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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2016년 11월 30일 20시 15분  조회:3952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박상천 /시인, 한양대 교수


4. 시의 언어는 왜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는가?

언어가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언어와 사물을 동일시하기 쉽다. 그러나 언어가 곧 사물은 아니다. 언어는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연필’ 두 자루가 있다고 하자. 이 두 자루의 연필은 각각 별개의 사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가지 별개의 사물을 모두 ‘연필’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러한 언어 사용법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두 자루의 연필 중에 하나를 A라 하고 또다른 하나를 B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의 언어 사용법으로 볼 때, A〓연필, B〓연필이고 이 명제에 따라 ‘A〓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A와 B는 서로 다른 사물이므로 ‘A〓B’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다. 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가? 그 까닭은 ‘A〓연필’, ‘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물과 언어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또한 사물 개개의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자의적으로 붙여진 이름(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연필’이라는 언어는 연필 하나하나에 붙여진 개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필의 공통적 속성(흑연 심을 가느다란 나무때기 속에 넣어 만든 필기도구)에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

개별적인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공통적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언어의 성격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불완전한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A가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B도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말한 ‘슬픔’은 동일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의 ‘슬픔’이 동일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슬픔’이라는 말은, 모든 이들이 가진 그 다양한 ‘슬픔’의 공통적 속성(뜻밖의 일에 낙심하여 눈물이 나거나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느낌)을 뽑아내어 ‘슬픔’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슬프다’ 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이 지닌 개별적인 ‘슬픔’의 진실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는 일상의 언어가 지닌 이러한 추상성과 불완전성을, 언어를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슬픔.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슬픔의 진정한 모습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한 노력이 시를 탄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시는 비유, 묘사, 상징, 이미지 등 다양한 시적 장치들을 동원하여 사물의 공통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 개별적 사물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시에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인 사용법이 아닌 언어의 비정상적 사용법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셈이다.

5. 시의 언어는 의사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사회적 약속을 지켜 언어를 정상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언어의 정상적 사용법을 무시하고 깨뜨리고 왜곡한다. 따라서 시는 언어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언어와는 달리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그다지 효율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 시를 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정상적 용법으로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는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의사 소통을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시는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시도 언어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의사 소통의 목적을 위해 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의사 소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때 시는 일상의 언어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생각해보자. 의사 소통이란 발신자(말하는 이)가 어떤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말 듣는 이)에게 ‘내용’을 보내고 수신자는 매체를 통해 받은 ‘내용’을 해독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과정이 제대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발신자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내야 하고 수신자는 발신자가 매체를 통해 보낸 내용을 발신자가 의도한 내용대로 해독하여야만 한다.

만약에 발신자가 보낸 내용이 수신자가 해독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거나 또는 발신자가 보낸 내용을 수신자가 임의로 해석하게 되면 의사 소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인은 발신자, 시의 언어는 매체, 독자는 수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에 따라 시인은 독자가 해독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에 따라 시를 해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어떤 세계를 창조하였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인이 창조해 놓은 세계를 해독할 뿐이다. 즉, 시인은 독자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를 알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시는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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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 김제현(1939∼ )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이 작품은 시조다. 시조 하면 대개 딱딱한 형식을 연상하지만 이 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편안하게 읽힌다. 게다가 참 좋다.

 그저 따라 읽기만 했는데도 맑고 청량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맑은 이유는 이 시가 산속 절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공기가 맑은 곳, 정신이 맑아지는 곳에 시가 있으니 맑을 수밖에 없다. 청량한 이유는 이 시가 언어로 적혀 있지만 언어가 없는 세계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제현 시인은 시에서 탁한 것을 몇 번이고 여과해서 기존의 생각과 이미지를 정화하고 있다.

 시의 처음, 우리는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을 만나게 된다. 풍경은 분명 종의 일종이지만 사실 그것은 일종의 소리에 가깝다. ‘뎅그렁’ 울리면 비로소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풍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풍경을 만나, 과감히 그것을 지운다. 사람들이 듣는 것은 다만 소리일 뿐, 안에 담겨 있는 적막의 의미까지는 모른다. 정말 봐야 할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다. 정말 들어야 할 것은 풍경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퍼지는 전체의 분위기와 느낌이다.

 고요한 산속에서 바람 따라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 몹시 오묘하고 색다르다. 조금 과장하자면 세상의 잡음과 다른,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소리라고 할까. 풍경 소리를 들으면서 한참 앉아 있으면 지금까지 집착하던 욕망들이 참 헛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느낌과 마음을 시인은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무상이란, 그 위에 뭘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는 뜻이다. 별빛만 무상일까. 이 시도 무상의 작품이다. 그 위에 무엇을 더할 수 없이, 맑고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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