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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 - 牧人을 기다리며 / 반복의 미학적 시법
2016년 03월 12일 02시 30분  조회:3951  추천:1  작성자: 죽림

주체의 소멸과 목인(牧人)을 기다리며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주체성이란 인식이나 행위의 주체였던 그것들의 책임을 지는 태도가 있는 것을 말한다. 주체는 중국에 있어 천자의 체(體) 내지는 천자를 의미하고 있었으나, 명치시대 이후 ‘subject’의 역어로 쓰이게 되었다. 니시다 기타로는 이것을 ‘subjectum’에 위치시켜 피히테의 실천적 자아의 의미로 하였다. ‘주관’이 지식적인 자아를 의미하는데 대해 주체는 가장 구체적이며 또는 객관적인 실재로서 인식이나 행위의 담당자로서 간주되었다.

본래 ‘subject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체[基體:hypokeimenon]의 역어로서 ‘substantia’와 동일계열의 언어이고, 질료, 형상, 양자의 종합체, 속성의 담당자, 판단의 논리적 주어 등을 의미하고, 중세에는 인식 밖에 실재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것이 ‘지성에 투영된 것’, 표상으로서의 ‘objectum’이었다. 이 관계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이르는 근대에 있어 역전한다. 라이프니츠는 ‘subjectum’을 ‘혼 그 자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subjectum’은 인식활동을 담당하는 ‘주관’이 되고 ‘objectum’은 거기에 대한 대상, ‘객관’이 된다. 그리고 ‘subjectum’이 실천적인 활동의 담당자이기도 할 때, ‘주체’의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이 주체성을 확립하는 배경에는 데카르트와 같이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일 것이라는 비판적 정신이 있었다. 그것은 근대 휴머니즘을 낳고, 사상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변혁의 원점이 되었으나, 정신과 물체, 마음과 신체를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낳고 사물만이 아니라 마음의 실체성도 부정하는 영국 경험론에 대해 첨예화한다. 칸트도 그 마음의 실체화는 배척하면서도 주체성은 확보했으나 사물 자체는 한계개념으로 할 때에 의해서였다. 독일 관념론은 이 이원론의 극복을 절대자, 무한자의 사상에서 구하여 인간을 초월한 곳에 통일을 두었다. 헤겔은 진실된 것을 실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간주할 것을 제언하였으나, 그것은 주체성을 절대자에게 귀의하게 하는 의미였다. 근대적 자아를 보존 하면서 고대 중세의 몰의식적 실체와의 통일을 꾀하였다. 그것은 근대의 실체상실 상황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인륜적 공동체를 창출하고, 판단의 논리적 주어에 대해서는 그것을 술어와의 상관관계에 있어 다루어 주관 객관의 대립에 관해서는 사물 자체를 주관과의 상관에 초래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간 주체를 포섭하면서 역사적으로 전개하는 절대자의 사상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 이후 주체성을 인간 측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운동이 현저했다.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유일자를 설한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이 나타나 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하는 포이에르바하는 소외된 인간 본질의 회복을 가리키고,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감성적인 직관을 실천적 주체적 활동으로 다루어 근대세계에 있어 인간 소외로부터 해방을 추구하였다. 또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주체 속에만 있는 것으로 진실한 크리스트교 신자의 길을 추구하여 그를 조상으로 하는 실존주의는 실증과학과 합리주의의 융성에 대해 ‘실존’의 입장에서 주체성의 회복을 꾀하였다. 살아있는 창조적 생의 이해를 가리키는 생의 철학, 또 의식의 명증적 경험에 돌아가려고 하는 현상학도 주체성으로의 강한 지향을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주체성의 회복은 용이하지 않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근대인의 봉기란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데카르트가 표명한 것처럼 인간이 신을 대신하여 자연의 지배자,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빛나는 성공과 발전을 가져오는 반면, 자연의 황폐를 불러일으켜 인간의 생존 환경 바로 그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게다가, 가치관이나 의미의 기준을 애매하게 하고 인간의 진로를 불분명하게 했다.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의 상황을 ‘신의 죽음’을 추도하는 ‘불행한 의식’으로서 다루고 있으나 그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구래의 인간을 극복한 ‘초인’의 탄생이 추구되었다. 그러나 고도의 과학 기술을 구사하는 현대의 지배 권력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도 조작적 지성의 대상으로 하여, 인간의 유대를 끊어 개개의 사람을 고립시키고 아톰화하고, 더 나아가 그 내면적 통일, 인격동일성(개체성)을 파괴하기에 이르고 있다. 호르크 하이머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립성과 독립성을 강조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역설적인 귀결이고 ‘지배 원리의 변증법적 반전’에 다름 아니다.

근대인의 내적 분열을 헤겔은 ‘찢겨진 의식’으로 표현했으나 주체는 반드시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과 같이 투명한 의식의 존재감으로 안주할 수 없고 분열을 내재하고 동일성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의 분열로,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는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무의식으로, 구조주의자 라캉은 자기중심으로 타자를 보는 것에 의해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성의 부활과 유지 보호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대두되어 근대주체주의의 반성이 다가온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 그 목인(牧人)으로서 유럽의 ‘주체성의 형이상학’에 경종을 울리고, 생태학은 인간을 다시 생명계로서의 능산적(能産的) 자연=퓨시스의 안에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다. 또 유럽 내부에서 탈유럽의 자세를 낳고, 다른 문화에의 관심과 다원적 사고태도를 지속적으로 육성시키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 즉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의 극한인 죽음의 가능성을 예측함에 따라 비로소 자신의 일상성의 내면으로 되돌아간다고 설하고 시간의 근원현상을 장래로 한다. ‘나는 존재한다 sum'의 의미는 나에게로의, 나 이외의 사람에게로의, 사람 이외의 사물로의 ‘마음씀sorge'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 그것을 기르는 자 목자(牧者=목인)이다.

서양철학이 인간 주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초점을 두었듯이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은 현대 인문학의 최대 화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구성된, 만들어진 나이다.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한일 시인 교류회 -소통과 상생, 매개체로서의 시- 세미나에서 일본 측 시인으로 온 기타가와 도오루(北川 透)시인의 문예 평문 「시에서의 ‘나’와 ‘타자’에 관한 여섯 개의 메모」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그의 생각에 많은 공감을 하였다. 그 중에 말(랑그=언어 규범)을 사용하여 사물을 생각 하는 ‘나’는 “언어 활동(랑가쥬)에 의해 나는 ‘나’를 자각하지만 언어(랑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로서 존재하였고, 내가 태어나자마자 세계와의 위화와 동화를 표현하는 신체(파롤=발화)가 되어, ‘나’를 창조한다.”고 하였다. 그런 ‘나’는 비슷한 나는 얼마든지 있으나 동일한 나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이런 나는 창조될 때에 나와 ‘나’로 만들어진다. ‘나’는 어디까지나 상징질서 속의 주형된 ‘나’라면 나는 단수이며 ‘나’는 복수의 ‘나’이다. 그래서 말에 의해서 태어난 ‘나’는 같은 말에 의해 태어난 불특정 다수의 ‘당신’을 향해 시를 쓰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쓴다는 것은 잠재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그 독자는 ‘당신’이다.

1926년 간행된 만해 한용운의 『님의 沈黙』에는 서문 격인 ‘군말’에서 시를 쓰게 된 이유를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같은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라고 님의 정체성에 관하여 말하면서 만해에게 님은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라고 하여 광범위한 대상이 된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에 관하여 신약성서 루카복음서 15장 4-7절의 말씀을 보자.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 글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 오는 것에 대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예수를 못마땅해 하고 비난하였다. 거기에 대한 예수의 답변으로 이어지는 루카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은전의 비유(8-10), 되찾은 아들의 비유(11-32)도 같은 의미의 비유이다. 여기에서 ‘잃은 양’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다. 회개metanoia는 신약성서에서 ‘회심’ 또는 ‘되돌아감’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이며, 라틴어로는 콘베르시오(conversio)이다. 이는 전철[前綴meta-]과 원래는 '사고'를 표현하는 후철[後綴noia]에서 이루어진 복합명사이다. 그리스어 일반 용례로서는 전철을 시간적인 의미의 ‘후에서’로 풀이하여 ‘프로노이아pronoia’의 반의어이며 ‘현자는 뒤에서 생각하지 않고 미리 생각해야 한다’(포르퓨리오스)는 용례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경우 전철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 전체의 자세를 역방향으로 전환하는 의미(회심)을 강조하여 예수의 하늘나라의 선포 혹은 원시교회의 말에 직면한 개개의 사람이 그 때 그 장소에서 요구되는 결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의미는 회개가 그만큼 어렵고 그 사람의 삶의 자세나 태도를 하늘나라 중심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그러니 선한 사람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예수는 말하였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계급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자신들의 권력만 탐욕스럽게 부풀리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며, 자기네 백성들을 의롭게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612개의 율법사항에 저촉되는 모든 양 무리를 철저하게 죄인으로 규정하여 잘라내고, 그것으로 자신들이 심판자 노릇을 하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다닌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예수의 눈에는 삯꾼이나 도둑, 강도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약성서 루카복음서에 나타난 ‘잃은 양’의 비유는 신약성서 요한복음서 10장에서 예수 자신이 착한 목자에 비유하면서, 착한 목자와 양 떼의 관계를 ‘착한 목자/도둑, 강도, 삯꾼’을 대조적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10:1-5)

 

목자와 양 떼들의 음성을 매개로 그 관계를 비유하는 이 말씀은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고 있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다. 서로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 양들은 목자를 따라 바깥으로 나와서 목자는 앞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이것은 서로를 알고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목자와 양들의 관계는 앎이 전제되어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끎과 따름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는 이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삯꾼과 다른 이유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데까지 구체화 되고 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10:11-18)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예수는 가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권한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된 권한이다. 아버지는 성부를 상징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맡긴 양 떼를 위해 목숨마저 내놓기에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고 한다. 이 복음에서는 ‘아버지와 나/나와 양떼/아버지-나-양떼’의 관계가 이루어지며, 거기에는 서로 신뢰의 관계로써 맺어진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스스로 철저한 희생과 복종이 뒤따른다. 삯꾼은 삯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 양들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양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착한 목자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라고 하듯이 서로가 앎을 바탕으로 한 신뢰관계이다. 이는 아버지와 나의 앎의 관계와 동일하다. 양들은 아버지가 나에게 맡긴 이들이므로 신뢰와 섬김, 전소유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 있다. 삯꾼에게 양들은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와도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아서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아버지가 맡긴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가진다는 의미이다. 목자와 양들에 관한 신약성서의 비유는 구약성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에제키엘 예언서는 기원전 593년에서 571년 예루살렘 붕괴 이후 제2차 유배가 단행되고 난 다음까지의 기간에 예언자 에제키엘에 의해 쓰여졌다고 한다. 이 예언서의 전반부(제1장~32장)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한 신탁과 이민족들에 대한 신탁이 쓰여졌다. 그리고 후반부(제33장~제48장)는 쇄신에 대한 신탁과 새로운 백성에 대한 신탁이 기술되어 있다. 에제키엘은 차독 가문의 사제였기 때문에 망국과 바빌로니아 유배의 원인을 목자들에게서 찾고 있다. 그가 환시 속에서 보았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었고, 그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환시를 통하여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게 된 것이 에제키엘 예언서의 배경이다.

만해에게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은 곧 님과의 이별이다. 님은 부재하는 님이며, 부재하는 님은 나에게는 죽어서 없는 것과 같은 슬픔을 안겨준다. 님이 조국이라면 조국을 잃은 백성은 흩어지고 남의 나라에 강제 징용이나 징집되었다. 양 떼들을 돌봐야 했던 조선 말기의 정치 지도자들은 에제키엘이 말하듯이 제 양을 잡아먹고 방치한 결과 제 양 무리도 지키지 못하고 양 우리와 목초지까지 빼앗기게 된 비극의 역사가 일제강점기이다. 이 비극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바빌로니아 유배 전 이스라엘의 불의한 지도자들의 모습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런 불의한 목자들에 대하여 여호와 하느님의 경고는 계속 된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바빌로니아 유배 시에 망국의 원인을 되돌아보며, 망국 전 유대의 권력 주체는 자기 양 떼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의한 목자들에게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라고 경고한다. 이에 대해 좋은 목자는 목숨을 바쳐 양 떼들을 돌보는 자이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에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나라를 빼앗겨 유배로 흩어진 양떼들을 다시 불러 모우고 푸르고 기름진 풀밭에 쉬게 하여 풀을 뜯어 먹게 하겠고 그 과정에서 상처 입은 양들을 고쳐주며 원기를 북돋워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면서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며 공정으로 양떼를 기르겠다고 한다. 공정한 목자는 심판자로서 역할을 하며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린다.

 

‘너희 나의 양 떼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너희는 좋은 풀밭에서 뜯어 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나머지 풀밭을 발로 짓밟는 것이냐? 맑은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나머지 물을 발로 더럽히는 것이냐? 그래서 내 양 떼가 너희 발로 짓밟는 것을 뜯어 먹고,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셔야 하느냐?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그들에게 말한다. 나 이제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너희가 약한 양들을 모조리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뿔로 밀쳐 내어 밖으로 흩어 버렸으니, 내가 내 양 떼를 구하여 그것들이 더 이상 약탈당하지 않게 하겠다. 내가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34:1-22)

 

정의와 공평은 좋은 목자의 양을 돌보고 기르는 역할과 함께 중요한 역할이다. 양들 간의 시비는 양들 간의 힘의 균형이 편향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며, 권력을 가진 집단은 ‘기름지고 힘센 양’이며, 그들로 인해 억압과 소외를 당하는 ‘여윈 양’을 구하겠다고 하였다. 억압과 소외를 강요하는 사회나 권력집단은 ‘약한 양들을 모조리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뿔로 밀쳐 내어 밖으로 흩어 버린’ 자들이다. 만해의 님은 이러한 약한 님이다. 성부와 성자의 님은 이런 님을 구원하려고 육화강생을 하였다. 이런 님들이 편안히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현실세계는 이렇게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자는 육화강생을 하여 하느님 나라를 부르짖었다. 하느님 나라에의 초대는 모든 이들이 공존공생하며, 서로 좋은 목자가 되어 양을 먹이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나라이다.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나라이다. 그런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무한대를 달릴수록 그런 나라는 멀리 있고, 이 말씀들은 지속적으로 사모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에는 이런 세상에 대한 비꼼과 함께 이런 세상을 위해 스스로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려고 한다. 그는 시인으로서 그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강물」에서 시작 되는 그의 상생과 위로, 돌봄의 시학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Em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중략)-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나갈 때 안으로 말아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 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가슴마다 봇물이 될까.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 -시「강물」중에서

 

시인은 견자(見者)이다. 여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시인의 눈에는 보인다. 이 견성은 시인의 의식 깊은 곳에 견성으로 인도되는 성질이 마음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이에 관한 신약성서의 말씀은 요한복음 제9장 1절부터 41절까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태생 소경인 자를 고친 예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하느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라고 공격을 당한다. 그러나 태생 소경으로 하느님의 일에 파견 받은 청년은 회당에서 기적의 치유에 관하여 증언하면서 예수가 하느님에게서 온 이라고 하였고, 바리사이들로부터 단죄 받으며 쫓겨난다. 그것을 듣고 예수는 그를 만나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고 묻고,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라고 말한다. 태생 소경이었던 청년은 하느님의 아들을 보게 되었고, 예수는 자신이 이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러 왔으며, 그 때는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 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때 함께 있던 바리사이들은 “우리가 눈 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라고 묻자, “너희가 눈 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말한다. 태생 소경이었던 청년은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고, 바리사이들은 잘 보는 자임에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알고 바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은 지도자들은 그들 양들의 음성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자신이 돌봐야할 양 떼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612개 조항을 들어 심판자 노릇이나 그 위에서 군림만 한다. 이런 지도층에게 양 떼는 양 떼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호구로 보이는 법이다. 이어 요한복음 제10장에 목자의 비유가 나오는 것은 야들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 불의한 지도층들이 양들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바로 눈이 먼 자들이라는 뜻이다.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은 그들의 양 떼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단지 마귀 들려 미친 자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즉 그 기적의 은총을 받은 청년과 그것을 지켜본 주위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알아보는 눈이 열렸으나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만이 더 눈이 멀게 되어 예수를 마귀 취급했다는 뜻이다.

 

이시환 시인은 시를 창작한 초기에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Em이는 것일까.’라고 하여 이 견성을 통하여 시업의 길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뜨일 때 존재의 본질을 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시인의 시업은 바로 견성이 생기면서부터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내면의 눈은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라고 하여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의 꼬리 즉 마음의 흐름도 보일까라고 조용히 자문한다. 그러나 그런 심정으로 그들의 가슴에 가 닿을 때에 비로소 보이게 된다. 그러니 그런 그들은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라고 하여, 가슴 속에 흐르는 것이 눈물이며, 그 눈물을 시인은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시인의 눈은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견성을 획득하면서 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견자는 곧 다른 이들의 삶의 밑바닥에 흐르는 눈물을 헤아리고, 그 눈물을 닦아주며, 그 눈물의 원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이로서 돌보는 이가 되는 것이다. 이 견성을 겸비한 이는 그의 시 「함박눈」에 비유된 것처럼 낮고 겸손한 자이며, 세상의 어둡고 고통스런 곳으로 스스로 임하는 자이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 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從(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안암동日記』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함박눈이다. 시인은 함박눈을 통하여 자신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나는 끊임없는 ‘자기 지우기’를 시도한다. 자기 지우기는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 시에서 ‘충실한 종’으로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도 달려가 쾌히 엎드리겠다는 의미는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이며, 이는 겸손으로 낮아진 자의 모습이며, 그것이 바로 참 목자의 모습이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함박눈처럼 낮은 곳으로 임할 때 나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어서 시「북」에서는 북의 이미지를 통하여 사람들을 기만하는 이 세상에 한 알의 밀알로 썩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북으로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기희생의 본을 북을 통하여 그리고 있다.

 

무릇 알맹이는 가라앉고 껍데기만 뿌옇게 떠서 오락가락 가락오락 눈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입을 속이고 속이듯 속고 속이고. 속 썩은 연놈들이야 두 겹도 좋고 세 겹도 좋아 그럴 듯이 처바르면 보이는 것 있을 수 있나. 하늘 땅 무서운 줄 모르고 두꺼운 낯짝 설레설레 휘저으면 타고나지 못한 너와 나야 저만치 밀려나고 보면 구석. 도시 힘 못 쓰는 시상 아닌가벼. 이놈의 세상 내 어릴 적 썩은 이빨 같다면 질긴 실로 꽁꽁 묶어 눈감고 힘껏 땡겨 보겄네만 이 땅의 단군왕검 큰 뜻 어디 가고 곪아 터진 곳 투성이니 이제는 머지않아 기쁜 날 기쁜 날이 오겄네.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 날이. 이 한 몸 이 한 맴이야 다시 태어나는 그 날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힘이 된다면 푹푹 썩어 바로 썩어 이 땅의 뿌릴 적시는 밑거름이라도, 밑거름이라도 되어야지 않겠는가.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

 

-「북」, 『안암동日記』에서

 

북은 우리네 농민들이 추수철이나 대보름날 농악대를 앞세우고 한바탕 신명나게 놀 때 둥둥 두드려 흥을 돋우는 악기이다. 이런 정서의 악기인 북은 바로 사람들을 속이는 ‘속 썩은 연놈들’로부터 구석으로 밀려난 이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 그 설움을 가슴에 품고 곪아터진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대항하며 새날이 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견디며, 그 울분의 가슴을 둥둥 두드려 풀어준다. 소리를 내는 북처럼 둥둥 두드려 자기희생을 하는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 바로 이들이 새로운 역사를 여는데 자기희생을 해준 이들이다. 그들의 설움과 울분은 북이 되어 둥둥 두드려져서 이 땅의 뿌리를 적시는 밑거름이 된다. ‘속 썩은 연놈들’의 횡포는 시 「웃음病」에도 폭로 되고 있고, 그 때부터 시인은 실소를 하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냉소를 하게 된다.

 

마른 추위가 계속 되던 어느 날, 나는 모를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급히 물걸레를 들고 헬기장으로 달려가 주변 사철나무 잎새마다 내려앉은 먼지, 먼지를 닦아냈습니다. 일 년 내내 쌓인 먼지가 아니라 세상의 아이러니와 무지의 깊은 세계 구석구석을 훔쳐냈습니다. 그리고는 호루라기 소리에 반사적으로 달려나와 길게 길게 오줌을 누며 숨을 돌렸고, 화장실 앞 양지바른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햇살에 손을 녹이며 곰곰이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의 소리 없는 웃음을 눈치 채고 그 때부터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바보’라 불렀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빈틈없는 바보가 되었고, 나는 바보가 아닌 위인들의 업적과 치부를 들여다보며, 또 하나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은 온통 웃음덩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내겐 실없이 웃는 버릇이 생겼고, 언제부턴가 웃음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病(병)이 되어 깊어만 가고.

-「웃음病」, 『안암동日記』에서

 

수직사회인 군대에서 시적 화자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사철나무 잎새마다 내려앉은 먼지를 닦는다. 누군가 순시를 나오고 일사분란한 모습으로 준비하는 이 광경은 세상의 아이러니와 무지의 깊은 곳을 닦아낸다. 그리고는 혼자 기막힌 이 상황을 헛웃음으로 웃는 이 체험 속에서 시인은 세상의 이면에 있는 아이러니와 어둠, 무지를 웃음으로 폭로하고 있다고 하겠다. 시인은 이 아이러니로써 세상을 전복할 에너지를 생산한다. 폭압적인 국가기구(RSA)에 의해 주도되는 국가의 권력을 시인은 군대에서의 일상적인 개인의 체험을 시적으로 재구성하여 아이러니의 풍자성을 바탕으로 실소나 냉소를 자아내게 하여 부조리나 정의롭지 못한 군대 사회를 우스꽝스럽게 창조해내고 있다. 역시 폭압적인 국가기구에 대항하는 민초들의 고통을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여 공권력 경찰과 정보기관의 폭압에 맞서고 있다.

 

십자가를 메고 비틀비틀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끝내 못 박혀 죽고 거짓말 같이 사흘 만에 깨어나 하늘나라로 가셨다지만 도둑처럼 오신 서울의 예수는 물고문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죽었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온몸에 불을 다 붙였지만 달포가 지나도 다시 깨어날 줄 모른다. 이젠 죽어서도 하느님 왼편에 앉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 서울의 예수는 갈라진 이 땅에 묻혀서, 죽지도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의 밑둥, 밑둥을 적실꼬.

 

-「서울의 예수」, 『안암동日記』에서

 

국가권력의 협력자인 경찰과 같은 공권력과 정보기관의 탄압은 바로 양떼들을 잡아먹거나, 약하고 야윈 양떼들을 구석으로 밀려나게 하는 ‘속 썩은 연놈들’이다. 양떼와 국가권력의 싸움은 에제키엘 예언서의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이다. 이것을 여호와는 가리겠다고 하였다. “너희는 좋은 풀밭에서 뜯어 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나머지 풀밭을 발로 짓밟는 것이냐? 맑은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나머지 물을 발로 더럽히는 것이냐? 그래서 내 양 떼가 너희 발로 짓밟는 것을 뜯어 먹고,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셔야 하느냐?” 이 말씀처럼, 좋은 풀밭에서 독식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공권력과 같은 권력의 충견을 앞세워 양떼들의 풀밭을 짓밟고 양떼들이 먹을 물을 더럽힌다. 그들은 짓밟힌 풀을 먹고, 그들이 더럽힌 물을 마셔야 하는 불공정과 정의롭지 못한 이 권력을 하느님은 응징하겠다는 뜻이다. 서울에 도둑처럼 그 때와 그 시간도 모르는 새에 재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어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분신(焚身)을 하면서도 한 달 반이 되어도 부활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간다. 그러니 공권력에 희생되고 스스로 분신으로 몸을 바친 영혼들은 하느님 오른 편에 앉는 영광도 누리지 못한 채 서울의 갈라진 한반도 이남에 묻히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죽지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의 밑둥을 적시고자 한다.

이런 비극의 역사는 왜 되풀이 되는가?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 제대로 목자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생기는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 권력남용과 억압, 공포정치로 이어지고 그 속에서 먹을 것을 빼앗기고, 다치고, 목초지에서 내몰린 야윈 양들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은 서울의 예수 그리스도로 비유되어 대항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간다. 이것은 스스로 선택한 자기희생이다. 이것이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지 못한 사회의 병리현상이다. 그러니 일제강점기의 역사 속에서 시인은 의사 안중근을 통해서 이렇게 나라와 조국을 위하여 한 목숨 바친 도마 안중근을 기리는 시를 쓰고 있다.

 

젊은 중근 달려간다/우리 중근 달려간다/칼날에 총부리에/쓰러져 신음하는/어깨처진 풀들을 어루만지며/달려간다 달려간다/“하늘이 주는/하늘이 주는 기회라”/일그러진 떡밥 같은/늙은 도적/심장에, 갈빗대에, 복부에/세 발의 탄환(彈丸)/통쾌하게 명중시키니/하루아침에 제국주의가/땅에 떨어지도다/만천하/무사태평함을 알리고/우리 중근, 조선 의사(義士)/당당하게 걸어간다/사방천지/도탄에 빠져있는/이 나라 백성들을 일깨우고/‘義 ’하나로 살다 죽어/여한 없는 우리 중근/“조선에 사람 있도다/조선에 사람 있도다”/가장 외로운 남자 가장 뜨거운 남자/마지막 가는 길/바지 저고리 두루마기/정갈하게 갈아입고/날아가네 날아가네/훨훨 날아가네/살아있는 백성/가슴 가슴 가슴 속으로/조선의 붉은 꽃이 되어/눈부신 구름이 되어/날아가네 날아가네.

 

-「안중근」, 『백운대에 올라서서』에서

 

이 시에서 양떼들은 ‘어깨처진 풀들’로 비유되어 있고, 안중근은 그런 야윈 풀들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하고는 하늘이 준 기회라 여기면서 한 몸을 바쳐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권력의 심장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다. ‘조선의 붉은 꽃 되어’라는 표현은 안중근의 자기희생으로 조선 독립만이 조선 민중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꽃이 된다. 그 꽃은 순국의 안중근의 피와도 연결되어 있다. 안중근의 조선의 생명을 살리는 데에 자신의 생명을 던진 가장 뜨거운 남자이다. 시인은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 서울에 재림한 예수를 완성한다. 예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여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대항하다가 젊은 피를 흘려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었다. 그것은 성부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자기희생으로 힘센 양들 사이에서 다치고, 내몰리며, 소외되고, 목초지를 빼앗기며, 짓밟힌 풀과 더렵혀진 물을 먹고 살아간 이 땅의 민초들을 구원하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으로 이어져 가슴에서 가슴으로 순혈의 피의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 그 역사의 강물은 도도하게 흐르며, 그것은 또한 쉼 없이 흐른다. 이 역사의 흐름도 하느님의 자비 속에서 시인의 경건한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청하며 기도한다. 시인은 이렇게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며 불의한 세상에 대해 시 「나의 기도」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한다.

 

오, 하느님

당신의 뜻대로 하늘과 땅 사이에

죽어있는 것과 살아있는 온갖 것들을

다 빚어 놓으셨지만

 

당신의 뜻대로

이 땅 가득 번창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눈먼 욕구를 채우기 위해

충혈된 눈동자를 더 이상

숨길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숨을 쉬며 산다는 것은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의 목을 조르는 일이고,

크고 작은 것들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짓밟고 잘라내어

이 땅 위로

버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머지않아 그런 것들 속에서 내가

허우적거릴 것이지만

오늘에 미친 우리는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검은 손과 무지는

다름 아닌 나의 목을 노리고

성큼성큼 다가설 것입니다.

밤마다 저려오는 그런 예감을 애써 외면하면서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망설여야 하고,

눈을 맛보고 빗속을 거니는 것은

이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뿔싸, 이대로라면

사람에겐 사람의 손이

가장 무서운 것이 될 것이요,

그쯤에선 하나뿐인 이 땅의 몸살도

아깝게 멎어버릴 것입니다

 

진지하고 화려했던 우리의 과거는 물론

사라진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영영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당신의 뜻이라면,

이 또한 당신의 뜻이라면,

그러나 당신은 우리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지혜와 기회를 주셨사오니

그 뜻만은 아닌 것 같구려.

그 뜻만은 아닌 것 같구려.

 

이 나의 위선이 위선이 아니 되기를

이 땅에 버릴 것 하나 없는 세상으로

빛과 어둠을 부리어 주소서.

말씀으로 천 가지 만 가지 빛깔을 내시는

당신이여,

당신의 귀여운 것들이

당신과 함께 숨쉬며

당신의 뜻을 넉넉히 헤아리게 하소서.

 

하늘과 땅 사이

조금도 구김살 없이 감도는 기운,

당신은 필연이 아니신가요.

조금도 빈틈이 있을 수 없는.

 -「나의 기도」, 『바람 序說』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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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환의 시법 : 반복의 미학

-지향하는 세계의 도래를 위하여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우리는 어떨 때 반복적으로 말할까? 이루어 지지 않은 꿈을 꾸기 위해서 스스로 수없이 되뇌인다. 마치, 자기최면처럼 ‘나는 ~가 될 거야’ 라고 속으로 수없이 반복한다. 개인적인 어떤 바람을 두고 마음속으로 또는 소리를 내어 말하거나, 때로는 공동체나 광장에 모인 이들이 어떤 이슈를 두고 다함께 반복하여 외쳐대기도 한다. 때로는 원치 않는 일로 인해서 상처가 깊을 때에 그 상처가 다 낫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 하여 이야기한다. 아마, 그럴 때는 되풀이 하여 이야기 하는 동안에 분이 풀려서 마음에 평정을 찾고 더 이상은 이야기 하지 않게 된다. 또는, 좋은 기억들을 끄집어내어서 한 번 더 행복에 젖기도 하고, 슬픈 일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자꾸 흘려서 슬픔과 우울을 쫓아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종교적으로는 일심(一心) 정진을 위해서 기도문을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하여 마음을 비우고 일심을 이루기도 한다.

반복은 니체의 ‘영원 회귀’로 거슬러 올라간다. 들뢰즈는 ‘영원회귀’에 대해 해석하기를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며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으로 보았다. 차이를 내포하고 생성하는 원리로서 반복을 다루게 되면 시의 언술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이는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원리와도 관련이 있다.

문학작품에서 반복은 수사법의 하나로 다루어지거나 시에서는 주로 리듬의 구성 원리로 논의 되어왔으나, 이 글에서는 이시환 시의 반복이 시의 언술 구조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반복의 형태와 반복의 내용을 파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시환의 시에서 반복은 시의 언술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사용되고 있고, 많은 시편들이 이 반복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무엇이 반복되는가에 따라서 반복의 구성 요소는 음소의 반복, 어휘의 반복, 구문 및 문장의 반복, 시행 및 연의 반복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반복이 문장이나 언술을 구성할 때 대구, 병렬, 나열, 점층 등의 형태를 가진다. 이러한 반복이 시에서 쓰였을 때 한 편의 시를 어떻게 변화 시키는가는 반복이 지니는 언술구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제1시집 『안암동日記』속의 산문시「강물」을 읽어보자.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Em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지금도 예고 없이 불쑥 불쑥 들이닥치는 안바람 바깥바람에 늘 속수무책으로 으스깨어지다 보면 어느새 주눅이 들어 키 작은 몸을 움츠리는 버릇이 굳은살이 되고 더러는 살아보겠다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어깨 부러진 활자들의 꿈틀거림이 정말로 보일까.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나갈 때 안으로 말아 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 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가슴마다 봇물이 될까.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

 

이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종결 어미 ‘~것일까, ~있을까, ~보일까, ~보일까, ~보일까, ~보일까’ 밑줄 친 부분이다. 이 표현은 자문하거나 확실치 않거나 의구심이 들어서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볼 때 쓰는 말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Em이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던지기 전에 ‘이제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고 하여 불확실성을 담은 시 구절이 먼저 왔다. 그러나 상술한 종결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릴까라는 것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함과 조금은 보이지만 아직은 완전히 보이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시적 화자가 보고자 하는 것은 심안이 열려 우리네 서민들의 주름살의 깊이를 짚을 수 있는 눈, 그런 사람들이 고통 중에도 묵묵히 가슴으로 삭이면서 그 슬픔과 고통이 가슴, 가슴마다 흐르는 뜨거운 몸짓을 보는 눈, 세상의 세찬 바람에 주눅 들고 가끔은 부러져 다시 일어서는 활자들의 꿈틀거림을 볼 수 있는 눈,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생의 절박함에서 올리는 기도를 보는 눈, 이런 것이 아우성이 되고 가슴 마다 터지는 봇물 되어 흐르는 눈물 없는 뿌리를 보는 눈이다. 그러나 아직은 의문이다. 그게 다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를 쓸 때 그에게 이미 언어로 토해낸 만큼은 보인다. 더 깊이 내려가 고통과 슬픔, 서러움과 분노, 상대적 박탈감 등 눈물의 뿌리를 시적 화자는 보고자 꿈을 꾼다. 그의 꿈은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른다. 그래서 가슴 가슴들을 적셔준다. 시인은 그네들 가슴 속에 묻어둔 역사를 꿰뚫어 보는 견자(見者)의 눈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 땅의 민초들이 이렇게 서럽게 살아가는 원인을 시인은 신분, 계층, 부 등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제2시집 『白雲臺에 올라서서』(1993) 속의 「돈」에는 이러한 원인들인 돈이 끊임없이 돌고 돌듯이 반복되는 현상과 거기에 따른 서민들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이 시집의 앞부분에서 「타령을 아시나요」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타령조에 기본 리듬을 두고 있다. 타령은 ‘침몰하는 기운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요, 슬픔을 기쁨으로 전이시키는 흥이다’라고 말하듯이, 타령조가 지니는 전통적인 리듬을 따라 반복하다 보면 슬픔을 희망의 기쁨으로 변주시킨다. 어떨 때는 가슴 속에 삭여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또는 가슴에 묻어둔 말을 폭로하여 토하거나 이루고 싶은 요구사항을 함께 반복하여 외쳐댐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는 것이 타령조라는 전통 리듬이 가진 힘이다. 특히, 제2시집에 타령조라는 전통 리듬을 전통의 악기가 지니는 특성을 소재로 하여 녹여 낸 시들을 모은 이 시집에서 반복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고, 이는 그의 시의 언술구조를 이루는 핵심이 되고 있다.

 

그 놈의/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돌고 돌아 돈이로구나/네가 궁해 눈을 뜨면/범벅돈이 다 된 애비 애미/오늘도 타령이오 돈돈/낯짝 두꺼운 놈 손에 손에/약싹빠른 놈 주머니 속속/오래 오래 머무르지 말고/돌고 돌아 오고 가는 게/너 아니냐 돈돈/단 돈 천원에 울고 웃는 사람아/돈에 죽고 돈에 사는/사람아 세상아/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이 세상에/못나빠진 사람 사람/가슴마다 눈물뿌리 내리고/웃음씨를 말리는 돈돈/한눈 파는 너와 나/혼줄을 속속 다 빼가는/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

 

‘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이 세 번 반복 되고 ‘오늘도 타령이오 돈돈’, ‘너 아니냐 돈돈’, ‘웃음씨를 말리는 돈돈’이 세 번 반복되고 있다. 황금만능주의로 물신화된 세상은 돈이 사람을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돈은 그야말로 물신이며 맘몬이다. 서민들의 가슴마다 눈물뿌리를 내리게 하고 웃음씨를 말리는 돈은 영혼마저도 다 빼앗아 가는 무서운 존재로 군림한다. 이 시는 전통의 3․4나 3․5, 4․3을 기본의 리듬으로 하여 ‘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을 후렴처럼 반복하여 돈이 지니는 위력을 점층적으로 나타내어 의미를 강화시킨다. 그리고 반복을 통해 돈이 지니는 의미가 강화될수록 돈을 갖지 못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한 채 유기 되어가는 슬픈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서민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은 자연히 할 말을 다하고 살지 못한다. 그래서 늘 가슴에 응어리가 져 있다. 그러니 그것을 풀지 않으면 병들어 가는 사회가 된다. 우리의 전통 살풀이춤에다 이 부정적인 정서들을 녹여내려는 「살풀이춤」은 너와 내가 서로의 가슴에다 묻어둔 응어리를 풀고 풀어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되게 하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할 말이 있네/할 말이 있네/해야 할 말/못다 한 말/많으면 많을수록/이렇게 저렇게 돌아앉아/옷고름 속에 묻어두고/왼발 오른발 서로 엇디디며/왼손 오른손 앞뒤로 옮겨/이승 저승 틀어 엎고/아래 위로 뿌리면/양부리 버선코 치맛자락/어우러져 어우러져 흰 수건/아슴아슴/속치마 사이로 뜨고 지는/초승달 무지개 꿈/옷자락을 여미듯/살며시 몸을 흔들어/두 눈을 재우듯/앉아 휘젓는 이 몸은/뒤엉킨 한 타래 실이련가/타오르는 불덩이/타고나면 타고나면/엉긴 매듭 풀리어/장단과 장단 사이로/숨찬 바람되어/걸어 나오는/너는 나이고/나는 너이고

 

연 구별이 없고 행갈이만 있는 이 시는 1행과 2행에서 ‘할 말이 있네/할 말이 있네’로 병렬 반복되고 있어 살풀이춤이 주로 굿판에서 벌어지므로 동시적 의미와 주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구의 반복으로 ‘어우러져 어우러져’와 ‘타고나면 타고나면’이 살풀이춤의 과정에 따라 반복되고 있다. 살풀이춤을 추는 이유는 몸짓을 통한 춤의 동작으로 가슴 속에 쌓아둔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춘다. ‘할 말이 있네/할 말이 있네’는 두 번 되풀이 되면서 강조를 하고 있다. 그 할 말에는 해야 할 말과 못다 한 말이 있다고 한다. 꼭 해야 할 말은 뭔가를 폭로해야 할 말일 것이며, 못 다한 말은 속에서 삭이고 있는 말이 될 것이다. 할 말에 대하여 춤으로 풀어감으로써 할 말을 부연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연하는 기능으로 반복이 계속됨으로써 춤을 추는 의미를 구체화하고 있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한 타래 실인 몸을 불사르면 엉긴 매듭은 풀어져 장단과 장단 사이로 숨찬 바람이 되어 걸어 나오는 너는 나이고 나는 너가 된다. ‘너는 나이고/나는 너이고’라는 구절의 대칭적 반복은 너와 나의 이원적 의미가 너가 내가 되고 내가 너가 됨으로써 우리가 되어 이원적 의미를 넘어서 일원적인 조화지경으로 변화되어 의미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가슴에 엉킨 실을 불태워 죄다 풀어서 너와 내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살풀이춤의 광경을 반복의 리듬에 실어서 표현함으로써 가슴 속에 묻어둔 못다 한 말을 풀어헤쳐 너와 내가 서로 하나 되어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우리가 된다고 하여 의미가 점층적으로 확대되어 하나로 어우러지는 춤판을 표현한 시이다. 이 시에서는 병렬 반복을 통해서 의미 강조, 어구와 어구의 반복을 통해 리듬을 생산, 대구 반복을 통해 이원적 의미가 조화지경으로 점층적으로 의미가 확장이 되어 ‘할 말’의 내용을 부연해주는 것은 반복되는 춤사위의 동작에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춤과 리듬을 탄 노래 즉 시를 통해 동시적 기능과 주술적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서를 지닌 반도의 백성은 그의 시 「아쟁」에서 ‘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 사람들이다.

 

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우리들의 어제와 오늘 속속/그 어느 곳이 얕고/어디쯤이 병 깊은 곳인지/짚어내기 어려운/반도땅 손금/드러누운 골골이/어찌하여 안개만 안개만/이 놈의 죄 없는 눈과 귀를/비비고 쑤셔보아도/침침한 바깥 시상은 여전해/그렁저렁 일고 잦는 바람에/시방 몸을 던지는/왼 들엔 풀뿌리/어깨를 풀지 아니허고/잠기어 가는 건 목,/목마른 이들의 몸부림일 뿐/아쟁 아쟁 아쟁의 걸음마/절며 오르고 올라//못내 솟구치다가/거꾸로 떨어지는 가락은/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 땅/가는 허리 쥐어짜기.

 

아쟁이라는 전통의 현악기가 지니는 음색이나 곡조를 연상하여 반도 땅 백성의 병 깊은 곳을 아쟁의 활로 더듬어 찾아가는 것은 아쟁 연주의 느린 음처럼 절며 오르고 오른다. 이 백성은 더불어 눕거나 더불어 일어선다. 이것은 바람에 더불어 눕고 더불어 일어서는 풀과 같다. 거기에 바람 대신에 아쟁의 활이 내는 소리고 더불어 눕고 일어선다. 그러다가 못내 솟구치다가 거꾸로 떨어지는 극적인 가락은 이 땅 백성들의 여윈 허리를 쥐어짜는 어제와 오늘의 병 깊은 곳이다. 이 시에서 ‘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 이 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반복된다. 이 구절 뒤에 오는 ‘우리들의 어제와 오늘’과 ‘땅 가는 허리 쥐어짜기’는 바로 그 땅에 사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아쟁 소리에 실어서 소리의 파장을 통하여 확장하는 효과와 이 땅의 백성이 지니는 고통이 어느 한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운명의 그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풀이」라는 시에는 징, 꽹과리, 장고, 북, 날라리, 피리 등의 전통 악기를 불고 두들기고 치면서 탐관오리들과 외세의 침탈자들에 대해 대항하고 응징하거나, 비극적 역사 속의 응어리를 풀어서 동(東)과 서(西)가, 남(南)과 북(北)이, 한강과 임진강이 하나가 되는 민족 대동의 새 역사를 기원하는 데까지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1

가물가물/세상 사는 일이 술술/우리 맘처럼 풀리지 않을 땐/손을 놓고 일어나/징을 치세 징을 치세/이리도 둘러보고/저리도 굴러보아/그래도 이 가슴 답답하면/박차고 일어나 꽹꽹 꽤갱/꽹과리를 치세/꽹과리를 치세/다락 속에 깊은 잠자는/날나리․장고․피리 모두 나와/큰 북 작은 북 한 데 어우러져/신이 나게 두들기고 불어 보자/그렇게 한바탕 소나기 되어/메마른 땅 위에 이 한 몸 뿌리며/돌고돌아 돌다보면/백 년 천 년 묵은/체중이 다 내려간다/죽어서도 그 근성 못버리는/「조병갑」나와라/「변학도」나와라/「북곽선생」나와라/왜놈 뙤놈 양놈 다 나와라 이잇/네 이놈들/할 말 있으면 하라하니 허허/입은 천이어도 만이어도/가만 먹통이로구나/술술 징징 꽹꽹 허허 하하.

 

2

오락가락/세상사는 일이 술술/우리 맘처럼 풀리지 않을 땐/헛웃음도 좋고/한숨도 좋고/唱도 좋고/어깨춤도 좋아/억울한 것도 풀고/분한 것도 풀고/슬픈 일도 풀고/심심한 것도 풀고/풀 것을 푸는 데는/이골이 다 나있는/너와 나 우리 우리/다같이 일어나 한 데 엉겨/목판 위 엿가락이 되도록/징을 치고 북을 치고/겨드랑이 사타구니/등줄기 사이사이/흥건하게 젖어/흥건하게 젖어/東과 西,/南과 北을 잇는/우리의 한강이 되고/임진강이 되고/마침내 하나가 되거라/다시는 떨어질fo야 떨어질 수 없는/둘도 아닌 하나가.

 

시집의 첫째 마당이며 ‘살풀이 춤’이라는 시장(詩章)의 제목에서와 같이 이 시는 이 장의 결정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는 동어 반복이나 구문 반복 유난히 많으며 ‘징을 치세/징을 치세’, ‘꽹과리를 치세/꽹과리를 치세’ 등의 병렬적 반복도 두드러진다. 온갖 전통악기를 동원하여 가슴 답답한 개인과 민족의 비극적 아픔을 풀어내고자 한다. 마당놀이라는 형식이 갖는 힘은 공동체적이다. 개인들이 모여 무리를 짓고 집단을 이루어 가슴을 답답하게 한 원인을 처단하려고 한다. 그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를 조롱하거나 응징하는 이 마당놀이는 근현대사에서 억눌린 가슴들을 풀어주고 갈라진 반도 땅을 하나로 만들어 나간다. 이렇게 마당놀이에 쓰이는 전통악기를 모두 동원하여 한바탕 두들기고 불고 치다보면 억눌린 가슴들이 풀어진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일어나 흥건하게 메마른 가슴이 젖어 내리고 억울한 것도 분한 것도 슬픈 것도 권태로운 것도 모두 풀리고 만다. 이렇게 흥건히 젖어서 흐르고 흘러 한강이 되고 임진강이 되어 강과 강이 만나 마침내 하나로 흐른다. 강이 그렇게 흐르듯 갈라진 겨레가 하나가 되어 흘러간다. 대동(大同)의 흐름이다. 이렇게 풀어야 하는 게 우리네들의 근성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우리네는 역사의 비극에 대해 총칼로써 복수극을 펼치기보다 이렇게 대동단결로 풀어내었다. 그것이 우리네 근성이고 본질이다. 시인은 그것을 마당놀이라는 형식을 시에다 옮겨와서 전통악기를 동원하여 그 반복적으로 두드리고, 불고, 치는 행위를 통하여 시의 언어에 리듬을 타게 하였다.

언어의 리듬은 노래가 되어 한반도가 하나 되길 기원하면서 반복하여 다함께 합창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반복은 「조선낫」에서 ‘낫일테면 조선낫이라/낫일테면 조선낫이라’하여 남성의 이미지로, 「호미」에서 ‘풀을 매며 억척스레 살아온/조용한 아침의 나라/어머니여, 호미여’ ‘이제는 너 없이 못살고/나 없이 힘 못쓰는/호미여, 어머니여’로 여성의 이미지로써 점층적으로 반복되어 그 의미가 강화된다. 여기에는 시인이 인식하는 민족 공동체 의식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이 마당놀이의 가락인 전통 리듬을 타고 불리어진 것이다. 시인은 왜 이렇게 이 땅에 자유와 평화와 정의가 꽃피워지길 희망하는가? 그것은 시인의 개인사인 가족사에서도 또 그의 이웃들에게서도 공통적인 비극의 역사를 대면하였기에 미래에는 서로 상생하며 조화롭고 생명으로 흘러넘치는 이 땅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시환 시인은 비극적 요인을 가족사/민족 공동체의 역사와 같이 외부에서 찾는 제1, 제2시집과 달리 제3시집『바람 序說』부터는 내면으로 침잠하여 들어가면서 사물과 자연물을 대상으로 대화를 나누어 간다. 제4시집『숯』과 제5시집 『추신』에는 존재/비존재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인간의 유한성에서 오는 허무감과 공허, 보잘 것 없음을 깨달으면서 제6시집 『바람 소리에 귀를 묻고』, 제8시집『상선암 가는 길』, 제9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 제10시집『애인여래』, 제11시집『눈물모순』에서 구도의 여정을 걸어간다. 이 시기의 시들에서 반복은 제1, 제2시집에서 보이는 특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전통적 리듬을 바탕으로 하되 제1, 제2시집에서 보이는 음소와 동어 반복, 문장(구문) 반복, 종결어의 반복과는 달리 연을 이루어 시의 구조에 변화를 주어서 한 편의 시가 반복 구성으로 인해 시적 긴장을 형성하거나, 의미와 정서를 강화하여 보다 기능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제3시집『바람 序說』의 「그리움」을 읽어보자.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언덕 너머

바다가 좋다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는

 

그렇듯 하루가 멀다고

밤마다 가슴 속 속속들이 파고드는

불면의 그 뿌리 사이로

조용한 혁명이 꿈을 꾸고

 

차라리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산 너머 있는 그대로

네가 좋아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서는

 

이 시는 그리움을 표현한 시로서 그 대상은 바다이다. 이 시에서는 전 5연 구성 중 2연과 5연에 대구 반복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시적 화자 ‘나’와 바다인 ‘너’의 거리를 잘 표현하면서 그리움이라는 시제에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랑하는 연인이 하나가 되기 전에 이렇게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고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서는 그런 관계일 것이다. 이것은 남녀 간의 거리만이 아니라 대상과 나, 즉 객체와 주체의 거리이다. 그래서 그리움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시의 반복은 나와 너의 거리가 대칭적으로 반복되어 이원적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과의 거리 두기는 사랑하는 사이에는 서로가 시선을 마주하고 집중한다. 제4시집 『숯』의「굴뚝나비」에는 부정이나 금지의 반복이 두 번씩 되풀이 되어 의미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눈길 주지 말게나.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덥석 덥석 앉질 말게나.

 

늘 검은 정장 검은 브래지어

검은 팬티를 착용하는

유별난 개성.

 

너는 그렇게

늘 당당하지만 그것으로 외로운

한 마리 가녀린 나비가 아닌가.

 

너는 그렇게

늘 홀로이지만

언제나 나의 시선을 묶어 두지 않았던가.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눈길 주지 말게나.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덥석 덥석 앉질 말게나.

 

이 시에서 나는 굴뚝나비에게 시선을 묶어둔다. 굴뚝나비는 외롭고 가녀린 한 마리의 나비이지만 나의 시선이 늘 묶여있으므로 아무 꽃에나 앉지 말라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이 반복은 전 7연 중 1, 2연과 6, 7연에 아무 꽃에나 눈길을 주거나 않지 말라는 대칭적 반복이 시의 연으로 구성되어서 굴뚝나비인 너와 시적 화자 나는 이원적으로 되고, 꽃과 굴뚝 나비의 긴장 관계는 너와 나의 긴장 관계를 내포하고 있어서 시적 화자는 금지의 당부를 하는 것이다. 숯과 동일한 이미지의 동물인 굴뚝나비를 통해서 시인은 꽃과 굴뚝나비를 대조적으로 보고 이것을 나와 너의 관계에 비유하여 긴장을 유발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다룬 시인의 제5시집『추신』에는 존재/비존재의 고뇌 속에서 비존재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공허할지라도 그가 늘 주장하듯이 유무동체(有無同體)의 인식 속에서 변화되고 있다.

 

문을 닫고 들어와 보게./들어오면 알게 될 거야./네 빛깔, 네 향기, 네 모양새부터 버리고/자리를 말끔히 비워둔다는 게/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내가 나를 버려/온전히 비어 있다는 게/얼마나 향그런 열매인가를/너는 알게 될 거야.//연분홍빛 미소로/내내 서 있던 그 자리가/텅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너의 꽉 찬 비밀이/비밀이 아님을/알게 될 거야./알게 될 거야.

 

3연 구성의 이 시에서는 ‘알게 될 거야’ 라는 말이 반복이 되고 있다. 제1연은 자신의 빛깔, 향기, 모양새를 버리고 들어와 보면 비워 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거라고 시적 화자는 말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와 보라고 권유한다. 제2연에서는 내가 나를 버려서 너를 내 안에 들어오게 하였듯이 그것이 얼마나 향기로운 열매인지 너는 알게 될 거라고 강조하여 반복한다. 3연에는 텅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너와 나 사이에 장애였던 너의 비밀이 비밀이 아님을 알게 될 거라고 두 번을 반복한다.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관계란 바로 서로가 상대방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비워놓을 때 바로 텅 비어 있는 것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의 시로서 유무동체에 도달한다. ‘알게 될 거야’ 라는 속삭임은 ‘깨닫게 될 거야’의 의미이며,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나를 버려서 너가 들어올 자리를 위해 비워둘 때 가능하다. 그 때는 장애가 되었던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되며 함께 공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추신․25」를 읽어보자.

 

푸른 하늘에/떠가는 흰구름 같이//내 마음/내 몸도//내 생명/내 삶도//푸른 하늘에/떠가는 흰 구름같이//머물면 눈이 부시고/사라지면 깊고 깊어라.

 

‘푸른 하늘에/떠가는 흰 구름 같이’라는 문장이 연을 이루어 1연과 4연에 반복되어 있는 이 시는 나의 마음, 몸, 생명, 삶도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 같이 머물면 눈이 부시고 사라지면 깊고 깊을 뿐이라는 인식(認識)이다.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머물 그 때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사라지면 깊고 깊다고 한다. 그러니 시인에게는 삶도 죽음도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과 같다는 인식이다. 시인은 흰 구름과 같이 비워서 가벼워진 정신세계를 지녔기에 삶도 죽음도 모두 아름답고 깊고 깊다는 인식에 도달하여 가볍고, 자유롭고, 변화하며, 유동적이면서, 유기적이다. 이 시집의 이름이나 주요 시의 제목이 ‘추신’ 인 것은 죽음을 내 안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자가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며 쓴 것이기에 비교적 짧은 시에 그 마음을 담았고 1연과 4연의 대칭적 반복으로 2연의 마음/몸, 3연의 생명/삶이 지니는 이원적 세계가 모두 일원적 세계로 귀결되게 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머물고 사라지는 것은 매 한 가지란 의미이다. 즉 있는 것도 없는 것도 같은 것인 세계를 시인은 제5시집『추신』에서 깨달은 것이다. 반복 기법의 다양한 변주로 ‘당신과 나’를 노래한 제6시집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에는 궁극적으로 당신을 꿈꾸는 시인의 영혼을 읽을 수 있다. 먼저, 「生命(생명)」을 읽어보자.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함성이 있고

그 속에 기쁨이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네가 있고

그 속에 내가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속삭임이 있고

그 속에 말씀이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이 시에서는 병렬적 반복이 쓰이고 있다. ‘~할 지어다’라는 어구에서 오는 주술적 의미를 병렬 반복을 통해 강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생명이 푸르고 푸르길 시인은 주술적으로 반복하여 되뇌이고 기원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생명은 영원히 푸르고 푸르러야 한다. 그 생명 안에는 우리들의 함성이 있고 기쁨이 있다. 그 생명 안에는 너와 내가 존재하며 그 생명 안에는 생명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의 속삭임과 우주만물에 깃든 말씀이 임재하고 있다. 그러니 푸르고 푸를지어다라고 신들린 듯 되뇌이고 있다. 이 시는 불필요한 언어를 재단(裁斷)하고 시인이 예언자적 영감을 가지고 간명하면서도 핵심 되는 언어만으로 생명이 지닌 힘을 나타내고 있다. 이 생명은 함성, 기쁨, 너, 나, 속삭임, 말씀이기 때문에 푸르고 푸를지어다라고 하였다. 이 생명은 곧 당신이다. 이 시집에는 「당신을 꿈꾸며」라는 시가 6편의 연작시 구성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접을 받으며

당신의 城門을 열고 들어가

마당 가운데 핀 당신만의 꽃을 보았습니다.

그 꽃술에 흐르는 달콤한 꿀과 향기에 취해

그만 혀끝을 갖다 대면서

비몽인지 사몽인지 진몽인지 간에

당신의 나라를 탐해 버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당신의 깊고 깊은

우물 속으로 던져져

죽고 죽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당신의 나라, 당신의 영토 위에서

비로소 당신의 심장이 되었고,

당신의 숨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새삼스러이 깨달았습니다.

내 그토록 간절히 그리워하던 당신이 나의 정령이고,

내가 곧 당신의 정령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내가 타버리고 남은 당신의 가슴 위에

당신이 무너져 내린 내 가슴 위에

웅장한 또 하나의 새 城이 솟고 있음을.

눈이 부시게, 부시게 솟고 있음을.

 

이 산문시에는 ‘~ㅂ니다’라는 종결 어미와 ‘당신’과 ‘나’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고 있다. 또 중요한 어구의 반복 중에는 ‘죽고 죽어서’와 ‘부시게, 부시게’라는 동어반복이다. 이 동어반복을 통하여 내가 죽고 당신이 무너져 내려서 새로운 성이 눈이 부시게, 부시게 솟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신과 나는 하나의 정령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같은 의미를 말이 다른 시어로 구성하여 변주하거나 부연하거나 반복하고 있다. 당신의 나라, 당신의 영토는 같은 의미이고 당신의 심장, 당신의 숨 또한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의미적으로 전환․확장하거나 강화하는 것이 이 시에서의 반복의 기능이다. 「눈을 감아요」를 읽어보자.

 

눈을 한 번 감아 보아요.

이 땅에 바람의 고삐를 풀어 놓아

온갖 생명의 뿌리를 어루만지고 가는,

바쁜 손이 보여요.

 

눈을 한 번 더 감아 보아요.

이 땅에 바람의 고삐를 풀어 놓아

온갖 생명의 꽃들을 거두어 가는,

분주한 손의 손이 보여요.

 

그렇게 귀를 한 번 닫아 보아요.

이 땅 위로 넘쳐나는,

서 있는 것들의 크고 작은 숨소리도 들려요.

 

그렇게 귀를 한 번 더 닫아 보아요.

이 땅에서, 이 하늘에서 넘쳐 흐르는,

바람의 강물소리 들려요.

바람의 고삐를 풀어놓은 손과 손이 보여요.

 

이 시집에서 바람에 대한 시인의 묵상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람은 우주의 원력으로써 모든 생명들을 잉태하게도 하고 소멸하게도 한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하고 귀를 닫아야 비로소 보이고 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제1연과 제2연에서는 눈을 감아 보라고 반복하고 제3연과 제4연에서는 귀를 닫아 보라고 한다. 왜냐하면, 바람의 바쁜 손, 즉 바람의 역할을 심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들으려면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하늘에서 넘쳐 흐르는 바람의 강물소리는 귀를 한 번 더 닫을 때 들린다고 하였다. 오히려 그렇게 할 때 바람의 강물은 들린다고 하니 마음의 귀로 한 번 더 들으라는 뜻이다. 이 시에서는 대구 반복이 쓰여져서 오히려 눈을 감을 때 바람의 손이 보이고, 귀를 닫을 때 바람의 강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것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니는 이시환 시의 주요 어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반복은 「하늘․2」에 오면 리듬을 타고 몸의 세계인 현상계에 너무 목 메이진 말고 하늘을 바라보길 권한다.

 

서럽거든 보라.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라.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스스로 깊어가는 저 하늘을 보라.

 

백 년도 순간이요

이 몸도 그림자 같은 것이니

아끼되 목 메이진 말구려.

아끼되 목 메이진 말구려.

 

괴롭거든 보라.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라.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스스로 푸르러가는 저 하늘을 보라.

 

백년도 하루요,

이 몸도 바람 같은 것이니

슬퍼도 크게 슬퍼하지 말구려.

기뻐도 크게 기뻐하지 말구려.

 

이 시에서는 반복의 기법이 아주 탁월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휘적으로도 약간씩 변화를 주어서 대조적 반복을 통해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연과 3연, 2연과 4연이 각각 대조적 반복을 통하여 시 전체에 긴장을 형성하고 있는 예이다. 그러면서도 각 연의 3, 4행에 변화를 주어서 진부하지 않게 하였다. 특별히 이 시에서는 이미지나 비유를 동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이한 언어를 쓰고 있지만 반복의 기법을 잘 구성함으로써 일상성을 초월한 시적 언어, 시적 구조로 변화시키고 있어서 돋보이는 시가 되고 있다.

 

나는 떠가네.

나는 떠가네.

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처럼 누워.

 

나는 떠가네.

나는 떠가네.

저 강물에 풀잎처럼 누워.

 

당신의 품에서 나와

그저 재롱이나 실컷 부리다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네.

 

저 하늘의 구름처럼

저 강물의 풀잎처럼

그리움만 가득 싣고 돌아가네.

 

「無題(무제)」라고 제목이 붙은 이 시는 그저 특별한 제목이 없어도 그냥 읽으면 투명하며 맑아서 어른이 아이의 동심으로 돌아가서 시심을 불러 일으켜 쓴 시와 같은 느낌으로 마치 선경에 이를 경우에 이런 시를 쓰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당신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움을 가득 품고 돌아간다. 당신은 아마 우주를 창조하거나 주재하는 절대자일 것이고, 그 절대자의 품이다. 그런 절대자의 넓은 품에서 나와 실컷 재롱부리며 살다가 다시 그 품 안으로 돌아가는 나는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내가 가능한 것은 푸른 하늘의 흰 구름처럼 가볍고 강물의 풀잎처럼 가볍기에 나를 완전히 비웠기에 나는 가볍게 떠 갈 수 있다. 제1연과 제2연은 병렬적 반복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나 1연 3행은 ‘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처럼 누워’서 나는 떠간다. ‘나는 떠가네’라는 어구가 2연에 걸쳐 반복되었고 ‘돌아가네’가 2연 3행의 말미에 배치된 것도 시인이 의도한 것이다. 4연에 1행과 2행에 1연 3행과 2연 3행의 내용을 ‘저 하늘의 구름처럼/저 강물의 풀잎처럼’이라고 종합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완결된 느낌을 준다.

이시환 시인은 반복의 기법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도 자신만의 철저한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시인들의 그것과 다르다. 그 이유는 이 짧고 평이한 시에서 1연 3행과 2연 3행의 ‘누워’라는 말에서 3연 3행과 4연 3행의 ‘돌아가네’로 귀결되는 것은 인간이 직립보행하면서 마음껏 재롱부리고 이 세상을 놀다가 죽을 때는 누워서 돌아가는 육신의 모습을 간취하게 하는 어구를 말미에 오게 한 것이다. 이런 부분이 이시환 시의 독특한 부분이다. 그는 늘 삶과 죽음이 유무동체임을 인식 속에 담지하고 있기에 이런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이다. 그의 시 「통일론․1」과 「통일론․2」에 오면 이 반복의 기법이 더욱 깊이를 더함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 통일, 통일을 외치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지만

 

통일, 통일, 통일을 오늘도 외쳐야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안에 원치 않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네.

 

이 시에서는 통일, 통일, 통일이라고 반복하여 외치는 까닭은 간절하기 때문에 반복하여 외치는 것이며, 또 우리 안에 통일을 원치 않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오늘도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복은 간절함, 절실함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 하는 것이며, 그 간절함에 대해 같이 꿈꾸기를, 같이 이루기를 원치 않는 무리들이 내부에 있기 때문에 통일, 통일,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통찰인가. 이 시의 반복 기법은 점층적 반복으로써 통일을 외쳐야 하는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통일론․2」에 오면 통일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닌데 현실세계에서 통일을 어렵고 멀리 있게 만드는 것에 대한 슬픔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야.

 

통일은,

버스를 타고 가는, 차창에 비친 낯선 사람들을 향해

가던 길 멈추고 가까이에서, 멀리 손을 흔드는

저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서, 얼굴에서부터 오는 법.

 

통일은,

무더운 여름날, 버스 안에서 웃옷을 다 벗고

손뼉을 치며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는

남과 북 노동자들의 가슴에서, 흥에서 오는 법.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야.

 

1연과 4연은 통일이 어려운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그 이유에 대한 부연의 기능이 2연과 3연의 내용이다. 통일은 2연에서는 ‘저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서, 얼굴에서부터 오는 법’이며, 3연의 ‘남과 북 노동자들의 가슴에서, 흥에서 오는 법’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니 멀리 있는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닌데 현실은 너무 어렵고 두 개의 정권이 지속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할 뿐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거나 분단으로 인해 생기는 폐해는 3연과 4연의 사람들이 고스란히 지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 세계의 정치적 논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반복의 기법은 아주 돋보이며 여기서는 부가적 반복과 통일의 정서를 강화하는 기능하고 있다.

이시환 시인이 꿈꾸는 세계는 ‘너’와 ‘내’가 ‘우리’로 하나가 되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과 자비로 살며, 그런 혼들이 모인 반도 땅이 나아가 온 세계의 사람들이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의 뜻에 따라 투명한 의지와 영혼으로 자유롭고 조화롭게 만물과 교감하며 더불어 지상복락을 누리는 세계이다. 「너와 나」와 「비눗방울처럼」에는 반복을 통해 그가 꿈꾸는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네가 울면 나도 울고

네가 웃으면 나도 미소 짓는 것이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나으면 나도 나아지는 것이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너와 내가 하나 되고

너와 내가 한 몸일 때

우리는 사랑, 우리는 자비.

 

비누방물처럼 가벼웁게

비누방울처럼 투명하게

살고지고 살고지고

 

 

 

비눗방울처럼 영롱하게

비눗방울처럼 둥-글게

살고지고 살고지고

 

비눗방울처럼 자유롭게

비눗방울처럼 조용하게

살고지고 살고지고

 

세상 사람들은 인생이 덧없다하나

덧없다 할 것도 없고,

 

세상 사람들은 한사코 가진 게 없다하나

실은 온통 버릴 것뿐이네.

 

이 두 편의 시에서는 반복의 기법을 통해서 시인은 의미를 강화하거나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주술사처럼 되풀이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통일론」1, 2에서와 같이 통일이 아직 오지 않은 것처럼, 그가 꿈꾸는 세계가 아직 오지 않았거나 내부에 그런 세상이 오길 바라지 않는 사람[훼방꾼=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유난히 반복기법이 많이 쓰였다는 사실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필연적으로 그런 세계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하며,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마치 주술사처럼 끊임없이 되뇌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바로 그는 역할을 하는 자이며, 그가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리라. 꿈꾸는 세상이 올 때까지 그의 반복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이시환 시가 지닌 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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