) 결과가 알려져 있다. 이 결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에는 주어지는 정보에 바탕을 둔 단순한 계산과정과는 다른, 지각과 유사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조작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거기에 대해, 피리신을 대표로 하는 <기술이론>의 제창자들에 의하면, <심적 이미지>도 그 외의 정보와 같이 <구조화된 명제> 내지는 기술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되어 진다. <기술이론>에 의하면, 전술한 <심적 회전>과 같은 실험 결과도 일의적으로 <화상이론>을 지지할 리가 없고, 예를 들면 <회전 각도의 크기와 회전에 요구되는 시간이 비례한다>라는, 대개는 피험자에게도 명확하게 의식되지 않는 <암묵지(暗黙知)>에 바탕을 두고 생겼다고 생각하면 설명 가능하다. 이 논쟁은 분명히 결론이 난 것은 아니고, 현재로는 뇌 과학자를 끌어들여 이미지 체험과 지각 체험 사이에서 어느 범위의 신경기능이 어떤 방식으로 공통적으로 이용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미지는 인지적 역할을 가질 뿐만 아니라 미적 체험이나 창조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양자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반드시 명백하지 않다. 칸트는 <판단력>의 이중 작동방식 속에서, 양자의 차이와 관련을 내다보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비트겐슈타인의 <아스펙트 지각>의 사고가 참고가 된다. 예를 들어, <거위/토끼>의 양의적 지각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지각은 단순히 대상을 <볼> 뿐만 아니라, <~로서 보>는 점이 눈에 띠는 경우가 있다. 이미지 체험이 지각과 유사하다고 생각되어질 경우에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로서 본다>는 구조를 가진 지각일 것이다. 대상을 이러이러 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는 점으로 보여지는 의지적 성격, 다른 한편, 그 알아차리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대상이 나타난다는 자발적 성격 등은, 감각과 사고 사이에서 이미지 체험이 완수하는 미적․ 창조적 역할을 해명하는 상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Mary Warnock, imagination, 1976; Ned Block, ed, Imagery, 1982.)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정리하면 핵심은 이미지가 감각과 지각에 의해 상상되어진 어떤 것이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판타스마에 가까우나 오류를 유인하는 것으로 쓰이지는 않을 것이며, 플라톤의 참실재인 이데아를 닮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감각과 지각, 지각과 상상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이미지 개념인 대상의 특유한 현현 방식 내지는 대상에의 특유한 ‘관계 방식’이라는 점이 시에서의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루트가 될 것이다.

 

이시환의 시에서 이미지는 두드러진다. 그의 이미지는 섬세하며 여성적이고 부드러우며 생동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의 주요 이미지를 나누어 보면 물 이미지, 바람의 이미지, 대지 이미지, 광물이미지, 식물 이미지로 나눌 수 있겠다. 이 이미지들은 그의 시의 세계가 불교 철학적 바탕 위에 서 있으므로 불교적 세계관과 거기에 따른 인식 및 지각이 대상을 만나 감각을 통하여 관계 지워지고, 현현하는 방식이며, 구조된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아스펙트 지각>에 기반을 둔 <~로서 본다>라는 구조를 가진 지각일 것이다.

먼저, 물 이미지는 이시환 시에서 정화와 재생의 기능을 하는데, 이것은 그의 구도정신과 그의 삶에 녹아 흐르고 있다. 물 이미지가 가지는 폭은 그의 시에서 흘러넘치는 계곡물→강물→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고, 그 바다는 여래의 품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표상들은 어디까지나 그가 불교적 철학과 인식의 바탕 위에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가는 내적 작업을 하였기에 가능했으며, 거기에는 관조와 관상의 자세를 견지하여 얻었던 결실이다. 제8시집인 『상선암 가는 길』속에 실린 「물」을 읽어보자.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깊이깊이 생각해야 하네.

넘치는 물이라 해서 모두가

우리의 갈증을 풀어 주지 않으니 말일세.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하네.

흐르던 물조차 마르고 마르면

옥토가 사막이 되니 말일세.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진실로 감사해야 하네.

이 한 방울의 물이 곧 너와 나의

생명이란 꽃을 피우는 불길이니 말일세.

 

깨끗한 한 방울의 물속에

해맑은 물 한 방울 속에

크고 작은 만물의 숨이 깃들어 있고

그것으로 정녕 단단한 말씀이네.

 

-「물」전문

 

물은 우리가 일용하는 생명수요 없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이 시의 제1연에서 넘치는 물로도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일상의 물의 역할을 넘어서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했다. 제2연에서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은 기도의 강물이 흐르면 우리의 마음이 옥토로 가꾸어지나 기도하지 않으면 그 강이 말라 사막이 되고 만다. 그것과 같이 기도는 우리의 마음밭을 길경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은 기도의 강물이 흘러넘쳐야 마음은 항상 옥토라 하였다. 제3연에서는 한 방울의 물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하였다. 이 한 방울의 물은 너와 나, 우리의 생명을 꽃피우는 불길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한 방울의 물을 관상하면서 시인은 깊이 생각하여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왜,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방울의 물을 중요시하는가? 그 이유는 제4연에서 깨끗하고 해맑은 한 방울의 물속에 크고 작은 만물의 숨이 깃들어 있고, 그것이 곧 말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면 시인은 자연물인 물을 이렇게 보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한 방울의 물은 이런 존재이다. 그것이 말씀이라는 의미는 우주의 생명의 숨이 깃들어 있고, 만물 안에 말씀이 깃들어 임재하시기 때문에 그 한 방울의 물이 귀하디귀한 것이 된다. 이런 물 한 방울이 모여서 계곡의 물을 이루고 그 물은 대하를 거쳐 바다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구도자의 여정에도 비유되며, 이시환 시의 물이 지니는 이미지이다.

 

바닥에 깔린 바위 모래 나뭇잎 조각들까지

있는 그대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닥에 고인 하늘 햇살 바람까지

있는 그대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이리도 맑을 수가 있구나.

이리도 깊을 수가 있구나.

 

빈 그릇 같은 이 마음도 저와 같아

머물러 있는 듯

끊임없이 제 몸을 떠밀고 내려가

울퉁불퉁 돌들을 넘고 바위틈을 빠져나가며

 

마침내 눈이 부시게

두런두런 길을 여는 물굽이처럼

이 생(生)에 이 몸을 다 풀어 놓을 수 있을까.

 

-2003. 4.1. 20:32

「화엄사 계곡에 머물며3」전문

 

제1연과 제2연은 지리산 화엄사 계곡의 물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묵상에 젖는다. 산 속의 더럽혀지지 않은 계곡 물의 바닥에는 떨어진 잎이 가라앉아 있고 바위 모래 돌들도 다 비춰 보인다. 말 그대로 계곡 물은 속을 다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제2연에서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닌 하늘과 구름 햇살 바람까지도 고여 있는 그 맑은 물을 들여다본다. 물이 맑고 깨끗하기에 만물이 그 안에 들어와 고여 있다. 물이 있는 그대로 제 속을 다 드러내 보이니 시인은 제3연에 와서 ‘이리도 맑고 깊을 수가 있구나’라고 감탄을 한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계곡의 물처럼 깨끗하거나 맑지도 않으며 제 속을 다 드러내 보이지도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뭔가를 가려놓는다. 그 은폐 속에서 위선과 거짓, 가식의 씨앗들이 자란다. 그리하여 인간관계를 헤친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어 보이면 누군가가 그 마음에 깃들어온다.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간에 깃들 마음자리가 없다. 마음을 드러내놓는다는 것, 열어놓는다는 것은 마음을 비워놓는 것이다. 누군가를 깃들이고 싶을 때 이렇게 해야 한다. 교만과 아만심, 시기, 질투, 미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 마음이 가득 차면 마음이 더럽기에 드러내 보일 수 없다. 그러니 스스로 감추고 닫아놓는다. 아무도 거기에는 깃들일 수가 없어진다. 시인은 그런 물과 같이 빈 그릇과 같은 자신의 마음도 온갖 것이 깃들어 있는 계곡 물같이 머무르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떠밀고 내려가 돌들과 바위틈을 빠져나가 눈이 부시게 길을 여는 물굽이처럼 이 생애에 자신의 몸을 물처럼 다 풀어놓을 수 있을까하고 자문하고 있다. 비록 마음이 비워졌다고는 하나 돌들과 바위틈을 지날 때의 물처럼 자신을 버리고 물처럼 완만하게 흘러 길을 여는 물굽이처럼 생의 대하에, 바다에 몸을 풀 수 있을까 자문하는 데에는 비워진 마음이 세상과의 관계들 속에서 물처럼 부드럽게 흘러갈 수 있을까에 대한 냉철한 자기 응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편의 시에서 시인은 관조하면서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로서 본다’- 보고 있기 때문에 물이 지니는 본질도 간취하고 있고, 또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불교의 이념을 통하여 한 방울 작은 물방울 속에서도 말씀(불법)이 있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시인에게 말을 걸어온다. 시인의 비워진 마음은 그것들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芙蓉抄」에서 연꽃이 시인에게 “네 깊고 깊은 미소가 피어나는/無心, 無心川으로/뛰어내리라 하네./뛰어내리라 하네.”라고 속삭이고 있다. 무심이란 바로 마음의 완전한 비움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진리를 받아들여 완전히 자유로워진 경지이며, 차별상이 마음에서 사라지는 ‘연꽃-무심천’으로 뛰어내리라고, 몸을 던지라고 속삭인다. 이 의미는 불법에 완전 귀의하여 득도의 여정을 걸으라는 강력한 권고가 연꽃을 바라보면서 연꽃에게 들은 말이다.

 

잠시 잠깐 피었다지는 들꽃 같은,

바람이야 불거나 말거나

사람이야 있거나 없거나

염주알이 구르듯 흘러내리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아서

되레 부족할 것도 속박될 것도 없이

낮이고 밤이고 흘러내리며

물로서 한 몸이 되고 물길로서 큰 뜻을 이루어가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물살의 손과 손의 숨이,

간간이 바람을 일으키며 꽃을 피우며

큰 산 깊은 계곡의 말씀 되어 흘러내리네.

큰 산 깊은 계곡의 생명 되어 흘러내리네.

 

-2003. 8. 17. 17: 25

「화양계곡에서」전문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 사물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제1연과 제2연의 5행에서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라고 반복하고 있다. 화양계곡의 물소리는 분명히 시인에게 들어본 적이 없는 독특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제1연에서 물소리를 염주알 구르는 소리에, 제3연에서는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소리에 비유하였다. 이 두 비유에서 알 수 있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가진 음악과 같고, 염주알에서 알 수 있듯이 단조로우면서도 기도하는 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물이 염주알 구르듯이 흐르기 때문에 무심의 경지에 들고, 제2연에서 의미도 담지 않아서 그 자체로 구족하고 자유롭게 밤낮으로 흐른다. 그런 물은 물 그 자체로서 한 몸이 되고 물길로서 큰 뜻을 이루어간다. 그 물은 제3연에서 물살의 손과 손의 숨을 지녀 간간히 바람을 일으켜 꽃이라는 생명을 움트게 하고, 큰 산 깊은 계곡의 말씀과 생명이 되어 흘러간다고 하였다. 물이 흐르는 것을 보는 것은 시각이지만 그 물소리는 청각으로 듣는다. 그러나 물이 큰 뜻을 이룬다든지 말씀과 생명으로 흐르는 것을 관조하는 데에는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그 마음의 눈은 물이 지니는 근원적인 힘에 의거한다.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구조화된 아스펙트 지각을 이해할 수 있다. 천지창조 때의 심연은 곧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다. 모든 생명이 물에서 비롯되었음은 창세기에서 물과 물 사이의 궁창이 생겨 아랫물이 땅이 되고 위의 물이 하늘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물살의 손과 그 손의 숨이 바람을 일으켜 생명의 꽃을 피우는 물의 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자연 속의 화양계곡의 물을 통해 심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불교적 우주 이법을 사유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시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불교적 사유는 그의 구도 기행시집이기도 한 인디아 기행시집인 『눈물모순』에서 시인은 석가모니 부처가 걸었던 강가 강을 거닐며 자신의 구도에 대해 묵상을 정리하고 있다.

 

 

전략(前略)

 

그는, 희노애락이란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중생들에게

일체의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않고,

일체의 변함조차 없는

여래(如來)의 덕성을 말할 때에도

발 밑 모래의 모래밭을 떠올렸지.

 

그로부터 줄잡아

이천 오백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이 대신에 이방인인 내가 서있네.

그가 바라보았을

강가 강의 덧없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가 거닐었을

강가 강의 모래밭을 거닐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네.

분명, 그가 바라보았던 강은 강이어도

그 강물 이미 아니고

분명, 그가 거닐었던 모래밭은 모래밭이어도

그 모래 이미 아니건만

변한 게 없는

이 강가 강의 무심(無心)함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풀꽃들이

이곳저곳에서 피었다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풀꽃들처럼 명멸(明滅)되어 갔을까?

 

무릇, 작은 것은 큰 것의 등에 올라타고

큰 것은 더 큰 것의 품에 안겨

수없이 명멸을 거듭하는 것이

생명의 수레바퀴이거늘

이를 헤아린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살아 숨 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2008. 06. 03. 「

강가 강의 백사장을 거닐며」

 

강가 강은 갠지스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시환 시인의 주석에 따르면 원래 천상에 사는 비시누 신의 발가락에서 흘러나와 천상의 극락세계 곳곳을 적셔주는 풍요로운 강이었으나 인간이 머물러서 지상에 가뭄이 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인(仙人) 한 사람이 고행으로써 기도한 결과 이 강물을 지상으로 끌어내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곧바로 떨어지면 땅의 모든 것이 파괴되므로 시바신이 자신의 머리로써 강물을 받아 그 거대한 물줄기들을 조각내어 땅에 안착시킨다. 그래서 이 강을 두고 인도인들은 시바신의 머리칼이며, 시바신이 목욕하는 곳이요, 시바신이 명상하는 곳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화를 간직한 강가강은 히말라야 산맥의 간고토리 빙하에서 발원하여 인도 북부 지역을 흘러 힌두 성지인 바라나시와 하리드와르를 거쳐 뱅골만으로 흘러드는 2, 506Km의 큰 강인데 힌두인들에게는 신성한 곳이며 ‘자신들의 젖줄이며 어머니’라 여기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는 거닐었고, 시인은 그가 걸었던 강가 강의 모래밭을 거닐며 묵상한다. 이 큰 강이 품어준 생명들이 긴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명멸을 거듭하였겠는가. 시인은 그가 정신적으로 기댄 석가모니 부처의 족적을 더듬으면서 생명의 수레바퀴는 작은 것이 큰 것의 등에 올라타고, 큰 것은 더 큰 것의 품에 안겨 수없이 명멸해감을 깨닫는다. 그러니 강가강의 모래알을 헤아릴 수 없듯이 그것을 헤아려 무엇하겠는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자연도 이러한데 여래의 덕성이나 가르침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비유한 ‘항하사(恒河沙)’란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그 넓고 깊은 불법의 강은 2500년 이래 인도인들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나투시어 생명을 살려왔다는 의미다. 이것은 곧 강가 강이 인도인들의 젖줄인 것처럼 부처의 가르침은 곧 중생의 젖줄이며, 그것은 변함이 없는 영원한 진리이다. 이 진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석가의 제자이며, 시인은 강가 강을 거닐며 여래와 하나가 되고, 여래의 품에 여래를 찾았던 많은 이들과 함께 깃든다. 그러니 그는 결코 이방인도 아니다.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품에 깃들어 머무는 자는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2500년 전부터 흘렀던 그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뭇 생명들을 길러냈던 변함없는 강가 강처럼 여래의 법의 깊이를 내포한 강은 말없이 흐르지만 시인은 그 강이 품어온 생명과 말씀을 묵언으로 듣는다. 그가 화양계곡의 물소리에서 들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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