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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행詩 쓰기
2016년 02월 06일 04시 20분  조회:4050  추천:0  작성자: 죽림

현대시에 나타난 ‘외국 여행’

이승하



1. 외국 여행과 우리 시


여행 체험은 시인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한다. 낯선 곳에 갔는데 문학적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고, 그것을 시로 쓰지 않으면 병이 된다.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 낯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이색적인 풍경을 보고, 색다른 체험을 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현대문학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전국 방방곡곡, 문학인의 펜이 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1950~70년대까지는 해외의 자연 풍광이 우리 시문학의 공간이 된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광복 이후부터 1981년 8월 1일 해외여행자유화조치가 이루어지기 이전까지는 외국 여행을 해본 시인이 많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이국의 풍광과 풍물이, 주거지와 유적지가, 인물과 인심이 시에 그려진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외국 여행을 자유롭게 하게 되고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된 80년대부터 우리 시문학에 있어 달라진 현상이 바로 외국 여행의 결과물로 시가 씌어지게 된 것이다.

지구본을 놓고 보면 대한민국은 참으로 작은 나라다. 하지만 대륙에 붙어 있고 삼면이 바다라는 지정학적 특성은 자고이래 우리 민족의 시야를 광활한 만주 벌판과 수평선 저 너머에 두게 하였다. 우리 고전문학을 살펴보아도 이국으로의 여행이 작품 창작의 모티브가 된 예가 드물지 않았다. 신라시대 때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승려 혜초는 『往五天竺國傳』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는데, 그 양피지 책자에 나타나 있는 여행의 경로는 인도 전역과 서역과 중국 서북부에 걸친 엄청난 거리였다. 『往五天竺國傳』의 가치가 기행문에서 끝나지 않았음은 거기에 실려 있는 자작시 5편을 통해 알 수 있다.

여행의 산물은 아니었지만 헌강왕 5년(879) 작품인 「討黃巢檄文」은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당시 황소의 난을 평정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쓴 격문으로서 당나라 사람들로부터 큰 평가를 받았다. 조선조 영조 40년(1764)에 나온 「日東壯遊歌」는 김인겸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정사(正使) 조엄의 서장관으로 따라가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쓴 장편 기행가사이다. 고종 3년(1866)에 나온 「燕行歌」는 홍순학이 청나라에 가는 사신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다녀온 뒤에 쓴 기행가사이다. 시가 아닌 산문 기행문학은 숙종 39년(1713)에 김창업이 지은 「燕行日記」와 정조 22년(1798)에 서유문이 지은 「戊午燕行錄」이 있다. 이들 작품은 한글로 씌어진 데 반해 기행문학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박지원의 「熱河日記」는 한문으로 씌어져 아쉬운 바도 있지만 그 문학적 가치는 앞의 작품들을 단연 압도한다.

외국 여행의 결과가 문학 작품이 되는 전통은 개화기에 나온 창가 「세계일주가」로 이어지고, 일제 강점기 때의 시작품 가운데에도 작품의 무대가 이국인 것은 적지 않다. 이육사의 「절정」과 「꽃」,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故鄕」「北關」 등은 북방(북만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정지용의 「카페 프란스」, 안용만의 「강동의 봄」, 임화의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등은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체 편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나라도 중국과 일본에 치우쳐 있다. 그나마 이러한 전통은 해방 이후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만다. 그러다 해외여행자유화조치 이후 다시 외국 여행이 봇물처럼 이루어짐에 따라 그 경험이 수많은 시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2.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외국 여행의 목적은 대개의 경우 관광 내지는 답사이다. 그밖에 연구를 위한 여행일 수도 있고,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느낀 점을 시에 담을 수도 있다. 시인의 외국 여행 체험 가운데 한민족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을 우선 살펴보도록 한다.


내가 누구냐고 자문하는 것은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로프스크쯤에서는
질문이 아닌지 모른다, 내가 누군지
알려고 부질없이 애쓰지 않아도 이곳에서의 삶은
저렇게 바닥이 드러나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길로 저물 뿐, 끝간 데 없는
지평을 바라보거나 하루 종일
말이 없다, 시장 귀퉁이에
몇 봉지 김치를 내놓은 저 동포 아낙네도!
동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누구에게도
말 건넬 필요가 없다, 일찍이
이곳이 하바로프스크의 지하 감옥이라도!
조명희는 소비에트 비밀경찰에게 고문당하면서
끝끝내 신분을 감추고 무산자 계급으로 남았을까
영웅적인 파르티잔을 낳지 않아야 혁명이 혁명다웁고
안타깝게 쳐다보아도 이념의 푯대 때문에 차라리
믿음이 남던 시절은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연해주 詩篇 2」 부분


김명인은 현재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 교환교수로 가 있으면서 몇 편의 시를 쓴다. 그러므로 「연해주 詩篇」 연작시는 외국 여행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쓴 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시사를 통틀어 연해주가 작품의 무대가 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이 자리에서 그 의의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연해주 어느 도시(이 시의 무대가 블라디보스토크인지 하바로프스크인지 확실하지 않다)의 거리와 시장통을 거닐면서 자신의 정체성 탐구에 골몰해 있다. 내가 누구냐고 자문하는 것이 부질없는 이유는, 시장 귀퉁이에서 봉지 김치를 팔며 살아가는 동포 아낙네를 만났기 때문이다. 동포일지언정 아낙네와 나는 국적이 다르다. 그래서 “동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누구에게도/ 말 건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국에서의 감회가 뼈저린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소설가 조명희가 일본 스파이로 몰려 스탈린 통치 시대에 소비에트 비밀경찰의 고문을 받다 죽은 곳이 바로 하바로프스크이다. 조명희가 죽은 지하 감옥을 떠올려보며 시인은 우울해한다. 그래서 시의 후반부는 이렇게 전개된다.


조명희를 기념하다


팽개치고 싶은 절망 말고는 무엇 하나
남은 것 없이 변방까지 밀려와
철 지난 겨울이 온몸을 고문하는 바람 속에 서서
언제부터 내 생각의 結氷 이렇게 두터웠는지
다시 닿을 종착도 예 아니라는 듯이
저렇게 지구 끝쯤으로 떠나는 기차에게 물어보는 일도
이곳에서는 이미 부질없다.


세찬 바람이 온몸을 고문하듯이(!) 불어대고 있다. 바람 속에 북방의 풍경도 얼어붙어 버렸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조명희에 대한 생각으로 얼어붙어 있다. 이주를 했건 도망을 갔건 그곳은 이국 땅, 이민족의 땅이기에 받아온 설움이 오죽했으랴. 민족의 슬픔과 시인 자신의 외로움이라는 두 색깔의 물감을 풀어 쓴 이 시에는 우리 민족이 이국에서 당한 고초가 은은히 배어 있다. 그 연해주에서도 살지 못하고 화물 열차로 오래오래 실려와 카자흐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산 우리 조상의 슬픈 역사가 있다.


김씨임을 잊지 않는다는 그는 고뇌 끝에 음울한 모스크바 하늘 아래로 돌아갔다. 아름다운 러시아어를 등지고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나라는 그에게 인자스럽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화물 열차에 실려와 뿌리내린 카자흐 구릉 마을의 아들, 다시 유랑민이 되어 캄차카와 시베리아, 그리고 변방 사할린에다 소년기를 묻어놓았다는 사내의 키는 작다. 이때의 눈물이 오늘에 이르러선 ‘초원, 내 푸른 영혼’이라고 노래하게끔 되었나보다. 그의 내면으로 우러나는 이미지를 통해서 나 또한 초원, 내 푸른 영혼이라고 화답한다.

―「초원, 내 푸른 영혼」 앞 연


신중신이 쓴 이 시의 제목은 재러시아 동포 작가 김아나톨리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하다. 스탈린은 연해주에 사는 조선족(그들은 고려인이라고 불렸다)을 러시아 민족에게 해를 끼칠 화근으로 간주하고는 대대적인 이주 작업을 전개하였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화물 열차로 실려와 내린 곳이 시베리아의 한 귀퉁이, 카자흐 구릉지대였다. 그 황무지를 악착같이 일구어 농작물을 수확한 조선족의 후예가 바로 한민족 러시아 작가 김아나톨리이다. 이 시에는 한 사람의 성장기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해 연해주로 갔다가 거기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카자흐, 캄차카 반도, 시베리아, 사할린 등지로 떠돌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처절한 수난사가 담겨 있다. 시인이 김아나톨리의 자서전을 읽고 이 시를 썼다면 여행 체험의 시화(詩化)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 『카프카의 집』에는 러시아와 동구권 일대를 여행했음을 알게 하는 시가 여러 편 있다. 예컨대 “동방정교회 구원의 표지가/ 목 없는 형체로 어렴풋이 드러나는/ 전람회장의 그림”(「전람회장의 그림」), “간절함을 퍼올리는 한낮 거리에/ 선연한 빛깔로 나선 우즈베크 처녀, 젖은 눈동자.”(「우즈베크 옛 마을」), “古都의 빛은 책갈피에서 창연할 테지만/ 그것은 멀리 돌아앉아/ 안개만 자욱한 크라코프 역,”(「잿빛 안개」) 등이 그렇다. 문학적으로 거의 미지의 세계였던 연해주가 우리 시의 공간으로 들어온 것은 뜻 깊은 일이고,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미지의 세계인 사할린이 우리 시에서 다루어지기를 소망해본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쿠릴 열도와 함께 사할린 섬의 남반부를 얻었다. 1956년 일본이 소련과 국교를 회복하면서 사할린에 있는 일본인은 다 귀국했지만 한인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으로 귀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30~40년대 초반에 일본은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인을 무더기로 사할린에 징용으로 끌고 갔는데, 전쟁이 끝났을 때 그 수가 6만 명이었다. 후손들 4만 3000명이 아직 그곳에 살고 있고, 최근에 들어서야 영구 귀국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미 1세대는 거의 다 죽었고, 2~3세대는 삶의 뿌리를 그곳에 내려 귀국이 어려운 상태이다.)

고구려의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남아 있는 기록이 부실하여 한민족이 세운 국가다 아니라고 하는 중국과 우리 쪽 의견이 팽팽히 맞서 있다. 문자로 적힌 기록은 별반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 계속 출토되고 있는 유물과 통치 지역의 유적으로 미루어보건대 한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여겨진다. ‘여겨진다’가 아니라 확신을 갖고 발해 지역에 가서 자료 조사를 하고, 수많은 관련 사적을 뒤적이며 시를 써온 시인이 있다. 상희구의 시집 『발해기행』과 『요하의 달―발해기행ㆍ2』는 역사의 흔적을 문학적으로 복원하려는 원대한 꿈을 펼친 시집이다.


그쪽에서 출토되었다는 깨어진 발해 銅鏡을 닦다가 이가 빠진 때묻은 발[簾]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아카시아 향기에 취하여 펀듯 낮잠에 든 지도 꽤 오래다.
느닷없이 朱雀大路에 들었다. 글자 그대로 가로변의 집들은 호화스러웠고 지붕들은 붉었다. 山勢는 민화투의 그림처럼 끝의 선들이 매끄럽지 못하였으나 신비로웠다.

―「발해기행ㆍ1」 첫 부분


발해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동경은 한낮의 꿈속에 발해의 주작대로가 펼쳐지게 한다. 발해 영토에서 출토된 구리거울을 보다가 잠에 들어 그 시대의 거리를 거닐어본 시인은 아예 발해 현지답사에 나선다. 첫 번째 시집에는 「발해기행」이 10편 실려 있지만 두 번째 시집에는 무려 56편이 실려 있다.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연구를 한 결과물이 한 권의 시집이 된 것이다. 시인은 요하의 강둑을 거닐며 시상을 떠올린다.


동짓날 열사흐렛날 자정, 같은 날 같은 時에
나는 꽁꽁 얼어붙은 요하의 강둑에서,
아내는 잠실본동 310번지 우리 집 베란다에서,
달 표면 중 「고요의 바다」 쪽을
동시에 바라보기로 약조했다.

―「발해기행 20」 앞부분


발해 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동묘(東廟)를 관람하고, 돈화(敦化) 육정산에 있는 정혜공주의 무덤을 돌아보고, 월희(越喜, 발해에 있던 도시 이름) 번화가를 거닐어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발해의 설화를 수집하고, 문자를 연구하고, 당시의 영토를 상상하여 지도를 그린다. 시인의 발해 기행은 잊혀진 고대사의 현대적 복원 및 시적 상상이라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역사의 흔적이 묻어 있는 시는 또 다른 시를 본다.


무덤 속에서도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덤 속에서도 바라보고 싶은 별들이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잠이 들고
바다는 조용히 땅에 눕는다


그 얼마나 어둠이 깊어갔기에
아침도 없이 또 밤은 오는가


무덤 속에서도 열어보고 싶은 창문이 있다
무덤 속에서도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있다

―정호승, 「詩人 尹東柱之墓」 전문


사람이 묻혀 있는 곳이라고
꽃밭 아니랴
그 무덤에 더더욱 시인이 산다면
꽃밭보다 더 황홀한
새벽江 아니랴


청천대낮에도 별들은
내려와 서럽도록
따뜻한 꽃밭을 이루나니
잎새에 이는 바람도
여기서만큼은 벌 나비 되었으라


아아, 천지가 북망산천이래도
그곳에 시인이 산다면
시퍼런 빛살로 드러눕는
새벽江도 이리 황홀한 것을

―허형만, 「윤동주의 무덤」 전문


윤동주의 묘는 북간도 용정의 교회 묘지 터에 자리잡고 있다. 정호승이 그곳에 가보고 와서 이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덤의 소재지가 중국 땅임이 분명하므로 외국 여행의 산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일본의 복강형무소에서 운명한 윤동주의 묘를 소재로 했다는 것 자체가 역사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또한 나라 바깥으로 나가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시로 써 현장감을 전하는 시적 경향을 대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허형만 시인은 윤동주의 무덤 앞에서 애도의 뜻을 표하는 한편 부러움도 느낀다. 시인의 생애는 짧고 불행했음에 틀림없지만 그 무덤은 시퍼런 빛살로 드러눕는 “황홀한 새벽江”이다. 그 강이 황홀한 이유는 시인의 생애가 너무나 청청했기 때문이며, 그의 시가 위대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고작 27년을 살다 일제의 인체 실험에 희생양이 되어 죽고 말았지만 그의 시는 위대하기 때문에 영원하리라고 허형만은 윤동주의 무덤 앞에서 생각해본 것이다. 백두산을 한참 돌아서 갈 수밖에 없는 것도 국토의 허리가 동강난 우리 역사의 슬픈 질곡 때문이다.


다음날엔 장춘(長春)으로
두 시간 반의 비행.
양자강 하구가 바다나 다름없데.
가도가도 끝없는
대해(大海) 아니면 대평원이로구나.
길림성(吉林省)에 들어서자
마치 낯익은 고향에 돌아온 듯,
산들이 여기저기 엎디어 있고,
구석구석 가꾸어진 기름진 농토……
하기야 저 고구려 옛적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 아니던가.
녹음 우거진 장춘에서 만난
총각 가이드는 그곳 길림대학생,
석별의 정을
한국 유행가로 멋지게 달래더라.

―박희진, 「백두산 가는 길」 부분


나도 돌아서 갔다
돌아서 가는 길이 생생하고 가쁘다
長春에서 밤도와 延吉로 가는
열차도 숨이 차 열이 나는지
어둠을 한 켜씩 벗고 달린다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는 산과 들
조붓조붓 웅크린 마을이며
낯익은 옥수수밭 호박밭이 환하다
하! 이곳에도 혈육이……
아무튼 살아줘서 고맙다

―임영조, 「백두산 가는 길」 부분


두 시인이 쓴 시는 제목도 같지만 느낌도 비슷하다. 아마 다른 시인이 썼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한 사람이 백두산 구경을 하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고 장춘까지 가야 하고, 장춘에서 열차를 타고 밤을 넘겨 연길로 달려가야 하고, 연길에서는 또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한다. 두 시인은 백두산 가는 길에 한인을 만나 몹시 반가워한다. 총각 가이드와 옥수수와 호박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조선족을 만나 반가워하지만 여기에도 일제의 모진 압제를 피해 만주로 연해주로 사할린으로 남부여대하여 떠났던 우리 민족의 수난사가 얼비친다. 박희진은 2001년에 『박희진 세계기행시집』을 펴내 랭보처럼 자유인으로 살아온 생의 이력을 총정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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