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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아현동 굴레방다리 옛 간이역 앞 하숙방에서 詩 쓰다
2016년 03월 12일 05시 13분  조회:3959  추천:1  작성자: 죽림
尹東柱 그 介潔性의 詩와 삶/이수화|

尹東柱 그 介潔性의 詩와 삶
이수화



별 하나에 동경과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을 불러보던 윤동주 시인-.
 

하늘과 바람과 별은 하늘의 존재며 영원한 세계이기에 그가 노래한 시와 생애는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숭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숭고한 노래와 생애. 산도 아니며 바다도 나무도 아닌 별과 바람과 하늘을 동경한 그의 노래는 하늘에 닿아 영원히 산다. 하늘이, 별이, 바람이 끝내 숨을 거두는 일이 없듯이 그의 천상적인 것들을 노래한 시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큰 유성이 공중에서 다 타지 못한 채 운석(隕石)이 되듯이 그의 노래 중에도 몇 몇 노래의 운석은 비록 존재할지라도-.

 

그리고 그의 숭고한 생애는 1940년대 암울했던 어둠 속에서도 늠렬(凜烈)한 시를 썼고 마침내 아까운 28세의 젊음을 일제에 꺾이우고 말았다는 사실로서 완성된다. 그것은 순열(殉烈)이었다. 시를 위하여 몸을 바쳐 죽은 사람, 殉烈-.


총과 칼보다도 강한 것으로써 시인은 순열에 이르렀다. 최후까지 모국어로 노래했고, 고고한 정신으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괴로워 한 생애였다.
1941년 11월 5일 별을 헤던 밤,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윤동주 시인은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그의 명시<별 헤는 밤>을 끝맺는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끝 연

그 27년 후,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이 그의 시 <별 헤는 밤>의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자신의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린 다음, 그의 이름자가 묻힌 언덕 위에도 무업위에도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봄이 오면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라고 예언한 27년 후, 그의 이름자는 정녕 자랑스럽게 밤이면 밤에도 무성한 별빛처럼 빛나게 되었다.


1968년 11월 3일, 연희동산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별 헤는 밤>을 쓴지가 27년 후의 일이며 윤동주 시인 전생애 28년과 버금가는 세월 뒤의 일이고, 그의 순절 23주기 째 되는 해의 일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2월 20일

이렇게 높이 250센티미터, 너비 115센티미터의 화강석 비면에 각자된 그의 비문 <序詩>, 윤동주 시인 원고지 자필시를 확대하여 각자해 냈고, 그의 아우 尹一柱 교수의 설계와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주선으로 세워진 ‘윤동주 시비’-


그 비음(碑陰)에 적힌 그의 행적기를 본다.


윤동주는 민족의 수난기였던 1917년 독립운동의 거점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1938년 이 연희동산을 찾아 1941년에 문과를 마쳤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모진 형벌로 목숨을 잃으니 그 나이 29세였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 때 지은 구슬 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 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리니, 그 메아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더불어 길이 그치지 않는다. 여기 그를 다르고 아끼는 학생, 친지, 동학들이 정성을 모아 그의 체온이 깃들인 이 언덕에 그의 시 한 수를 새겨 이 시비를 세운다.
1968년 11월 3일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이와 같은 비음의 행적기가 적힌 윤동주 시인의 시비는 그가 한 때 기숙사 생활을 하던 건물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1938년부터 41년까지 연희전문 문과를 다닌 그는 1940년 일제의 침략전쟁 관계로 기숙사의 급식이 조악해지자 정병욱(鄭炳昱, 서울대 문리대 교수)과 함께 종로구 누상동에 하숙을 구해 나온다. 이 하숙방에서 1년쯤 한밤중에만 시를 썼고, 그의 노래는 유고가 되어 다른 많은 시편들과 함께 단 한 권의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로 그가 옥사한 후 정병욱 교수의 주선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그가 ‘서시’를 쓰던 1941년경은 조선 총독부가 문예지 및 일간 신문 등을 폐간시키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며 한글 사용을 억제하던 시기였고, 지식인의 에비 접속과 투옥이 자심하던 때였다.
일제 암흑기, 민족혼과과 시혼과 글과 말, 그리고 하늘의 별조차 바람에 스치우는 어둡고 암울한 시대임에도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노라고 노래했다.
정직하고 맑으며 고결한 시인의 기품이 수 놓여진 그의 ‘서시’는 결국 윤동주가 일제 말 암흑기의 민족시인으로 순교자가 됨을 예언한 십계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남성적인 페이소스가 정제된 그의 서정 시편들에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읽어낼 수
없다고 한다면 윤동주 시인의 태생과 성장환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일본 땅에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사상범으로 피검되어 끝내 옥사한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1931년 3월 태생지인 간도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는 김동환의 시집<國境의 밤>을 접하게 된다.
1981년 만죽구 간도성 용정에서 출생한 윤동주에게 기독교 장로인 조부와 동경과 북경 유학을 했던 부친은 교육적으로나 훈육면에서 충분한 혈족들이었고, 특히 외삼촌 김약연은 독립운동가로서 윤동주에게 애국정신을 심어주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간도 용정의 은진 중학 시절의 윤동주가 문학 뿐 아니라 축구와 수학 성적이 뛰어났다는 사실은 훗날 그의 시가 페이소스만으로 함몰하지 않고 이지적인 시혼을 담을 수 있었으며, 시대적인 어둠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시인이 되는 정신적, 육체적 구합체였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1936년 평양 숭실 중학을 다니던 전후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서 동시 수 편을 발표한 것이 그것이며 1938년 연희전문에 입학하면서부터 그의 시작 활동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그 결정(結晶)이 바로 연전을 졸업하고 간도로 귀향하던 때 원고본으로 상재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그 당시 아직 세상에 내놓지 못한 그의 첫시집이자 마지막 시집 원고본 한 부를 연전 후배 정병욱에게 맡기고 도일하여 윤동주는 1942년 入校大學에 적을 뒀다가 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그 2년 후 그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 언도를 받고 福岡 형무소에 투옥, 조국광복을 불과6개월 앞둔 채 그는 일제의 잔혹한 고문 끝에 옥사했던 윤동주 시인.
그는 운명하면서 일본인 간수가 듣기에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다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그는 부르짖었을까.
최후로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을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죄밖에 없노라고.
그렇다. 조국을 사랑한 죄밖에 없노라고 그는 분명히 최후의 절명사를 외쳤을 것이다.
母國語로-. 그의 사랑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어머니이신 조국의 노래를-.

“형님이 옥사하자 아버지와 당숙 윤영춘 선생은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해탄을 건너 한줌의 재로 변한 그의 유해를 모셔왔습니다. 그 때 우리는 살던 용정에서 약 2백리 떨어진 두만강에 있는 웃 삼봉역까지 마중을 갔었는데 그 대의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유해는 아버지 품에서 내가 받아 모시고 긴긴 두만강 인도교를 걸어서 건넜습니다. 2월 말의 춥고 몹시 흐린 날, 걸어서 건너는 두만강 다리는 어찌도 그리 길어보이던지-. 그것은 동주형에게는 사랑하던 고국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아니 세상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교량 같았습니다. 다리 끝에 이르러 그곳에 버티고 서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켜보는 일본 헌병을 보았을 때는 다시 한번 치미는 울분을 참아야 했습니다.” (-아우 윤일주 씨의 말)

이렇게 그는 한 줌의 재가 된 채 부친의 품에 안겨 현해탄을 건넜고, 사랑하던 조국 땅에도 묻히지 못하고 아우의 품에 안겨서 두만강 긴긴 다리를 건너 마침내 고향 용정에 묻혔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가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아니라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이 시 <또 다른 故鄕>은 윤동주 시인이 가장 정력적인 시작을 하던 1941년에 씌어진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序詩>, <별 헤는 밤>. < 十字架> 등 그의 시편 중 탁월한 작품들이 이해에 씌어졌는데 이 작품 <또 다른 故鄕>은 한국현대시의 문제작이 된다. 그의 서정시편들 가운데 드문 상징시이며 문학사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서 시인 윤동주의 시적 이데아가 매우 함축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연희전문 졸업을 두세 달 앞둔 시절 그는 지금의 아현동 굴레방다리 옛 간이역 앞으로 하숙을 옮기고 계속 하숙방에서 한밤중에 시를 썼다. 9월에 <또 다른 고향>을 쓰고 11월에 <별 헤는 밤>, <서시> 등 명작들이 씌어지는데, <또 다른 고향>은 제목부터가 상징적인 것이다. 즉, 육신의 고향인 북간도를 더나 마음의 고향인 조국의 서울 굴레방다리 하숙방에 돌아와 누웠으나 여기도 그의 영혼은 안주할 수가 없다. 암울한 1940년대의 조국(서울)은 그에게 정녕 마음과 육신을 편히 누일 고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天上的 인 세계를 노래하고자 동경하는 그에게 조국(서울)은 너무도 ‘어둔 방’이며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음울하고 불안한 타양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의식은 지조 높은 개로 상징한 자기가 신의 내면적 의지의 소리에 쫓기듯 ‘아름다운 도 다른 고향에 가자’라고 재촉한다.


육신의 고향인 북간도도 아니고, 마음의 고향인 조국도 아닌 도 다른 아름다운 고향에 가자고.
이렇게 육신의 고향도 마음의 고향도 상실하게 된 (일제에 빼앗겼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이란 무엇이었겠는가. 고독이었을 뿐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고향(정신적 육체적) 상실처럼 고독한 처지가 도 달리 있겠는가. 하물며, 시인에게 있어서 조국이라는 정신적 고향상실처럼 참담한 고독이 또 있겠는가. 시인 윤동주의 고독은 그리하여 마침내 천상적인 구원의 길을 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지상적인, 현실적이 아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즉 이데아의 세계이다. < 다른 고향>에 이어 쓴 <별 헤는 밤>으로 그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시작은 마침내 개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15일 뒤에 완성한 <서시>에서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노라고 저항의 혼불을 조용히 태워 올리는 것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천상의 불인 별의 시인 윤동주-. 하늘에 별이 뜨는 한 그는 영원히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이 久存하는 한 그는 영구히 우리의 큰 별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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