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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문학 : 풍경을 넘어・2 . 1
-이시환의 인디아 기행시집 『눈물 모순』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준주성범』의 저자 토마스 아 킴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 독일의 수도사, 종교사상가)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 외에는 ‘허무로다 허무!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코헬 1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현세를 경계하며 하느님 나라를 사모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지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헛된 일이란 소멸하고야 말 재물을 찾는 것, 그 재물에 희망을 두는 것, 존경 받기를 갈구하거나 높은 지위를 꾀하는 것, 후에 큰 벌을 받을 육신의 욕구를 좇는 것, 오래 살기만 원하고 착하게 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 현세의 생활에만 골몰하고 장차 올 후세를 미리 생각하지 않는 것,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릴 것을 사랑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을 들고 있다. 이 영성적인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대로부터 인간은 신을 섬겨왔고, 그 신을 섬기는 것이 인간이 의식주를 얻고 현세의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우선순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이 현세란 내세나 후세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게 의식주를 얻을 수 있게 하고 현세적 복락을 주는 것도 신에 의해서라고 믿든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기구(祈求)를 통하여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이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죽음이 있다는 의미는 인간이 지닌 운명임과 동시에 유한성의 본질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을 빼고 다른 이야기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다음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한 인간의 현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 말은 어떻게 하면 현세를 가장 가치 있게 살아가는가의 문제이다. 이때의 가치란 세상의 가치와는 구별되는 신적인 가치라고 해야 하며, 인간이 그러한 신적인 가치를 살 때야말로 신을 닮아가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창조설과 인간이 유인원과 같은 원숭이나 침팬지, 고릴라 등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진화론의 오랜 각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여기’의 우리에겐 이 현세의 극악한 악덕들의 결과인 모순과 부조리, 그것들이 거대한 뿌리를 형성하여 만들어낸 그릇된 권력과 폭력 속에 살아가면서 그것들과 싸워가기에도 힘겨운 것이다. 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하면서도 그것이 의로운지 의롭지 못한 것인지도 분별하지 못한 채 양심과 이성을 팔았던 나치즘에 자발적으로 동조하고 시녀노릇을 한 인간의 지식이란 얼마나 쓸모없으며, 한낱 인간 형제를 죽이는 데 정당화된 말과 지식들에 지나지 않는가 말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의 진리만을 따르는 길이 가장 고귀한 것임을이 저자는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영원한 진리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신에 대한 영원한 사모이며 섬김이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신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아주 큰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신에 의해 피조 되었다는 것에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 생각이야말로 가장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하잘 것 없는 예술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우리들의 눈을 매료시키는 성당이나 건물들은 신을 위해서 만들어졌기에 인간의 신을 사모하는 마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해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고난과 시련기인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던 중 -이집트를 향한 신이 보여준 10가지 재앙을 경험하고 극적으로 갈대바다를 건너면서 신의 전지전능함과 사랑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그들의 신을 버렸고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경배하였을 때 그 금송아지는 맘몬에 다름 아니며, 그 결과는 악덕의 생산에 지나지 않았다. 악덕의 대량생산은 어떻게 보면 스스로 자멸하는 길인 것이다. 신이 벌을 내렸다고 성경에서는 전해내려 오지만 어쩌면 그 악덕의 결과로 재앙이 덮쳤기에 그 재앙 속에서 다시 신을 찾게 된 과정일 것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대로 회복해 가는 데에는 성찰과 회개(metanoia)가 뒤따랐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회개란 단순히 일상의 크고 작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일이다. 금송아지에게 돌린 시선을 여호와 하느님께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인간은 피조 되었기에 창조주에 대해 끊임없이 닮아가고 창조된 목적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인간의 삶은 지복 -신이 주는 사랑의 선물- 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따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적 진리로 이것을 접근하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고 실증되지 않는 것은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문학은 그러한 계량화되고 실증적이기만 한 과학적 진리의 오류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인간의 눈을 지상에만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게 하고 먼 시원(始原)인 우주를 바라보게 한다. 불분명한 것, 불명확한 것이야말로 신의 세계이다.
신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있기에 불분명하거나 불명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신을 부정하면서 생긴 비극은 그 이전의 어떤 비극보다 더 참혹하였다. 그 이전에는 천재지변이나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었으나 신을 부정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재앙은 대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근대의 반생명적인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현대철학이나 이론들, 담론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그래서 저자는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라는 코헬 1장 8절의 격언을 기억하라고 하며 “이 세상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고 무형한 것을 찾아 나서기 위해 힘써라. 세상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르게 되면 결국 양심을 더럽히고 하느님의 은총을 잃게 된다.”고 권고하고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종 모세의 영도로 가나안 복지에 이르렀으나 광야살이 때와 같은 일 -왕국분열, 이방신 숭배와 타락- 을 저지른 끝에 결국 바빌론 유배로 귀결되었다. 바빌론의 강가 기슭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던 시편의 저자는 잃어버린 하느님과 나라와 고향, 가족들과 공동체을 그리워한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노라.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비파를 걸었노라.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는구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을러대는구나. 시온의 노래를 불러라. 우리에게 한 가락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 손이 굳어 버리리라.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귀향 시켜주고 포도의 수확 철에 즐기는 축제의 분위기를 다시 되돌려 줄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을 모든 것을 잃고 난 이국의 유배살이의 설움에서 깨닫게 된다.
이 애탄의 비가(137편1-6)는 뼈아픈 회개를 하는 저자의 심정이 녹아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애처롭게 한다. 비파를 타는 손과 거기에 맞춰 부르는 혀가 굳어 버려라고 할 만큼 유대인들의 저항적 심정을 읽을 수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이것은 만해 한용운의 『님의 沈黙』의 님을 잃은 애타는 심정과 성찰, 자기부정에 이르는 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겠다. 구약성경의 모세오경이 바빌론 유배 시 유대인 지식층 디아스포라에 의해 집필되었다는 의미는 오경이 그들의 유배 전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회개가 동인(動因)이 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글쓰기는 페르시아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이후(B.C 587~540)부터 키루스 임금의 귀환 칙령(B.C 539)이 내릴 때까지이다. 유배지는 바로 사막과 광야와 같은 시공간이다. 사막과 광야는 고난과 시련의 시공간이며, 성찰과 회개, 정화와 재생의 시공간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나이 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았던 광야의 40년, 바빌론 유배지에서 근 70년간은 고난과 시련, 성찰과 회개, 정화와 재생(재건)의 시기였다. 이와 같이 고난과 시련의 시공간에 놓여진 이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고난과 시련의 여정에로 불리움을 받은 것이며, 이것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것이란 의미는 이 여정을 지나는 순례의 삶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섬기거나 그 진리인 하느님 나라를 사모하듯이 이시환 시인의 제11시집『눈물모순』에는 힌두교와 불교적 전통이 강한 인도를 통하여 문학과 종교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에서 중핵을 이루는 것은 불국토로서의 공간과 시간, 강, 돌과 사막이다. 그의 인도기행시편인 이 시집에서 보여지는 것은 사막과 광야와 같은 고난과 시련의 시공간 속으로 시인이 걸어 들어가 -시인이 여정을 수행하는 순례자로 초대되어- 일구어낸 커다란 마음의 밭이라 하겠다. ‘눈물모순’이란 바로 이 고통으로 인한 비탄과 시련 속에서 흐르는 그 눈물이 바로 은총임을 깨닫게 되는 데에서 발견한 삶의 역설적 진리가 종교적 신비로 여겨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눈물이다. 이 때 흐르는 눈물은 신의 은총으로 변화 된 내면의 고통스런 고백이다.
먼저, 첫째로 서시(序詩)에서 이시환 시인에게 인식되는 인도는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강물은/비로소 망고의 과즙이 되고,/사막의 모래알조차 그대로/밤하늘의 별이 되는 광활한 세상”이며 “위아래가 따로 없고,/그야말로 귀천(貴賤)이 따로 없는,/살아 숨 쉬는 것들로/가득한 세상”이다. 인도는 인간 세계의 하나의 큰 바다인 어머니와도 같은 공간이다. 지식, 명예, 부, 권력으로 차별되는 계급과 신분의 상하가 따로 없으며 귀천이 따로 없이 모두가 동일한 존재일 뿐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오히려 “궁궐에 사는 이들에겐 수심(愁心)이 배어 있어도/남의 처마 밑에서 늦잠 자는/노숙자들의 얼굴에는/미소가 떨어지지 않는 백성들”이 사는 나라이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물이 근원에서부터 먼 길을 돌고 돌아 흘러와서 아열대 과일인 망고의 달콤한 즙(汁)이 된다는 의미는 물이 ‘멀고 먼 길’을 돌아 큰 강이나 바다에 이르듯 자신에게 부딪쳐오는 안과 밖의 모든 길항관계들을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듯이 삭이고 삭혀 달콤한 즙으로 변형되는 곳이다. 마치, 한 송이 연꽃이 진흙의 더러움을 삭이고 삭여서 청초한 꽃으로 탄생되듯이 말이다. 인도는 인간 간의 차별상이 없는 평등상이 실현된 불국토의 땅이며 사막의 모래알조차도 밤하늘의 별이 되는 신비한 종교적 이상-힌두이즘과 불교적 진리- 가 실현된 땅이다. 그래서 사막의 모래알과 같이 거칠고 하잘 것 없으며 쓸모없는 것조차 밤하늘의 신비스런 별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인도는 인간과 동물이 한데 어울려 사는 “동화(童話) 속 같은 나라”이며 “눈에 보이는 짧은 현세(現世)보다도/보이지 않는 길고 긴 내세(來世)를 위해/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이다. 인간과 동식물에게도 미치며 두루 나투시는 부처의 진리와 자비로 가득한 이 땅에서 “신의 자비로운 아들딸들은/오늘도 강물에서/호숫가에서 목욕재계하고/밤에는 별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신들의 심기를 헤아리느라/ 부좌를 풀지 않네.”라고 하여 수행과 고행을 하며 신의 심기에만 오직 관심을 두고 삶의 중심을 두는 사람들이 사는 대지이다.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의 중심에 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저 먹고 살기 바쁜 중생들의 궁색함에서/버려지는 것들이 이곳저곳에서/썩어가면서/피어나면서/뜨겁게 몸살을 앓는/대지여/강물이여/사막이여”라고 외친다. 그리고 “문득, 내가 태어나기 전과 내 죽은 후를/오래오래 생각하는,/그리하여 명멸(明滅)하지 않는/존재의 근원을 향해 꿈을 꾸듯/노(櫓)를 저어나가는/강가 강의 백성들”이라고 한다. 이 시 구절은 현재의 본유(本有)에서 전생과 후생을 명상하며 ‘명멸하지 않는 존재의 근원’을 향해 노를 저어나가듯이 끊임없이 수행해나가는 백성들이 사는 곳이므로 종교가 전체로서 작동하는 나라이며, 그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불교의 영원무궁한 길이를 가진 시간대(나유타 겁)에서 아주 짧은 찰나에 지나지 않고 거기에서 명멸하지 않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인도인들은 내세의 삶을 위해 본유가 있을 뿐이므로 수행과 정진이 습관이 되어있고, 오히려 가진 자보다 가지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더 귀하게 드러나는 세상이므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와 다름없는 땅이다. 시인은 이 인도의 백성들을 “검게 탄 피부에 흰옷을 걸친/깡마른 사람들이 서성이며/웅성거리며,/분주하게 움직이어/나비떼가 내려앉는 듯/목련꽃을 피워놓는다.”라고 하여 열차에서 내리는 수많은 인도인들의 모습을 목련꽃에 비유하면서 “눈이 부시게/눈이 부시게”라고 감탄한다. 이것은 2008년 4월 2일쯤에 마무리된 시편인데 인도기행시집의 서시의 중요 부분들이다. 이 시 구절에서 간취되는 것은, 이시환 시인이 그렇게도 인도에 매료된 이유는 그의 눈에 비친 인도는 귀천이 없고 상하의 차별이 없는 평등상이 실현된 모습의 불국토이며, 그것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것은 끊임없는 명상을 통한 수행과 고행을 하며 신을 섬기는 나라이며, 신을 삶의 중심에 두기 때문이라고 여긴 듯하다.
두 번째로 시간에 관한 시로서 「더디 가는 인디아 시간의 수레를 타고」를 읽어보자.
믿기지는 않겠지만 지구를 떠나
행성(行星)을 바꿔 타면 몸무게가 바뀌듯
우리의 시간조차 빠르고 더딘 곳이 있다네.
하루하루가 유난히 빨리 가는 사람들은
인디아로 가보시게나.
그곳에 가서,
아주 느릿느릿 가는 시간의 수레를 타고
낯선 세계를 한 바퀴 돌아보시게나.
마음이 조급한 이들의 시계바늘이야
여전히 조바심을 내겠지만
멀리 돌아가는
그들의 시계바늘은 아주 더디다네.
-「더디 가는 인디아 시간의 수레를 타고」부분
이 시에서는 인도가 동서남북 대지를 가로지르는 야간열차의 빠른 속도와 현대식 무기와 사상이 있으나 그들의 발걸음은 느리면서 무겁고 저들의 동작은 굼뜨면서도 여유롭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가 너무 빨리 가는 사람들은 꼭 인디아로 가보라고 한다. 이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한 통속이 되어 있는 기이한 나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유별나게 느릿느릿 가는/시간의 수레 위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는,/뚱뚱하기도 하고 깡마른/저들의 티 없는 미소가/저들의 해맑은 눈빛이/경이롭고 경이로울 뿐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은 삶에서 때로는 “경우에 따라서는 지름길 보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더 빠를 수도 있음을/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온몸으로 느껴 보시구려.”하여 인도를 가서 직접 보고 느낌으로써 체득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빠름으로 일관된 세상에서 사는 시인은 인도의 시간의 수레를 타고 느리고 여유롭게 가는 시간을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느리고 무겁고 굼뜨고 여유로운 것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신을 만나고, 신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시간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신을 늘 만나고 신에게 대화를 나누며 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들에게 빠른 것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2~3개월에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2~3개월 후면 그것들은 다시 옛 것이 되어 의미를 잃고 이런 것들을 대량으로 끊임없이 쏟아내는 현대의 후기산업사회는 이 신과 접속하는 나라와는 다르다. 물론, 인도에도 산업이 발전하였고 현대식 무기가 있고 빠른 속도로 대륙의 동서남북을 달리는 야간열차가 있지만 동물들과 한데 어우러져 살고 가난한 이들도 행복한 인도에는 선진 산업사회와는 다른 풍모를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인디아 연꽃」을 읽어보자.
눈이 부셔 바로 볼 수가 없네.
너무나 멀리 있기에
너무나 높이 솟아 있기에
가까이 다가가 만져볼 수도 없네.
다만, 그 커다란 연꽃 송이 위에서
막 태어난 갓난아이 울음소리 들리고,
그 연꽃 송이 위에서
이따금 황금빛 왕관을 쓴
새들이 날아오르네.
다만, 그 커다란 연꽃 송이 위에서
무시로 천둥 번개 치고,
그 연꽃 송이 위에서
이따금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네.
하지만 임자는
그 연꽃 송이 위에 앉아
명상 삼매에 빠져있네.
어느 날 운이 좋게도,
그 연꽃잎 한 장 떨어져서
한참을 나풀나풀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그 꽃잎이 땅에 닿자마자
에메랄드 빛 작은 호수 하나가 생기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네 눈조차 의심할 일이 생기고 마네.
얼마 후 갈증에 지친 사람들은
제 눈들을 비비며 사방에서 모여들고,
호숫가 한쪽 귀퉁이에서는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화(神話)를 쓰고
신전(神殿)을 세우느라 분주하네.
-「인디아 연꽃」전문
희고 붉은 연꽃은 만다라화, 만수사화라고 하여 불교적 진리를 상징하는 꽃이다. 이 꽃은 불국토에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를 이 시에서 상징하고 불교적 진리의 법신이 바로 그가 된다. 연꽃 송이 위에 앉아 명상 삼매에 빠진 부처의 모습은 무량한 시간 속의 한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겁의 수많은 부처들 중에 법신으로 사바세계,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이 세계에 현현하신 것이다. 이 인연 역시도 무한한 시간대의 한 순간에 이루어진 일인 동시에 영원한 시간의 속의 일이다. 그런 불국토의 사람들은 부처를 중심으로 기도와 찬양하거나 신화를 쓰고 신전을 짓는 것이 삶의 중심일 뿐이다. 이 시간의 수레는 또한 생명의 수레이다. 다음으로 강에 관한 부분이다. 「강가 강의 백사장을 거닐며」를 읽어보자.
언제부터였을까?
강물에 실려온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어지간한 바닷가 백사장보다
더 길고, 더 넓고, 더 두터운
모래밭이 형성된 여기.
‘바라나시’라는 고도(古都)를 에돌아 흐르는
강가 강 동쪽 변에
허허벌판처럼 펼쳐진
이 모래밭을 거닐며,
먼 옛날 온갖 번뇌를 다스려
깨달음을 얻은 자, 그를 생각하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념(想念)들을 말할 때에도,
헤아릴 수 없이 길고 긴
세월을 말할 때에도
이 곳 모래밭의 모래알을 떠올렸지.
그는, 희노애락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중생들에게
일체의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않고,
일체의 변함조차 없는
여래(如來)의 덕성을 말할 때에도
발 밑 모래의 모래밭을 떠올렸지.
그로부터 줄잡아
이천 오백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이 대신에 이방인인 내가 서 있네.
그가 바라보았을
강가 강의 덧없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가 거닐었을
강가 강의 모래밭을 거닐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네.
분명, 그가 바라보았던 강은 아니어도
그 강물은 이미 아니고,
분명, 그가 거닐었던 모래밭은 모래밭이어도
그 모래 이미 아니건만
변한 게 없는
이 강가 강의 무심(無心)함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풀꽃들이
이곳저곳에서 피었다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풀꽃들처럼 명멸되어 갔을까?
무릇, 작은 것은 큰 것의 등에 올라타고
큰 것은 더 큰 것의 품에 안겨
수없이 명멸을 거듭하는 것이
생명의 수레바퀴이거늘
이를 헤아린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살아 숨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강가 강의 백사장을 거닐며」부분
강가 강은 인도인들에게 생명의 젖줄이다. 오염된 듯한 강가 강에서 사람들은 그날 그날의 식수를 마시고 신을 예배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한다. 이 강은 작은 인도의 지류들에서 많은 오물들과 썩은 것들을 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정작용을 하듯이 인도를 정화시킨다. 이 강에서 인도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시작하여 현재에까지 이르며, 그 모래알들이 쌓인 만큼 그 시간의 부피도 두껍다. 이 강의 역사와 함께 얼마나 많은 것들이 명멸하여 갔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었다 졌던가? 그러나 강은 무념무상에 잠겨 있다. 시인은 이 강가 강에서 번뇌를 다스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를 생각하고, 그가 수많은 상념, 수많은 시간과 세월들, 일체의 변별심과 일체의 변함이 없는 부처의 덕성을 항하사(恒河沙)에 비유한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작은 것은 큰 것의 등에 올라타고 큰 것은 더 큰 것의 품에 안겨 수없이 명멸을 거듭하는 것이 생명의 수레바퀴라 하여 이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반문하는 것은 그만큼 부처의 자비가 뭇 생명들에 두루두루 나투신다는 의미이다. 이 시는 강가 강의 생명력과 여래의 우주만물에 두루 미치는 생명력이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하겠다.
세 번째로 돌에 관한 시편들을 읽어보자. 먼저 「옛 인디아의 석공(石工)들에게」를 읽어보자.
인디아의 돌은 돌도 아니런가.
돌을 자르고, 깨고, 쪼고, 다듬고, 갈아서
모양을 내는 솜씨로 치면
그대와 견줄 자가 없구나.
이 외진 골짜기 산 밑 거대한 돌 속으로
그려지고 세워지고 구축된 사원과 신전인
그대 ‘꿈의 궁전’을 들여다보노라면
그대는 정녕 돌이, 돌이 아닌
다른 세상을 살다갔네그려.
오로지 신을 향한 간절함인가.
먹고 살기 위한 그대만의 손끝
피눈물이 흐르는 기교인가.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던가.
나는 알 수 없다마는
분명한 게 있다면
그대 앞에서 돌은 한낱
찰흙덩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네.
그런데 나는 왜
그런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일까?
네가 마무리 짓지 못하면
네 아들이 마무리 지었을 것이고
네 아들조차 마무리 짓지 못하면
그 아들의 아들이 마무리 지었을
수많은 석굴사원에 녹아든
행복한 절망이 부질없고
내 눈물조차
부질없음을 알고 있으련만
나는 왜,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일까?
「옛 인디아의 석공(石工)들에게」전문
백년을 하루 같이 살며
대(代)를 잇고 잇기를 오백년이 넘도록
위로부터는 쪼아 내려오고
옆으로는 파고들어가
그야말로 커다란 바윗덩이 속으로
더 큰 신(神)들과
더 생명력 넘치는 인간들이 함께 살아갈
전당(殿堂), 전당을 빚어놓았네.
분명 돌을 쪼고 새기기를
진흙처럼 여겼으니
그대 손과
그대 머리와
그대 가슴들은
도대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가?
실로 놀랍도다.
놀랍도다.
그대 믿음에 놀랍고
그대 정성에 놀랍고,
그대 순종에 놀랍고,
그대 손끝에서 피어나는
기교에
놀랍도다.
놀랍도다.(중략)
하여 나는 쓸쓸하구나
장엄하고도 거룩한 신전이여.
하여, 모든 게 부질없구나.
단단하지만 진흙에 지나지 않는
돌의 꿈이여.
돌의 말씀이여.
그저 바람결에 흔들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저 푸른 풀잎이
나의 성(城)이요,
그저 부드러운 햇살에 미소 지으며
순간으로 영원을 사는,
저 돌에 핀 작은 꽃이
나의 궁전임을.
-「엘로라 Ellora」부분
첫 번째 시편은 ‘아잔타, 엘로라, 우랑가바드, 뭄바이, 엘리펀트 아일랜드 등 기타 석굴사원을 돌아보고’라고 부제가 달린 「옛 인디아의 석공(石工)들에게」이며, 불교 문화유산 앞에서 그것을 만든 석공들을 기리며 시인의 상념을 시로 풀어 쓴 것이다. 돌은 석공들의 삶의 방편이었든 종교적 정념이었든 간에 장인들의 손끝에서 거대한 석굴사원들이 탄생되었으며 돌을 다루는 그들의 솜씨가 마치 진흙을 다루듯 한 장엄한 예술품 앞에 시인은 감탄을 하면서도 이 석굴사원에 녹아든 행복한 절망에 울고 그 눈물조차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석공에게 돌이 하나의 삶에서 겪는 고난이자 기쁨이자 먹기 위한 방편이자 종교적 정념일 것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그런 돌에 새겨 넣은 석공의 꿈과 돌의 말씀은 세월의 비바람에 닳고 닳아 영원할 것도 영원하지 못하고 단단한 것조차 이미 단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게 부질없다고 하여 불교적 무상을 드러내고 있다. 차라리 그런 돌보다 바람결에 흔들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푸른 풀잎이 시인에게는 성(城)이며, ‘순간으로 영원을 사는,/저 돌에 핀 작은 꽃’이 시인에게는 궁전이라고 하여 돌의 단단함과 같은 고체성이 풀과 작은 꽃과 같은 식물성의 부드러움으로 변화되어 거대한 사원과 궁전, 성에 상반되고 있다고 하겠다.
네 번째로 사막은 인도기행 시편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막 투어」를 읽어보자.
나는 철없이 사막 투어를 떠나네.
얼굴엔 선크림을 바르고
머리엔 창이 긴 모자를 눌러쓰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까지 끼고서
그야말로 철없이 사막 투어를 떠나네.
그곳 어디쯤에 서서
그곳 어디쯤을 바라보지만
그것은 분명 수억 수천 년의 세월이 빚어온
한 말씀의 성(城)이요,
그 성의 한 순간 영화인 것을.
아직도 곳곳에 솟아있는
오만한 바윗덩이 부서지고 부셔져서
내 살 같고 내 피 같은 모래알이 되고,
그것들은 다시 바람에 쓸리고 쓸리면서
오늘, 어머니의 젖무덤 같고
궁둥짝 같고
깊은 배꼽 같고
긴 다리 사이 같은
모래뿐인 세상,
적막뿐인 세상 그 한 가운데에 서서
머리 위로는
쏟아지는 햇살로 흥건하게 샤워하고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어둠으로는
머릴 감으면서
나는 비로소 눈물,
눈물을 쏟아놓네.
아, 고갤 들어 보라.
살아 숨 쉬는, 저 고단한 것들의 끝
실오리 같은 주검마저도 포근하게 다 끌어안고,
혈기왕성한 이 육신의 즙조차 야금야금 빨아 마시는
모래뿐인 세상의 중심에
맹수처럼 웅크린 적막이 나를 노려보네.
한낱, 그 뜨거운 시선에 갇힌
두려움 탓일까?
모래 위에 찍힌 내 발길의
시작과 끝이 겹쳐 보이는 탓일까?
하염없이 흐르는 내 눈물이
마침내 물결쳐가며
머리 위로는
숱한 별들을 닦아 내놓고
발밑으로는
깨끗한 모래톱을 펼쳐 내놓는 이곳에서
숨조차 멎어버릴 것 같은,
그 눈빛 속으로
내가, 내가 드러눕네.
-「사막 투어」
이 시에 대해 시인은 ‘무엇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가? 태양의 두터운 입술도, 바람의 격렬한 포옹도 아니다. 오로지 내 살 같고 내 피 같은 모래알뿐인 사막의 깨끗한 적막이다. 그것은 내 생명의 즙을 빨아 마시지만 내 터럭 같은 주검조차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는 글을 남겼다. 이것이 부제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사막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노트한 듯하다. 이 글에서와 같이 사막의 모래알은 시인에게 있어 피와 살이며 깨끗한 적막이라고 하였다. 시인이 마주한 생의 사막은 무엇인가? 신 앞에서의 단독자로서의 철저한 고독, 그 고독에로 초대 받은 자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그 속에서 적막함이 맹수처럼 자신을 삼킬 듯한 고독이 시인에게 눈물을 불러온다. 한 남자의 고독한 울음, 한 시인의 고독한 울음, 그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 사막은 눈물방물 속에서 빙글빙글 천천히 거대하게 회전하고 시인의 울음은 사막의 적막을 서서히 부순다. 시인의 울음은 견고하게 쌓여서 점성으로 질기게 붙어있는 모래의 결속력을 해체시킨다. 모래알들이 약간 떨다가 조금씩 움직인다. 마치 울음의 폭풍이 사막의 모래알을 우리 눈앞에 거대하게 날리듯이 날리듯이 울음은 빙글빙글 원운동을 하고 사막의 모래폭풍도 둥글게 휘몰아치는 가운데 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적막 속에서 눈물 흘리며 큰 소리로 흐느껴 우는 시인의 모습이 이윽고 보이지 않는다. 사막의 모래폭풍이 가려버렸다. 시인의 울음은 얼마나 그 자신의 속을 토해내었을까? 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것들이 눈물과 콧물, 침과 엷고 투명한 가래로 끊임없이 가슴에서 치받쳐 올라온다. 오장육부에 쌓인 묵고 삭은 것들이 위장과 식도를 타고 밖으로 끊임없이… 그 밑바닥에 붙은 것까지 다 토하듯 게워내고 나면 사막은 시인에게 영혼의 모래욕탕이 되어 그의 비워낸 내면을 정화시켜준다. 우리의 시야에서 일순간 사라진 시인은 저 멀리서 하얗고 조그만 몸을 드러낸다. 모래폭풍이 지난 사막에 말갛게 드러나는 풍경을 우리는 본다. 시인의 인도는 이렇듯 자신을 비우는 여정(旅程)이요, 순례(巡禮)이며, 정화(淨化)요, 재생(再生)의 시공이다. 시인은 그 자신만이 들어가지 않고 우리도 거기에 불러들인다. 풍경은 일그러지지도 않고 굴절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도 거기에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문학
-이시환의 인디아 기행시집 『눈물 모순』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저 멀리 모래 언덕을 무언가가 흔들리며 다가온다. 사막은 작열하는 태양의 뜨거운 아지랑이가 가물거리기에 물체는 시야에서 어른거리다가 희미해졌다가 멀어지거나 다가오거나 한다. 등에는 짐을 지고 모래언덕을 오르는 사람이나 낙타에 몸을 싣고 낙타가 걷는 걸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늘어진 어깨와 무표정하거나 더위에 지쳐 땀에 젖고 까맣게 그을리거나 열에 달아 벌게진 얼굴이다. 하늘은 뿌옇고 낮게 가라앉은 듯한 이 낯선 풍경 속에, 한 시인이 걸어들어간다. 풍경을 찢고 사막과 동화되기 위하여 들어간다. 풍경이 풍경만으로 존재한 근대의 풍경을 넘어, 시인은 걸어 들어간다. 풍경의 겉과 속을 다 들어가 본 사람과 풍경을 바라보기만 한 사람은 풍경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여기에서 이야기의 방식은 달리 전개될 것이다. 풍경의 겉만 본 사람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아주 일부분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풍경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풍경 전체를 이야기 하려하고 풍경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람이 들어감으로써 풍경에 변화를 줄 것이다. 여기서는 ‘들어간다’는 의미는 어떻게 ‘던질까’의 문제이다. 이시환의 열한 번째 시집인 『눈물모순』(2009)은 풍경 속을 들어간 사람의 이야기이다.
기행(紀行)은 무엇인가? 어느 곳을 방문하고 느낀 감상이나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는 왜 그곳을 택하여 가고, 그곳에서 무엇과 대면하여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 또는 왜 그 때 그 장소에 가는 것일까? 그리고 현실의 그 시공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상상의 공간으로 재창조하여 이야기하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에 앞서 왜 사람은 여행을 하는가? 여행은 일상의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여행의 배경에는 일상에서 오는 권태나 딜레마로부터 탈출구를 찾고자 하거나 심신의 휴양, 이국적 정취나 문화에 대한 동경 등이 동인이 되며, 여기에는 현실적으로 물질적 풍요가 밑받침 될 것이며, 특히 최근의 해외여행 붐이 구루메(gourmet), 힐링(healing)을 위한 것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시환 시인은 제8시집 『상선암 가는 길』에서부터 일상의 공간과 시간을 떠나 고적한 산사를 찾거나 자연물과 조우하면서 고요와 침묵의 관상생활 가운데 자기 내면을 탐색하는 여행을 하고 있고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을 시로 표현하였다. 이 시집의 후반부에서도 남미와 캐나다 시편들을 실었다. 이 시편들에는 남미의 대성당과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스도교 문화유산들 속에서 스페인이나 포르투칼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간취하고 피식민인들인 인디오들에서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농투성이를 만나면서 주체와 타자를 동일시하는 시편들을 보여주었다. 제10시집 『애인여래』에서도『상선암 가는 길』의 관상생활을 더욱 깊이 하여 여래(대타자)와 ‘나’(주체)가 하나가 되는 불심의 승화를 보여주었다. 제9시집 『백년완주를 마시며』에서는 중국과 남아시아를 여행하고 쓴 시편들이 실려 있는데, 대륙적 풍모를 지닌 중국의 웅장하고 장대한 자연물(산수)에서 대우주 자연의 신비한 비경을 통찰하여 생명력을 노래하였다. 이들 여행 시편들의 두 줄기는 관조와 관상생활을 통한 구도(求道)의 의지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비판적 성격을 지닌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다. 열한 번째 시집인 『눈물모순』에 이르러 그간의 여행 시편들에서 얻는 시 창작 방법이나 그 세계가 인도여행을 계기로 하면서 한 권의 기행시집으로 온전히 내용을 채워 묶게 된 듯하다. 그러니까, 이시환 시인은 국내를 비롯하여 남미와 캐나다와 같은 아메리카 대륙과 중국과 남아시아를 여행하고 난 뒤 불국토의 땅인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기행시집을 남겼으며, 제12시집인 『몽산포밤바다』(2013)에 이르러 그의 시업의 정점을 이루었고, 이어 그간의 중요 시들을 엮은『대공』(2013)이 나온 것이다. 물론 제12시집인 『몽산포밤바다』에서도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며 쓴 시편들이 실려 있다. 시인은 국내여행부터 시작하여 해외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각각의 시편들을 제8, 9, 10, 11, 12시집에다 산재시켰으나 열한 번째 시집인 『눈물모순』은 인디아 여행 시의 시편들만 모아서 시집으로 묶어내고 있으며, 심층 여행 에세이도 출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여러 여행지 중에서 인도에서 태어난 시들이 ‘인도기행 시집’이란 이름으로 독립된 시집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는 시인 자신이 인도 여행에서 받는 문화적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가 제8시집 『상선암 가는 길』과 제9시집 『백년완주를 마시며』, 제10시집 『애인여래』에서 보여주었던 발심과 자연물에서의 불성의 발견, ‘애인여래’라 불리우는 대타자와의 일치를 향한 구도적 의지와 귀의는, 불국토인 인디아 여행에서 실제 인디아와의 대면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으로 이국 문화나 생활, 관습에서 오는 이해 부분에서 생긴 정신과 이성의 균열을 보여주거나 인디아 여행의 시공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형상화의 재창조 과정이었던 것이다.
인도여행과 관련된 그의 시에 대해 남긴 글을 『눈물모순』후기에서 읽어 보자.
내가 인디아에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여행을 떠났던 게 언제였던가. 그 때 한 달 가량 머물며,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받았던 문화적 충격은 꽤나 컸었다. 귀국해서도 한동안 일손이 잡히질 않았으니 그 때 충격이 컸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충격 해소 차원에서 심층여행 에세이집이라 하여 『시간의 수레를 타고』를 애써 펴내기도 했다. 그 책이 나온 뒤, 나는 한동안 그 기쁨에 휩싸여 있으면서 ‘이제 그 인디아로부터 자유로워졌구나.’ 싶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 뒤에도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인디아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쓰기 시작한 게 이 글들인데 분명 아무리 보아도 시(詩)가 아닌 듯하고, 시인 듯하기도 하다. 그 증거가 있다면,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왠지 껄끄럽다는 점이다. 두세 편을 빼고는 한 편 한 편의 시가 비교적 길기는 해도 고작 스물네 편뿐인데 읽어내기조차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체념한 채 한동안 그것들을 잊어버리기로 작정했었다.
위 글에서 유추해 보면 시인에게 인도는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땅이었고 그 일환으로 심층여행에세이인 『시간의 수레를 타고』를 먼저 만들어 내고 난 후 그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다시 시를 써서 인도기행 시집인 『눈물모순』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시인이 밝히고 있는 바, 이 24편의 인도 여행 시는 ‘시가 아닌 듯하고 시인 듯’하기도 하다는 자평과 함께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기행산문을 먼저 쓰고 운문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점일 수도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의 이와 같은 자책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 시집은 기행시집임에는 틀림이 없고, 내재율과 외재율을 가진 시임에는 틀림없다. 이 자책은 아마 시를 쓰는 장인으로서의 철저한 자기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인도여행 후의 여파가 기행에세이와 시집으로도 이 충격이나 여파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아’) 다시 지중해연안국 여행을 떠나기 위하여 3개월을 준비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과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을 읽으면서, 두 종교에 관한 궁금증을 40여 편의 초고를 쓰면서 풀어갔다고 한다. 그 와중에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에 관한 문명사도 읽으면서 여행을 준비하여 2009년 아직은 서울이 추운 3월에 떠나 꽃이 피는 무르익은 봄에 7개국 70일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여행 준비 차원으로 읽었던 성경에 관한 초고들을 수정, 보완하고 지중해연안기행에 관한 것들을 정리하면서 인디아 기행원고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2009년 4월은 성경 관련 초고와 인디아 기행원고를 수정, 보완하면서 여행 중에 쓴 일기를 뒤적이며 자료를 정리하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고 시집의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간취되는 시인의 일련의 작업들이 다분히 종교적인 순례의 기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제도적 종교의 신앙인으로서 순수한 종교적 순례와는 다른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문인으로서 자신이 따르는 불교적 진리를 추구하면서 이웃 종교들의 경전 경험을 통해 그 이동성(異同性)을 발견하지만 종국에는 진리가 하나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수행된 순례의 여정이 아니었나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도기행 시편의 창작과 관련하여 첫째, ‘시적 공간’의 중요성을 들어 ‘시인에 의해서 구축된 시적 공간이란 시적 화자가 머무는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적 공간이다. 즉 시인의 정신적 시계(視界)로서 시공’이며 ‘문장으로써 구축되고 형상화 되는 시공(時空)이라고 밝히고 있다. 거기에 대한 예로 시문인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강물은/비로소 망고의 과즙이 되고(인디아 서시)”를 들어서 ‘강물’과 ‘망고’라는 두 대상 간의 관계 내지는 두 대상의 본질을 형상화시킴으로써 진정한 시적 공간을 축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둘째는, ‘속을 감추어 놓는 운문의 긴장이 아니라 그 속을 풀어 헤쳐 놓는 산문으로서 또 다른 긴장상태를 조성해 놓으려는 새로운 시도이다. 시에 관한 일반적 이론인 비유적이고 함축적인 표현으로 의미 전달하는 과정에서 탄력을 유지하는 긴장을 가진 시의 기능으로부터 탈피하여 쉽게 그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는 문장들이 엮어 내놓은, 어떤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구축되는 현실성과 상징성에 시적 진실을 환기시켜 내는 힘을 발견한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디아 기행시들은 이런 의미에서 기존의 시에 관한 고착화된 개념에 대해 반기를 듦으로써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였다. 셋째로, 존재의 본질이나 삶의 모순을 꿰뚫어보는 직관적 판단이 중요한 시구가 되어 그 기둥이 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이시환은 여행에서의 볼거리인 화려한 궁전이나 높다란 성이 백성들의 고혈(膏血)로 지어진 권력자의 욕망을 단적으로 들어내 주는 상징물로 보고 그것을 찬양 찬미하는 감탄의 시가 아니라 “저 푸른 풀잎이 나의 성(城)”이며 “저 돌에 핀 작은 꽃이/나의 궁전”이라고 하여 풍경에 가리어 두 눈과 귀가 멀어지고 비판적 인식과 판단이 부재된 근대의 풍경을 넘어서 그 실체를 꿰뚫어 보고 있다. 이런 점이 이시환의 기행시에서 나타나는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의미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듯이 하는 근대의 풍경과 달리 풍경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풍경의 실체와 본질을 꽤뚫을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의 지평이 어디에 서 있느냐의 문제이다. 즉,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스탠스에 따라 풍경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다.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고 하여도 풍경 너머에 있는 역사성과 거기에 내재된 생명력을 보지 못할 때 풍경은 평가절하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문인들에게 비친 조선의 모습은 왜곡과 평가절하로 얼룩져 있다. 일제강점의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일본인들에게 비친 조선의 풍경은 시간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지만 풍경의 역사는 여전히 굴절되거나 왜곡의 역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풍경에 관한 굴절과 왜곡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이시환 시인이 말하는 대상의 본질을 형상화할 때 극복되어 질 수 있으리라. 풍경의 굴절과 왜곡이 지양되어야 할 이유는 이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풍경을 바라보는 자의 ‘자기 지우기’ 일 것이며, 여기에서 자기 지우기란 편견이나 그릇된 인식의 바탕에서 형성된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즉, 대상에 대한 이해와 대상을 바라보는 자의 스탠스를 통해 우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자가 어디에 서 있으며, 그의 인식이 어떤 맹점을 가지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시환의 「돌 속의 신전-엘로라 ‘카일라시’ 사원을 둘러보고」을 가지고 이 문제를 이야기 하여 보자.
돌은 내게 이야기 하네,
너무 어렵게 말하지 말라고.
돌은 내게 말하네,
그냥 쉽게 말해 버리라고.
돌은 내게 다그치네,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리라고.
폭염에 호박잎이 다 타들어가고
사람들의 마음조차 다 녹아내려도
아니, 폭우에 집안에 기둥뿌리 뽑히고
온갖 것들이 다 쓸려 내려가도
저 단단한 돌 속으로만 들어가면
저 깊은 돌 속으로만 들어가면
세상의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두 다리 뻗고 숨을 돌릴 수 있는
궁전이 있고
신전이 있고
낙원이 있으리라.
그곳은 아주 시원하며
비바람이 몰아치지도 않으며
어떠한 소용돌이에도 휩쓸리지 않고,
그곳은 언제나 아늑하고 고요하며
미움이나 질투조차 없으며
폭력이나 전쟁 또한 없으며
오로지 그곳에서는
신의 심기(心氣)만 읽으면 되고
신(神)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리기만 하면 되리라.
그렇게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그곳에서
명상삼매의 꽃을 피우고
온갖 구차스러움을 다 버린 채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어감으로써 사는
돌 속의 신(神)의 아들딸들이여,
바야흐로 그곳은
시간도 정지하고
시비(是非)도 끊기고,
선악(善惡)도 없는가.
그런 낙원을 꿈꾸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돌 속으로 모여들어
수백 년이란 시간의 육신을 풀어
삭히고
태우면서
그 속에 궁전을 짓고
그 속에 거대한 탑을 세운
신의 자식들이렷다.
그런 너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일지만
네가 구축한 돌 속의 세상을
돌아나올 때에는
이 가슴 두근거림을 부인할 수 없다.
-2008. 07. 02
인도는 국토가 우리나라보다 넓고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나고 자라고 득도한 나라로 오랜 전통의 종교인 브라흐마를 믿는 나라, 힌두교적 전통과 불교적 전통이 깊고도 오래된 나라이다. 우리가 ‘불국토’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지라는 의미에서 그렇게들 부르고 있는 듯하다. 이 나라는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로서 사람과 식물이 한 데 어우러져 살고 있고, 더러운 강가 강의 오염된 듯한 물을 마시며 여기저기 쓰레기 더미와 오물이 사람과 동물 사이에 한 데 어우러져 있는 나라이다. 어쩌면 이런 풍경은 시인의 눈에 아직 덜 문명화되고 덜 도시화된 우리나라의 근대 정도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네들의 꾀죄죄한 얼굴에서 눈빛은 맑고 영롱하며 여유롭기 그지없고 경계의 눈빛을 던지지 않으며 항상 웃는 얼굴로 이방인을 대하고 있다. 또 시간이 천천히 옮겨가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급한 것이 없고 조급하지도 않다. 그러면서 타지마할이나 불교사원 등의 호화롭고 장엄한 문화유산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의 인도를 바라보는 눈을 멀게도 하며 인도인들의 여유와 느림의 생활 태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짐작하게 하기엔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돌 속의 신전-엘로라 ‘카일라시’ 사원을 둘러보고」에는 사원을 이루는 돌을 통하여 인도의 본질에 다가가고 있다.거기에는 현실의 인도의 겉모습을 너머 신의 나라 인도,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신의 자식들일뿐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도가 지니는 풍경을 왜곡도 굴절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그의 인식에 들어온 인도를 독자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 시에서 돌이 여행자, 즉 풍경을 바라보는 자인 ‘나’에게 말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시 속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돌은 사물이고 무생물 주어이지만 활유법을 써서 ‘내게 속삭이네’라고 말한다. 돌의 말을 인도에 관해 시를 쓰는 시인에게 너무 어렵게도 말하지 말고 그냥 쉽게 말해 버리라고 한다. 그도 저도 아니면 차라리 침묵하라고 한다. 4연, 5연과 같은 현실적 고통들이 밀려와도 돌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만 하면 세상 근심 걱정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궁전과 신전, 낙원이 있으리라 추측한다. 그곳에는 비바람과 소용돌이와 같은 생로병사의 고(苦)도 없어 아늑하고 고요하며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기,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 폭력과 전쟁 또한 없다. 그곳에는 오로지 신의 뜻만 읽으면 되고 신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리면 된다. 그곳에는 험한 바깥세상과 차단된 곳이며 명상삼매의 꽃이 피고 온갖 구차스러움을 버린 채로 죽음으로써 사는 돌 속의 신의 아들딸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은 시간도 시비도 선악도 존재하지 않는 낙원이다. 신의 나라 사람들은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어감으로써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인도임을 시인은 이 시에서 인도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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