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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알아보기]- 안공근, 안정근, 또한 누구인가...
2016년 07월 17일 18시 58분  조회:10330  추천:0  작성자: 죽림

 

안중근 장군 국내 유족대표인 안기수 안기려 자매가
국회 안 헌정기념관 앞뜰에 전시 중인 안중근 장군 동상을 찾아 참배했다.

안기수 기려 자매는 안중근 장군 친동생인 안정근 친손녀다.

안중근 장군에게는  정근 공근 두 남동생과 여동생 안성녀가 있었다.

안정근 공근 형제는 1910년 3월 9일과 10일에 중국 대련 려순감옥에 형 안중근을 면회했다.

이 자리에서 형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몇 가지 유언을 전한다. 그 중 하나가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라'하는 것이다.

두 동생은 형 안중근 순국 이후 가족을 데리고 연해주로 망명한 뒤 1919년 이후 중국 상해로 거쳐를 옮긴다. 그곳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선다.

막내동생 안공근은 한인애국단 단장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기획했다.

안공근은 1939년 전후해 의문의 죽음(행불)이 된다.

안정근은 해방후 귀국하지 않고 1949년 상해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안정근은 슬하에 아들로 원생, 진생 딸로 미생, 혜생,옥생, 은생을 두었다.

안진생은 미안마, 콜롬비아 대사를 지낸 바 있있고, 딸 미생은 상해에서 김구 선생 비서로 일하다가 김구 선생 장남 김인과 결혼한다. 그 사이에 딸 (효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해방직전 김인이 병사한다.

해방직후 미생(김구 큰 며느리 이자 안중근 남동생 딸)은 김구선생을 수행하고 함께 귀국한다.

그러나 김구선생이 암살 당한후 남북 단독정부 꿈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남한을 떠나 미국으로 홀연히 떠나 단 한번도 귀국하지 않았다. 수 십년 후 김구의 큰 손녀 효자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모녀의 소식을 잘 아닌 사람이 없다.

 

이번에 안중근 장군 동상을 만난 두 손녀는 안정근의 아들 안진생의 친딸이다. 안중근 의사는 큰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이들이 안씨 성을 가진 유일한 국내 유가족이다.

안중근 장군 직계는 안중근-안준생(한국전쟁 당시 부산서 사망)-안웅호(미국거주) -안 토니주니어(45세 미국 거주)가 있다. 안 토니 주니어가 안씨 성을 가진 안중근 증손자다.

안중근 장군 증손자, 안 토니 주니어는 오는 10월 26일 안중근 장군 의거 100주년 기념식과 안중근 동상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안중근 장군 직계는 미국에 있고, 동생 안공근 직계는 북한에, 동생 정근 직계는 남한에 있다. 남북통일이 되면 다 만날 수 있다. 또 다른 친인척 중에는 독일, 남미 파나마 등에 거주자도 있다. 뿔뿔이 헤어져 사는 상황이다.

1910년 3월 9일, 형 안중근을 면회하는 두 동생 정근과 공근(사진 왼쪽) 정근의 직계 후손은 남한에, 공근 직계 후손은 북한에, 안중근 직계는 미국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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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부터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안중근의 둘째 동생 안정근, 안정근의 아들 안원생, 안중근의 딸 안현생, 안중근의 셋째 동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

 

길림신문에서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 의사의 친조카 안원생이 충국에서 활약한 축구 스타이자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소개한적이 있다.

 

신문은 “안원생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1920년대로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축구선수이자 코치로 근 30년간 중국 체육계를 호령했다”고 빍혔다.

 

안원생은 황해남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출생했다. 안원생의 아버지 안정근과 큰아버지 안중근은 그의 할아버지인 안태호(安泰镐)한테서 태어났다.

 

간도에서 생활하던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은 러시아 내전을 피해 중국 흑룡강성으로 옮겨 살았다.

 

안원생은 상해교통대학을 졸업한 축구 스타였다.

 

중국 《민국일보》의 민국 19년(1930년) 1월 2일자에는 “…신국권, 안원생 등 주요 선수들이 축구기술이 매우 뛰여나 상해판을 들썩해놓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안원생은 1922년 6월 상해류학생축구단의 일원으로 첫 조선방문 축구경기에 참가하면서 조선의 축구무대를 누벼나갔다.

 

한국의 축구백년 사사전에는 “…안중근의사의 친조카인 안원생 선수도 교통대학의 축구팀과 함께 조선에 와 축구실력을 보였다…”고 적혀있다.

 

안원생은 교통대학 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북경연경대학(지금의 북경대학 전신) 축구팀의 감독으로 축구무대에서 활약했다.

 

1934년 4월 조선 축구팀은 중국방문 세번째 경기를 천진에서 치뤘다. 천진에서의 마지막 친선경기에 안원생이 출전하자 관람석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안원생, 안원생》하면서 환영하였다. 그 경기에서 조선팀과 지기는 했어도 안원생의 두드러진 기량은 수많은 관중들에게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원생은 조선 축구사업발전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해방 전 일찍 축구무대를 통해 조선축구팀, 연희전문대학축구팀(지금의 연세대), 평양축구팀 등의 중국방문과 중국주재 조선유학생, 중국인 화동팀 등의 조선 방문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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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광복절을 즈음해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해방 후 행적이 묘연해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과 중국에스페란토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인 안우생이다.
 
그는 1909년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 안공근의 장남으로 1907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안공근은 전 가족과 함께 1922년에 상해로 이주하여 김구의 측근으로서 독립운동에 활약했다. 이에 안우생도 1939년경 중경에 가서 항일전선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했으며, 1942년 9월 임시정부 개편 이후 편집부의 과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김구의 대회담당비서로 일했다. 그의 민족통일에 대한 신념과 노력은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남북연석회의에 김구를 수행했던 그는 1949년 홍콩으로 간 후에 아무런 소식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던 중 40년 후인 1986년 4월 19일 북한 노동신문에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 남북연석회의와 김구선생을 회고하면서”라는 논문이 안우생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일본 관서에스란토연맹 기관지에 이 논문의 저자가 바로 안우생이라는 기사가 실려 안우생의 생사를 몹시 궁금해 하던 많은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후 한국 언론이 그가 1991년 2월 북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 에스페란토를 구사한 어학의 기재(奇才)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와 교분을 쌓은 중국 에페란티스토들은 그가 특히 문학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가졌다고 말했다.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사>에서 그는 ‘엘핀’(Elpin)이라는 필명으로 중국의 대표적 애국문학가인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 ‘고향’, ‘백광’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했다는 글을 읽고 그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인으로 중국 근대문학의 최초 소설인 ‘광인일기’를 번역했고, 그가 번역한 소설 세편이 책의 4분의 1을 차지한 것 등에서 그의 에스페란토 실력과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쉰 소설을 번역한 세 작품 외에도 다른 역작이나 원작이 분명히 더 있을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 섰다. 헝가리에서 에스페란토학을 공부하면서 1991년부터 헝가리, 오스트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여러 편의 그의 문학작품들을 수집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 있던 문학잡지 <문학세계>(Literatura Mondo) 1934년 11월호에 게재된 안우생의 번역작품 김동인의 ‘걸인’과 함께 두권의 책(<루쉰문선>, <루쉰소설집>(Noveloj de Lusin), 네 개의 정기간행물(<원동사자>, <동방호성>, <중국보도>, <문학세계>)에서 모두 40편에 달하는 작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의가 1938-40년 중국의 홍콩, 청두, 중경에서 발간된 것들이다. 이것은 전부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고, 원작시 3편, 번역시 14편, 원작소설 2편, 번역소설 12편, 번역희곡 4편 그리고 기사 5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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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동생 정근, 공근

한국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가족적 유대가 남달리 강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부계(父系) 혈족을 중심으로 해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가족 내지는 가까운 친족들은 하나의 혈연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그 공동체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던 과정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냈던 이상룡(李相龍) 가문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시영(李始榮)의 집안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와 함께 안중근의 집안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대표적 가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안중근의 독립의지는 그의 두 동생들과 조카들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안정근과 그 자녀들

 

“식민주의는 민족주의의 학교”라고 누군가 말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주의의 형성은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안중근의 동생들에게 딱 들어 맞았다. 안중근에게는 안정근(安定根, 시릴로)과 안공근(安恭根, 요한) 두 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과 함께 안중근의 죽음을 통해 민족주의의 학교에 입학해서 민족 모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 동생들과 그 소생들은 남북한 사회에서 각기 높이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우선, 안중근의 손아래 동생인 안정근(시릴로, 1885-1949)은 안중근의 의거 이전에 이미 한씨 부인과 결혼했었고, 그들 사이에는 안원생(安原生) ‧ 안진생(安珍生) 두 아들과 안미생(安美生) 등 네 딸이 있었다. 안중근의 순국 후 안정근은 자신의 가족 및 모친과 안중근의 유족 등과 함께 우선 러시아령 연해주 꼬르지포에 정착했다. 이들의 연해주 정착에는 그 곳의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하여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도움이 컸다.

안정근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1914년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1915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노령(露領) 총감을 맡고 있었다. 1918년 11월 중국의 길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무오독립선언문’의 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3‧1운동 후 1919년 10월 경 그는 가족들과 함께 샹하이로 이주했다. 이들의 이주는 안중근의 맏아들 분도가 독살된 이후 안전한 활동근거지를 찾으려던 자신들의 소망과, 이미 샹하이에 집결해 있던 백범 김구(1876-1949)나 도산 안창호 등의 초청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샹하이에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참여하여 백범 김구와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후에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다.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 후 간도와 연해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샹하이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독립신문>의 발행인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간도 교민단(僑民團) 설립, 청산리 전투 보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25년경부터 신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고, 1939년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샹하이에서 1949년에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안정근의 자식들도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2남 4녀를 두었다. 그들 가운데 두 아들 안원생(安原生)은 샹하이 교통대학에 다닐 때 중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동한 바도 있었다. 그는 1943년 한독당 계의 청년조직인 한인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고, 한국광복군 인지(印支) 파견책임자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안진생(安珍生)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 흥인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그의 차녀 안미생(安美生)은 중국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임정 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맏아들 김인과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으로 백범 김구와 안중근의 가문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공근과 그 자녀들

안중근의 두 번째 동생은 안공근(安恭根, 요한, 1889-1940?)이다. 그는 원래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하여 교사로서의 생활을 접고, 중형 안정근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뻬쩨르부르크 및 모스크바에 머물며 러시아어를 연구했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안창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어 샹하이로 오게 되었다. 샹하이에 도착한 다음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 등을 상대로 하여 독립자금의 확보를 위해 활동한 바 있었다. 안공근은 샹하이로 귀임한 1925년 이후부터 모친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실질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1928년경 정화암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샹하이에서 빙과점을 운영한 바도 있었지만, 그 생활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는 1925년 샹하이로 귀환한 직후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이 서거했을 때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적 통일’을 강조했던 그의 유언을 필기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26년 여운형의 후임으로 샹하이 한인(韓人) 교민단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파생된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1927년에는 유일당 운동에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전민족 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과 함께 우파계열의 통일체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이사직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한독당의 별동대로서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인애국단’이 김구의 주도로 결성되자 안공근은 그 단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이봉창 및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한 조직이었다. 이 시기 일제의 정보보고서에는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안중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고 평한 바 있었다. 1930년대 그는 이처럼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최측근인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 한다. 그는 샹하이에서 미국 혹은 영국대사관에 통역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소련 영사관 및 독일 영사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서 국민정부의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정을 중국을 비롯한 외국정부기관 및 조선인 좌파 세력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결시켜주던 인물이었다.

안공근은 일제의 샹하이 침공과 유봉길의 의거로 인해 1932년 샹하이를 탈출할 때 자신의 어머니와 처자식 및 안중근의 자녀를 남겨둔 채 김구의 모친만을 모셔왔다. 이 때문에 그는 김구에게서 심한 질책을 당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안공근은 1934년 중국 낙양에 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고,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안공근은 1936년 김구가 주도해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 함께 참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김구 주석의 정보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7년부터 행방불명이 되던 1940년까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말 중경(重慶) 시절 김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안공근은 중경에서 샹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의 집을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해방후 경교장에서. 오른쪽부터 김구의 비서였던 安偶生, 白凡 金九, 金九의 자부(金仁의 부인) 安美生, 張佑植

안공근에게는 안우생(安偶生) 등 두 아들과 네 딸이 있었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거쳐 중국 광뚱에 있던 국립 중산대학(中山大學)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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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5월 30일 안공근의 실종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상징같은 존재라면 단연 안중근 의사다. 침략의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도 사건이려니와, 그 후 재판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격렬한 웅변, 그리고 일본 간수들과 변호인까지 감동시킨 고매한 인격과 뛰어난 경륜은 독립운동가의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이 아니라 황해도 해주 출신의 안씨 가문은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가운데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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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거사 당시 평안도 진남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 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 이후 온 가족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도왔던 빌렘 신부를 따라 독일에 유학함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 됐고, 무려 6개 국어에 통달한 임시정부의 국제통이자 정보통으로 활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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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구의 측근이었으며 윤봉길과 이봉창 등을 배출한 한인애국단의 핵심 간부였다.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원으로서 거사를 완수할 것을 선서한 곳이 바로 안공근의 집이었고 태극기 앞에 선 윤봉길의 마지막 사진은 안공근의 아들 안낙생이 찍은 것이었다. 또 그는 여러 무술에 능했던 바, 친일 행각을 벌이는 조선인들을 직접 처단하는 암살 조직을 지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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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가 1939년 5월 30일 갑자기 증발했다. 치과에 다녀오겠다고 길을 나선 후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도 찾지 못했다. 안공근의 딸은 중화민국 주석의 아내 송미령에게 진상을 밝혀 줄 것을 호소했지만 중화민국 정보기관의 수사도 헛되이 안공근은 영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납치 살해한 범인들의 정체는 대개 두 방향으로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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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국제 간첩 나검북의 소행이다. 일제 밀정을 추적하던 안공근이 나검북이 일제 밀정과 만나 정보를 전달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이 사실을 안 나검북이 상해에서 중경까지 추적하여 안공근과 교분이 있던 중국 관리 조웅으로 하여금 안공근을 불러내게 한 후 살해하여 폐광에 버렸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범 김구 또는 임시정부 내 기호계열의 소행이라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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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백범 김구는 대외가 아닌 독립운동 내부의 다툼에 있어서도 암살 등의 수단을 즐겨 활용한 사람이었다. 소련에서 제공한 공금유용을 이유로 중견 독립운동가를 없앤 것이 김구였고, 그 외에도 임정 내의 반대 세력이나 좌익들과는 피차 살벌한 음모전을 펼치기 일쑤였다. 이 와중에 안공근이 공금을 유용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김구와 소원해지고, 안공근 또한 김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 김구의 측군이 먼저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김구가 자신의 최측근으로 오래 활동했던 안공근, 개인적으로 사돈간이기까지 한 안공근이 한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기로서니 ‘제거’까지 시켰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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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안공근을 크게 힐난했던 것은 중일전쟁 후 일제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안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형의 가족들은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만 모시고 왔던 일에서 비롯된다. 김구는 안공근을 다시 들여보내 안 의사 가족을 모시고 오게 하려 했지만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만 겨우 데리고 탈출했다. 이는 이미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에서의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되지만 김구는 의외로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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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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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김구의 우려가 아주 틀리지는 않았던 것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간 안중근의 가족들은 그대로 ‘내선일체’의 표본으로 이용되어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를 하며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아버지가 구름을 치며 통곡할 일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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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생은 이 일로 ‘호부의 견자’로 치부된 가운데 한국전쟁통에 쓸쓸히 죽었고, 일본에 투항하기를 종용했던 안중근의 사위 황일청은 해방 후 피살당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939년 5월 30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안공근의 자식들 가운데 3남인 안민생은 평화통일 운동을 하다가 5.16 쿠데타 후 10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장남 안우생은 김구의 북한 방문 때 함께 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반역과 지조와 좌와 우에 걸쳐진 안중근 가족들의 가족사는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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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공근(安恭根)을 다시 알아보기...
 

안공근(安恭根, 1889년 7월 11일~1939년 5월 30일[1]?)은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교육자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관이자 한인애국단의 조직에 참여하였다.[2]

황해도 신천 출생이며 호(號)는 신암(信庵)이다. 그는 1909년 형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연좌되어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다가 러시아로 망명, 러시아 교민들을 지도하였으며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러시아 대사로 임명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한때 이동휘김규식 등을 따라 모스크바에 동행, 레닌으로부터 지원금 교부를 위해 노력했다.

그 뒤 한국독립당한인애국단의 재정 담당으로 활동하였으며 김구의 최측근이었으나, 자금 문제와 형 안중근의 가족 이주 문제로 김구와 갈등하던 중 암살되었다. 안중근·안정근의 동생이며 안태훈의 아들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천주교 영세명은 요한, 호는 신암(信庵)[3] 이다. 1937년부터는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이었으며, 중일전쟁 직후 형 안중근 부인 김아려와 가족을 데려오지 못한 일로 김구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이후 결국 결별하였다. 1939년 5월 30일 살해되었으나 암살의 배후는 미궁이다. 황해남도 출신이며 가명으로는 서이로(西利潞)·신암(信庵)·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등을 사용하였다.

 

 

친척 관계[편집]

활동[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진사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1879~1910), 안정근(1885~1949)이 그의 형이었다. 군수를 지낸 안인수는 셋째 아들 안태훈이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와 연관된 인연 때문에 가문이 피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깊이 우려하였고, 가산을 정리하고 7~80인의 가솔을 데리고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사연으로 안중근과 안정근은 해주읍 동문 밖에서 태어난 반면 안공근은 신천 청계동에서 출생하게 되었다.[4] 안공근은 부친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형들과 함께 성장하였고 1892년부터 1900년까지 형 안정근을 따라 한문사숙에서 수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5] 이후 진남포에서는 큰형 안중근이 가산을 처분하여 세운 2개의 학교 가운데 하나인 천주교 계통의 야학교인 삼흥학교(三興學敎)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6]

수학과 망명[편집]

1899년 일어학교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안공근의 일어 실력은 만주 여순에서 안중근의 동생 자격으로서 참고인 시문을 받을 때에 통역 없이 일어로 대화를 나눴을만큼 뛰어났다.[6] 1907년 3월 서울로 올라왔다. 안공근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속성과로 6개월 과정을 마쳤다.[7] 그 뒤 1908년 8월 판임관 4등에 임용되어 진남포 공립보통학교 부훈도로 발령받았다.[8]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9년 안중근 의거 직후 러시아로 망명한다.[9] 당시 진남포보통학교에서 맡던 그의 직책은 정교사가 아닌 부교사로, 당시 부훈도라고 불렀다.[10]

1909년(융희 3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 직후, 공범혐의로 1개월 남짓 심문을 받았고,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이 유언을 남기는 최후까지 함께 했다.[3] 수시로 형 안중근을 면회다녀왔으며, 조선총독부 등의 탄압과 주변의 불편한 시선이 계속되자 그는 망명을 결심, 자금과 인력을 모아 치밀하게 준비한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편집]

임시 정부 참여[편집]

 
충칭 임시정부 청사.
 
김구

1910년(융희 4년) 러시아로 망명한 그는 형 안중근의 뜻에 따라 러시아어를 배웠고,[2] 해외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안중근 기념사진 엽서를 발행하였으며 첩자 김정국(金鼎國)을 처단하였다.[11]

1920년 12월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의사회 의원이 되고, 192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황해도 지역구 의원이 되었다.

1921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러시아 대사에 임명되어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외교를 벌였다.[2][11]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으며, 상해 교민단, 독립운동 촉성회,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형 안정근은 안중근안정근 등과 사적인 인연이 있던 도산 안창호와 친하게 지내며 형님, 동생이라며 호형호제 하였지만 그는 안창호를 멀리하고 김구를 가까이 하였다. 이후 그대로 김구의 측근이 되어 조소앙엄항섭 등과 함께 의거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였다.

러시아 활동과 귀환[편집]

1922년 5월 러시아 정부에 구두보고를 보내 3.1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소비에트정부의 이동휘대한 지나친 믿음은 잘못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12][13]1922년에는 한때 이동휘김규식 등을 따라 모스크바에 동행, 레닌으로부터 군자금 잔액 140만 루불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

1924년 2월 가족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이주했고 1925년 가족들을 이끌고 위해위로 요양하러 떠났다.[14] 1926년 안원생(형 안정근의 장남)과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하였다.[15] 1926년 상하이 한인교민단장에서 물러난 여운형을 대신하여 상하이 한인 교민단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상하이에서 이유필최창식오영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고, 철저한 독립운동가의 조직적 대단결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해 5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직을 사퇴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16] 안창호의 측근들은 그에게 지지를 호소하였지만 그는 안창호 지지를 거부하였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촉성회가 구성되고 1927년 4월 상하이에서는 전민족독립당이 창당되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인 홍남표정백 등이 전민족독립당을 공산,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려 하자, 그는 참여를 거부하고 탈퇴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석을 거부했는데도 전민족독립당에서는 계속 집행위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을 두고 있었다.

한인애국단 활동[편집]

 
한국독립당특무대(한인애국단의 전신) 대원 이봉창의 사진(1931년경)
 
김구와 윤봉길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으며 단원의 모집과 관리, 통신연락, 특무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11] 일제 요인과 친일파 암살을 주관하였다.[2] 동시에 안공근은 서무와 재정, 자금 조달과중화민국 장제스쑹메이링, 오철성 등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교류 및 후원금을 운반하는 활동을 하였다.

한인애국단의 본부는 안공근의 집에 설치되었고, 따라서 한인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은 안공근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윤봉길이 출정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그의 차남 안낙생이 자기 집에서 촬영한 것이라 한다.[17]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 등을 도왔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 및 후신인 한국특무대독립군의 운영을 맡아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2][9] 한국국민당 이사,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11] 이때 공식, 비공식 활동에 분주히 돌아다니던 안공근은 일제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서이로(西利潞)·신암(信庵)·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등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18] 이 시기 상하이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밀정들의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대부분 안공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하여 그가 김구의 의거 행위를 여러가지로 도왔음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에게서 받은 지원금을 사적인 목적으로 쓰다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눈밖에 나게 된다. 1930년대 윤봉길의거 이전 어느 시기에 위혜림과 함께 한 중국 광동인의 술수에 말려들어 수천 달러를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19]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도박 자금으로도 탕진하는 등의 행위가 계속되자 이는 김구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1933년에는 박찬익엄항섭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친일 조선인인 상해한국인친우회위원단 유인발을 제거하였고, 친일파 변절 의혹이 있는 옥관빈을 암살하였다.

1934년 6월경부터 외교술로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임무를 맡아온 박찬익을 대신하여 중국측과의 교섭임무를 맡게 되었다.[20]

김구와의 갈등과 만년[편집]

독자적 활동[편집]

193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가 그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2월 안공근은 장남 안우생과 함께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8월 한인애국단 대표로서 미국내 한인독립운동단체와 연명으로 한국당호운단체(韓國黨護運團體)의 중일전국(中日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같은달 8월 17일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국내 한인독립운동 9개 단체를 토대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서 1938년까지 활동하였다.[9][21]1937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이는 그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그의 신분이기도 했다.

김구와 결별[편집]

 
1930년대 초의 김구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자신의 큰형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22]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22] 중일전쟁 후 일제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김구는 안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형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들 조차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 우선 데리고 나왔다. 당시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16][23] 이를 두고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16] 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며 안공근을 질타하고 꾸중하였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16] 당시 상하이는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므로 전황이 좋지 않았으나 김구는 안공근이 형수를 모셔오지 못했다고 크게 질책했다.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24][25]"

오영섭에 의하면 '안공근이 김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김구로부터 신망을 읽었으며 그로 인해 김구의 단체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는 위의 기록을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26]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안공근 자신에게 쏟아질 것임을 누구보다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 형의 가족을 함께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의 현지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26]'라는 결론을 내렸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하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며 오히려 총독의 양자를 자처했고, 사위 황일청은 전향하여 일본에 항복할 것을 독려하다가 광복 직후 피살되기도 했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해서 안공근의 부도덕성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26] 함락된 상하이에서 형수와 형의 유족을 구해오지 못한 일로 심한 꾸중을 들은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실종과 암살[편집]

1939년 5월 충칭에서 실종되었다고 한다.[11] 충칭에 있을 무렵 그는 상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의 집을 출입했는데, 유진동의 집에 출입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27] 유진동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한때 김구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5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그러나 살해범은 찾지 못했으며, 안공근의 시신 역시 찾지 못했다. 향년 51세.

안공근의 딸 안정생은 쑹메이링에게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잡아줄 것을 청원, 쑹메이링의 청으로 다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경찰이 상하이를 수색하였으나, 용의자는 끝내 잡지 못하였다. 안공근의 암살 배경에는 일본의 스파이에 의한 암살설, 중국계 마적단에 의한 암살설, 안공근과 갈등하던 김구의 다른 측근에 의한 암살설이 있다.[28] 또한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한 암살설[27] 도 있다.

사후[편집]

범죄자를 찾아서 처벌해줄 것을 요청한 피해자 안공근의 딸 안정생의 부탁 편지를 받은 쑹메이링의 청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경찰은 상하이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고, 미궁으로 남게 됐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고 아들인 안우생은 광복 후 1948년 4월 김구를 따라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김구 사후 홍콩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80년대 북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알려졌다

정부로부터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9] 그의 사인으로는 그와 갈등관계에 있던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에 의한 암살설, 국제간첩인 나검북(羅劍北)에 대한 암살설 등이 있다.[28] 참고로 한겨레에 임정의 역사를 다룬 [길을 찾아서]를 연재 중인 김자동 씨에 의하면 안공근의 시신을 한인 의사 유진동의 집에서 처리했다고 한다.

김구와의 갈등[편집]

안공근이 중국 국민당 정권에게서 지원받은 공금을 사적으로 사용하거나 도박 등에 돈을 날렸고 이 일로 김구와 소원해지게 된다. 특히 중일전쟁 직후 그는 형인 안중근의 일가족을 한국에서 데려오라는 김구의 지시를 받았으나, 일본 경찰의 추격으로 데려오지 못하고 자신의 가족만 비밀리에 선박으로 상하이로 데려왔다. 그러자 김구는 형님 의사(義士)의 가족은 데려오지 못하고 자신의 가족만 데려왔느냐며 안공근을 질책하였다. 김구의 질책에 화가 난 안공근은 임시정부의 가족 이동에서 빠지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광동인의 술수에 말려들어 수천 달러를 사기당했다.[19] 이는 한인애국단과 임시정부의 자금으로 모금했던 돈이라 김구 및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눈밖에 나게 됐다. 또한 그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임정 주석직에서 김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다.

평가[편집]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22] 이를 두고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16] 고 평가했다.

그의 씀씀이가 헤픈 것과 사치에 대한 비판도 있다. 당시 중국 관내에서 활동한 일반 독립군들의 생활수준은 일신을 지탱하기에도 넉넉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지원금을 관장하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안공근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29]

학력[편집]

기타[편집]

1925년 프랑스 불조계 공무국이 작성한 보고서에 김구이시영노백린김규식김약산여운형이유필 등과 함께 중요한 한국인으로 분류되었다.[14]

2008년 7월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1][2][9]

가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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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부: 안인수(安仁壽), 진해현감 역임
  • 조모: 제주 고씨
  •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1905), 진사
  • 어머니: 조마리아(趙마리아)
  •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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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 안우생, 묘는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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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녀 : 안기애
      • 손자 : 안기철
      • 손자며느리 : 김씨, 남로당 제주도 유격대장 김달삼의 딸
      • 손자 : 안기호
      • 손자 : 안기영
      • 손자며느리 : 김씨, 김일성의 측근 김병식의 딸
    • 아들: 안낙생
    • 딸 : 안씨
    • 사위 : 한지성(韓志成), 한국전쟁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 딸 : 3명
  • 형: 안중근(安重根, 1879~1910)
  • 형수: 김아려
  • 누이: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 형: 안정근(安定根, 1885~1949),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 조카: 안준생, 안중근의 아들
  • 조카: 안원생(安原生), 안정근의 아들
  • 조카: 안진생, 안정근의 아들. 미얀마 대사 역임
  • 종손: 안웅호(安雄浩), 안준생의 아들이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 이동:  국가보훈처 (2008년 7월 1일). ““호국영령 영원히 기억할 것””. 나라사랑. 8면 상단면.
  2. ↑ 이동:        장일현 기자 (2008년 6월 30일). ");">“7월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조선닷컴.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3. ↑ 이동:  서정훈 기자 (2008년 6월 29일). ");">“안공근 선생 7월의 독립운동가”. 뉴시스.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4.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65~266p
  5.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66p
  6. ↑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67p
  7.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67~268p
  8.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68p
  9. ↑ 이동:     진성훈 기자 (2008년 7월 1일). ");">“7월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한국일보.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10. 이동 교사는 훈도라고 불렀다.
  11. ↑ 이동:     고경호 기자 (2008년 6월 30일). ");">“7월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선정”. 대전일보. 14쪽면.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12.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83~284p
  13. 이동 고정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고정휴, 2006,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92~93p
  14. ↑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4p
  15.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7p
  16. ↑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8페이지
  17.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90p
  18.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6p
  19. ↑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8p
  20.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3p
  21.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7p
  22. ↑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0페이지
  23. 이동 한시준,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138쪽
  24.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0~301페이지
  25. 이동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엮음) 361~362페이지
  26. ↑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1페이지
  27. ↑ 이동: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가톨릭뉴스 2008년 07월 29일자
  28. ↑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2~303p
  29.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2페이지

참고 서적[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2007. 경인문화사)
  • 고정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2006)
  • 한시준,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엮음,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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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근, 알아보기...

안정근(安定根, 1885년 1월 17일 ~ 1949년 3월 1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이력[편집]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일명은 안청(安淸), 안정근(安正根)이고 황해도 신천출생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생애[편집]

그는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의 친아우이고 독립운동가 안공근(安恭根)의 친형이며 안명근(安明根)의 사촌 남동생이고 독립운동가 김인(金仁, 백범 김구의 첫째아들)의 장인이다. 김구(金九)의 첫째아들 김인(金仁)의 부인이기도 한 독립운동가 안미생(安美生)은 그의 딸이며 독립운동가 겸 외교관 안진생(安珍生)은 아들이다.

1939년 병을 얻어 와병하기 시작하였고 홍콩(香港)과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中華民國 江蘇省 上海,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를 전전하였으며 1945년 일제가 패망한 8.15 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본토에 머물러 있다가 1949년 3월 17일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에서 병사하였다.

사후[편집]

사후에는 생전의 그가 세운 독립 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가족 및 친척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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