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연주자에게 이메일로 질문을 보낸 뒤 답장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아도 1주일. 열흘이나 보름이 넘어가면 그야말로 ‘인내심 테스트’가 되기 일쑤다. 하지만 영국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스티븐 허프(59)는 정반대로 딱 52분 걸렸다. 퇴근 전인 오후 6시 22분 한국에서 질문을 보냈더니, 퇴근 중인 오후 7시 14분쯤 질문마다 대여섯 줄의 영어 답변이 빼곡하게 적힌 그의 답신이 ‘받은 편지함’에 들어와 있었다. 보낸 편지가 반송된 줄 알고 퇴근 버스에서 깜짝 놀랐다.
60여 장의 음반을 내놓은 정상급 피아니스트, 30곡이 넘는 자작곡을 발표한 작곡가, 음악과 종교에 대한 책은 물론이고 소설까지 펴낸 작가. 세계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에서는 이런 그에게 ‘박식한 피아니스트(polymath pianist)’라는 별명을 붙였다. 정작 그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전혀 좋아하지 않는 별명!”이라고 했다. 허프는 이달 말 발표하는 새 음반 ‘덧없는 인생(Vida Breve)’에서 한국 민요 ‘아리랑’을 직접 편곡하고 연주했다. 2019년 내한 무대에서도 그는 앙코르로 ‘아리랑’을 연주했다. 이 영상은 예술 채널 아르테의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아리랑'을 녹음하게 된 계기는.
“한국 공연을 앞두고 말레이시아에서 친구와 점심 식사 자리에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가 뭔지 물었다. 특별한 걸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그 친구가 ‘아리랑’의 악보를 건네줬다. 단순한 아름다움(simple beauty)에 첫눈에 반했고 앙코르용으로 편곡했다. 아시아 각국에서도 이 노래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아리랑' 원곡의 매력은.
“유튜브에서 들어보았는데 멜로디가 자연스럽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예상 가능한 듯하면서도 놀라움을 선사하는 선율의 모양새와도 연관이 있다. 편곡할 때도 원곡의 단순함과 전통적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했지만, 몇 군데에서는 서구적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노래를 연주하는 이유는.
“언어·정치·종교를 떠나서 음악은 세상을 통합시키는 힘이 있다. 음악을 듣는 순간만큼은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베토벤처럼 유명한 작곡가뿐 아니라 요크 보엔이나 페데리코 몸푸처럼 덜 알려진 작곡가도 열심히 조명하는데.
“우리가 연주하는 모든 곡이 걸작일 필요는 없다. 몇몇 위대한 작품만이 아니라 음악사의 샛길들(byways)을 탐색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보엔은 영국 낭만주의 음악을 공부하다가 발견했고, 몸푸는 내가 꼬마였을 때 처음으로 들었던 음반이었다. 진실성과 단순성이 깃들어 있는데, ‘아리랑’과도 그리 멀지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연주자들도 집이나 스튜디오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일상에도 변화가 있는가?
“팬데믹 기간에 예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한다. 6장의 음반을 만들었고, 작곡·편곡도 많이 했다. 첼리스트 요요마의 음반에도 내가 편곡한 두 곡이 들어갔다.”
-한국을 다시 찾을 계획은.
“올해 6월쯤 대전과 서울에서 연주가 예정되어 있다. 제발 바이러스와 여행 상황이 나아져서 한국 음식을 다시 맛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너무 맵지만 않다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