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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사회 조선시대 녀류시인들
2016년 02월 01일 23시 45분  조회:5497  추천:0  작성자: 죽림

유교 사회가 철저했던 조선시대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몸으로 치열하게 살아낸 5명의
시인 황진이, 허난설헌, 이옥봉, 이매창, 김운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황진이

 

정이란 그 대상이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욱 그리워지는 법이다. 떠나려는 임을 만류할 수도 있었건만, 떠나게 두어 두고는 그리워서 애달파하는 심정을 <자탄-그 이유-자탄의 심화>라는 구조를 보이면서 넋두리하듯 읊었다. 명기 황진이의 자존심과 연정의 사이에서 겪는 오묘한 심리적 갈등이 고운 우리말의 절묘한 구사를 통해서 섬세하고 곡진하게 표현되었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다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난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아, 내가 한 일이여! 이렇게 그리워 할 줄을 몰랐단 말인가

있으라고 말씀드리면 임께서 굳이 가셨겠는가

보내놓고 나서 그리워하는 정은 나도 모르겠구나

 

아, 내가 한 짓을 좀 보아라, 이게 무슨 꼴이람. 막상 보내 놓고 나면 이렇게 더욱 그리워질 줄을 미처 몰랐단 말이냐. 제발 나를 버리고 가지 말고, 있으라고 만류하였던들 이렇게 뿌리치고 가 버리지는 않았을 것을. 하필, 말리지 못하고 보내놓고 나서 더욱 그리워하는 이 심정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당혹해서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행동을 하기가 일쑤인 것이 사랑의 생리임을, 사랑을 해 본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초장과 중장은 임을 보낸 후의 후회를 나타내고 있으며, 종장에서는 떠나보낸 후에 더욱 간절해지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체념조로 가라앉히고 있다.

 

문두에 등장하는 '아'라는 말은 이별을 하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던 그리움을 깨닫게 되었다는 표현과 더불어 생생하게 표현한 신선한 감각이 느껴진다. 특히 이 시조의 표현상의 절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제 구태여'의 행간 걸림이다. '제 구태여'는 앞뒤에 걸리는 말로서 앞에 걸려서는 '자기(임)가 구태여 가랴마는'의 도치형을 만들고, 뒤에 걸려서는 '자기가 구태여 보내고'라는 뜻을 가져 황진이 자기 자신을 일컫고 있다. 이 시는 고려 속요인 '가시리', '서경별곡'과 현대의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매개하는 이별시의 절조라 하겠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1506~1544 재위)때의 기생, 시조시인으로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다정다감하면서 기예에 두루 뛰어난 명기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하여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임 오신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가운데를 둘로 나누어서

따뜻한 이불아래에 서리서리 간직해 두었다가

정든 임이 오시는 날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기녀 시조의 본격화를 이루었고, 시조 문학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황진이의 절창 중의 하나이다. 임이 오시지 않는 동짓달의 기나긴 밤을 외로이 홀로 지내는 여인의 마음이, 임이 오시는 짧은 봄밤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동짓달의 기나긴 밤을 보관해 두자는 기발한 착상을 하기에 이른다. 또한 중장과 종장에서는 '서리서리', '구뷔구뷔'와 같은 의태어를 사용하여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을 매우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가 있었다. 혼자임을 기다리며 지내야 하는 긴 겨울밤과 낮이 길어 임과 함께 하는 밤이 짧은 봄이 서로 대조가 되어, 임과 오래 있고 싶은 화자의 심정이 잘 묘사되어 나타난다. 문학성을 띤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예술적 향취를 풍기는 작품으로, 기교적이면서도 애틋한 정념이 잘 나타나 있다.

 

주로 사랑에 얽힌 내용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춤으로써 관습화되어 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청산은 내 뜻'이라고 역설적인 자기 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를 벽계수에 견주어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황진이의 시조에 이르러서야 기녀 시조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시조문학이 높은 수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황진이의 작품으로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 가량의 한글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영반월 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 6수의 한시를 남겼다. 황진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시조 분야에 있어 일인자라 할 수 있다. 

 

 

난초같이 살다간 시인, 허난설헌

 

아래 시는 '나의 느낌'이라는 뜻의 <感遇(감우)> 연작시 가운데 첫 작품인 “난초를 바라보며”이다. 빼어난 그 자태는 시들어 파리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 난초의 모습에서 자신을 본 것이다. 눈물로 옷소매를 적시며 자신의 현실을 어찌하지 못했던 그녀가 너무나 측은하다.

 

창가에 난초 어여쁘게 피어나

잎과 줄기 어찌나 향기롭던지

하지만 서녘바람이 한 번 스쳐 흩날리자

슬프게도 가을 서릿발에 다 시들고 마네

빼어난 그 자태는 시들어 파리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사라지지 않으리니

그 모습 바라보다 내 마음이 쓰라려

눈물이 뚝뚝 떨어져 옷소매를 적시네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초희이며 호는 난설헌이다. 성리학 이념에 고착되지 않고 열린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아들 허성, 허봉, 허균과 같이 딸인 그녀에게도 똑 같은 교육기회를 주었다. 그녀는 8세의 나이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한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허난설헌은 이 시를 통해 현실의 어린이의 한계와 여성의 굴레를 모두 벗어버리고 가상의 신선세계에서 주인공이 되는 자신을 과감히 표현하여 신동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조선시대 규중의 유일한 여류 시인으로 성장한 그녀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을 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뛰어난 오빠와 남동생을 보고 자란 그녀에게 남편은 너무도 평범한 인물이었으며 시어머니조차 며느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객사를 하게 되고, 두 명의 아이마저 잃었다.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한 남편, 몰락하는 친정, 여기에 정신적 지주였던 오빠 허봉마저 객사하자 허난설헌은 점점 쇠약해져 갔고 그녀의 나이 26세 때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시 ‘몽유광산산’을 지었다. 27세가 되던 날 아무런 연유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오늘은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허난설헌은 한국문학사 위에 불꽃같은 존재이다. 여성에게는 이름도 허락하지 않던 시대에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호와 자까지도 만들어 가졌다. '초희'와 '경번'은 난설헌 자신이 현실 세계에 대해 아직 충만한 기대를 가졌던 시기에 만든 이름과 자이다. 그녀의 청춘은 꿈과 희망이 있었다. 현실은 여성에게 꿈과 미래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그래서 자신의 희망과 미래를 담아 이름을 만들어 가졌다. 그녀의 이름과 자는 그녀가 소망했던 자유와 이상을 향한 자신의 인생가치를 담고 있으며, 짧았던 인생에서 반짝였던 청춘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삶의 좌표요, 상징이었다. 또한 여성에게는 창작의 권리가 없던 시대에 그녀는 시를 지었으며, 여성 최초의 단독 전문시집인 『난설헌집』을 갖고 있다.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지만 동생 허균이 누이의 작품이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가 친정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다.  후에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시를 보여주어 중국에서〈난설헌집〉이 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인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해 일본 열도에서도 애송돼 격찬을 받았고,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삶은 오늘날 다시 회자되고 있다. 그녀의 시는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신선시와 삶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으로 대별된다. 비록 그녀의 삶은 짧았지만 향기를 담은 그녀의 아름다운 시는 후세에도 끝없이 읽혀질 것이다

 

 

온몸을 시로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요즘 누가 사랑에 목을 매겠나. 뜨거웠던 사랑도 식을 때는 야속할 만큼 빠르다. 두 번 다시 시를 짓지 않겠다던 맹세를 깨고 한순간의 방심으로 산지기의 아내에게 시를 지어준 옥봉은 운강에게 버림받는다. 거리로 내쫓긴 옥봉은 중국행 선박에서 바다에 몸을 던지지만 그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었던 것이다. 온몸을 시를 쓴 한지로 염을 하듯 둘둘 감은 채 떠오른 옥봉의 시신. 한 중국인이 시신을 거두고 시를 수습해 한 권의 시집을 발간했으니 아래 “홀로 읊노니”를 포함한 32편의 <옥봉 시집>이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나요

사창에 달이 뜨니 한만 서려요

꿈 속에 오고간 길 흔적이 난다면

그대 문 앞 돌길은 모래가 되겠네요

 

그 꿈길에 흔적이 남는다면 남자 집 문 앞의 돌길이 모래가 되었을 거라는, 이토록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쓴 여인은 누구일까? 이옥봉(李玉峯: 1560?~?)은 16세기 후반 선조대왕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충북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글과 시를 배웠으며 영특하고 명민하여 그녀가 지은 시는 부친을 놀라게 하였다. 성년이 되어서 조원(趙瑗: 1544년∼1595년)이라는 선비를 흠모해 그의 첩을 자청했는데, 조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 내리는 일이라며 다시는 시를 쓰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옥봉은 10여 년의 세월 동안 시혼을 억누르고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도둑 누명을 쓴 남편을 도와달라는 사정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녀는 10여 년 만에 단 한번 파주목사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지어 이들 부부를 도왔다.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참빗에 바를 물로 기름 삼아 쓰옵니다/ 첩의 신세가 직녀가 아닐진대/ 어찌 낭군께서 견우가 되리까” 이렇게 그녀가 써준 시 한편이 관가의 사법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필화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조원의 화를 사게 되어 결국 친정으로 내쳐지고 말았다.

 

닷새 길 고개 넘어, 사흘 걸어 영월에 오니(五日長關三日越)

단종의 애가소리 노릉 위 구름을 끊어놓네(哀歌唱斷魯陵雲)

첩의 몸도 왕손의 딸(妾身亦是王孫女)

이곳 두견의 울음은 차마 듣지 못할레라(此地鵑聲不忍聞)

 

허균은 “성수시화”에서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 투명하고 장대함)하여 지분(脂粉: 기생이 화장하고 교태를 부리듯 말을 꾸며내는 모양)의 태(態)가 없다. 특히 두견새는 단종의 넋을 싣고 단종의 시를 읊듯 울어대니, 단종의 무덤 위 구름은 창자가 끊어지듯 갈라진다고 표현한 애가창단노릉운(哀歌唱斷魯陵雲)은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해도 그 맛을 살릴 수가 없다. 기가 막힌 표현이다. 이런 표현은 마음이 청장할 때 천기와 만나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 구절! 경대 앞에서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입술을 칠하는 말의 수식적 기교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썼다.

 

이밤, 우리 이별 너무 아쉬워

달은 멀리 저 물결 속으로 지고

묻고 싶어요, 이 밤 어디서 주무시는지

구름 속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소리에 잠 못 이루시리

 

그녀는 어떻게든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지만 돌릴 수 없었던 옥봉은 자신의 외로움과 허망함을 시로 읊으며 밤마다 꿈속에서 그리워하다 세상을 떴다. 그녀가 죽은 지 40년쯤 뒤,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원로대신의 질문에 부친이라고 대답하니,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보여주었는데「이옥봉 시집」이라 씌어 있었다. 아버지의 첩으로 생사를 모른 지 벌써 40여 년이 된 옥봉의 시집이 어찌하여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는지 조희일로선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 시문을 온 몸에 말고 강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 명나라에까지 시명이 알려진 여류시인으로서 여인의 시답지 않게 맑고 씩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과 조선에서 펴낸 시선집에는 허난설헌의 시와 그녀의 시가 나란히 실려 있다.

 

 

탁월한 비유와 상상력을 지신 시인, 이매창

 

이매창이 첫사랑 유희경을 그리며 쓴 유명한 한글시조 '이화우 흩날릴 제'다. 조선 선조 때의 기생이며 여류시인인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은 1573년에 당시 부안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본명도 가지고 있으나 매화의 절개를 사랑해 매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녀는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당대의 여인이었지만 만 37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시인 신석정은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의 '송도삼절'에 견주어 이매창과 유희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이라 칭했다. 당시 한시와 시조 가무 등에 다재다능한 매창의 소문은 전국에 알려졌고 같은 천민 출신으로 시재(詩材)에 출중한 유희경이 매창을 찾으면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동병상련이랄까. 스무 살 꽃다운 매창과 스물여덟이나 더 많은 유희경은 첫 눈에 반해 시(詩)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노래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면천을 받아 양반으로 신분상승과 함께 관직에 나가 종2품 가의대부까지 승승장구했다.

 

취하신 임 사정없이 날 끌어당겨 (醉客執羅衫)

끝내는 비단저고리 찢어놓았지 (羅衫隨手裂)

비단저고리 아까워 그러는 게 아니어요 (不惜一羅衫)

임이 주신 정마저 찢어질까 두려워요 (但恐恩情絶)

 

그런 유희경에 대한 소식을 접한 매창은 마음의 거리가 갈수록 더 멀어짐을 느끼면서 사무치는 그리움과 회한을 시로 승화시켰다. 15년의 긴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유희경은 열흘간의 짧은 재회를 뒤로하고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한 남자와의 만남을 잊지 못하고 10년 동안 유희경을 그리워한 매창의 시는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속되거나 평범하지 않으며 탁월한 비유를 통해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수백 수의 한시를 쓴 매창은 조선 최고의 한시(漢詩) 작가였다. 현재 남아있는 58수를 보면 매창이 얼마나 다양한 의식지향을 보여주었는지 알 수 있다.

 

그녀가 죽은 후 몇 년 뒤에 그의 수백 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1668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그녀는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매창의 작품은 500여편이 넘는다고 전하지만 현재까지 한시 70여 수와 시조 1수가 전해지고 있다.

 

 

내유의 세계를 지향한 시인, 김운초

 

김운초(1812~1861?)는 조선시대 기생·여류시인이다. 본명은 부용(芙蓉)이고 호는 운초(雲楚)이다. 조선 순조12년(1812) 평안도 성천(成川)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퇴기의 양녀가 되었다. 조선의 3대 명기(송도 황진이, 부안 이매창, 성천 김부용)중 한 사람으로 뛰어난 미모와 우아한 자태, 그리고 가무와 시문에 뛰어났다. 당대 권세가였던 김이양(金履陽)의 인정을 받아 종유하다가 1831년(순조 31)에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김이양의 소실이 되면서 신분적 변화를 가져왔고, 이에 따르는 다양한 삶을 체험한 독특한 시인의 한 사람이다.

 

운초와 김이양의 운명적인 만남은 순조31년(1831)에 일어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평양감사를 역임하고 있던 김이양의 나이 77세, 운초의 나이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하던 운초는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라며 김이양을 따랐다고 한다. 김이양이 호조판서로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자,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애절한 시를 썼다. 운초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조선 시문학에 혁기적인 삼각형 층시(層詩)를 남긴다. 그 유명한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다.

 

이별 하오니 (別)

그립습니다. (思)

길이 멀고 (路遠)

글월은 더디옵니다. (信遲)

생각은 님께 있으나 (念在彼)

몸은 이곳에 머뭅니다 (信留玆).

 

김이양의 나이 92세가 되던 해 김이양은 운초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는데, 그녀의 나이 33세였다. 운초는 그 후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고인의 명복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임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그와의 추억을 더듬이며 상사에 가까운 “곡연천노야(哭淵泉老爺)”라는 그리움의 시를 짓는다. 풍류기개는 호수와 산을 아우르고, 경륜과 문장은 재상의 재목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김이양을 그녀의 나이 열아홉에 만나, 서른셋에 떠나보냈으니 15년 쌓인 정이었다.

 

풍류의 기개는 호산(湖山)의 주인이요

경술(經術)과 문장은 재상의 기틀이다.

십오 년 정든 임은 오늘의 눈물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어이 주려나

 

운초는 19세기 전반기에 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는데, 민병도가 편찬한 <역대여류시선집>에 한시 240제 329수가 실려 있다. 운초는 그 시재(詩才)가 천부적이라는 평을 들으며 황진이•이매창과 함께 삼대시기(三大時妓)로 꼽히기도 하고,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여성한문학사의 발흥기와 난숙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 받을 만큼 인정받는 시인이었다. 이러한 운초의 시명은 고향인 성천 서도로부터 출발하여 한양에까지 드날렸다. 또한 운초는 동료 소실들과 함께 ‘삼호정 시사’를 결성하고 시회를 열었으며, 이 때문에 운초는 연구자들에게 의해 최초의 여성문단인으로 평가된다. 운초는 반상의 구별이 매우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존재하던 매력적인 기생이었으며, 당돌하고 호기가 있는 시정(詩情)을 표출하는 감성의 시인이었다. 조선의 여류시인들이 연약과 병적 애상의 시를 표했다면, 운초는 여장부 같은 시정을 읊었다. 그녀의 문집은 운초시(雲楚詩; 일명 芙蓉集)에는 약 150여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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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 [詩作初心] - 詩는 노력가의 결과물 2016-03-25 0 4189
1260 [따뜻한 봄날 아침 따끈한 시 한잔] - 숲 2016-03-24 0 4269
1259 [詩공부시간]- 詩창작의 비법은 없다 2016-03-24 0 4864
1258 [신선한 詩 한잔 드이소잉]- 토르소 2016-03-23 0 4032
1257 [詩作初心]- 은유는 천재의 상징 2016-03-23 0 4799
1256 누에가 고치짓지 않으면 누에는 죽는다... 2016-03-23 0 4558
1255 한국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詩계렬 2016-03-22 0 5567
1254 ... 2016-03-22 0 4192
1253 ... 2016-03-22 0 4547
1252 ... 2016-03-22 0 4625
1251 ... 2016-03-22 0 4308
1250 ... 2016-03-22 0 4296
1249 [문학의 뿌리 알아보기]- 인도 문학 2016-03-22 0 4825
1248 [문학의 뿌리 알아보기]- 일본 / 몽고 문학 2016-03-22 0 5087
1247 [복습해보는 詩공부]- 시속의 은유 2016-03-22 0 4220
1246 [춘분절기와 詩]- 봄나물 다량 입하라기에 2016-03-21 0 4052
1245 [이 아침 신선한 詩 한잔 드시소잉]- 장춘(長春)- 긴 봄 2016-03-21 0 4358
1244 [월요일 아침 詩] - 물결 표시 2016-03-21 0 4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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