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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무덤에 있는 벽화와 그림 문자들
중국 상나라 시대의 갑골문으로 그림이 문자로 바뀌었다.
청동기에 쓰여진 金文으로서 한문의 형태로 바뀌어 갑니다.
그림에서 문자로 나폴레옹 군대는 1799년 8월에 이집트의 로젯티 마을로 진격했다. 나폴레옹 군대의 장교인 부샤르는 이상한 기호가 새겨져 있는 돌덩이를 한 개 발굴했다. 이 기호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몰랐다. 영국 군대가 이집트의 프랑스 군대를 공격하여 몰아내고는 로젯타에서 발굴한 돌까지 뻬앗았다. 이 돌은 런던으로 옮겨져서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프랑스는 다행히도 로젯타 돌의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이 돌의 새겨진 기호를 해독하려 달려들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때 프랑스의 젊은 학자 상폴리옹이 로젯트 돌에 새겨져 있는 그림을 해독했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글자이다. 이 글자는 소리도 있고, 뜻도 있다,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오리 그림은 오리의 의미이다. 중국의 문자가 발전해 온 자취를 보면 그림이 하나의 뜻을 가지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늘까지 흘러왔다. 그러나 이집트 상형문자는 오리의 그림이 오리의 뜻이 아니고 하나의 소리라고 보았다. 문자에서 소리를 나타내는 문자와 뜻을 나타내는 문자가 있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이다. 로젯타 돌의 기호를 보면 소리글자이든, 뜻글자이든 그 뿌리는 그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폴리옹이 읽은 로젯타 돌의 문자의 뜻은 기원전 196년에 쓰여졌다. 사제들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작성한 포고문이었다.
그림에서 문자로 발전한 또 하나의 글자는 한자이다. 그림에서 문자로 바뀌면서 우리가 읽는 역사를 중국 한문을 예로 알아보겠다. 청나라 말기의 학자 왕의영은 북경 국립대학 총장직에 있었다. 그는 말라리아를 앓았다. 키니네가 없던 시기의 중국에서는 용골이라는 약재가 특효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왕의영의 제자로서 은허의 비문을 공동 연구하면서, 식객이었던 유철운이 용골을 구해 왔다. 한약방에서는 용골을 가루로 갈아서 팔았다. 한 번은 심부름하는 아이가 가루로 만들지 않은 용골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요즘 말로 하면 바빠서인지, 아이라서 무시해서인지 가루로 만드는 서비스를 하지 않았다. 그 용골에는 글자 같기도 하고, 간략한 그림 같기도 한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로젯타 돌을 발굴한 지 꼭 100년이 지난 1899년이었다. 유철운은 북경의 한약방을 뒤지고 다니면서 문자가 새겨져 있는 용골은 모조리 샀다. 용골 값은 값이 뛰었고, 심지어는 가짜로 그림을 새겨 넣어서 파는 용골도 나왔다. 업자들에게 용골의 생산지를 물었으나 거짓으로 알으켜 주었다. 자기들만이 발굴하여 돈을 벌려는 욕심에서 정확하게 가르켜 주지 않았다. 그러나 거짓은 언제나 들통이 난다. 발굴지가 하남성 안양현 소둔이라는 마을로 알려졌고, 은허 발굴로 이어졌다. 유철운은 갑골편을 많이 모아서 상해로 갔다. 1900년이 되면 중국은 시끄러웠다. 외세가 물밀 듯이 들어오자 민족 자긍심을 일으키려는 의화단이 봉기하여 청나라 정부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기독교 교회를 공격했다. 8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북경으로 진격했다.(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북경의 55일이다.) 연합군이 북경을 압박해오자 청나라 정부는 황족과 귀족을 이끌고 서안으로 피난 갔다. 양의영은 약을 먹고 우물에 뛰어 들어 자살했다. 부인도, 딸도 그의 뒤를 따라서 우물로 뛰어 들었다. 왕의영의 아들 왕한보는 빚을 정리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수집해 둔 갑골편을 유철운에게 팔았다. 이로서 유철운을 갑골문을 연구하여 해독하는 일을 했다.
갑골문은 그림의 형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단순화하고 문양화하여 문자로 발전하는 단계를 아주 잘 보여준다. 갑골문의 이전에는 앙소 문화를 일구었던 신석기인이 남긴 도자기에 문양이 있었다. 그것은 산이고, 아침 해이고 돼지이다. 거의 그림에 가까웠다. 이것이 문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갑골문의 전신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도문(匋文)이라고 한다. 갑골문은 앞서 말한 유철운을 위시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로 상당히 많은 글자를 읽는다.(모두 해독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갑골문을 사용했던 시대의 사회상을 알게 되었다. 갑골문으로 인하여 중국의 은(상)나라가 역사에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다.
갑골문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된 은나라는 끊임없이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나라였다. 나라의 운명 뿐 아니고 왕실과 개개인의 운명까지도 신에게 묻고, 제사를 올린 나라였다. 제사를 올리는 제관이 나라를 통치했다. 역사에서 말하는 신정일치 제도의 통치였다. 신의 뜻은 절대적이었다. 신을 뜻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신에게 제사를 주관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지배자 즉 왕도 신과 같은 존재였다. 왕은 무소불위의 권능을 갖고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 이처럼 신처럼 군림한 왕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이 문제를 두고 고심했을 것이다. 그는 살아있을 때에 신적 존재였으므로 죽으면 신의 나라로 올라가서 신이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다. 이제는 죽은 왕에 대한 제사도 극진하게 올렸다. 그도 신과 동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은 죽은 왕의 아들이고, 후손이다. 따라서 죽은 왕에게 올리는 제사는 바로 조상신 숭배가 되었다. 갑골문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은나라도 후대에 오면 조상신의 권위가 더 높아졌다. 조상신에 대한 제사가 더 많아졌다. 너무 많은 제사는 재화를 탕진하고, 나라의 살림을 곤궁하게 했다. 백성들도 살기가 어려워지면 원성이 쌓였다. 사람들의 인지도 깨어서 과연 신이 절대절명의 힘을 가졌었으므로 인간은 불평 한 마디 할 수 없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인간의 인지가 발달한 것이다.
하늘(신)의 뜻도 인간하기 나름에 따라서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왕을, 그리고 백성을 설득했다. 나라를 잘 다스리면 신도 감복하여 인간에게 복을 내리고,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신도 화를 내서 인간 지도자를 벌준다는 사상이 나타났다. 이때는 사람들의 머리도 많이 현명해졌고, 청동기를 흔히 사용할 만큼 문명의 진보가 나타났다. 그들은 갑골문에 글자를 남기는 대신에 청동기에다 글자를 남겼다. 갑골문에서 발달하였으므로 갑골문의 흔적이 많지만 갑골문보다는 그림의 모습이 많이 줄어들고 점점 더 기호의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중국 문자인 한문의 형태로 띠어 갔다. 청동기에는 여러 형상의 조각상이 나타난다. 조각상이나 문양이 기호가 되어서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는 중에 글자도 한 자씩, 또는 몇 자씩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낸 형상들은 점차 줄어들고 문자의 가치가 더 중요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문자를 읽으므로 사회의 변화를 우리가 알 수 있다.
이제 청동기에 쓰여 있는 명문(銘文)을 보자. 은나라 중기에 해당하는 무정(武丁) 시대의 청동기 명문에는 조상을 기리는 내용이 많다. 청동기를 만들어서 바치는 사람보다 청동기를 받는 사람(조상)에 관한 내용이 많다. 청동기를 받는 사람의 경력은 길게 적었고, 만들어서 바치는 사람은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상대(은나라) 말기가 되면 청동기를 만들어서 바치는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 이것은 대수롭지 않아보이지만 사회가 엄청나게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나라의 마지막 두 왕 때는 청동기 명문이 조상에게 청동기를 만들어서 바치는 이유롤 이야기조 길게 기록했다. 예로 들어보면 조상의 공적을 기리기보다는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거나 봉작을 받았으면 그 내용을 길게 청동기에 새겨서 조상에게 바치는 형식이었다. 이제는 조상을 기리는 봉헌이 아니고 청동기를 만들어 바치는 자신의 세속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서 청동기에 글자를 새겼다.이런 글에서는 항상 상을 받은 날자를 세심하게 기록했다. 마침내는 조상에게 바친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청동기 명문이 나타났다.
서주 시대(기원 전 1050-975)가 되면 명문의 길이가 아주 길어지면서 정치적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왕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재산을 받았다는 징표로 이 청동기를 만들어서 기록을 남긴다는 형식이다. 관직을 받게 되는 것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등의 내용이었다. 청동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새겨 넣는 것은 스스로의 이름을 알리고, 자신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릴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편으로 가문과 문벌이 형성되는 것을 보여준다.
서주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조상 숭배는 전반적으로 쇠퇴했으나 효를 알리고 가계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주례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 확립된 질서가 중국의 도덕률로 발전한다고 했다.
청동기는 고대 중국에서 제사 용기로 사용했다. 주나라 때가 되면 청동기의 명문은 점복과 같은 예언적인 글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에 청동기를 만드는 사람들, 왕이나 귀족의 소망과 기도가 주문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주문은 자신의 소망을 자기에게 상투적으로 중얼거리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독백이고, 바람이다. 이것은 신(帝)이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일이고, 자신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사고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의 갑골문을 통해서 그림이 문양으로, 그리고 문자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림이 문자로 바뀌면서 인간의 사유세계도 바뀌어 가는 것을 알았다.
청동기도 초기에는 글자는 없고 도철문이나 동물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글자를 새기면서 도철문 등의 동물문양은 감소하고, 나중에는 문자만을 새겼다. 이것을 두고 학자들은 말한다. 신을 사유의 중심에 두던 사회가 인간을 중심에 두는 사회로 바뀐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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