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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이탈리아 문단을 이끈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자이다. 16세 대 첫 시집 <이른 봄에>를 펴냈다. 이후 개성이 뚜렷한 시집 <새로운 노래>, 자전적 소설 <기쁨의 자녀>, 단눈치오 시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하늘·바다·땅·영웅을 예찬하며>를 펴내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군에서 여러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공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전투 중 한쪽 눈을 잃었다. 1919년 300여 명의 지원병들과 함게 달마치야 항구를 점령했으며, 1920년 12월까지 집정관으로서 피우메를 다스렸다. 그뒤 파시스트가 되어 베니토 무솔리니로부터 훈장과 함께 국정판으로 작품집을 펴내는 포상을 받았고, 이후 은둔하면서 회고록과 고백록을 썼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이탈리아 문단을 이끌었다.
저명한 정치가이자 페스카라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로마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6세 때 첫 시집 〈이른봄에 Primo vere〉(1879)를 펴냈다. 시집 〈새로운 노래 Canto novo〉(1882)는 개성이 더 뚜렷하고 활기가 넘치며, 정열적이고 감각적인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자전적 소설 〈기쁨의 자녀 Il piacere〉(1898)에서는, 이후 그의 소설에 많이 나오는 니체의 초인과 같은 정열적 주인공이 첫선을 보인다.
〈침입자 L'innocente〉(1892)에도 그러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죽음의 승리 Il trionfo della morte〉(1894)를 발표할 무렵에는 그는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이 소설과 그뒤에 발표한 대표작 〈바위산의 처녀들 Le vergini delle rocce〉(1896)에는 악독할 정도로 이기적이며 철저하게 비도덕적인 니체적 주인공이 등장한다.
단눈치오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시 부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서정시집 〈하늘·바다·땅·영웅을 예찬하며 Laudi del cielo del mare della terra e degli eroi〉(1899)이다. 이 연작시의 제3권 〈알키오네 Alcyone〉(1904)는 토스카나 지방 여름의 냄새·맛·소리·사건들을 그려낸 작품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단눈치오 시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다. 1894년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와 오랜 기간 계속된 불륜의 관계를 시작했고, 그녀를 위해 비극 〈조콘다 La gioconda〉(1899 상연)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Francesca da Rimini〉(1901 상연)를 비롯한 희곡을 쓰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쓴 관능적인 소설 〈불꽃 같은 삶 Il fuoco〉(1900)에서 둘의 관계를 드러냈다. 가장 뛰어난 희곡은 아브루치 농민들의 두려움과 미신을 그린 힘찬 시극 〈이오리오의 딸 La figlia di Iorio〉(1904 상연)이다.
뒤이어 여러 편의 희곡과 장편소설 1편을 발표했으나 그 수입으로는 사치스런 생활을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빚을 지게 되어 1910년 프랑스로 피신해야만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탈리아도 참전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이탈리아가 참전을 선언한 뒤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군에서 여러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마지막으로 공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전투중에 한쪽 눈을 잃었다.
1919년 300여 명의 지원병들과 함께 베르사유 조약에 반기를 들고 피우메의 달마치야 항구(지금의 유고슬라비아 리예카)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정부와 연합국 측에서는 이곳을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주로 합병시키자고 제안했으나, 단눈치오는 이탈리아에 속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 12월까지 집정관으로서 피우메를 다스리다가 이탈리아 군부의 강압에 못이겨 통치권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행동으로 피우메에서 이탈리아의 이권을 확보했으며, 이 항구는 1924년 마침내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뒤 열렬한 파시스트가 되어 베니토 무솔리니로부터 훈장과 함께 국정판으로 작품집을 펴내는 포상을 받았으나, 이탈리아 정치에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 롬바르디아의 가르도네리비에라로 은둔하여 회고록과 고백록을 썼다(피우메 문제).
다채로운 경력, 말썽 많은 연애사건, 전시에 보여준 대담성, 2차례의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발휘한 정치적 지도력과 웅변술 때문에 그는 당대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문학작품들은 자기중심적인 관점, 매끄럽고 음악적인 문체, 여성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통해 얻은 감각적 만족감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점 등이 특징이다. 〈밤중 Il notturno〉(1921)을 비롯한 몇몇 흥미로운 자전적 작품을 빼면 산문은 지루한 느낌을 준다. 또한 당대의 사상과 양식을 지나치게 받아들인 까닭에 다른 작가들의 영향을 무분별하게 반영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부분의 희곡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지만 〈이오리오의 딸〉만은 힘차고 박진감있는 인물묘사로 돋보인다.
시인 단눈치오의 위력은 풍부한 감수성에서 나온다. 일찍이 〈이른봄에〉와 〈새로운 노래〉에서 여인과 자연을 사랑하는 소년의 넘치는 건강과 젊음의 패기를 명료하고도 힘있게 그려내는 놀라운 재능을 보인 바 있다. 비록 그뒤의 시에서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주제로 돌아섰지만, 성숙기의 대작 〈하늘·바다·땅·영웅을 예찬하며〉, 특히 제3권 〈알키오네〉에서 넘쳐흐르는 생명력을 되찾았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새롭고 음악적인 형식을 찾아냈다.
〈알키오네〉에 실린 시 가운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감각적이고 환희에 찬 느낌을 표현한 몇 편은 이탈리아 현대시의 걸작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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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년 ~ 1938년)는 이탈리아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이다.
아브루치의 페스카라에서 태어났다. 카르두치의 영향을 받은 1880년 시집 <조춘(早春)>으로 인정받았다. 정력적인 작가로 시집 13권, 단편집 4권, 소설 8권, 극작 17편, 그 밖에 평론, 산문집 등이 있다. 1893년에 <죄없는 자>의 불역(佛譯)이 나와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1910년에 빚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조국 이탈리아의 참전을 주장하고 귀국, 그해 7월 의용군에 가담하여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그 이듬해 비행 중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다. 종전 후 국제 연맹의 결정에 항의하여 피우메 시(市)를 점령하는 장거를 감행하였다. 1921년 동시를 자국군에 인계하고 귀국, 1924년 몬테 네보소공(公)으로 봉(封)함을 받아 파쇼 정부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1938년 가루다 호반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프랑스 자연주의와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시는 풍부한 시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활기에 찬 운율로 생의 환희를 노래하며 관능적 미가 넘치는 것이었다. 특히 <하늘과 땅과 바다와 영웅의 찬가>중의 제3권 <알초네>(1904) 가운데에 우수작이 많다. 19세기 말 퇴폐적인 남부 유럽적 향락을 구가하는 소설도 많이 썼는데, <쾌락>(1889), <죄없는 자>(1892), <죽음의 승리>(1894) 등이 걸작이다. 육체의 쾌감을 추구하면서 항시 불안에 괴로워하는 향락주의자의 심리를 시와 같이 응축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어느 작품에나 대중 취향을 꺼려한 니체적인 초인사상(超人思想)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한없는 미의 추구자이던 그는 동양 문물에도 흥미를 가져 이를 작품 속에 취급한 것이 있다.
1898년 <봄의 새벽꿈>을 가지고 극단에 등장했다. 이듬해에 발표된 <가을 저녁의 꿈>과 함께 대화체의 시(詩)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연극성은 빈약하다. 산문으로 쓰여진 3작품 <죽은 마을>(1898) <라 지오콘다> <영광>(1913)도 지나치게 대사에만 의존하여 무대에서의 성공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낭만파가 묘사한 중세라는 이질적인 피비린내나는 황량한 세계에서, 단테로부터 힌트를 얻어 엮은 사랑의 이야기를 전개한 시극(詩劇)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902)는 단눈치오의 본령(本領)을 보인 것이며, 또한 <요리오의 처녀>(1904)는 원시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농민극으로, 신앙의 기적과 동물적인 욕정의 대립에 고도의 긴장을 보이는 걸작으로, 각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배(船)>(1906)는 고도의 서정성이 있는 작품으로서 연출가에게 큰 흥미를 주며, 그리스 비극에서 취재한 <페드라>(1909)와 함께 주목된다.
그는 단신에 과히 뛰어난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면 어떤 귀족 부인이든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을 지녔다. 부드러운 음색과 달콤한 수사어로 상대를 찬미했으며, 과감하고도 은근한 눈길로 여성을 사랑에 빠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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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포트=문지연 기자] =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정신적 지주가 된 시인 단눈치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이하 서프라이즈)에서는 피우메를 차지한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탈리아의 방해에도 피우메를 차지했던 단눈치오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후 무솔리니의 집권 기간 동안에는 전쟁 영웅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손을 잡기로 했으나 피우메 영토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이에 승전국이 됐지만 피우메를 차지한 단눈치오 탓에 피우메는 묶인 땅이 되고 말았다.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그를 따르던 2000여명의 추종자와 함께 피우메를 점령했고 이에 이탈리아는 적당한 때를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단눈치오는 피우메를 자유사상으로 통치했고 이에 이탈리아 국민들은 거주지를 점점 옮기기 시작했다.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단눈치오 정권은 생각보다 오래 가며 이탈리아의 골치를 썩였다.
이탈리아는 피우메를 무력으로 차지하지도 못한 채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탈리아는 피우메를 차지하기 위해 식량보급로를 차단했다.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이 작전에도 피우메는 끝까지 이어갔다. 단눈치오가 독립국으로 인정 된다면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에 따라 경제적 지원이 이뤄질 것이고 이 전에 이탈리아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결국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과 조약을 맺고 공동 관리하기로 했다.
결국 단눈치오의 자유사상은 피우메의 규제와 도덕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매음굴에 범죄 소굴로 불리는 등 불명예를 안은 것. 이에 이탈리아는 단눈치오를 내려보낸 뒤 이탈리아로 데려왔고 피우메를 차지할 수 있었다. 5년 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집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정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로 존경했다.
무솔리니는 1938년 열린 단눈치오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이탈리아 국왕은 무솔리니의 청에 단눈치오를 몬테네보소공으로 봉했고 직위를 줬다. 단눈치오는 말년을 호화롭게 보내며 75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잠들었다.
/문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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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오노라 두세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그들은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달랐다. 그는 명성과 그 외적인 표상들을 즐겼고, 독자가 보내는 반응과 경의를 필요로 했다. 그녀는 떠들썩한 것을 기피해서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숭배자들 앞에서 몸을 숨겼으며, 자기 삶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는 낭비가 심했고 그녀는 검소했으며, 그는 사치를 즐겼고 그녀는 소박하게 살았다. 그는 장광설에 이를 정도로 고도의 수사, 충만한 감정, 풍부한 암시를 작품에 담았기 때문에 걸출했고, 그녀는 인위적으로 꾸며진 당시의 부자연스러운 연극 관례를 깨고 극단적인 소박함을 택했기 때문에 탁월했다. 이런 점에서 작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연극배우 엘레오노라 두세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그들의 재능과 사랑이 모든 성격적 특성보다 더 강하게 두 사람을 결속시켜 주었기 때문에 커플이 되었다.
페스카라의 상인 집안 출신이었던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이미 열일곱 살 때 청소년 작가로 주목을 받았으며, 서정시와 산문으로 일찌감치 문학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정말 불 같은 사나이로 , 새로운 영감을 얻고 책을 쓸 때마다 매번 아름다운 여인을 필요로 했고 또 이용했다. 그의 예술적 모범은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였으며 ' 좋합 예술 작품' 에 대한 바그너의 비전이 이탈리아에서도 실현되기를 바랐다. 엘레오노라 두세는 유랑 배우들 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롬바르디아 지역을 돌아다니는 극단을 운영했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부터 무대에 섰던 엘레오노라는 열두 살 때 이미 눈이 크고 여린 소녀로 연인 역을 연기했다. 그녀의 탁월한 재능은 서서히 드러났기 때문에 절대적인 인정을 받기까지는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두세는 먼저 무대위에서의 자연스러움과 명확한 이미지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가르쳐주어야만 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극단을 갖고 공연 계획에서 잡동사니들을 제거하고 연출의 상세한 부분까지 함께 결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성공하게 된다.
단눈치오와 두세는 1895년 베네치아에서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서른여섯 살이었던 두세는 작가 알고 보아토와 애인 관계였으며 연극배우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몇 차레의 순회 공연을 통해 지구의 반을 돌았고, 디바의 화신으로 숭배받으면서 자기 고향은 물론 유럽의 다른 지역이나 해외에서 신격화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와 정반대의 격앙되고 인위적인 스트일을 연기했던 프랑스의 최고 여배우 세라 베르나르와 대등한 위치에 오르는 데도 성공했다. 그녀보다 다섯 살이 어렸던 단눈치오는 나폴리 공주의 연인으로 그녀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고, 소설가 , 시인, 바람둥이로 나라 밖에까지 유명해져 있었다.
두 사람 다 결혼을 했으나 오래 전부터 배우자와 헤어져 혼자 지내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그들의 만남과 사랑에 대해서는 당시 언론이 활발한 관심을 보였는데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시인과 디바가 나름대로 우상이자 수출품으로 각자 모두의 입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공주는 단눈치오에게 이미 넌더리가 나있었고, 보이토는 두세에게서 완전히 물러난 상태였다. 연장 순회 공연이 두세를 애인한테서 끊임없이 빼앗아갔기 때문에 두 연인에게는 함께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함께,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 하자면 그러한 상황에 적응하는데 더 큰 어려움은 없었다. 두세는 피렌체 아주 가까이에 작은 집 ' 라 포르치운콜라(제비집) ' 를 빌렸다. 단눈치오는 이웃해 있는 빌라 ' 라 카폰치나' 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 이들의 여러 전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듯이 -- " 르네상스 군주방식으로 " 화려한 생활을 했다.
이제 단눈치오에게는 두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서 ' 종합 예술 작품' 의 이탈리아적 변형 형식을 무대에 올릴 일만 남아 있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 있는 바그너의 축제 극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극장에 대한 꿈을 꿨다. 그 당시까지 극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의 무대 이념에 대한 훌륭한 해석가이자 비평가가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세도 자신에게 새 아침이 밝기를 희망했다. 프랑스 살롱 연극이 주를 이루었던 레퍼토리를 가지고 20년 가까이 항상 똑같은 것만을 연기했던 그녀는 <동백꽃 부인> 에 진저리가 나 있었다. 이미 입센 작품이 있었고 골도니 (1707~1793), 이타리아 극작가 - 옮긴이) 의 작품은 항상 새롭게 각색할 만한 가치가 있긴 했지만 , 극단장 두세는 이탈리아인으로 자신과 함께 국립극장을 현대화할 수 있는 동시대 극작가를 원했다.
정말 두세는 그렇게 확신했을까? 그녀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슴으로 느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배유로서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창출했던 여성이었다면, 단눈치오에게 있어 천재란 인간적인 동정과는 무관했다. 이 위대한 시인은 자신의 작품과 그 작품에 예속된 노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이기부의자로서 자신을 선택받은 자, '초인' 으로서 생각했고, 또 틀림없이 그렇게 행동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단눈치오는 예술과 삶에 대한 니체적특징을 지닌 자신의 이해 방식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회의를 느끼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정치에 뛰어들어 베니토 무솔리니 편에 서면서 그런 태도를 반민주주의적인 격정을 지닌 변종된 위용으로 개조했다. 그는 1938년 가르다 호 근처에 잇던 자신의 마지막 거주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문학가보다 고급 장교들의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1904년에 나온 단눈치오의 시집> 두세는 1924년 미국 순회 공연 중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단눈치오의 연인들 중에서, 헤어진 후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갔던 유일한 여성이다. 더구나 공백기를 보내고 난 후인 1920년대 초에 그의 작품들을 다시 연기함으로써 그를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용서했다.
평가>> 모든 사람이 감탄한 위대한 여배우는 뛰어난 재능의 작가를 사랑했고, 이 작가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
읽을만한책 ; 『 불 』- 가브리엘라 단눈치오 볼만한영화 ; < 죄 없는 자> , 이탈라아;1976 , 원작;가브리엘라 단눈치오 감독; 루키노 비스콘디 출연 ; 엘리지 체가니 (엘레오노라 두세) 둘러볼만한관광지 ; 가르다 호의 단눈치오 빌라 ' 비토레 알레'의 단눈치오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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