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연출과 제작은 미국인데, 주연 배우는 한국계이고 사용 언어는 한국어라면 어느 나라 영화일까요? 이전까지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었던 질문을 던질 때가 왔습니다. 한국계 미국 영화 감독 리 아이작 정(한국명 정이삭)의 ‘미나리’ 덕분입니다.
살짝 과장을 보태면 이 작품은 오는 4월로 예정된 미 아카데미 시상식을 향해서 ‘쾌속 질주’를 하는 중입니다. 지난해 미 선댄스 영화제 최고상인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거머쥐더니, 최근에는 로스앤젤레스와 보스턴 등 미 현지 영화 비평가 협회상을 연이어 받고 있지요. 미 연예 매체들도 이 작품을 미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과 각본상, 여우조연상 등 주요 부문의 후보로 점찍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의 전초전’부터 청신호가 켜지고 있는 셈입니다.
방금 전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미나리’의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이고, 제작은 배우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영화사인 플랜 B가 맡았습니다. 연출과 제작 기준으로는 분명 ‘미국 영화’인 셈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셈법이 복잡해집니다. 영화는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가족이 남부 아칸소의 시골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봉준호 감독의 ‘옥자’로 친숙한 한국계 미국 배우인 스티븐 연과 한예리가 한인 부부, 윤여정이 딸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는 친정 어머니 역을 맡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영화의 절반 이상을 한국어 대사가 차지하지요. 어쩌면 ‘미국 영화계가 제작한 한국어 영화’가 정답에 가장 근접한 답변일지도 모릅니다.
최근 ‘미나리’를 둘러싸고 미 영화계에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다음달 열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본상인 작품상이 아니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라갈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지요. 시상식을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의 규정에 따르면 대사의 절반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에는 외국어 영화로 분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나리’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보도가 나온 직후, 아시아계 영화인들은 이 규정이 ‘차별 조항’이라고 반발했지요.
잠시 이야기가 곁가지로 빠지는 감이 있지만, 여기서 2017년 골든글로브 공로상을 받은 메릴 스트립의 수상 소감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네요.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 미국 사회에서 비난 받는 집단에 속해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할리우드, 외국인, 그리고 기자들이라니요(All of us in this room belong to the most vilified segments in American society right now. Think about it: Hollywood, foreigners and the press).” 스트립의 소감처럼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에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요소가 세 가지나 들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나리’를 둘러싼 최근 논란이 보여주듯이 이 영화는 한국과 미국의 영화적 경계선에 있는 작품입니다. 한국 관객들이 느낄 법한 자긍심과 미국의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반발은 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지요. 영화는 정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는 국내 언론과의 영상 인터뷰에서도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일화를 제 가족의 이야기에서 가져왔다”고 말했지요.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정 감독은 영화의 배경인 아칸소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예일대를 졸업한 뒤 영화계에 뛰어들었습니다. 국내에서 350만 관객을 동원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할리우드 실사판 리메이크가 그의 차기작입니다.
오는 3월쯤 극장 개봉 예정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많지 않습니다. 지난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 1박 2일의 짧은 출장길에 이 영화를 관람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뒤에 소감을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제 영화적 경험의 폭을 넓혀주는 작품”이라고 말이지요. 과연 ‘미나리’는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까요. 그렇다면 한국과 미국 영화계 가운데 어느 나라에 기쁜 소식일까요. ‘미나리’의 선전에 관심이 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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