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속에서 은밀하게 자라/시간을 갉아 먹는 암세포를/고귀한 인연이라 생각해 본 적 있는가…(중략)/이것 또한 귀하지 아니한가.'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과 3호선 홍제역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옆 안전벽에 붙은 '몹쓸 인연에 대하여'라는 시(詩)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이용객 사이에서는 "시인의 의도와 작품성을 떠나 모든 연령층이 이용하는 공간인 지하철에 적합한 작품인가" 하는 지적이 나온다. 3호선 고속터미널역 등에 있는 '공생'이라는 시에 포함된 '부자는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파먹고/가난한 자는 부자의 동정을 파먹고…'라는 구절에도 비슷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거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 할까'(목련꽃 브라자), '칼 막 쓰지 마라…(중략)/포도주보다 붉은 혁명의 밤이/촛불처럼 타오른다'('맑'스) 등의 시는 이미 민원으로 철거됐다.
공공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 많다는 지적을 받아온 서울 지하철 시가 오는 8월부터 바뀐다. 지하철 시의 상당수를 차지해온 문인단체 소속 시인들의 시가 순차적으로 빠지고, 국민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명시(名詩)가 게시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하철 시를 두고 '읽기에 부적절하고 불편하다'는 민원이 끊이질 않아 명시 위주로 교체를 단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하철 시는 2008년 등장했다. 서울시가 '지하철에서 시를 읽자'는 김재홍 백석대 석좌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다. 현재 지하철 1~9호선·분당선 299개 역 4840개 면에 총 2059편의 시가 있다.
게시 작품 중 75%는 문인단체 소속 시인들의 시다. 나머지 25%는 시민 공모작이다. 문인단체 시인들의 시는 각 단체가 시를 제출하면 심사위원 11명이 선정해 왔다. 하지만 심사위원 중 7명이 문인단체 관계자여서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 지하철 시를 처음 제안한 김재홍 백석대 석좌교수는 "문인단체들이 다수의 시를 독점적으로 제출하고, 이 단체의 간부가 심사까지 맡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며 "인지도가 떨어지는 시인이 자기 시를 알리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작품성이나 내용을 둘러싼 문제도 계속 불거졌다. 폭력·선정성이 지나치거나 계층 간 갈등을 부추기는 표현 등이 많아 공공장소에 게시하기에 부적절한 작품이 적잖다는 것이다. 문정희 전(前) 한국시인협회장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시는 물론이고, 지나친 감상주의와 과도한 정서 남발, 언어의 비논리적 사용 등 미숙한 시가 상당수 있다"며 "같은 시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있다"고 했다.
서울시는 이런 논란을 없애기 위해 지하철 시 선정 기준을 전면 개편하기로 했다. 전체의 50%는 시민·평론가·독서지도사 등이 추천한 '내가 사랑한 시'로 채울 계획이다. 이 중 일 부는 윤동주·서정주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고(作故) 시인들의 작품에 할당한다. 나머지 50%는 시민 공모 작품을 지금의 25%에서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문인단체 시인 작품 공모는 폐지한다.
서울시는 시 한 편을 싣는 지하철 역 승강장의 숫자도 지금의 2~3곳에서 최대 7곳으로 늘릴 예정이다. 이용객들이 명시를 여러 곳에서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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