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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주 칠레 민중시인 네루다를 다시 만나다
2016년 02월 09일 03시 47분  조회:3572  추천:0  작성자: 죽림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한’ 칠레의 민중시인파블로 네루다
“네루다의 시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생동이다.”라고 정현종 시인은 말했다. 민용태 시인은 네루다 시의 생동감을 한 단어로 ‘열대성’ 또는 ‘다혈성’이라고 표현했다. 실로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 폭우에 흠뻑 젖는 느낌, 강렬한 태양 아래 벌거벗고 선 느낌, 폭풍우가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 그리고 빽빽한 밀림 속에서 공룡 알로 누워 있는 느낌이 교차한다.

공산당 입당, 박수갈채와 가시밭길의 삶 함께 걸어
네루다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파란만장한 삶을 산 만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어렵지만, 1945년 7월 칠레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야말로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7월 8일, 네루다는 산티아고의 카우폴리칸 경기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칠레 공산당 입당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대는 나에게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를 주었다./ 그대는 나에게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힘을 보태주었다”라고 노래한 그의 시 ‘나의 당에게’는 바로 이 순간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1948년 1월 6일 의회석상에서 연설하는 네루다. 이 연설은 이후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다.
공산당 입당 이후 그의 생애는 격동의 세월 그 자체였던 칠레의 역사와 더불어 영광과 고난의 길을 번갈아 걸어야만 했다. 시작은 대단한 박수갈채, 바로 그것이었다. 7월 15일 브라질 상파울루의 파카엥부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서 열린 공산주의 혁명가 프레스테스의 환영 집회에서 네루다는 시를 낭송했고, 그의 시는 대중의 가슴속을 활화산으로 만들었다. 이후 네루다가 가는 곳에는 대중과 시가 있었고, 열렬한 환호가 있었다.
네루다가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희생당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파시스트들에게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는 이미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파시스트들이 마드리드 밤거리에서 준동하고 있을 때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이 세력을 조직하고 군대를 창설하여 이탈리아인들, 독일인들, 무어인들, 팔랑헤 당원들과 대적하였다.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힘이었다.”라며,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 그의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이를 보면 네루다의 공산주의는 파시즘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사실상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에 대한 애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선택이 그를 평생 가시밭길로 걸어가게 했지만, 그는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1934년 12월 6일에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유명한 강연에서 로르카는 네루다를 “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가장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네루다의 시가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에너지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루다가 살아온 환경과 풍토가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시로 되살아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 초입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년 시절 얘기를 하자면 잊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비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마치 케이프혼이라는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네루다는 하늘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와 같은 삶을 살았고, 그 비와 같은 시를 썼다.
1904년 7월 12일,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포도주 산지인 파랄에서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당시 네루다의 어머니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노산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이 꽤 힘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출산하고 나서 두 달 후인 9월 14일 사망했다. 네루다는 자신을 세상에 나오게 해준 여인을 영영 알지 못했다. 네루다가 그토록 절절한 사랑의 시를 썼던 것의 근저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생전에 매우 친절한 여교사로 학생들에게 시와 작문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네루다는 어머니의 이런 면모를 닮았음에 틀림없다.
네루다의 아버지는 자갈 기차 기관사였다. 자갈 기차는 침목 사이에 자갈을 제때 채워주지 않으면 철로가 유실되기 때문에, 그 자갈을 나르는 기차를 말한다. 이런 자갈 기차에서 일하는 인부는 철인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성격은 매우 거칠었다. 아버지가 귀가할 때마다 문이 흔들리고 집 전체가 진동했으며, 계단은 삐걱거렸고, 험한 목소리가 악취를 풍겼다. 이런 아버지가 자식을 홀로 키워야 했다면, 네루다의 어린 시절은 몹시도 험난했을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재혼했고, 새어머니는 상냥하고 온화했다.
어린 시절부터 네루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동정심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은 누군가 상처 입은 고니 한 마리를 네루다에게 주었다. 네루다는 상처를 물로 씻어주고는 빵조각과 생선조각을 부리에 넣어주었는데, 고니는 모두 토해버렸다. 상처가 아물었는데도 고니는 네루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네루다는 고니를 고향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새를 안고 강가로 갔다. 그러나 고니는 슬픈 눈으로 먼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20일 이상을 고니를 강으로 데려갔지만, 고니는 늘 너무도 얌전했고 네루다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니를 다시 데리고 집으로 오려고 안았는데, 고니의 목이 축 처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어린 소년은 고니를 통해 죽음을 맨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강압적인 아버지 몰래 필명으로 창작 활동
1915년 6월 3일, 네루다는 어떤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 생애 첫 시를 썼다. 그는 새어머니에게 이 시를 바치기로 했다. 뮤즈의 첫 방문을 맞이한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그는 부모님한테 가서 시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건성으로 읽어본 아버지가 “어디서 베꼈니?”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네루다는 자서전에서 “그때 처음으로 문학비평의 쓴맛을 보았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미 식을 줄 모르는 독서열로 밤낮을 거의 잊고 살 정도였다. 194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여성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그 고장의 여학교에 부임한 것은 네루다의 문학열을 더욱 부추기는 일이었다. 미스트랄은 네루다가 찾아갈 때마다 러시아 소설책을 주곤 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등의 소설을 읽은 네루다의 꿈은 자연스럽게 문학을 향해 직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시인을 꿈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미 학생 시인으로서 필명을 날리고 있었던 때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노트를 창밖으로 던진 후 불태워버렸다. 네루다가 필명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이러한 탄압 때문이었다. 1920년 10월, 그는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의 성을 빌리고, 파울로(바오로, 바울)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파블로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처음에는 단지 필명이었으나, 1946년도에는 아예 법적인 이름이 된다. 이 이름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1921년 산티아고의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 입학한 네루다는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의 창작열은 칠레의 자연만큼이나 왕성했다. 1923년 8월 그는 첫 시집 <황혼 일기>를 펴냈다. 20세가 안 되는 어린 시인의 가슴속에서는 맑고 투명한 정열이 샘솟고 있었다. “하느님, 당신은 하늘을 불 밝히는 이 놀라운/ 구릿빛 황혼을 어디서 찾으셨나요?/ 황혼은 저 자신을 다시 기쁨으로 채우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마루리의 황혼’)와 같은 구절은 젊은 영혼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이었다. <황혼 일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학창시절 네루다가 숭배했던 칠레 시인 페드로 프라도는 “확신컨대, 나는 이 땅에서 그 나이에 그만한 높이에 다다른 시인을 따로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칭찬은 네루다의 창작열을 더욱 북돋아 1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펴내게 한다. 이 시집이야말로 네루다를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인기 있는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이 시집의 시들은 흥분제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들끓게 하면서도, 관능적이고 오묘한 여성의 몸처럼 아늑하고도 화려한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고,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의 세계 속으로 깊이 파 들어간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이 내게서 달아났고
밤은 내 가슴으로 거세게 파고들었다.
난 살아남기 위해 그대를 벼렸다, 무기처럼,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은 오고, 난 그대를 사랑한다.
가죽과, 이끼와, 단단하고 목마른 젖의 몸뚱이여.
아 젖가슴의 잔이여! 아 넋 잃은 눈망울이여!
아 불두덩의 장미여! 아 슬프고 느릿한 그대의 목소리여!
내 여인의 육체여, 나 언제까지나 그대의 아름다움 속에 머물러 있으리.
나의 목마름, 끝없는 갈망, 막연한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뒤따르고,
고통이 한없이 계속되는 어두운 강바닥이여. ―‘사랑의 시 1’ 전문(김현균 역)
네루다의 문학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 후의 작품 <무한한 인간의 시도>(1926) <열렬한 투척병>(1933)을 거쳐, 초현실주의의 걸작으로 주목 받은 <지상의 거처>(1935)까지 그야말로 네루다의 시적 행진은 쾌도난마 그 자체였다. 그 사이에 1926년 버마의 랭군(오늘날의 양곤)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면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등 견문을 넓혔다. 1935년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바르셀로나로 옮겨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것이 네루다를 공산당에 입당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도 역사의식을 가슴속 깊이 품게 되었고, 그 결과 <모두의 노래>(1950) 같은 총체적인 서사시를 생산해낸다.
역마살 낀 보헤미안의 삶, 정치적 행보가 떠돌이 삶 부추겨
네루다처럼 떠돌이 삶을 오래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에 거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는 끊임없이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혼인을 세 번이나 한 것도 보헤미안의 삶에 어울린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입지가 확고해지지만, 보헤미안으로서의 삶은 더욱 강화된다.
공산당에 입당하기 전 1945년 3월 4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네루다의 본격적인 정치 행보가 시작된다.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한 곤살레스 비델라 대통령이 공산당과 체결한 협약을 파기하자 파블로 네루다는 격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1948년 1월 6일의 의회 연설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네루다의 상원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2월 5일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영장을 발급한다. 네루다의 은둔생활 혹은 방랑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월 24일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네루다는 파리, 폴란드, 헝가리를 거쳐 멕시코에 체류한다. 세계 곳곳을 거쳐 1952년 카프리 섬에 거주하고 있을 때 칠레 정부는 네루다의 체포영장을 철회한다. 1969년 칠레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네루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이듬해 살바도르 아옌데를 단일후보로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한다. 1970년 9월 4일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네루다는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된다.

[왼쪽] 1949년 턱수염을 기른 도피 시절의 네루다. [오른쪽] 1949년 4월 15일. 파리 제2차 평화세력 세계회의에서 포옹하는 네루다와 피카소.
네루다는 세계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 받으면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지만 수상의 영예는 쉽게 오지 않았다. 1971년 10월 21일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해에 전립선암 수술을 해야 했고, 2년 후에는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1970년 7월 12일, 예순여섯 살 되는 생일에, 그는 의사인 친구 프란시스코 벨라스코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봐, 나 걱정거리가 있는데 말이야.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거든.” 벨라스코는 당장 산티아고 최고의 비뇨기과 의사를 찾아가라고 충고했다. 그는 전문의에게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무언가 작은 종양이 하나 보이는데, 한 달 안으로 다시 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가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항상 용감했던 네루다였지만, 죽을병에 대해서는 용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왼쪽] 1971년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네루다. [오른쪽] 1971년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 시절. 엘리제 궁에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가운데), 모리스 슈만(오른쪽)과 함께했다.
1973년 건강상의 이유로 대사직을 사임했으면서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에게 칠레 내전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운명의 때는 오고 있었다.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인민전선 정부가 전복되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피살되었다. 칠레 독립기념일인 9월 18일, 네루다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아내 마틸데는 구급차를 불러 네루다를 병원으로 옮겼다. 9월 20일 멕시코 대사가 와서 네루다에게 칠레를 떠나도록 설득했다. 네루다에게 바깥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슬픔을 누를 길이 없었고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아내 마틸데에게 말했다. “그자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어. 산산조각이 난 시신들을 건네주고 있다고. 노래하던 빅토르 하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 몰랐어? 그자들이 하라의 몸도 갈기갈기 찢어 놓았어. 기타를 치던 두 손을 다 뭉개 놓았대.” 그럼에도 네루다는 평생 견지해 온 낙관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문병 온 화가 네메시오 안투네스에게 말했다. “이 군인이라는 자들이 지금은 끔찍할 만큼 잔인하게 굴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사람들 마음을 끌어보려고 할걸세.” 그러나 암세포는 끝내 네루다의 생명을 앗아갔다. 1973년 9월 23일 10시 30분이었다.
파란만장한 생애만큼이나 스펙트럼 넓은 시세계
파블로 네루다처럼 다양한 시세계를 선보인 시인도 드물다. 그는 매우 감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민중을 선동하는 혁명시인이었다. 그는 열렬한 사랑을 갈구하는 격정적인 연애시인이면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냉철하고 지성적인 시인이기도 했다. 직관으로 쓴 짧은 서정시로부터 아메리카 역사를 노래한 서사시까지 네루다가 보여준 시의 스펙트럼은 칠레의 긴 영토가 대면하고 있는 바다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루다가 유난히 사랑시를 많이 쓴 시인임에는 틀림없다. 사랑시를 쓴 시인의 경우 대중성은 확보하지만 그 질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네루다는 그렇지 않았다.
사랑이여, 우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격자 위로 포도넝쿨이 기어오르는 곳:
당신보다도 앞서 여름이 그
인동넝쿨을 타고 당신 침실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 방랑생활의 키스들은 온 세상을 떠돌았다:
아르메니아, 파낸 꿀 덩어리—:
실론, 초록 비둘기—: 그리고 오랜 참을성으로
낮과 밤을 분리해 온 양자강.
그리고 이제 우리는 돌아간다, 내 사랑, 찰싹이는 바다를 건너
담벽을 향해 가는 두 마리 눈먼 새,
머나먼 봄의 둥지로 가는 그 새들처럼:
사랑은 쉼 없이 항상 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삶은 담벽으로, 바다의 바위로 돌아간다:
우리의 키스들도 그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100편의 사랑 소네트 033’ 전문(정현종 역)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 마음속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파도가 치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진다. 비든 바람이든 파도든 고요든 그것들은 소름이 되어 살갗에 박힌다. 왜일까? 네루다의 시가 그만큼 격동하는 삶 속에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우리의 심장 박동을 닮았고, 그리하여 우리의 뼈와 살과 피부가 느끼는 감각을 생생하게 옮겼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에 읽으면 그 감동이 태풍처럼 강렬해진다. 그것은 네루다가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마음이다.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네루다의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에서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100편의 사랑 소네트
파블로 네루다 저
정현종 역
문학동네
2004.07.20



충만한 힘
파블로 네루다 저
정현종 역
문학동네
2007.03.24
파블로 네루다의 시는 많은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대부분이 선집이지만, 네루다 시의 진경을 살펴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다만 역자의 눈으로 뽑아서 번역한 선집 외에 네루다가 엮은 시집의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정현종 시인이 옮긴 <100편의 사랑 소네트>와 <충만한 힘>은 시집을 통째로 옮긴 것이어서 한 시점의 네루다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100편의 사랑 소네트>는 네루다가 세 번째 부인 마틸데에게 바친 사랑시를 모은 시집이다. 사랑을 꿈꾸고 있거나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에 진저리를 치고 있거나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빠블로 네루다
애덤 펜스타인 저
최권행 역
생각의나무
2005.10.28
애덤 펜스타인의 <빠블로 네루다>는 자세하게 기술된 평전이다. 일국의 대통령 후보가 된 적도 있었기에 시인으로선 특별한 삶을 살다 간 것 같지만, 누구보다도 시인답게 살다 간 사람이 바로 네루다이다. 섬세한 감각으로 세계 곳곳의 아름다움을 느낀 시인이고, 감정에 충실하기도 한 시인이었다. 외교관으로서 세계 곳곳을 떠돈 것조차 유랑시인의 기질에 딱 맞는 것이었다. 그의 치열한 삶이 곧 시에 다름 아니었음을 확인케 하는 책이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파블로 네루다 저
박병규 역
민음사
2008.03.05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는 네루다의 목소리로 그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네루다의 산문 또한 시처럼 거침없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약 1년 동안 집필한 이 책은 시인이 가장 시인답게 쓴 자서전이다. 시대 순으로 엮여 있긴 하지만 시인의 자유로운 기질이 한껏 살아 있는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뜻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어느덧 우리는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인간과 시대의 격랑 속으로 휘말려들고 만다.

로르까에서 네루다까지
민용태 저
창비
1995.01.31
스페인과 중남미 시인들의 시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민용태 시인의 <로르까에서 네루다까지>를 권한다. 외국 시의 감동을 우리말로 살리기 위한 시인의 노력이 만들어낸 특별한 책이다. 이 책 속에서 네루다를 다시 읽어보라. 감동의 차원이 달라진다. 네루다 외에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세사르 바예호, 라몬 로페스 벨라르데, 올리베리오 히론도, 헤라르도 디에고, 마리아노 브룰, 비센테 우이도브로, 호세 후안 타블라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 스페인어권 시문학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시인들의 시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글 차창룡 (시인, 문학평론가)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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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7 詩의 벼랑길위에서 만나는 시인들 - 오장환 2016-02-05 0 3519
1066 산문시를 확실하게 알아보기 2016-02-05 1 4688
1065 참 재미있는 산문시 2016-02-05 0 3750
1064 산문시를 다시 알아보기 2016-02-05 0 4234
1063 산문시를 아십니까... 2016-02-05 0 3998
1062 詩창작의 최고의 교과서는 詩와 詩集 2016-02-05 0 4160
1061 散文詩이냐 산문(수필)이냐 2016-02-05 0 3621
1060 산문시 쓰기전 공부하기 2016-02-05 0 4503
1059 동시야 동시야 나와 놀자... 2016-02-05 0 3530
1058 우리도 산문시 써보자... 2016-02-05 0 4090
1057 산문시를 공부하기 2016-02-05 0 3621
1056 詩와 산문시, 수필의 차이점 2016-02-05 0 3924
1055 무감각해진 詩의 하체를 톡톡 건드려봅시다 2016-02-05 0 4346
1054 散文詩에 대하여 2016-02-05 0 5558
1053 은유에 관한 보고서 2016-02-05 0 3656
1052 詩쓰기와 자아찾기 2016-02-05 0 3969
1051 풍경이 곧 시인의 재산 2016-02-03 0 3589
1050 "스물여덟 삶" ㅡ 영화 "동주" 이달 18일 개봉 2016-02-03 0 3747
1049 詩의 언어운용에 관하여 2016-02-03 0 4863
1048 겁없이 쓰는 詩와 겁먹으며 씌여지는 詩 2016-02-03 0 4407
1047 태양아래 새로운 것 없다?!... 있다?!... 2016-02-03 0 4049
1046 生态詩 공부하기 2016-02-02 0 3682
1045 "생태시" 시론을 공부하고 생태시 쓰자... 2016-02-02 0 3432
1044 유교사회 조선시대 녀류시인들 2016-02-01 0 4521
1043 생태문학과 소통해보다... 2016-02-01 0 3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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