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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곧 시인의 재산
2016년 02월 03일 23시 42분  조회:3590  추천:0  작성자: 죽림

나는 이렇게 쓴다:ㅡ

풍경 만들기의 방법과 의미 



                            /이은봉 



1. 여는 말 

제대로 된 시인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시와 관련하여 저 나름의 표현방법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특별히 스타일리스트나 기교파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작의 시인이라면 시의 표현방법에 대한 자기 나름의 運算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는 내가 응용하고 있는 아주 초보적인 표현방법 몇 가지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려고 한다. 언젠가는 시적 대상을 인식하고 응용하는 나 나름의 기법적 탐구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좀더 큰 글자리가 만들어지기를 빈다. 

시인에게는 풍경이 곧 재산이라는 말이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시를 '풍경 만들기'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때의 풍경은 단지 하나의 서정적 컷일 수도 있고, 서사적 동영상일 수도 있고, 이미지들이 마구 혼재되어 있는 무의식적 장면일 수도 있다. 그렇다. 풍경이 만드는 화폭의 질감은 그것이 담아내는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일단 따뜻하고 정겨운, 다시 말해 溫柔敦厚한 아우라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란다. 

이 때의 풍경이 반드시 선명하고 명징한 구상일 필요는 없다.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추상이나 관념일 필요도 없지만 구태여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형상을 만들 까닭도 없다. 실제로는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적절히 조절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작품이 선택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단정적으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풍경들은 당연히 그 자체로 우리 시대의 제반 문제들을 상징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사이든 세계사이든 움직이는 보편적인 역사와 무관한, 오늘 이곳의 삶과 무관한 풍경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풍경의 선택은 세계관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해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 그려내는 것이 시에서의 풍경이다. 

그러나 내가 쓴 시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말 그대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시에 함유되어 있는 풍경이 선택된 풍경 자체를 객관적으로 묘사해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손을 떠난 시가 담아내고 있는 풍경은 그 동안의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내가 만들어낸, 창조해낸 것일 따름이다. 내 시에 포유되어 있는 풍경은 있는 것을 그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자의로 창조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때의 창조가 경험이나 체험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창조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은 경험을 재조립하는 과정에 태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적으로 진전된 실감을 획득하기 위해 풍경의 대상을 섬세한 사실화로 그려내기도 하고 몽롱한 半抽象畵로 그려내기도 한다. 이는 당연히 시의 소재와 주제가 지니고 있는 특징에 따라 그때 그때의 상황과 연관되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각설하고, 표현방법과 관련한 풍경 만들기의 내포를 좀더 구체적으로 진전시켜 보기로 하자. 단일한 체험을 곧바로 하나의 풍경으로 만드는 적은 별로 없다. 두 개 이상의 경험이 만드는 장면을 중첩시켜 재구성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2. 체험의 중첩화 

1) 장면 모으기 

일단은 각각의 체험에서 비롯된 중첩되는 장면을 단일한 풍경으로 재구성하여 묘사하는 방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두 개 이상의 장면을 하나의 장면으로 통일시켜 독립된 풍경을 만드는 기법을 가리킨다. 시인으로서 세계에 대한 나의 사유를 肉化하기 위해 다양한 체험으로부터 기인하는 여러 장면들을 재구성해 새로운 하나의 풍경으로 재창조해 내려는 것인 셈이다. 

구체적으로 졸시 [사이, 소리]를 예로 들어보자. 어린 시절 고향집 뒤란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감나무가 있었고, 대숲이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서 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 대숲은 6·25 직후 입대를 했던 아버지가 군생활을 견디지 못해 잠시 탈영해 숨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아버지는 나중에 재입대하여 군생활을 마친다. 내 뇌리 속에는 언제나 이러한 고향집 뒤란의 풍경이 박혀 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오랜 친구인 이영진 시인이 잠시 전남 화순의 어느 시골마을로 내려와 산 적이 있다. 소설을 쓰는 김훈 씨가 거주하며 {칼의 노래}를 쓴 곳이기도 하다. 이영진 시인이 거주하던 화순의 이 시골집에 방문했을 때 나는 감전이 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집의 풍경이 순식간에 나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했기 때문이다. 이 집은 동신대학교 미술과의 김경주 교수가 화실로 사용하던 곳이기도 하다. 

고향집과 이 집의 풍경을 바탕으로 이곳저곳에서 경험한 풍경을 재조립해서 단일한 풍경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래의 시이다. 

뒤란 대나무 숲 울타리 
뭉게구름 잠시 멈춰 선 자리 

장독들 옴죽옴죽 비켜선 사이 
푸드득, 숨죽이는 바람 소리 

낯부끄러운 홍시들 
얼싸안고 뺨 비비는 소리 

오조조, 보조개 피우는 사이 
포르르, 날아가는 박새 한 마리 

흙바닥 위 호두알만한 그림자 
또로록, 떨어져 내리는 사이 

제 울음 하얗게 되씹는 소리 
뭉게구름 우줄우줄 걸어 내려오는 자리 

마른 감나무 잎사귀 
아하, 저 혼자 팔랑거리는 소리. 
―{사이, 소리} 전문 

이 시에는 별다른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무의미의 순수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를 쓰게 된 데는 지난 1980년대 시들이 지나고 있던 무거운 역사의식, 다시 말해 시에 대한 그 무렵의 획일적 시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작용을 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이 이 시를 쓰던 무렵의 나이다. 당시에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를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서정시인이다. 그렇다면 순수서정만으로 이루어진 시도 써야 하지 않을까. 정신의 깊이가 살아 있는 순수서정시 만큼 생명력이 긴 것도 없다. 그 즈음 나는 늘 이러한 생각에 쫓겨다녔다. 

어쩌다 보니 서정시 자체가 너무도 귀한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근래에 들어 부쩍 강화된 현상이기는 하지만 순수 서정시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또한 내게는 바람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이 시대를 가리켜 잡종의 시대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잡종이야말로 신생이 이루어지는 첩경이다. 하지만 순수 토종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이가 들다 보니 이러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는 지금 10여 년 가까이 광주에, 이른바 빛고을에 살고 있다. 빛고을은 말 그대로 햇빛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이 고장의 햇빛은 무수한 아우라를 동반하고 있어 특히 주목이 된다. 나는 시를 통해 빛고을의 햇빛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연 일반이 지니고 있는 소리며 파동, 색이며 질감(결)까지 시로 살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2) 장면 뒤섞기 

시에 수용되는 중첩되는 장면을 해체하여 반드시 단일한 풍경으로 재조립할 필요는 없다. 중첩되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중첩시켜 표현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면들을 오버랩시켜 드러내 보이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영화의 기법을 시창작의 기법으로 응용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시는 일종의 언어그림이다. 시를 그림과 비교해 논의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너무 사실적인 그림, 즉 구상화는 금방 싫증을 느끼기 마련이다. 약간의 추상이 가미된 그림, 다시 말해 半抽象의 그림이 두고두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재미를 주는 경우가 많다. 시라고 해도 이는 다를 바 없다. 서너 개의 풍경을 덧씌워 창작한 시의 경우 오히려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은 재미와 호기심을 줄 수도 있다.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나는 시에 여러 풍경을 중첩시켜 환상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을 선호한다. 약간의 비현실적인, 비의적인 분위기를 담아내려고 하는 것인데, 당연히 이 때의 중첩된 풍경은 중첩된 의미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현대시의 모호성은 현대사회의 불확정성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시어 자체의 특수성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시인이 지니고 있는 인식능력의 무능성을 반영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아래의 예는 이러한 생각에서 시의 풍경을 단일하게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풍경을 오버랩시켜 표현해본 작품이다. 

허겁지겁 몇 숟가락 점심 떠먹고 마악, 일터로 돌아오는 길, 환하게 거리를 메우는 것들, 배꼽티를 입고 날렵하게 여기저기 다리 쭈욱 뻗는 것들, 백양나무 하얀 우듬지들, 그것들 아랫도리 후둘후들 흔드는 것들 

석간을 사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고 서 있는데 
정신들이 없군 우르르 흩어 퍼지는 
아흐, 치자꽃 향기라니! 

흠흠 말 더듬으며 돌아보니 원시의 숲들, 신비를 만들며 솟구쳐 오르는 생령덩어리들, 그렇지 풀무질로 커 오르던 고향 마을 유년의 에너지들, 시원도 하지 킁킁, 코 훌쩍이며 몇 숟가락 점심 떠먹고 마악, 일터로 돌아오는 길 

석간을 사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고 서 있는데 
정신들이 없군 우르르 뿜어져 나오는 
하여튼 저 젊어터진 향기라니! 
―{아흐, 치자꽃 향기라니!} 전문 

이 시를 가리켜 의미를 갖지 않는 순수 서정시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시의 풍경이 내포하고 있는 정서와 이미지는 공히 그 나름의 의미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시의 중첩되는 장면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 생명력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잘 형상화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초봄에 엿볼 수 있는 자연의 활기와, 막 대학에 입학한 젊은이들의 활기는 본원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 시에서 나는 바로 이러한 점, 즉 인간과 자연이 지니고 있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신생하는 것들은 늘 아름답다. 

이 시에는 몇 가지 장면이 혼재되어 있다. 당연히 이들 장면은 시인인 나의 체험에서 기인한다. 전체적인 계절의 배경은 초봄이다. a)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가판대에서 석간을 사고 있는 시인, b) 가로수로 서 있는 한참 물이 오르는 백양나무 가지들, c)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대생들, c) 시인인 내가 통과해온 젊은 시절의 몇몇 체험, 이 네 가지 것들이 이 시에 혼재되어 있는 이미지 혹은 영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이 뒤섞여 약간은 추상적인 풍경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이 시인 셈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공간적 배경은 서울 어디쯤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초봄의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에 대한 어떤 감흥(영감)을 실제로 느꼈던 것은 우리 대학의 정문 앞에서다. 물론 점심식사를 하고 연구실로 돌아오면서다. 현재의 구체적인 체험과 관련된 장면을 과거의 경험과 관련된 가상적인 장면에 떼다 붙이며 새로운 반추상의 풍경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3) 장면 겹치기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시 역시 하나의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험에서 비롯되는 장면들을 표나지 않게 짜깁기해내는 것이, 그렇게 사기를 치는 것이 시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시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模寫해내는 것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새로운 풍경을 창조해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풍경 만들기를 진실이 아니라 허구라고 낯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가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원래 리얼리스트들이 그려내는 삶의 풍경은 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도에 맞게 재구성한 것, 말하자면 새롭게 허구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리얼리스트의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다름 아닌 그렇기 때문에 예술을 가리켜, 시를 가리켜 창조라고 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풍경과, 풍경의 안에 자리잡고 있는 풍경을 다르게 그려내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겉으로는 단일한 풍경처럼 보이도록 하면서도 속으로는 두 개 이상의 장면(체험)을 숨겨 두는 방법이 그것이다. 전경화되어 있는 풍경과 후경화되어 있는 풍경이 서로 다르게 시를 구성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때 후경화되어 있는 풍경은 전경화되어 있는 풍경과는 달리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양동작전이고, 위장전술인 셈이다. 

실제로는 이러한 방법으로 시를 쓰기가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풍경과는 달리 속으로 감추어져 있는 풍경을 통해 시인이 역사, 사회적 진실 전반을 종합적으로 압축해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시는 시인이 그 나름의 세계관을 지니고 각각의 풍경이 함유하고 있는 문명사적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내고 비판해낼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 시인 자신이 랭보가 말하는 見者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럴 때 비로소 풍경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가슴으로 모시고 다니는 집, 전쟁통에 허겁지겁 정신 없이 지은 집, 너무 낡았네 

걸핏하면 굴뚝 밑 무너지는 집, 함부로 방고래 막히는 집 아궁이 가득 불덩이 처먹고도 방구들 뜨뜻하질 않네 

사람들 아랫목 이불 속 손 넣어보곤 아이, 차가워라 마음까지 얼어붙곤 하네 

청솔가지 타는 냄새 매캐한 집, 도둑고양이들 우르르 몰려다니는 집, 고방 밑까지 우수수 무너지고 있네 

전쟁통에 지은 집, 다들 그러하네 이 집 수리하느라고 병원엘 다니는 내게, 현일 스님은 그만 다 버리라고 하네 

……버리면 어쩌지 이 낡은 집, 그래도 그 동안 나를 키워준 집. 
―{낡은 집} 전문 

이 시에서 집은 일단 말 그대로의 집, 곧 주거공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냥 집으로, 주거공간으로 읽어도 충분히 일정한 시적 형상, 즉 시적 풍경을 펼쳐 보여준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일단 낡은 집으로 읽히도록 장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며 키를 열고 들어가면 이 시에서의 집이 이내 시인의 시원찮은 몸, 아픈 육체를 가리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가 내포하는 의미망은 그 뿐만이 아니다. 눈을 밝혀 읽으면 여기서의 집은 시인의 몸뿐만 아니라 시인의 계집, 즉 시인의 아내의 아픈 몸을 가리키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도 읽힐 수 있도록 몇몇 심미적 장치를 숨겨 두려고 했다. 시인이든 시인의 아내든 나로서는 집을 몸으로 읽었을 경우 신통치 않은 몸을 지켜내기 위해 시인이 이런저런 애를 쓰는 풍경이 떠오르도록 몇몇 징후들을 장치해 두려 했던 것이다. "이 집 수리하느라고 병원엘 다니는 내게" 등이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에도 나는 이 몸이 역사적 산물임을, 6·25 전쟁의 산물임을 암시하려고 했다. 전쟁통에 대를 잇기 위해 우발적으로 만들어진 몸, 곧 "전쟁통에 허겁지겁 정신없이 지은 집", 즉 그렇게 해서 태어난 몸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는 뜻이다. 요컨대 겉으로는 단일한 풍경처럼 보이도록 했지만 속으로는 두개 이상의 풍경(체험)을 중첩시키려 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법적 자각이 방법적 자각 자체만으로 머무는 것은 아니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역설적 정의를 떠나서라도 나로서는 이러한 방법적 고려를 통해 우리 시의 내포를 확장시키기 위해 많은 애를 써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역사적 전망과 함께 하는 시대가 만드는 양심에 충실하려는 의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3. 닫는 말 

평소에 나는 기법에 대한 자각이 없는 단지 내용 위주의 시인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온 바 있다. 한국의 現代詩史에서도 자기 형식이 없이 힘만으로 밀어붙여 시를 써온 시인들을 수용하는 데는 매우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들이 생산한 시의 경우 예술 이전의 줄글의 차원에서 멈춰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우리 시단에서 따끈따끈하게 생산되고 있는 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문예지가 쏟아져 나오고 수많은 시가 씌어지고 있지만 세월의 긴 여과를 거치고도 살아남을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우발적 영감만으로 시가 탄탄한 심미적 형식으로 영그는 것은 아니다. 

새삼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기법에 대한 자각은 곧바로 예술적 심미의식에 대한 자각과 통한다. 뿐만 아니라 기법의 계발은 곧바로 내용의 계발을 낳는다. 기법에 대한 고민이 없는 시인이 제대로 된 시인의 반열에 들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심미적 형식의 하나인 기법에 대한 자각은 비평가들에 의해 조명을 받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평가들의 경우 언어들이 이루는 맛이며 멋과 관련하여 머리에서 쥐가 나도록 몰두하는 시인들의 심미적 고뇌를 제대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이 집착하는 것은 시의 언어들이 이루는 형식이기보다는 내용이기 쉽다는 뜻이다. 

시가 풍경 만들기라는 것은 시가 이미지 만들기라는 것을 가리킨다. 묘사적인 것이든 비유적인 것이든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라고 주장하기가 힘들다. 장면의 중첩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풍경들을 바탕으로 하는 시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여 문화적 재부로 축적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때의 문화적 재부는 이론의 말할 것도 없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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