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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환의 자선 산문시散文詩 12편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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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시 12편]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
서울 예수
강물
굴비
나사
로봇
바람의 연주演奏
우는 여자․2
그리움
詩
-작은 침술
잠
오랑캐꽃
[작품해설]
Ⅰ. 존재의 초월을 위한 바람의 변주곡/서승석
- 이시환 산문시집『대공』에 부쳐
Ⅱ. 自然化된 人과 人化된 自然/김은자
-이시환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통해 본 시인의 시세계
Ⅲ. 산문시 이해를 위한 시론試論/이시환
-산문시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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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
사는 동안 까마득히 잊어 버렸거나 부인해 온 나의 꾀 벗은 모습. 원시림 속의 내가 모니터 화면에 잡혀 암실暗室로부터 끌려나오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미 검은 것은 희뿌옇게, 뿌연 것은 온통 검게 변해있다. 솟은 곳은 들어앉아 있고 패인 곳마다 솟아있는 뜻밖의 나는, 웃음 하나를 앞니 사이로 물고 서 있었지만 긍정肯定이냐 부정否定이냐, 좌左냐 우右냐, 안이냐 밖이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나의 편견과 독선이 더욱 오만해 지고 있을 무렵.
서울 예수
십자가를 메고 비틀비틀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던 예수는 끝내 못 박혀 죽고, 거짓말같이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나 하늘나라로 가셨다지만, 도둑처럼 오신 서울의 예수는 물고문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죽었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온몸에 불을 다 붙였지만 달포가 지나도 다시 깨어날 줄 모른다. 이젠 죽어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 서울 예수는 남북으로 갈라진 땅에 묻혀서, 죽지도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네.
강물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뜨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지금도 예고 없이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안바람 바깥바람에 늘 속수무책으로 으깨어지다 보면 어느새 주눅이 들어 키 작은 몸을 움츠리는 버릇이 굳은살이 되고, 더러는 살아보겠다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어깨 부러진 활자들의 꿈틀거림이 정말로 보이는 것일까.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 나갈 때 안으로 말아 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가슴마다 터지는 봇물이 될까. 그저 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
굴비
무심코 내뱉은 나의 말이 또 하나의 말을 감금監禁하고 있는 동안 내가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같이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말과 말들이 내 손아귀에서 감금되고 풀려나곤 하는 사이, 나는 이미 겁 없는 공룡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게 밟힐수록 살아나 틈을 엿보던 그들이 돌아설 숨조차 주지 않은 채 그들 머리 위로는 그물을 던지고 그들의 뒷걸음이 놓이는 곳마다 어김없이 덫을 놓는다. 그런 나의 음모가 무성해지던, 지난 여름, 줄줄이 걸려든 말과 말들은 목이 졸리면서 핏대를 세울 수밖에 없지만 그들이 꿈꾸는 것은 탈출도 반란도 아니다. 어쩌면, 소금에 절여진 한 마리 굴비가 되어 너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불현듯, 소금단지 속에서 나오는 한 마리 굴비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나는 얼굴을 붉힌다.
나사
어루만지는 곳마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른다. 아픈 곳을 잘도 골라 꾹꾹 쑤셔주는, 그리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조차 마주보게 하는, 살아있음의 큰 숨, 남근男根이다. 너는 이승의 풋내 나는 알몸 구석구석 깊이 박힌 채 눈을 뜨고 있는 몸살 같은 뜨거움. 불현듯 찬바람이 불면 내 몸뚱이 속, 속들이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조용한 흔들림. 하양과 검정을 이어주는, 무너지며 반짝이는 논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잇는 난해한 길이다. 어루만지는 곳마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는, 알몸에 박힌 세상의 구원이다.
로봇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로 난, 수없는 난해한 길들을 은밀히 왔다갔다하는 정체불명의 숨이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기능을 갖는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시작되지만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일로서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工程이다. 열심히 로봇이 사람을 닮아 가는 동안 사람들은 점차 완벽한 로봇이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꿈을 꾼다. 깊은 어둠의 자궁 속으로 길게 뻗어있는 뿌리의 꿈틀거림처럼 로봇이 나의 시녀가 되고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되는 것이다.
바람의 연주演奏
내가 낮잠을 즐기는 낮에도 캄캄한 수면실의 출입문틀과 유리문 사이의, 그 좁은 틈으로 끊임없이 바람이 지나며, 아니, 허공虛空이 무너지며 소리를 낸다. 문이 열리는 정도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지만 일 년 열두 달 위험스럽게 다가오는 벌떼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이 안과 저 밖이 내통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이곳뿐이랴. 저 외로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도, 그 외로움이 모여 있는 숲과 숲 사이에서도, 넓고 좁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도, 높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골목에서도, 평원에서도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틈에서도, 하늘과 땅 사이 그 깊은 틈에서도 나는 바람의 연주를 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 소리를 듣는다.
우는 여자․2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오르가즘이란 산의 7부 능선만 올라가도 신음 대신 간헐적으로 울기 시작하는 여자. 8부, 9부,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슬픔의 바다를 토해 놓듯이 허허벌판에서 엉엉 우는 여자. 그녀의 입을 한손으로 틀어막으면서 더욱 힘 있게, 더욱 깊숙하게, 더욱 빠르게 구석구석 몸 안에 퍼져있는 불씨에 불을 댕기면 그녀의 험준한 계곡에선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 들린다. 분명 이 세상을 처음 나올 때의 울음소리보다 더욱 격렬하고, 더욱 원시적인,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을 천지간에 쏟아놓는 여자.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그리움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 아니면 판독해 낼 수 없는 상형문자.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이고, 그 깊이만큼의 아득한 수렁이다. 너는 나의 뇌수腦髓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이거나 그도 아니면 치유불능의 정서적 불안. 아니면 여린 바람결에도 마구 흔들리는 어질 머리 두통頭痛이거나 징그럽도록 붉은 한 송이 꽃이다. 시방,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너는, 차라리 눈부신 억새 같은 나의 상사병이요. 그 깊어가는 불면不眠의 나락奈落이면서 추락하는 쾌감快感이다.
詩
-작은 침술
기장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것은 가장 깊은 곳에 있고, 가장 깊은 곳은 가장 은밀한 곳이고, 가장 은밀한 곳은 가장 어두운 곳이다. 가장 어두운 곳은 가장 조용한 곳이고, 가장 조용한 곳은 가장 뜨거운 곳이다. 가장 뜨거운 곳은 가장 비밀스런 곳이고, 가장 비밀스런 곳은 가장 깊은 곳이다. 바로 그런 곳을 잘도 짚어가며 굵은 것 가는 것을 가려 깊고 얕게 침을 놓듯 모나고 모난 세상 가장 깊은 곳의 어둠과 비밀을 흔들어 깨워 가장 뜨겁고 가장 은밀한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워 놓는다.
잠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이 무거운 몸뚱어리가 당신의 조립품組立品임을 의식하면서 이미 늪 속으로 빠져버린 나는, 손이 묶인 채 더욱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정비공장 기름바닥에 흩어져 나뒹구는 녹슨 볼트 ‧ 너트 ‧ 핀 ‧ 축軸의 숨이 곧 나의 늑골이요, 너의 긴 척추의 마디마디를 잇는 비밀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는, 영영 깊은 잠 속 어둠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의 시린 관절 속 틈새마다 후줄근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비는 지친 영혼의 나랠 적시고 가로누운 나의 꿈들을 적시고 적신다. 나는 젖으면서 그대로 빗물에 떠내려가는 쾌감을 예감하면서 간절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긴긴 터널을 빠져 나가는 사이 골반 속으로 새어 들어온 한 줄기 빗살이 어둠의 자궁을 후비기 시작한다. 이윽고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있던 나의 뿌리가 꿈틀대면서 다시금 너를 깨우고, 깨어난 너의 의식意識의 투명한 바다 속으로는 참새소리만 쏟아져 구른다.
오랑캐꽃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누워 있는 너는 ‘황홀’이라는 무게로 나를 짓누르네. 짓눌려 헉헉 숨이 막힐 때마다 나는 햇살 속 저 은사시나무 잎이 되어 반짝거리지만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너는 세상 가득 출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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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초월을 위한 바람의 변주곡
- 이시환 산문시집『대공』에 부쳐
서승석
시인/불문학 박사
시를 쓰는 행위는 부단히 존재의 공허함을 채워가는 작업이다. 이시환의 시 밑바닥에 짙게 깔려있는 허무의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주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51편이 수록된 산문시집『대공』에서, 우리는 1981년 발표한 첫 시집『그 빈자리』이후 시인이 끊임없이 탐색해온 종교적 성찰과 시적 자아의 성숙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반항·열정으로 점철되어지는 젊은 시절에 쓰인 대다수의 시들은 ‘의식적인 삶’을 살아온 그의 발자취임에 틀림없다. 젊은 날의 뜨거운 절망과 찬란한 희망이 교차하는 이 시집에서, 시인의 지칠 줄 모르는 지식과 창작에 대한 열정이 작품을 통해 발산되어, 그의 인생관과 우주관이 견실한 방향으로 확장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독자로서 누리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1. 시인과 탈
‘안과 밖’, ‘이쪽과 저쪽’, 혹은 ‘좌左냐 우右냐’의 선택을 강요받고 사는 어두운 시대의 시인들은 긍정과 부정을 드러내지 않고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 가면 속에 숨는다. 시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나 「강물」, 「웃음 흘리는 병病」, 그리고 「각인刻印」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암울한 시대의 정의로운 시인은 ‘바보’ 혹은 ‘또라이’라 불리며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문시의 진정한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유야무야’는 사건이나 행위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서술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시의 대표적 형식을 기술할 때 채용되는 용어를 빌리자면, 이 시는 이야기를 노래한 시로서 ‘서술시 narrative poem’에 해당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시의 구성원인 화자는 페르소나 persona, 즉 허구적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시인의 경험적 자아와는 구분되는 페르소나로서의 화자에 의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대상이 관찰되고 전달됨으로써 이 시는 객관성과 독창성이 확보되고 있다 :
아버지는 싸돌아다녔다. 거짓말을 보텔 양이면 한시도 집에 붙어있질 않았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행세하기를 좋아했고 대접 받기를 좋아했다. 대신, 어머니는 절간 같은 집을 지키면서 나이답지 않게 폭삭 늙어 버렸다. 아버지가 바깥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웃고, 즐거워하는 사이 꼭 그만큼 어머니는 속이 썩으면서 허리가 굽어갔다. 언제부턴가 무당처럼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 하루일과가 되어 버린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꿈자리가 사납던 날, 아버지는 집 앞 시골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에 부딪혀 왼쪽 대퇴골이 부러졌고 부서졌다. 아버지가 누워 있던 병실을 찾는 사람들로 시골병원은 붐볐고, 아버지는 그들 앞에서조차 애써 태연한 척 몸에 밴 친절을 가꾸고 있었다. 입원 3일째 되던 날 큰 수술을 했다.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집안 식구들은 더욱 초조했다. 바로 그날 그 시각, 우리 집엔 도둑이 들었다. 창문은 뜯겨져 있었고, 장롱이며 침대 밑이며 할 것 없이 구석구석에서 온갖 것들이 다 불거져 나왔다. 방 가운데엔 부엌칼도 나와 날이 서 있었고, 땅문서 집문서를 포함한 갖가지 서류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갔다. 가져가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 또한 완벽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토록 조금도 빈틈을 주지 않는 세상.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기라도 하면 하, 뜨거운 것, 귀여운 돌멩이 같은 것이다. 어느덧 희끗희끗해진 머리칼 속으로 새가 집을 짓는 줄도 모른 채 어머니는 ‘뿌린 대로 거두리라’를 눈을 감고 되뇌이면서 속을 삭이고, 정말이지 그에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유야무야 목숨만 타들어갔다.
- 「유야무야」전문
작품 속의 화자는 바깥세상에서 인기 좋으신 한량 같은 아버지와 집안에서 체념한 채 기다리며 사시는 어머니를 대조시키며, 어처구니없이 당한 교통사고와 도둑이라는 두 사건을 담담히 이야기하며 인과응보라는 주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야스퍼스가 ‘비극이란 진실을 깨우치는 기호(Chiffre des Seiten)라고 말했듯이 인용 시는 한가정의 비극적 체험이 삶의 진실을 깨우치는 기호임을 재확인 시켜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험적 자아로서의 시인은 감히 아들로서 ‘아버지는 싸돌아다녔다.’라는 표현을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소나라는 탈속에 숨은 시적 자아로서의 화자는 경험적 자아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마치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응징하는 듯한 말투로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탈을 씀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객관화하고 진리를 말하고 세계에 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시의 특이한 존재 방식”이라고 김준오가 『현대시와 장르 비평』에서 언급하듯, 이시환은 이외의 다른 시에서도 종종 가면이 주는 자유로움에 힘입어 자신의 목소리를 한껏 드높인다.
「유야무야」에서 어머니의 인생을 버겁게 하는 가해자로서의 미운 시적 이미지의 아버지는 작품 「아버지의 근황」에서 훨씬 순화된 모습으로 등장 한다 :
서울이 답답하다며 평생을 시골에서만 사시는 아버지는, 살고 있는 집에서 대략 1킬로미터쯤 떨어진 밭에 배나무 5,000 그루를 심었다. 올해 처음으로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더욱 바빠진 71살의 아버지.
(…)
배밭의 단내가 더해 갈수록 이른 아침부터 신경전을 펴는 아버지와 까치는, 오늘도 숨바꼭질하기에 바쁘지만 그렇게 한 철을 나고 보면 이미 짓궂은 친구가 되어 있다. 할 일이 없을 때엔 서로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친구가 말이다.
- 「아버지의 근황」중에서
새벽부터 일어나 배밭을 돌보며 배를 쪼아 먹는 까치들과 하루 종일 전쟁을 하시는 연로하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느덧 폭군의 위력은 사라졌다. 얄미운 까치와도 그저 친구가 되어버리는. 문득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이 시에서 화자와 아버지의 거리는 한결 가까워진 듯하다. 시인과 그의 젊은 시절 밉살스럽게만 여겨졌던 아버지가 동화되어가는 과정이 아버지와 까치의 신경전을 통해 극적으로 치환되어 있다.
2. 공간과 바람
이시환이 즐겨 쓰는 테마 중의 하나는 ‘바람’이다:
내가 낮잠을 즐기는 낮에도 캄캄한 수면실의 출입문틀과 유리문 사이의, 그 좁은 틈으로 끊임없이 바람이 지나며, 아니, 허공虛空이 무너지며 소리를 낸다. 문이 열리는 정도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지만 일 년 열두 달 위험스럽게 다가오는 벌떼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이 안과 저 밖이 내통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이곳뿐이랴. 저 외로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도, 그 외로움이 모여 있는 숲과 숲 사이에서도, 넓고 좁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도, 높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골목에서도, 평원에서도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틈에서도, 하늘과 땅 사이 그 깊은 틈에서도 나는 바람의 연주를 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 소리를 듣는다.
- 「바람의 연주演奏」전문
매우 탁월한 청각적 이미지의 형상화를 보여주는 인용 시의 시적 대상은 ‘바람’이다. 그 시적 상징성을 존재론적으로 고찰해보면, 바람은 죽음과 삶의 이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에서 ‘허공虛空이 무너지며’내는 소리요, ‘안과 저 밖이 내통하는 소리’이기도 한 이 바람은 다른 시에서는‘내 살 속 깊은 곳 어둠의 씨앗을 흔들어 깨우’기도하고, ‘내 살 속 깊은 곳 어디 또 다른 나를 흔들어 깨우’(「바람소묘」)는 원소이기도 하다. 발레리는『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살고자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을 노래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을 소생시키는 이 부드러운 바람은 죽음을 유발하는 파괴적인 타나토스의 무서운 얼굴을 동시에 지녔다. 그래서 시적 상상력에 있어서 바람은 원형적으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는 때로‘이 땅 위로 서 있는 것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겨울바람」)는 위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또한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화자가 제시하는 바람이 생성되어가는 상황이다. 여러 상황의 병렬적 제시를 통해 시간을 공간화 시키고 있다. 낮잠이라는 정지된 시간 속에 바람이라는 유체가 흘러들어와 퍼지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불멸의 테마를 아름다운 변주곡으로 연주하고 있다. 한편 다른 시에서 시인은 바람을 통해 자신의 인생론을 들려주기도 한다 : ‘저마다 제 빛깔대로 제 모양대로 제 그릇대로 머물다가 그림자 같은 공허 하나씩 남기며 알게 모르게 사라져 간다는 것, 그 얼마나 그윽한 향기더냐, 아름다움이더냐.’(「대숲 바람이 전하는 말」) . 가시세계와 불가시세계를 넘나들며 이렇듯, 바람은 일상적 존재성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아에 이르려는 시인의 끊임없는 화두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거친 이 세상을 항해하며 떠돌다가도 고향을 향하는 회귀본능처럼 ‘내 자궁 속 또 하나의 어둠을 쓰다듬으면서 나는 바람이 되어 돌아와야 한다.’(「바람소묘」)고 다짐한다.
이시환의 시세계에서 바람은 때로 시인과 우주를 잇는 매체로 등장 한다 :
그렇게 고요의 성城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가끔씩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바람이 소리 없이 내 알몸을 휘감았다가는 슬그머니 풀어 놓기도 한다. 그렇게 바람의 꼬리가 내 성을 빠져 나갈 때마다 내 마음 속 한 구석에 높이 매달려 있는, 작은 풍경이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가 바람에 벚꽃이 날리는 듯하다.
- 「더위나기」 중에서
도심의 무더위 속에 명상으로 더위나기를 시도하고 있는 인용 시는, 시적 화자가 우주만물과 교감을 느끼며 바람과 동화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그린 아름다운 정경을 보여준다. 화자는 시적 상상력의 전개를 통해, 한여름의 작열하는 콘크리트 아파트를 벗어나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날아 금성의 지표면을 홀로 걷게 된다. 구원 없는 현실, 이 황폐한 세상을 벗어나 신적 비밀로 인도하는 아리안느의 실을 찾으려는 정신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좁은 방에서 우주로 확장된 허무의 공간에서 시인은 자아와 사물과 세계가 모두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어가는 신비로운 체험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지적하듯이, “시 속에 존재하는 공간은 실제의 공간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구현되고 그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정적인 이미지로 출발한 이 시는 마침내 역동적인 이미지로 마무리를 하면서, 안에서 밖으로, 아래에서 위로의 변증법적 사유를 거슬러 올라가며, 무아경의 상태에서 우주와 합일을 하는, 시인의 우주론적 자아탐구의 다면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명상을 통한 존재의 초월을 예감하듯이….
3. 성sex 과 삶의 본능
초현실주의의 주된 탐구 중의 하나는 에로티즘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자들은 그의 꿈의 이론, 성욕설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전적인 이해를 시도했고, 욕망의 폭로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인식을 좀 더 확대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의학을 전공했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의 시적 혁명을 위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무의식의 탐험’을 제시한다. 1905년 발표된 프로이트의 성의 이론에 관한 세 논문에 의하면 억압된 것의 주된 내용이 성이고, 성본능은 가장 지속적인 자연적 충동이라 한다. 그리고 히스테리, 꿈 등은 억압된 본능(리비도)의 변태적 만족이라 풀이한다. 성의 활동과 정신생활의 관계를 검토한 이 연구에서 그는 에로티즘이란 쾌락본능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억압의 횡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라 말한다.
이시환의 시에서도 가끔 무의식에 잠겨 있는 억압된 욕망에 대한 탐구가 시도 된다. 「바람소묘」(‘내 자궁 속 또 하나의 어둠을 쓰다듬으면서’)나 「잠」(‘한 줄기 빗살이 어둠의 자궁을 후비기 시작한다.’)에서처럼, 그의 작품에서 ‘자궁’이라는 어휘가 빈번히 발견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 연유한다. 작품 「나사」에서 그는 나사를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조차 마주보게 하는, 살아있음의 큰 숨, 남근男根’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깊이 박힌 채 눈을 뜨고 있는 몸살 같은 뜨거움’혹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잇는 난해한 길’이라 묘사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다른 작품에서 그는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정치와 섹스」)이라 실토하기도 한다. 한편 작품‘산’은 리비도가 시각적 이미지로 전개되는 근사한 화폭이다 : ‘손끝에 와 닿는 당신의 두 개의 젖꼭지. 그 꼭지 사이의 폭과 골이 당신의 비밀을 말해 주지만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사내들의 곤두박질.’ 하지만 그의 에로티즘이 가장 아름답게 은유적으로 전개되는 작품은 시「오랑캐꽃」이다 :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누워 있는 너는 ‘황홀’이라는 무게로 나를 짓누르네. 짓눌려 헉헉 숨이 막힐 때마다 나는 햇살 속 저 은사시나무 잎이 되어 반짝거리지만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너는 세상 가득 출렁이네.
- 「오랑캐꽃」 전문
이시환의 에로티즘의 특징은 인간의 욕망에 내재한 야누스적인 두 얼굴 중에 죽음의 본능보다는 삶의 본능 쪽으로 무게가 기울어있다. 그래서 그는 남근으로 상징되는 나사에 대해‘알몸에 박힌 세상의 구원’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또 성행위를 하며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을 천지간에 쏟아놓는 여자’(「우는 여자․2」)는 ‘구석구석 알몸 속으로 숨겨진 슬픔의 씨앗들’(「우는 여자․1」)을 일제히 싹을 틔워 몸 밖으로 배출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시한 세계의 신비로 우리를 인도하는 자궁 속의 조용한 흔들림이 논리를 무너뜨리며 인간의 의식을 깨우기 때문일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리비도는 사랑으로 승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4. 결어
조선 후기의 예술의식을 연구한 최준식이 한국미의 원형을 ‘자유분방함’에서 찾았듯이, 이시환이 이 시집『대공』에서 선택한 산문시의 형태는 어쩌면 한국인이 자유분방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형시에 비해 산문시는 시인이 자신의 즉흥적이고. 소박하고, 해학적이고, 역동적이고, 여유로운 여백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이시환의 산문시는 우리 속악의 시나위 가락을 닮았다. 흐드러져야 맛이 나며, 기량이 난숙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가능한….
산문시가 지루한 하나의 넋두리가 아니라 영롱한 언어로, 독자에게 한 알 한 알 사리를 줍는 듯한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더욱 사랑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언어의 간결미와 한없이 고고한 품위와 높은 자존감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앞으로도 이시환이 산문시를 거듭 발전시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쓰기를 통하여 보다 완성된 삶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그의 피나는 노력이 그의 시세계의 지평을 더욱 드넓게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약력
경기도 평택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수학 및 불문학 전공. 파리 4-소르본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석사 및 불문학 박사, 덕성여자대학교, 수원대학교 겸임교수, 서울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한국시인협회 교류의원, 국제펜클럽 회원. 저서 : 시집 『자작나무』, 『흔들림에 대하여』 , 『사람 사랑』, 『그대 부재의 현기증』 번역서 : 파블로 피카소, 『시집』등이 있음.
自然化된 人과 人化된 自然
-이시환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통해 본 시인의 시세계
김은자(중국, 하얼빈이공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사)
1. 들어가는 말
우연히 이시환 시인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마주하게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창작된 51편의 시가 실린 부피가 크지 않은 개인시집이다. 그럼에도『대공』 이란 이름 때문인지 손에 쥐여진 원고에서 그 무게가 전해진다.
시인 이시환(1957.9 ~ )으로 말하자면 일찍 1981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그 빈자리』를 펴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550여 편의 작품을 창작하고, 이미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내는 등 저력을 과시하는 중견시인이자 평론가이다. 하기에 이번 시집의 출간도 새삼스럽지 않지만 다만 새롭고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시집에 실린 시들 모두가 ‘산문시’란 점이다.
산문시(散文詩)란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에는 어렵지만 말 그대로 산문(散文)과 시(운문,韻文)라는 서로 상반된 양식이 결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시가 지닌 형식적 제약(制約)은 물론 운율(韻律)의 배열 없이 산문형식으로 쓰여진 시로 정형시와는 다른 자유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행과 연의 구분도 없고 운율적 요소도 없는 형식은 산문에 가깝지만 표현된 내용은 시(詩)인 만큼 당연히 시로서의 핵심적 요소인 은유, 상징, 이미지 등 내적인 표현장치나 시적인 언어를 택하고 있다.
산문시의 시초(始初)는 「악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4~1867.8)의 "산문시는 율동(律動)과 압운(押韻)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兼備)한 시적 산문의 기적"이란 평(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파리의 우울」(1869)을 발표한 이래 산문시는 중요한 시의 한 부분으로 되었고 특히 프랑스 문학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 현대문학에서도 어렵잖게 산문시를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일찍 주요한의 「불놀이」(1919)에서 그 전형(典型)을 선보인 바 있고, 1930년대 와서 정지용의 「백록담」, 이상의 「오감도」, 백석의 「사슴」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어 1950년대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로 이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산문시에 대한 세인의 관심은 부족한 편이고 문학론적인 측면에서 장르의 성격 규명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개인의 작품세계를 정리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산문으로 된 시만 골라 펴낸『대공(大空)』이란 시집은 사뭇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산문시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그 매력을 공유하고자 시와 함께 실은 「산문시의 본질」이란 글이 더해져 무게를 더해준다. 부담 없이 자연스레 소리 내어 읽게 되는 내재율에 의해 인간과 자연의 속삭임을 실어내는『대공』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 주제와 시인의 시세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自然과의 대화 시도
시골 태생으로 자연을 벗 삼아 자라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움직임을 보며, 그것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에 익숙해진 시인이어서인지 그의 시에는 자연과 물상(物象)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다.
“자연 속에서 인간 삶의 지혜를 배우고, 내 몸속에서 자연을 읽을 수가 있었으니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의 진실과 아름다움이 나의 가장 큰 시적 관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시인이 밝힌 바 있듯이 그의 시 쓰는 일은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현상과 연관되면서 ‘자연을 베끼는 일’로 거듭나고 있다.
「서있는 나무」에 심상(心象)으로 등장하는 나무는 사람의 모습으로 봐도 무방하다.
서있는 나무는 서있어야 한다.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서있는 나무는 내내 서있어야 한다. 늪 속에 질퍽한 어둠 덕지덕지 달라붙어 지울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할지라도, 젖은 살 속으로 매서운 바람 스며들어 마디마디 뼈가 시려 올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시종 서있어야 한다. 모두가 깔깔거리며 몰려다닐지라도 , 모두가 오며가며 얼굴에 침을 뱉을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그렇게 서 있어야 한다. 도끼자루에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서있는 나무는 홀로 서있어야 한다. 서있는 나무는 죽고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 -「서있는 나무」 전문-
시인은 나무는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눕지도 앉지도 못 한다”고 하면서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말해주고 있다. ‘~지라도’로 끝을 맺는 일련의 표현들은 겪게 되는 시련을 뜻한다. 시인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서있어야 하며’ 심지어는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고 피력한다. ‘서있는다’고 해서 시련이 닥쳐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 ‘세상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함박눈」에서는 겨울에 내리는 눈을 빌어 자연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짝사랑 같은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만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전문-
재미있는 것은 시인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한 방울의 물과 구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는 입술을 부비고”,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갈 수 있다”고 한다. ‘눈[雪]’이란 심상으로 표현되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당신’이란 존칭어의 사용과 ‘옵니다’란 시어의 극존칭어미에서 더욱 간절하게 묻어난다.
이놈의 세상, 내 어릴 적 썩은 이빨 같다면 질긴 실로 꽁꽁 묶어 눈 감고 힘껏 땡겨보겄네만 이땅의 단군왕검 큰 뜻 어디 가고 곪아 터진 곳 투성이니 이제는 머지않아 기쁜 날, 기쁜 날이 오겄네,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날이. 이 한 몸, 이 한 맴이야 다시 태어나는 그 날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힘이 된다면 푹푹 썩어, 바로 썩어 이 땅의 뿌릴 적시는 밑거름이라도, 밑거름이라도 되어야지 않컸는가.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 -「북」 부분-
제목이 「북」이란 시이다. 시의 그 어느 부분에도 북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저 마지막에 ‘둥둥’하고 북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시의 전반부는 물론 인용한 부분에서도 ‘썩은 이빨’, ‘곪아 터진 곳 투성’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곪아터진 살 위로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날’을 기다리기에 절망적이지 않다. 결말의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이란 시어는 우리민족 정서에 알맞은 가락의 하나로 특유한 흥겨움을 담고 있으며, 힘든 지금을 견디고 나면 머지않아 행복한 나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안겨준다.
「나사」에서는 ‘나사’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조차 마주보게 하려’는 융합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불현듯 찬바람이 불면 내 몸뚱이 속, 속들이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조용한 흔들림. 하양과 검정을 이어주는, 무너지며 반짝이는 논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잇는 난해한 길이다. 어루만지는 곳마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는, 알몸에 박힌 세상의 구원이다. -「나사」 부분-
시인은 ‘하양과 검정’ 이라는 한눈에 대조되는 흑백의 논리를 넘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이어주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흑백이 공전하는 삶의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서로 어울려져야 빛을 발하는 나사처럼 혼자서는 ‘찬바람’이 불면 ‘흔들리기’에 더욱 간절히 조화와 융합을 꿈꾸고 있다.
조화와 융합을 시도하는 작품으로 「로봇」도 빠뜨릴 수가 없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로 난, 수없는 난해한 길들을 은밀히 왔다갔다하는 정체불명의 숨이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기능을 갖는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시작되지만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일로서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工程이다. 열심히 로봇이 사람을 닮아 가는 동안 사람들은 점차 완벽한 로봇이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꿈을 꾼다. 깊은 어둠의 자궁 속으로 길게 뻗어있는 뿌리의 꿈틀거림처럼 로봇이 나의 시녀가 되고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되는 것이다. -「로봇」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로봇을 만드는 과정을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이라고 하면서도 말미에는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로봇이 사람을 닮아가서 불안하다는 것에 출발했음에도 로봇(기계, 나아가 물질문명)에 대한 부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시인은 바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인화된 자연과의 끊임없는 교감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시의 서정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며 서정성이 주는 낭만에 대한 추구라고 보아진다.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 나무, 강, 산, 꽃, 단풍 등의 시적 소재들이 산문시임에도 불구하도 서정성이라는 시의 특성을 확보하게 하고 있다.
3. 人의 독백
이시환의 산문시 곳곳에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많은 시인의 분신’들로 시인 자신 내지는 인간의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다시 말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이도, 아버지도, 친구도, 나아가 예수의 모습도 모종의 의미에서 결국은 시인 자신이며 시인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바라고 있기에 결국 욕구불만족에서 오는 수많은 병을 앓고 있다. 그리움, 편집증, 외로움 등 그 이름도 다양한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보인다.
먼저 「그리움」부터 보도록 하자.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 아니면 판독해 낼 수 없는 상형문자.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이고, 그 깊이만큼의 아득한 수렁이다. 너는 나의 뇌수腦髓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이거나 그도 아니면 치유불능의 정서적 불안. 아니면 여린 바람결에도 마구 흔들리는 어질 머리 두통頭痛이거나 징그럽도록 붉은 한 송이 꽃이다. 시방,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너는, 차라리 눈부신 억새 같은 나의 상사병이요. 그 깊어가는 불면不眠의 나락奈落이면서 추락하는 쾌감快感이다. -「그리움」 전문-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라면 누구나 한번쯤을 앓아보았을 그리움이란 병을 언어의 마술사인 시인이 아니라고 할세라 수많은 명사로 환치(置換)하고 있다. ‘방언’, ‘상형문자’, ‘어둠의 깊이’, ‘수렁’ 등 일련의 표현을 얼핏 보면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난해(難解)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꽃’을 제외한 모든 명사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며 꽃마저도 예쁜 꽃이 아닌 ‘징그러운’ 꽃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리움이란 지독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의 소리 없는 웃음을 눈치 채고 그 때부터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바보’라 불렀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그들 앞에서 빈틈없는 바보가 되었고, 나는 바보가 아닌 위인들의 업적과 치부를 들여다보며 또 하나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은 온통 웃음덩어리라는 것을 슬프게도 나는 알아 차렸습니다. 때문에 내겐 실없이 웃는 버릇이 생겼고, 언제부턴가 웃음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병病이 되어 깊어만 갔습니다. -「웃음을 흘리는 병」 부분-
「웃음을 흘리는 병」은 제목부터가 아이러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인 ‘웃음’을 ‘병’이라고 한 것은 결국 ‘병’이 ‘병’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웃음’이 병이 되는 그런 세상의 아이러니를 풍자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어휘의 나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보’와 ‘위인’, ‘업적’과 ‘치부’같은 어휘의 병치(竝置)가 만들어내는 잔잔한 리듬감에서 비롯된다.
시 「각인(刻印)」 전편에서는 부제목에 붙인 것처럼 편집증을 앓고 있는 한 사나이의 고충을 담고 있다. 편집증증상을 갖고 있는 사나이를 ‘또라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을 부정하면서 시인은 ‘나는 나이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또한 시집의 마지막 시인 「봄날의 만가(輓歌)」와 첫 시가 되는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는 이야기의 서두와 결말처럼 서로 호응을 이루고 있으며, 시인이 던지는 삶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답을 시어로 풀어내고 있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고 보면 더는 허망할 것도, 더는 쓸쓸할 것도 없다. 세상이야 늘 그러하듯 내 눈물 내 슬픔과는 무관하게스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분망奔忙하고 분망할 따름, 이 분망함 속에서 죽는 줄 모르로 사는 목숨이며, 한낱 봄날에 피고 지는 저 화사한 꽃잎같은 것을. 아니, 아니, 이 몹쓸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 같은 것을. -「봄날의 만가輓歌」 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아낼 수 있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다”란 것은 생(生)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다.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다. 하기에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흐르는 세상이고 봄날에 피고 지는 ‘꽃잎’같은 인생임에도 시인은 ‘허망하지’도 ‘쓸쓸하지’도 않다고 한다. 죽음을 넘어 죽음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의 마지막에 삶이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같다는 표현에서 시인의 그러한 의식은 무가내(無可奈)와 탄식(歎息)을 넘어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시집에는 가족애와 우정을 다룬 시가 몇 수 된다. 「하나님과 바나나」, 「안암동일기」, 「아버지의 근황」, 「어머님 전상서」, 「벗들에게」 등 시편들은 그 일부가 문체상에서 말 그대로의 일기나 서신에 가까워 정녕 산문시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가족과 친구와 함께하는 가장 정답고 삶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이 따뜻해나는 정이 가는 것임은 분명하다.
4. 맺는 말
이시환의『대공(大空)』은 산문시집에도 불구하고 시적으로 정제(精製)되어 있다. 산문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시마다 분명 내재율이 존재하여 서정시와는 다른 운율의 미를 지니고 있다.
산문시라서 그런지 다소 화법이 직설적이고 함축성이 약한 편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시편에는 고독과 허무의 감정이 흐르고 있지만 이 또한 부정적이라고 보아지지는 않는다. 단지 시인의 관심을 갖고 있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불교의 가르침과 무관(無關)하지 않은 듯싶다. 하기에 어쩌면 이런 부정적이지만 진솔한 사람의 감정들을 시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시인 역시도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에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시집의 마지막 장을 조심스레 덮고 나니 시집의 첫 페이지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정녕(丁寧)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을 비우고서 시인의 목소리가 아닌 그렇다고 내 목소리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대공(大空)’이란 메아리가 마음속에 울려 퍼진다. 클 대(大), 빌 공(空), 대공(大空)!
[산문시 이해를 위한 시론試論]
산문시의 본질
이시환
‘산문시散文詩’라 함은 운문韻文이 아닌 산문散文으로 된 시詩를 말함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문장은 산문이지만 그 안에 시적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산문으로 썼다고 해서 모두가 다 산문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운문과 산문은 어떻게 다르며, 산문에서 시적 요소란 무엇을 두고 말함인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예문을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①
우주는 무수한 은하와 별들을 담을 정도로 크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50억 광년이다. 그러나 우주의 대부분은 암흑물질로 되어 있는 텅 빈 공간이다.
-이정후・김성식・박찬 공저 『우주의 신비』32P 일부
②
올망졸망,
높고 낮은 파도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 부려 놓고 간다.
그 살가운 어둠 쌓이고 쌓일수록
가녀린 초승달 더욱 가까워지고
나를 꼬옥 뒤에서 껴안던
소나무 숲, 어느새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이시환의 시「몽산포 밤바다」전문
③
사는 동안 까마득히 잊어 버렸거나 부인해 온 나의 꾀 벗은 모습. 원시림 속의 내가 모니터 화면에 잡혀 암실暗室로부터 끌려나오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미 검은 것은 희뿌옇게, 뿌연 것은 온통 검게 변해있다. 솟은 곳은 들어앉아 있고 패인 곳마다 솟아있는 뜻밖의 나는, 웃음 하나를 앞니 사이로 물고 서 있었지만 긍정肯定이냐 부정否定이냐, 좌左냐 우右냐, 안이냐 밖이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나의 편견과 독선이 더욱 오만해 지고 있을 무렵.
-이시환의 시「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전문
위 예문들에서 ①과 ③은 산문이고, ②는 운문이다. 그런데 운문인 ②는 당연히 시라 하지만 산문인 ③도 시詩라 한다. 그렇지만 산문 ①을 두고 시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운문과 산문을 분별하는 핵심적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의 제일 요소는 역시 ‘운韻’이다. 운의 유무(有無:있고 없음)에 의해서 운문이냐 산문이냐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운이 일정한 규칙 안에서 존재하면 운문이고 풀어 헤쳐져 흩어져 있거나 없으면[散: 흩다, 흩뜨리다, 한가롭다, 볼일이 없다, 흩어지다, 헤어지다, 내치다, 풀어 놓다] 산문이 된다.
그렇다면, 운이란 무엇인가? 소리 내기의 완급緩急・장단長短・고저高低・광협廣狹・청탁淸濁・반복反復 등의 요소들이 어우러져 내는 음악성(音樂性:음악과 같은 성질)이다. 시에서는 행行과 연聯 구분을 통해서 ‘일정한 시간 내’에 소리 내기의 완급과 장단을 조절하고, 같거나 유사한 소리 내기의 반복으로써 그 음악성이 구축構築된다. (여기서 일정한 시간이란 한 행 또는 한 연을 다 읽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으로, 이것이 몇 분 몇 초라고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에서의 ‘마디’나 ‘절’과 같은 구실을 한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시어詩語 선택으로 소리내기의 고저・광협・청탁에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시 문장에서의 운이란 행과 연 구분에 의한 소리내기의 완급・장단이며, 동음同音・동일구조 문장 반복에서 느끼는 일정한 규칙성이다. 물론, 그 규칙성에서 우리는 익숙해짐으로부터 오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동시에 그 문장의 의미가 쉽게 인지認知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위 예문들에서 ①과 ③은 공히 산문인데 ①은 시가 아니라 하고 ③은 시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운을 느끼게 하고, 실질적으로 그 운을 부여하는 도구이자 장치이기도 한 행과 연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같은 산문이라 하는데 무엇이 이들을 시詩와 비시非詩로 갈라놓았을까? 그것은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사실을 단순 기술해 놓는 문장이냐 아니면, 주관적인 느낌이나 생각, 바꿔 말하면 감정이나 사상 등을 정서적 반응으로써 표현해 내는 문장이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기술記述’이냐 ‘표현表現’이냐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 곧,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기분을 포함한 감정과, 생각이나 의식을 포함한 사상을 드러내는 정서적인 문장이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문이든 산문이든 시에서는 ‘정서적인 문장으로서의 표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느낌・기분・감정・생각・의식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되 수사적修辭的 기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산문으로 된 시일지라도 운문으로 된 시에서 느끼게 되는 음악성音樂性 곧 리듬감과, 수사修辭로써 빚어지는 내용의 정서성情緖性과 함축성含蓄性 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것들을 담아내는 방식이 운문과 다른데, 운문이 가지는 음악성을 행과 연 구분 대신에 문장이나 문단에서 느끼게 되고, 다시 말하면, 얘기 전개 과정에서 느껴져야 한다. 그리고 단순 기술이 아닌 수사적 표현기교에서 주관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개별적인 문장들이 담아내거나 겉으로 드러내는 의미들보다 문장들이 얽어내는[구축해 내는] 전체적인 얘기가 환기시키거나 숨겨 놓는 의미가 이미 존재하거나 존재할 법한 세계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얘기의 핵심을 드러내 놓고 있는 단면처럼 함축성을 지녀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한 편의 산문시는, 얼핏 보면 시시콜콜하게 풀어쓴 어떤 구체적인 얘기 같지만 그 얘기가 더 큰 의미를 환기시키는 암시기능과 내장하고 있는 대표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산문시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위 예문들을 가지고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보자.
①은 산문임에 틀림없다. 이 산문을 가지고 아래와 같이 운문처럼 행과 연 구분을 임의로 했다 하자.
④ ←①
우주는
무수한 은하와 별들을 담을 정도로 크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50억 광년이다.
그러나 우주의 대부분은
암흑물질로 되어 있는 텅 빈 공간이다.
얼핏 보면, 이것도 시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이런 유형의 시들이 사실상 많이 발표되고 있는 현실을 전제하면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시로서는 결격사유가 많은, 시가 될 수 없는 문장이다. 화자(話者=표현자)의 인식과 판단은 들어있지만 개인의 정서적인 반응으로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운문시 ②에서 행과 연 구분을 배제시켜 보자.
⑤ ←②
올망졸망, 높고 낮은 파도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 부려 놓고 간다. 그 살가운 어둠 쌓이고 쌓일수록 가녀린 초승달 더욱 가까워지고 나를 꼬옥 뒤에서 껴안던 소나무 숲, 어느새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행과 연 구분 없이 바꾸어 읽어도 본래의 ②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①과는 분명히 다르다. 화자의 인식과 판단이 기술되어 있다는 점은 ①과 ⑤가 같은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인식과 판단에 대한 단순기술이냐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표현이냐의 차이로 설명된다. 곧, 위 ⑤에서 화자의 중요한 인식이자 판단은, ‘파도가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을 부려 놓고 간다’는 것과, ‘어둠이 쌓일수록 초승달이 더욱 가까워진다’는 것과, ‘소나무 숲이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등 크게 보면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판단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화자의 기분이나 상태나 감정 등이 투사된 개인의 정서적 반응으로서 인식된 세계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화자의 기분・감정이나 인식・판단 등이 엮어내는 주관적인 의미망[意味體系]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현실의 세계가 자극刺戟으로 접수되었을 때에 화자가 그것을 해석하고 반응해 보이는 과정에서 구축되는 주관적인 가상의 세계일 뿐이다.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로서 현실 세계를 그대로 전달 받거나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식 등이 투사되어 나타나는 표현으로 구축되는 주관적인 진실로서의 가상세계를 읽는 것이다. 그래서 ①은 시가 되지 못하지만 ②와 ⑤는 공히 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산문시라 한 ③을 가지고 아래와 같이 행과 연 구분을 지어서 읽어 보자.
⑥ ←③
사는 동안
까마득히 잊어 버렸거나 부인해 온
나의 꾀 벗은 모습.
원시림 속의 내가
모니터 화면에 잡혀
암실暗室로부터 끌려나오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미 검은 것은 희뿌옇게,
뿌연 것은 온통 검게 변해있다.
솟은 곳은 들어앉아 있고
패인 곳마다 솟아있는
뜻밖의 나는,
웃음 하나를 앞니 사이로 물고 서 있었지만
긍정肯定이냐 부정否定이냐,
좌左냐 우右냐,
안이냐 밖이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나의 편견과 독선이
더욱 오만해 지고 있을 무렵.
원래 산문이었던 문장 ③을 가지고 이렇게 임의로 행과 연 구분을 해 놓으면 어떻게 읽히는가? 원래의 문장인 ③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③보다는 더 천천히 읽히게 된다. 그래서 그만큼 생각을 더하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가 얹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달라지거나 깊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별 의미가 있지는 않다. 오히려 천천히 읽는 운문보다 빨리 읽히는 산문 쪽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⑥보다는 본래의 ③이 낫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천천히 읽으며 생각하게 하는 쪽보다 빨리 읽는 쪽이 더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은 행과 연 구분을 하는 쪽이 좋고, 또 어떤 것은 그 구분 없이 산문으로 쓰는 쪽이 좋은가? 다시 말해, 어떤 것은 천천히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낫고, 또 어떤 것은 빨리 읽어내어 지각하는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 나은가? 그것은 오로지 개인적 판단에 맡겨질 일이지만 기본 원칙은 있을 수 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같은 산문시 ③과 ⑤의 차이로써 설명된다고 본다.
위 ③과 ⑤를 동일선상에 놓고 읽었을 때에 우리들은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알다시피, ③은 이시환의 산문시「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의 전문이고, ⑤는 이시환의 4연 10행의 운문시「몽산포 밤바다」를 산문시로 바꾸어 쓴 것이다.
③은 네거티브 필름에 박힌 사람의 모습을 실물과 비교해 가며 들여다보고 있는데, 명암이 뒤바뀐 그 이미지를 통해서 이분법적인 논리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짙은 정치 사상적 현실세계를 암시하고 있는 무겁고도 어두운 시이다. 반면, ⑤는 ‘몽산포’라고 하는 특정 지역의 밤바다 풍경을 파도・어둠・초승달・소나무 숲・바람 등의 객관적 요소들을 가지고 재구성해 놓고 있다. 그 재구성된 세계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사유세계로서 구축된 주관적인 진실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는 ③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③은 주관적 진실로서 인식된 판단에 대해 단순히 기술記述하는 측면이 크고, ⑤는 문장으로써 그려내는 그림에 가깝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나가며 생각을 함으로써 그 이미지를 떠올려야 하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③은 산문이 어울리지만 ⑤는 행과 연 구분을 통해서 읽어나가는 속도를 통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⑤보다는 ②가 낫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산문시가 가지는 진정한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 매력을 느끼려면 제대로 된 산문시를 많이 읽어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로서 ‘일방적으로 꿈꾸는’ 산문시의 매력은 이러하다. 곧, 빠르고 쉽게 읽혀져야 하고, 그런 데에서 오는 쾌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 쾌감이란 ‘알았다’ 혹은 ’나도 그렇게 느끼고 생각했다’는 지각知覺의 즐거움이자 ‘시원스러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오래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오래오래 깊이 생각한 결과를 펼쳐 놓아야 하며, 그 내용은 마치 무의 가운데 토막처럼 핵심적인 부분으로써 전체를 환기시키거나 암시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이왕이면 그 무가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드러내 놓는 눈[眼]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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