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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율에 풀어놓는 道의 길과 깨달음
-이시환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을 읽고
김준경(시인/문학평론가)
‘현대시(modern poetry)'를 논할 때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식은 ’현대시(modern poetry) = 운율(meter) +비유(metaphor)‘로 말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앞의 운율보다도 뒤의 비유에 무게 중심이 옮겨져 있는 형편이다. 그만큼 옛 시와 오늘의 시는 형식적인 면에서 많이 달라진 것이다.
길고 길었던, 화려한 20세기를 거쳐서 21세기에 당도한 영국의 현대시도 운율체계를 잘 지키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전적으로 무시하는 부류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영시에서는 약강격(弱强格:iambic), 강약약격(强弱弱格:dactyl), 강약격(强弱格:trochee)이라 하여 매우 과학적인 운율체계가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켜져 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과거의 시가나 시조에서의 음수율을 운율체계로 볼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 잘 지켜지고는 있다. 그만큼 노랫말로서 출발한 시는 운율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는 노래로 불리어지는 게 아니라 그저 소리 내어 읽는 정도로 그치고 말기 때문에 정형적인 외형률은 거의 다 사라지고 편 편마다의 독자적이면서 자유로운 리듬 감각으로 대체되어 있다.
최근에 필자가 읽은 이시환 시인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신세림, 2004)」은 한국적 내재율이 아주 강하게 작동되고 있는 것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는데, 딱히, 7.5조니, 3.4조니, 3음보니 하는 외형률이 아니라 작품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그래서 소리 내어 읽어도 흥이 절로 나는 일정한 리듬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우리 시의 전통적 운율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쨌든, 필자는 자연스레 소리 내어 읽게 되는 흐름 곧, 내재율에 불교적인 명상과 선적 정신세계를 실어내고 있는, 매우 특수한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이시환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을 분석하여 그 주제와 두드러진 특징을 말하고자 한다.
시집 속의 첫 작품에서부터 시인은 언어를 초월하는 진리를 용하게도 직관적인 언어로써 표현해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하,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문득, 이 곳 중선암쯤에 홀로 와 앉으면/이미 말(言)을 버린,/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내 스승이 되네. -작품<상선암 가는 길> 전문
불과 4행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시이지만 실로 많은 아니, 실로 깊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말 많은 인간세상과 그 말을 버린 크고 작은 바위를 대비시키면서 오히려 침묵하는 돌덩이가 말 많은 인간의 스승이라는 단 한 마디의 말로써 인간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으면서 침묵의 무게를 심감하게 한다. 그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절창(絶唱)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일평생 어찌 그리 즐거움만 있겠는가./어느 날 갑자기 슬프디슬픈 일도 닥쳐 올 수 있음을/예비해야 하지 않겠는가.//일평생 어찌 그리 괴로움만 있겠는가./어느 날 갑자기 기쁘기 한량없는 일도 밀물져 올 수 있음을/예비해야 하지 않겠는가.//길든 짧든 한 생을 다 지나고 보면/한 때의 즐거움도 괴로움도 다 헛것이었음을/어찌 되돌릴 수 있으리오.//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머무르지 않고/아무리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우리네 꿈같은 인생 그 실상이네 그려. -작품 <하루하루를 살며> 전문
위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인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공(空)’과 ‘무(無)’에 대해서 깊이 천착하고 있다. 일상의 즐거움과 슬픔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임을 환기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유(有)’와 ‘무(無)’ 곧 집착과 버림의 적절한 균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작은 창문이지만 열어 놓고 살며/쌀쌀한 아침저녁 바람이 부는 것을 체감하며/이 가을에 숨을 쉬고 있다는 게/얼마나 큰 기쁨이더냐?//땅에 바싹 엎드려 지붕이 낮은 집이지만/두 다릴 쭉 뻗고/조용히 잠을 청할 수 있다는 게/얼마나 큰 행복이더냐?//이 한 잔에 맑은 물을 마시지만/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이 몸의 투명함과 가벼움이,/얼마나 큰 축복이더냐?//일백 년을 산다 해도/일백 억 년을 산다 해도/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듯이/잠시 잠깐임엔 마찬가지.//길고 짧음을 잊고 사는 것이,/얼마나 농익은 맛, 그윽한 향이더냐? -작품<가을의 오솔길에서> 전문
작은 창문이 딸린 낮은 집에 살지라도, 아니, 진수성찬이 아니라 맑은 물과도 같은 소찬을 소식하며 산다 할지라도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큰 즐거움이고 행복이라는 가치관의 표현인 듯싶다. 더 나아가, 많고 적음에서, 높고 낮음에서, 길고 짧음에서 이미 초월한, 그래서 어떠한 굴레로부터 속박되지도 않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해탈(解脫)의 경지를 여유롭게 표현해내고 있다. 필자는 부득이‘해탈(解脫)’이라는 용어를 빌려 쓰고 있지만 시인은 이미 ‘있음’과 ‘없음’에서조차도 영원히 벗어나라고 말한다. 과연, 인간의 굴레를 쓰고서도 그것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양 어깨 위를 짓누르는/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몸뚱이조차 벗어놓아라.// 그리하여 우주를 떠도는 먼지처럼 가벼워진/ 그런 너마저 놓아 버려라.// 그리하여 모든 것과의 연(緣)이 끊어져/공간도 없고 시간도 끊긴//세계의 소용돌이가 되어라./ 아니, 있고 없음에서 영원히 벗어나라. -작품<여래에게·54 -나의 진화(進化)> 전문
이 세상 모든 일이 덧없으니/그것은 나고 죽는 법이라?//나고 죽음이 다 끊어진 뒤/열반 그것이 곧 진정한 즐거움이라?//그대도 한낱 꿈을 꾸었구려./그대도 한낱 꿈을 꾸었구려.//이 세상 모든 일이 덧없다 하나/그 덧없음 속에서 온갖 꽃들이 피었다지고//지는 일조차 새 씨앗을 잉태하는/ 자궁의 긴 침묵일 뿐//그 덧없음 속에 머물지 아니한 것 없네./그 덧없음 속에 머물지 아니한 것 없네. -작품<여래에게·8> 전문
물론, 궁극적으로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은 인생을 포기하고 먼지처럼 우주를 유영하듯이 살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모든 존재는‘덧없음’이란 덫에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라는 암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자칫, 인생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축소시키는 허무주의자들의 말이나 태도처럼 비추어질 소지가 없지 않으나 분명,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자궁의 긴 침묵’이라는 단단히 응축된 말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필자가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無意味)’ 시론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는 시란 있을 수 없으며,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말장난일 뿐 시의 윤리 상 옳지 않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옳다.”라고 했는데 무의미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옳다고만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영국의 비평가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의 작품인
어쨌든, 밤사이/눈이 많이많이 왔으면 좋겠다./어쨌든, 내일 아침엔/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으면 좋겠다.//그리하여, 움직이는 사람도, 자동차도,/나는 새조차 없었으면 좋겠다./그리하여, 지구촌의 62억 인류가 착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저마다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어쨌든,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인간의 오만함도 비추어 보았으면 좋겠다./그리하여, 하얀 눈처럼 깨끗해지고,/그 깨끗함으로 세상이 온통 뒤덮였으면 좋겠다. -작품<폭설을 꿈꾸며> 전문
그리고 시인은 여행에서 얻은 교훈을, 여행이라면 엄연히 현실세계이지만, 아주 함축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곧, 동서남북 지구촌 어디를 가도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 빛깔과 모양새와 향기가 다를 뿐 모두가 다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사연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같은 하늘, 같은 땅의 역사라는 것이다. 시인의 시계(視界)가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것의 빛깔과 향기와 모양새가 다를 뿐/동서남북 지구촌 어디를 가도/사람 사는 곳마다 이런 저런/사연이 있네.//그것의 빛깔과 향기와 모양새가 다를 뿐/동서남북 지구촌 어디를 가도/생명이 숨쉬는 곳마다 이런 저런/아름다움이 있네.//그저 태어나 죽고 사는 일이건만/그것으로 전부이고/그것으로 결백한/한 하늘 한 땅의/역사가 있을 뿐이네. -작품<어디를 가나> 전문
위 시와 유사한 구조와 내용을 갖는 또 다른 시 한 편을 더 보자.
지구촌 어디를 가고 또 가도/사람 사는 곳엔 사람의 어제와 오늘이 있네.//수많은 사람과 사람들이 대를 이어 오면서/아리아리 슬픔을 묻어두고/기쁨을 다 묻어두고/커다란 강물이 되어 흐르네.//지구촌 어디를 가고 또 가도/사람 사는 곳에 사람의 역사가 있듯/그 밉고 고운 사람들을 다 한 품안에 두고서/함께 체온을 나누어 온 대자연의 모성(母性)이 있네./아슴아슴 세월을 다 묻어두고/태초의 말씀을 다 묻어두고/한 숨결로 온갖 신비의 꽃을 피우네. -작품<지구촌 어디를 가도> 전문
지구촌 어디든 땅에는 사람의 역사가 있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가슴 속에는 대자연의 숨결이 흐른다. 그래서 사람과 땅이, 땅과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한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갈려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인류의 역사를 슬픔과 기쁨의 역사로 보고 있고, 그것을 다시 대자연의 모성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놀라운 시각이요, 발상이요, 거시적인 안목(眼目)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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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환 시인은 젊었을 때부터 오늘(2009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시와 문학평론 활동을 해온 중견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젊었을 때에 시에 흥미를 잃고 시를 내던져 버린 프랑스 시인 A. 랭보와는 전혀 다르다. 필자도 문학을 계속해왔지만 잠시 휴식을 취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인은 줄기차게 시집과 문학평론집을 발간해 왔다. 특히, ‘신시학파 선언’까지 했던, 매우 탁월한, 중요한 시인(major poet)이다. 물론, 그 신시학파 선언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문제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에는, 인생과 존재에 대한 통찰의 작품집으로, 도를 깨우쳐가는 과정에서 얻어진 작품들로 가득 차있다. 연작시 ‘애인여래’만을 읽어도 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시’라고 하는 그릇에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으리라 본다.
부처가 어디 인디아에만 있으란 법이 있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 동안 명상을 해온 시인인지라 인생과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인만의 농익은 시선이 시작품을 완숙되게 한 것 같다. 나는 그를 하산한 도인(道人)으로 여기며, 우리 한국현대시의 짧은 100년의 역사에서 정신적인 사유세계의 영역을 확대 심화시킨 시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앞으로, 시인으로서, 그리고 문학평론가로서 해야 할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이다. 부디, 하나하나 일구어 나가 우리 ‘한국문학사’라고 하는 커다란 산맥의 높은 봉우리가 되어 솟아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다만, 필자가 원하는 바, 한두 가지는, 문학의 대 사회적 기능 회복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 살 수 없기에 부족(部族)이 있고, 종족(宗族)이 있고, 사회(社會)가 있고, 민족(民族)이 있고, 국가(國家)가 있다. 따라서 순수서정시를 쓰는 것은 시의 본령을 지키는 일이긴 하지만 동시대(contemporary)의 문제와 공동체(community) 사회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아 주고, 함께 호흡해 주기를 바란다.
주문하고 싶은 떠 하나의 말은, 현대문학의 맹목적인 난해성 곧 나쁜 의미의 모더니티를 극복하는 일이다. 문장을 구사함에 있어 지나치게 현학적인 수사에 의존한다거나 공유될 수 없는 주관적 정서를 묘사해 내는 일에 급급해 하는 경향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한다. 물론, 이 점에 관한 한 이 시환 시인에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굳이 이 자리에서 이를 언급함은 오늘날 너무 많은 시인이나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알아먹을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것들이 범람하는데, 그들과는 변별성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솔직히 말해, 어떤 작가들은 독자들이 작품의 내용을 해독하느라 헤매는 동안에도 한가로이 손톱이나 깎고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모독하는 처사라고 생각된다.
바야흐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전 세기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양, 극복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리 한국의 현대시의 전통이, 다시 말해, 최남선으로부터 소월, 만해, 미당, 영랑 등의 시적 전통을 잇는 일이 매우 요긴하다고 본다. 여기에 사상적 깊이를 더해서 한국 현대시의 위대한 전통(great tradition)을 잇는 일에 나는 이 시인이 크게 기여하리라 믿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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