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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모음
2016년 06월 10일 21시 28분  조회:4262  추천:0  작성자: 죽림



연변 조선족시험장 희귀한 '떡'붙이기
[ 2016년 06월 08일 04시 08분 ]

 

 

연변 조선족 시험장 독특 광경, 떡 붙여 고득점 기원

지난 6월 7일 吉林성 延邊조선족자치주,
시험장 앞에 떡을 붙이는 것은 연변 시험장만의 독특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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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원더우먼 /정끝별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 - 외칠 때마다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 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아 정글 속의 로맨스
베트맨-. 슈퍼맨- 외치면
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무쇠 팔 무쇠 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세일러문 요술 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천생연분 /정끝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미라보는 어디 있는가/정끝별

                            

미라보
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
옥탑방 벽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
당신이었다가
퐁네프의 연인들이 달리는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
파리젠느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였다가
볏은 다리를 감춰주던 침대시트였다가
영등포동에 있는 웨딩타운이었다가
당신 사는 상계동이나 대전의 아파트였다가
엔티크한 삼인용 소파였다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보낸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미라보
하면 세면대에서 놓쳐버린 은반지였다가
간곡히 비어 있는 꽃병 속 그늘이었다
꼭꼭 숨어사는 누군가의 ID였다가
마른하늘에 살풋 걸리는 무지개였다가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미라보, 미라보는 얼마나 격렬한가
이 얼마나 멸렬한가

 

 

월간『현대시』2003년 6월호 밢표

 

 

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동백 한 그루 /정끝별

                                   

포크레인도 차마 무너뜨리지 못한
폐허(肺虛)에 동백 한 그루
화단 모퉁이에 서른의 아버지가
우리들 탯줄을 거름 삼아 심으셨던
저 동백 한 그루 아니었으면 지나칠 뻔했지 옛집
영산포 남교동 향미네 쌀집 뒤 먹기와 위로
높이 솟았던 굴뚝 벽돌뿌리와 나란히,
빗물이며 미꾸라지 가두어둔 물항아리 묻혀 있었지
어린 오빠들과 동백 한 그루 곁에서
해당화 밥태기꽃 함박꽃 알록달록 물들다
담을 넘던 이마에 흉터가 포도넝쿨처럼 뻗기도 했지
동백 한 그루 너머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버지 밥상 내던지셨지 그릇들 깨졌지 아버지 서재 오래 비어 있었지
영산포 이창동 소방도로 되기 직전
포크레인이 아버지 대들보를 밀어붙이고
콜타르와 시멘트가 깨진 아버지를 봉인해버렸어도
탯줄 끝에 손톱만한 열매를 붙잡고
봄볕에 자글자글 속 끓고 있었지 저 동백 한 그루
오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가까스로 서 있었지
나 쉬하던 뿌리 쪽으로 고개를 수구(首邱)린 채

 

 

 

『작가세계』2003년 겨울호 발표

 

 

개미와 앨범 /정끝별
                                 


책장 꼭대기에 쌓여가는 앨범들
주저앉을 것만 같아
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아이 앨범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파르르 바닥에 흩어지는 수천의 개미떼
앨범을 보던 아이가
먹던 비스켓과 함께 닫아두었나 보다
먹이를 찾아 몰려든 개미떼들
식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비스켓을 쏠고
앨범을 쏠고
환한 웃음을 쏠며
아이 얼굴에 주름집을 짓고 있었나 보다
에프킬러를 뿌린다

꿈틀거리는 개미 일가들아
비스켓만 먹고 가지,
휘발하는 검은 시간 벌레들아
추억만은 놓고 가지,

 

 

옹관(甕棺) 1 /정 끝 별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에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근 길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찬 항아리다

 

 

 

지나가고 지나가는 2 /정 끝 별 


  미끌하며 내 다섯 살 키를 삼켰던 빨래 툼벙의 틱, 톡, 텍, 톡, 방망이 소리가 오늘 아침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와 수챗구멍으로 지나간다 그 소리에 세수를 하고 쌀을 씻고 국을 끓여 먹은 후 틱, 톡, 텍, 톡, 쌀집과 보신원과 여관과 산부인과를 지나 르망과 아반테와 앰뷸런스와 견인차를 지나 화장터 길과 무악재와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지나간다 꾹 다문 입술 밖에서 서성이던 네 입술의 뭉클함도 삼일 밤 삼일 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던 배반의 고통도 끝장내고 말거야 내뱉던 악살의 순간도 지나간다 너의 첫 태동처럼 틱, 톡, 텍, 톡, 내 심장 한가운데를 지나 목덜미를 지나 손끝을 지나간다 지나가니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웃고 울고 입을 맞추고 쌀을 사고 종이와 볼펜을 사고 모자를 사고 집을 산다 한밤중이면 더욱 크게 들려오는 틱, 톡, 텍, 톡, 소리를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틱, 톡, 텍, 톡, 날카로운 구두 뒤축으로 나를 밟고 지나가는 그 소리보다 더 크게 틱, 톡, 텍, 톡, 기침을 하고 틱, 톡, 텍, 톡, 노래를 하고 틱, 톡, 텍, 톡, 싸운다 틱, 톡, 텍, 톡, 소리가 들리는 한 틱, 톡, 텍, 톡, 나는, 지나가는 것이고 틱, 톡, 텍, 톡, 살아 있는 것이다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첫눈 / 정끝별


날선 삿대질을 되로 주고 말로 받던 그날밤의 창가에
느닷없는 점령군처럼 함박눈이 내렸것다
서로의 눈이 부딪치고 쨍그랑 겨누던 무기를 놓쳤던가
그랬던가 어둡던 창밖이 우연의 남발처럼 환해지는
저건 대체 누구의 과장된 헛기침이란 말인가
그러자 핸드폰을 귀에 댄 남자가 검은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우산을 옆으로 든 여자가 흔들리는 네온싸인에 사뿐사뿐 제 얼굴을 비춰보고
오토바이를 세운 폭주족 크라운 베이커리 앞에 서서 환한 라이터를 지피고
달리던 자동차가 멈칫 쌓인 눈을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미끄러져 가고
그렇게 무섭게 굴러가던 것들이 일제히 제 둥근 모서리를 쓰다듬고 있었더란 말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내려앉으며
누군가의 어깨가 누군가의 어깨에 쌓이며
생애 첫눈을 뜬 장님처럼 서로의 눈을 맞추고 말았더란 말인가
염치를 잊고 손을 내밀고 말았더란 말인가, 용서라는
보고 또 보고도 물리지 않는
아 저건 누구의 신파였고
누구의 한물간 낭만적 연출이었던가
그리하여 창밖에 펼쳐진 단막의 해피엔딩이 끝날 즈음
뜨겁게 내리는 저 첫눈에게
그리고 또다시 속아넘어가버리고 말았더란 말인가

 

 

 

 

소금호수 /정끝별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이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다

맨발이었다

 

벗어놓은 신발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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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인 소개


출생 ; 1964년 11월 28일 (전라남도 나주)
소속 ;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국문학 박사
데뷔 ; 1988년 문학사상 - 칼레의 바다
수상 ; 2008년 제23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경력 ;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둥지새


발 없는 새를 본 적 있니?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에 쉰다지
낳자마자 날아서 딱 한번 떨어지는데
바로 죽을 때라지
먹이를 찾아 뻘밭을 쑤셔대본 적 없는
주둥이 없는 새도 있다더군
죽기 직전 배고픔을 보았다지

하지만 몰라, 그게 아니었을지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날기만 했을지도
뻘밭을 헤치기 너무 힘들어 굶기만 했을지도

낳자마자 뻘밭을 쑤셔대는 둥지새
날개가 있다는 걸 죽을 때야 안다지
세상의, 발과 주둥이만 있는 새들
날개 썩는 곳이 아마 多情의 둥지일지도
못 본 것 많은데 나, 죽기 전 뭐가 보일까

자작나무 내 인생,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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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랑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이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흰 책 / 민음사. 2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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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


흰 책 / 민음사.2000.5

~~~~~~~~~~~~~~~~~~~

현 위의 인생


세 끼 밥벌이 고단할 때면 이봐
수시로 늘어나는 현 조율이나 하자구
우린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차피 한 악기에 정박한 두 현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줘
세상과 화음할 수 없을 때 우리
마주앉아 내공에 힘쓰자구
내공이 깊을수록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지
모든 현들은
어미집 같은 한없는 구멍 속에서
제 소리를 일군다지
그 구멍 속에서 마음놓고 운다지


흰 책 / 민음사.2000.5.

~~~~~~~~~~~~~~~~~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흰 책 / 민음사, 2000

~~~~~~~~~~~~~~~~~

강진 편지


버석이던 갈대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에
춘백(春栢)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꽃
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
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내 영혼에 일렁이던 햇살도
한통속들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 비껴 서있던 당
신 겨드랑이와 내 겨드랑이가 이제야 키 낮은 망대를 만
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그토록 망설임이었거늘 가슴에 서로를 묻는
일이야 만장(輓章)처럼 당신쪽으로 누운 풀자국에 내내 가
난할 것입니다 모란 냄새 선명한 하마 흔하디흔한 세상 봄
밤으로 나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흰 책 / 민음사. 2000.5

~~~~~~~~~~~~~~~~~~~~~~~

얼굴을 파묻다


흐르는 것들에서는 묵은 쌀겨 냄새가 난다
갓 담근 술항아리에서 포도알을 훔쳐 먹고
얼굴을 파묻던 한마당의 쌀더미는 따뜻했다
누렇게 좀먹던 스무 살 페루의 하늘도
쏟아질 듯 무겁기만 하던 원산도 별밭도
비어 있던 대성리 철둑길도 그늘 무성해
소나기 퍼붓고 세상은 선뜻 변했다
쌀벌레들은 다시 쌀더미에 향기로운 집을 짓고
푸른 들판에 누워 한 백년쯤 자고 싶어,
지친 男子는 잎도 지기 전 창백한 女子를 떠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서늘한 질투도
이만큼 지나쳐서야 눈치채는 것인데
이 늦은 저녁 쌀을 씻으며
치댈수록 부예지는 쌀뜨물에 얼굴을 묻고
다행이다, 쌀벌레 껍질처럼
어제가 낙낙히 뜰 수 있다는 것은
부박했던 노래가 떠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은
촤르르 촤르르 말갛게 씻겨진 마음이
잘 익은 밥 냄새를 피워올릴 수 있다는 것은


흰 책 / 민음사.2000.

~~~~~~~~~~~~~~~~~~~~~~~

춘수(春瘦) / 정끝별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삼천갑자 복사빛 / 민음사, 2005

~~~~~~~~~~~~~~~~~~~~~~

입동/ 정끝별


이리 홧홧한 감잎들
이리 분분히 소심한 은행잎들
이리 낮게 탄식하는 늙은 후박잎들

불꽃처럼 바스라지는
요 잎들 모아
서리 든 마음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몸속부터 꼬숩겠지요

~~~~~~~~~~~~~~~~~~~~~~~

상강 / 정끝별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갈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엄으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

추억의 다림질


장롱 맨 아랫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콜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날개를 적시는 빗물과 같아,

안주머니까지 뒤집어 솔질을 하면
여기저기 실밥처럼 풀어지는
여름, 그대는 앞주름 건너에
겨울, 그대는 뒷주름 너머에

기억할수록 날세워 빛나는 것들
기억할수록 몸서리쳐 접히는 것들
오랜 서랍을 뒤져
얼룩진 미련마저 다리자면

추억이여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리면 다릴수록 익숙히 접혀지는
은폐된 사랑이여

~~~~~~~~~~~~~~~~~~

블루 블루스


땅 속 저 깊은 흙구덩이에서도
검게 그을린 씨앗으로 남아
여덟 개의 꽃잎을 만들어냈다는
이천 년 만에 핀 젖빛 목련

여래나 금륜왕이 올 때까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히말라야 산록의 우담화
삼천 년 만에 피는 꽃

얼음 토탄이 되어서도
살아남았다는 기적의 씨앗
푸른 등꽃을 닮은 알래스카 루핀
일만 년 만에 핀 꽃

그러나
흙 속에서 얼음 속에서
싹도 피워보지 못한 채 죽어간
세상 모든 씨들
마음 속에서 죽어간
하 많은 기다림의 씨들

~~~~~~~~~~~~~~~~~~~~~

천생연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

오래된 장마


새파란 마음에
구멍이 뚫린다는 것
잠기고 뒤집힌다는 것
눈물 바다가 된다는 것
둥둥
뿌리 뽑힌다는 것
사태지고 두절된다는 것
물벼락 고기들이 창궐한다는 것
어린 낙과들이
바닥을 친다는 것

때로 사랑에 가까워진다는 것

울면, 쏟아질까?


내일을 여는 작가 / 2001년 가을호

~~~~~~~~~~~~~~~~~~~~~~~

물을 뜨는 손


물만 보면
담가 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다 새어나가는 것이라고
무심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 본 적이 언제였던가

~~~~~~~~~~~~~~~~~~~~~~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 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시사사 2008. 3~4월호 / 나무의 노래 - 테마로 읽는 현대시

~~~~~~~~~~~~~~~~~~~~~~~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 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 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 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2004.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 피어라, 석유 / 현대문학
시집 ; 삼천갑자 복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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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에 걸린 공


창공의 공터에
동그랗게 입을 다물고 있는
가출한 동안童顔

누가 데려다 놓았을까
백년 묵은 은행나무 가지 꼭대기에
수은등과 나란히 걸려 있었어

대낮의 아이들이 뻥이야 맘껏 차버린
놀라워라 고 뻥 한번 따라 올라봤으면!
차고 던지고 굴리고 튕기고 날리던
공터의 찬 발들이 쏜살처럼 쏘아 올렸을
오래된 뱃속의 허공

그러나 너무 세게 차지는 마라
공마다 가늠할 수 있는 속도와 높이는 다른 법
가지 사이사이가 모두 삼천포다

가지를 벗어날 수 없는 둥근 허기가
안에서부터 제 거죽 몸을 먹어치우는 사이
초겨울 까지 날아와 날카로운 부리로
가지에 걸린 공을 가늠하고 간다
제 집으로 들앉을 셈인가


시와사람 2005 봄호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5,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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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리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 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 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났다
신음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시집 ; 삼천갑자 복사빛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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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좋은 떡갈나무


속 빈 떨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시집 ; 흰책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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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는 어디 있는가


미라보
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
옥탑방 벽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
당신이었다가
퐁네프의 연인들이 달리는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
파리젠느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였다가
벗은 다리를 감춰주던 침대시트였다가
영등포동에 있는 웨딩타운이었다가
당신 사는 상계동이나 대전의 아파트였다가
엔티크한 삼인용 소파였다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보낸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미라보
하면 세면대에서 놓쳐버린 은반지였다가
간곡히 비어 있는 꽃병 속 그늘이었다
꼭꼭 숨어사는 누군가의 ID였다가
마른하늘에 살풋 걸리는 무지개였다가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미라보, 미라보는 얼마나 격렬한가
이 얼마나 멸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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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전(空轉)


별들로 하여금 지구를 돌게 하는
지구로 하여금 태양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문득, 별을 떨어지게 하는
저 중력의 포만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나로 하여금 당신 곁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기어코, 나를 밀어내게 하는
저 사랑의 포만

허기가 궤도를 돌게 한다


문학수첩 2003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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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파라, 뱀 나온다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 속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속을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 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 때나 속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미끼들에 속아 파고 또 파면
속의 피를 보기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사납고
제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모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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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기다리는 일


찔레와 포플러와 길과 물과 함께 있던
늘어진 버드나무 밑에 함께 기대앉던
자운영과 골풀을 쓰러뜨리며 함께 눕던
우포 물 언저리 빗방울로 맺히던

물위에 초록 기둥을 세우고
좀개구리밥꽃처럼 작은 방을 들이고
소금쟁이 지나는 길목에 덜컥 꽃을 피우고
개구리마저 튀어 오르는 물밑으로 열매를 맺고

큰물이 흔쾌히 거두어갈 때까지
빗방울이 화석이 될 때까지
늪이 물이 될 때까지
발목을 쥐고 있는
물에 뜬 사랑

눈이 머는 일
마음이 먼저 먹히는 일
먹먹한 물이 되는 일
저 갯버들 가지에 치마를 걸어놓고
오지 않는 바람을 기다리는 일
고여 있으되 오래 썩지 않는 일

여기 중독된 불멸


열린시학 / 2003, 가을 / 고요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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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도록 꽃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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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 망


구멍에 빠져 본 사람은
구멍을 제 몸 속에 넣고 다닌다
두 눈을 움푹 파헤치고

구멍을 등에 지고 가는
은빛 눈썹의 낙타야
지친 너에게 구멍은 오아시스였니?
배 한가운데 구멍을 안고 가는
베두인의 여자야
허기진 너에게 구멍은 집이었니?

구멍에 빠질 때마다
한 삽씩 네 눈에서 퍼냈던
꽃 핀 모래가
신기루
그 허방이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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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 두 집


네게 닿고 싶어
서로를 보듬고 설 수 있는 짚단이 되고 싶어
까칠한 배꼽 감출 수 있는 울타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선 문이 있어야,
나그네처럼
사막을 헤매던 모래집이 말했어

그만 자고 싶어
탯자리를 향해 행렬 짓는
늙은 코끼리처럼 남아프리카 케냐 어디쯤
페루의 새처럼 남아메리카 어디쯤
하지만 우선 이 문을 버려야,
진흙뻘처럼
기다림에 지친 붙박이집이 말했어


희 책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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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원더우먼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외칠 때마다
군살 없는 근육질 허리에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아 정글 속의 로맨스
베트맨―, 슈퍼맨 맨― 외치면
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무쇠 팔 무쇠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세일러문 요술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흰 책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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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심


모든 그림자는 빛의 뒤편으로 무너진다는데
모든 풀은 바람 뒤로 밀리고 바람 뒤로 눕는다는데
모든 줄다리기는 뒤편을 향해 당겨진다는데
모든 말은 침묵 뒤편으로 고인다는데
모든 사람들은 뒤가 실해야 당당히 설 수 있다는데
모든 사랑은 기다림 뒤편에서 완성된다는데

모든 그림자에게 뒤는 내려앉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풀에게 뒤는 맞서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줄다리기에서 뒤는 버티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말에게 뒤는 숨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뒤는 돌아보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랑에게 뒤는 젖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앞에 대항하는 바로 그 심心


흰 책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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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 눈물


집에 빠진 나 한 집
생에 그늘이 될 만한 집 한 채는 있어야 해요
집은 나 한 집 하기 나름인걸요
도장에 미장 새시하고 조명 갈고
버디칼 걸고 유리창까지 닦는다
환해진 집에 황홀한 나 한 집

집이 기침을 하면 나 한 집 약 먹는다
집이 오줌누고 싶어하니 나 한 집 똥눈다
집이 술잔을 들면 나 한 집 담배를 피워 문다
집이 바지를 벗자 나 한 집 단추를 푼다
집이 심심해하니 나 한 집 아이 낳아 준다

집은 날로 의기양양 나 한 집 업신여기고
나 한 집 더럽히고 나 한 집 깔아뭉개더니
너 나가 너 나가 다 나가 나 한 집 내차네
집을 ?i아다니느라 빚더미로 오른 나 한 집
나 한 집 옹골차게 등쳐먹은 잔인한 집
집에 내?i긴 가엾은 나 한 집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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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늘


욕설같이 불쑥 주먹같이
흰마늘쪽이 꿈틀,
매운 눈 비비며
폭음처럼 질주하는
숨가쁜 휘발성
시퍼렇게 물오른
상추 고추 사이 봄마늘 마늘고추장
마늘 향기 하얀 남도 마늘꽃
오 싱싱한 봄밤
꽃이 아니어도 풀이 아니어도
하르르 피워내는
저 화냥기 좀 봐
쉿! 쉿!
당차게 뿜어대는 저 독기 좀 봐
봄바다를 게릴라처럼
상추 고추 사이 봄마늘 마늘고추장
마늘향기 하얀 남도 마늘씨


자작나무 내 인생 / 세계사,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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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참나무 숲에 살았네


비가 내리었네
온종일 오리처럼 앉아 숲 보네
그렇게 허름했던 사랑의 이파리
허물어진 졸참 가지에
넘어지며 나는 가고 있네
내 나이를 모르고 둥근 하늘 아래
잎이 피네 짐처럼 피네
잎이 지네 나도 흙먼지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무도
꽃이 피리라 기약치 않으리
숲 기슭에 오리처럼 앉아 있네
비가 많이 내리네


자작나무 내 인생 / 세계사,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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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먹


발레니나가 되겠다던
화가가 되겠다던
일곱 살배기 딸이 한 판 붙고 온 날
한 주먹이 되겠다네
세 놈을 한 방에 쓰러뜨린 수 있는 한 주먹
여자애라고 얕잡아보지 않을 한 주먹
한 주먹 키우겠다며 밤마다

나도 한 주먹 있었으면 좋겠네
한갓 시인이 되겠다는
한낱 풍경 감식가나 되겠다는
나를 갈고리에 걸고 내 마음을 파먹는
떠들썩한 빈말들 한 방에 날려버릴 한 주먹
한 주먹 키우겠다며 밤마다

한, 주먹, 쥐었다
한, 주먹,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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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심


돌고 돌다
설설
기고 기다
급기야
바닥에 박히는
부동심법

저 찰진
호구의


좆, 팽이


現代詩學 / 200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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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화단에서


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바람에 휘청,
넘어진 피와 멍이 너의 꽃이고 잎이었구나
저 계단에서
잠시 붙잡고 선 난간이 너의 뿌리였구나


2004 제1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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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을 엿보다


뼈와 뼈 사이에 살이 있다
벌어지고 구부러진 틈으로
검은 송사리 떼가 일구어놓은 물결이
살과 살을 잇는다
배를 묶어두는 밧줄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허공을 이어놓고
풀어내고 가두는 인연을 당길 때마다
흔들림을 정지시키며
배들을 튕겨주는 힘줄
송사리 떼가 들락이며 제 길을 넓힐 때마다
살과 살은 부드럽게 접혀지고
뼛속까지 출렁이는
이 오래된 계단을 따라
연하디연한 무릎 주름이 걸어들어간다

가만 보면
겹겹이 뜬 노곤한 봄날,누군가의
눈물 맺힌 밧줄이 풀리고 있다


2004 제49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 피어라,석유!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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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껍질을 보며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싸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살갗의 땀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돌처럼 견고했던 식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탁 모퉁이에서
사과 껍질이 몸을 뒤틀고 있다
살을 놓아버린 곳에서 생은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붉은 사과 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쥔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

껍질 한끝을 집어 든다
더듬을수록 독한 단내를 풍기는
철렁, 누가 끊었을까 저 긴 기억의 주름

까맣게 시간이 슬고 있다


2005년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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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장대 동백숲 / 정끝별


오백 년 동안 축축 늘어진 동백나무 가지가
바닥에 철렁 내려놓으며 들여놓은 동백나무 방들

미처 널어 말리지 못한 채 몇 철이나 쌓인
낙엽에 진 꽃에 어룽 햇살을 금침으로 깔아놓고

시간 없어 나 한 번 밖에 못했다며
젊은 아줌마를 앞세워 동백그늘을 나오는 아저씨라든가
그 나이에 한 번 허면 됐다며
추임새 좋게 동백 그늘에 드는 늙은 아줌마라든가

동백의 몸통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
동백의 팔다리는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

봄이 길다는 춘장대 옆 마량리 화력발전소 뒤
그렇게 한 오백 년 동안
춘정의 봄군불을 때다 그만 벌겋게 데기도 하는

오백 년 된 동백숲의 온 몸 동력
내연(內燃)의 한 천년은 들고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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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박깜박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통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봉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삼천갑자 복사빛 / 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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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관甕棺.1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에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근 길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 찬 항아리다


새로운 바람 / 다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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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나무


오십년째 이름없이 살던 참나무 한 그루
오늘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 되셨다
임학계 거목 김장수 씨 화장 유골이
살아 아끼시던 이 참나무 아래 묻혔으니
나무와 함께 살다 나무 곁으로 가셨으니
첫 겨울 개똥지빠귀 한 마리 놀러와
옹이에 앉아 휘파람 불어주고 있으니
참,나무 되어 장수하시겠다

손가락이 흰 자작의 딸이 아니었기에
어깨 처진 고배에 고배를 자작하였으니
언어를 호미 삼아 죽정밭 한 평쯤 자작하였으니
별똥을 쏟아내는 개똥벌레처럼
뼛속까지 하얗게 질린 채 자작거렸으니
나도 죽어 자작 나무 되어
별을 먹은 나무 되고 싶다

불힘 좋은 몸들,
나무들의 향기가 낯익다


유심 / 2004 가을호
오늘의 시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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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호수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이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아
맨발이었다

벗어놓는 신발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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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당신이 나를 지루해할까 봐
내가 먼저 멀리 당신을 던져봅니다
달아날 수 있도록 풀어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포기합니다
포기의 복수
포기의 쾌락
그리고 포기의 보상

당신은 늘 첫 떨림으로 달려옵니다

던졌다 당기고
풀렸다 되감기고
사라졌다 되돌아오는

천 갈래 던져진 그물 길
오요, 오요, 오 요요


삼천갑자 복사빛 / 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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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내 인생


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는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기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명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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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등뼈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시안 / 2006 가을호
2008 제22회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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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법칙


그래? 내 입과 두 눈에
네 손가락들을 깊숙이 박아봐!
그래? 날 던져봐!
잘 굴러갈 거야
네 빗장뼈를 타고 코불쏘뿔처럼 달려가
네 심장의 핀들을 모조리
으스러뜨려 놓을 거야
그래 너!
지금은 날 요리조리 애무하고 있지만
그래 나?
아직은 아직은 터질 듯 도사리고 있지만
그래 너?
언젠가 날 내던지고 말걸, 그 순간
그래 나!
네 검은 허파속을 돌진해
뚝 끊긴 지평선 너머까지 돌진할 거야
온옴으로 끝장내줄 거야

어때?
의심에 질린 맞수들의
스트-라이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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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락


반 평도 채 못 되는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 번을 내리치던 이 생生의 벼락
헐거워지는 네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 자락


제23회 2008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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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나무
-박수근 풍(風)으로


그 나무에 꽃 없다
피우지 못하고 꺾어버렸다
가슴에 더 할 말 없다고
사랑에게 뻗어가는 어깨 잘라버렸다
마음 다 펼칠 수 없다고
사랑에게 달려가는 발 묻어버렸다
문자 밖에서야 쓰여지게 될 것이라고
터져 나오는 꽃들 삼켜버렸다
그 나무에 숨 없다
뿌리처럼 비틀린
빈 목숨만이 붙어
옆얼굴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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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과 로맨스


처음 본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시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 앉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 앉아 한 번 더 마주 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 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 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 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 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 평생과
단 한 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 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네와 설렁탕집에


제23회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2008

~~~~~~~~~~~~~~~~~~~~~~~

까마득한 날에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밥 하면 순간 숨이 뚝 끊기는

밥들의 일촉즉발
밥들의 묵묵부답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

삼매三昧


직박구리가 목련꽃에 머리를 쑥 박고
이 뭐꼬! 꽁지를 한껏 치켜세운 채

검은 직박구리가 흰 목련꽃잎을
용맹정진 긴 부리로 촉 촉
장좌불와長座不臥! 가지에 힘껏 발톱을 박고

금세 한 목련 다 지고

목련 가지 끝 잎눈 하나가
하늘 경經 한 장을 바짝 끌어당기자
푸른 두 귀가 쫑긋,

벌어진 봄의 잎이란 무릇

세 그루 건너
배꼽마당처럼 허벅진 배꽃더미는
직박구리 봄의 무아無我다

~~~~~~~~~~~~~

산사춘


갈 수 없는 것 맞지?
봄바람에 사태 졌던
흰 꽃잎
발목 삔 잎들만 남았으니
꽃 핀 길
걸어 잠근 가시만 남았으니
취할 수 없는 거 맞지?
바람에 길이 막혔으니
영혼의 뿌리까지 다 내주어 버렸으니
다시 그 꽃,
피울 수 없는 거 맞지?
이른 노을에 물들어
붉게 맺히는 인연의
시린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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