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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21일에 태어난 엘리자베스에 대한 첫 기록은 할머니인 메리 왕비(조지 5세의 부인)의 일기 속에 "오 하얀 피부와 예쁜 금발의 자그마한 나의 아가야"라는 기록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에드워드 8세가 하야하고 부친이 조지 6세로 즉위하자 그녀는 차기 왕위를 이어받을 1순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엘리자베스는 통치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엄격한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은 다른 소녀들과 비교했을 때 감수성 많은 소녀 시기를 망쳐놓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준비했으며, 특히 엘리자베스의 교육에는 어머니의 공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즉 어머니는 엘리자베스의 학문적 성취도 중요했겠지만 한 국가를 다스릴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사회성을 기르는 데 소홀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구상하여 준비시켰다.
당시 엘리자베스의 모친의 교육 방식을 실천한 가정교사는 매리언 크로퍼트이며, 역사교육은 후에 이튼 학교의 교장이 된 C. 마틴이 담당하였다. 숨 쉴 틈 없이 짜여진 교육 일정에서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시골길을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그녀는 "내가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시골에서 말과 개들을 많이 사육하면서 지냈을 거야."라고 측근들에게 자주 말하곤 하였다. 물론 그녀는 아직까지 승마를 즐기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그녀와 동생 마거릿 로즈 공주는 런던에서 국민들과 함께 한 조지 6세 부처와는 떨어져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과 윈저 궁 및 궁 부속별장 등으로 옮겨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대전 마지막 해인 1945년 초 엘리자베스는 부친인 조지 6세를 찾아가 "저도 무엇인가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얻은 엘리자베스는 또래 소녀들이 봉사하고 있는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또래의 여자친구들과 사귀면서 그동안 통치자가 되기 위한 꽉 짜여진 통제와 계획 그리고 피난생활로 오는 무료함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비록 여자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소위 계급장을 달고 활동하면서 왕위계승자들이 치러야 할 군복무까지 치르는 효과도 얻었다. 한편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받아왔던 이론적인 수업을 현장에서 경험하고 다듬는 좋은 기회도 갖게 되었으며, 또 그녀의 남편이 될 그리스의 필립 왕자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필립 왕자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보자. 필립 공은 1922년 군사혁명으로 추방당한 그리스 및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공의 아들이다. 안드레아스 공은 당시 발칸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필립을 키우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부인 앨리스의 집안인 영국의 마운트배턴 가로 보내져 그곳에서 양육되었다. 최초의 마운트배턴 가문은 13세기 독일의 바텐베르크 백작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집안의 루드비히 알렉산더(1854~1921)가 영국의 해군제독이 되면서 영국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며 조지 5세의 사촌 여동생인 빅토리아 공주와 결혼하여 밀퍼드 해이번 후작이 되었는데, 1917년에 조지 5세의 요구로 해이번 후작은 자신의 집안인 바텐베르크 가를 마운트배턴 가로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집안에서 자라난 필립 왕자는 몰락한 그리스 왕가의 성을 버리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턴을 쓰게 되어 그의 공식이름도 필립 마운트배턴이 되었다. 필립 왕자는 스코틀랜드 고든스 타운 학교와 다트머스의 왕립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한 뒤 전쟁이 터지자 왕실 해군에 들어가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장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와중에 그는 구호품 수송 분야에서 활동하던 엘리자베스 소위의 초대를 받아 윈저 성에서 그녀와 자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먼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담 없이 만나면서 조국의 안위, 애국의 길, 그리고 해군장교의 역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자주 만났고, 드디어 연인 관계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둘의 관계를 알고 있던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가 21세 생일을 맞기 전에 그들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47년 7월, 약혼이 선포되고 1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거행된 그들의 결혼식이 전세계로 전해지면서 안정적인 영국 왕실의 미래가 보장되었다.
결혼 전날, 조지 6세는 필립에게 에든버러 공작, 메리어니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이란 작위를 수여하여 미래 여왕의 부군에 걸 맞는 위상을 갖추어 주었다. 이들 부부는 결혼 후 런던에 있는 클래런스 대저택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엘리자베스의 장남이자 현재의 왕세자인 찰스가 태어났다.
1951년에 들어서 조지 6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엘리자베스는 자주 왕실 행사를 대행하게 되었다. 특히 건강을 일순위로 요구하는 해외순방의 경우는 더욱 엘리자베스 부처의 몫이었다. 그해 10월부터 시작된 캐나다, 미국, 그리고 이듬해 1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아버지 조지 6세의 서거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부친의 서거는 자동적으로 그녀에게 왕위가 주어짐을 의미한다. 그녀는 영국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공적인 일을 하지 않고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1953년 6월 2일 TV를 통해 전세계 2,5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웅장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에게 주어진 공식명칭은 '엘리자베스 2세, 신의 가호 아래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 그리고 모든 그녀의 소유지의 통치자, 영연방의 수장이며 신앙의 옹호자1) '였다.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식이 화려하게 진행된 것은 대전 후 위축되어 가던 영국의 대외적 위상회복과 국내적인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처칠 수상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처칠은 15세기의 엘리자베스 1세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처칠의 의도에서도 잠깐 보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대영 제국의 위상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으며 이는 왕실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1947년 조지 6세 재위 시에 빅토리아 여왕부터 시작된 인도 황제의 위치를 끝낸 것은 실론, 버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 등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심지어 영연방들도 모국인 영국과는 큰 틀만 유지하고 독립된 정치구조를 구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였던 것이다.
이런 대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국민들에게 왕실의 존재가 과연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즈음에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는 어떤 형태로든 왕실의 변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존속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왕 부처는 이미 독립한 옛 식민지국가들은 제외하고라도 영연방만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이곳을 순회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순방은 왕으로서는 처음 갖는 행사로 그들과 새로운 유대를 기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인도에는 영국 군주로서는 50년 만에 방문하는 기록도 세웠으며 이후 남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을 꾸준히 순방하게 되었다. 그녀의 적극적 행동은 성과를 거두어 1977년 즉위 25주년에는 35개국의 영연방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참석하는 결실을 맺었다. 한마디로 급속하게 추락하던 영국 왕실의 위상을 유지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적절한 선에서 정치에도 관여를 하였다. 이집트 민족주의자인 나세르 수상이 일방적으로 취한 수에즈 운하 봉쇄 및 국유화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은 이든은 1956년에 드디어 무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사실 엘리자베스는 수에즈 사건의 경우는 이든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입헌군주제에서 수상의 일이니 간섭할 수는 없지만 당시 여론이 이든을 등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사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보수당인 맥밀런에게 차기 수상직을 준비하도록 권하였다.
여왕이 맥밀런을 염두에 둔 것은 대외적인 위신을 중요시하는 보수당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여야 왕권도 유지된다는 계산이었다. 여왕의 바람대로 맥밀런이 수상에 오르게 되었으며 이는 여왕의 정치적 역할이 확실히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맥밀런의 뒤를 이어 더글라스 홈이 수상에 오르는 것으로 이어졌다가 노동당의 윌슨 정부가 들어서는 1974년에 가서야 끝을 내었다. 여하튼 보수당과의 연계 속에서 정치적으로 흔들리던 왕실의 중심을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심스레 입지를 세운 왕실의 권위는 그녀의 자녀들에 의해 실추되기 시작했다. 딸인 앤 공주는 당시 소시지와 고기 파이를 만드는 회사를 갖고 있는 보통 사람의 자녀인 마크 필립 대위와 결혼을 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이 결혼은 결국 1982년에 이혼으로 끝나면서 더욱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여동생인 마거릿 로즈 공주마저 1978년에 공식적인 파혼을 하면서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결혼 전부터 염문을 많이 뿌리고 다니던 왕세자 찰스는 1981년 7월, 정숙하고 가문 좋은 스펜스 집안의 자녀이며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왕실의 권위는 다시 회복되는 듯 하였다. 둘 사이에서 윌리엄, 해리 왕자가 연이어 탄생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결혼 전부터 사귀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를 잊지 못하던 찰스는 결혼 1년쯤 뒤부터 다이애나와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심심찮게 왕세자 부처의 불편한 관계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1996년 이혼을 하면서 국민들의 실망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거기에 같은 해 둘째 왕자인 앤드류도 사라 퍼거슨과 이혼을 하면서 충격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사건은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연인 도디 알 파예트와 함께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는 와중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국민들의 원망이 찰스에게로 돌려지면서 왕실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1992년 다이애나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왕실의 뒷이야기를 다룬 《다이애나-그녀의 진실》이란 책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밝혔었다. 그 내용은 매스미디어를 타고 영국 내뿐 아니라 세계로 퍼져나갔고, 이로써 그녀에 대한 동정과 왕실과 찰스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은 커져 갔다. 이후 찰스를 폐위하고 아들인 윌리엄을 후계자로 삼자, 심지어는 영국 왕실을 폐지하자는 의견까지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언급된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상징적 통치자로 존재하는 군주제가 지속되는 것은 그녀의 지혜로운 처신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의 한 명이지만 늘 검소함을 잃지 않고 있다. 또 그녀가 즉위한 초기 때만큼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중심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신중하게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곤 한다.
대처 수상이 포클랜드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명목적이지만 전쟁에 대한 그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승인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과연 이런 표현이 부모가 된 입장에서, 앤드류만 생각한 내용일까? 마거릿 대처가 수상직을 끝낸 다음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는 무슨 일이든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녀를 싫어했다."고 사석에서 말했다. 이런 여왕의 신중하면서도 정치적인 표현은 국민들에게 묘한 매력을 발휘하였다. 다시 말해서 여왕의 존재는 상징적인 것 이상으로 국민과 정치를 중재해 주는 완충의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영국의 40번째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가 이끄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이제 21세기로 넘어 왔다. 오늘 이 순간에도 여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국가수반으로서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며 매년 가을 영국 정부의 정책을 요약하는 개회사와 함께 의회의 새로운 회기를 연다. 또한 여왕은 선거를 통해 수상이 선출되면 그를 임명한다.
그리고 정치에도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 그녀는 수상과 개별회의를 하며 그와 함께 영국의 미래를 풀어나간다. 지금까지 여왕은 토니 블레어 총리를 포함한 열 명의 총리와 함께 일해오고 있다.
대외적으로 엘리자베스는 모든 영연방 54개 회원국의 수장으로 인정되며, 다수의 영연방 회원국들의 여왕이기도 하다. 여왕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영연방 국가수반 회의에 참석하여 각국의 수장들과 개별 회담을 갖는다. 매년 크리스마스에 여왕은 모든 영연방 회원국들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사적인 메시지를 방송하며, 매년 3월 영연방 기념일에는 라디오를 통해 축하 메시지를 방송한다.
사회적으로는 여왕부처 모두 영국 각지의 기관, 기업체, 지역사회 등을 방문하며 버킹엄 궁에서 많은 내외국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여왕은 적십자사, 영국 문화원, 영국 학술원 등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자선 단체들의 후원자이다. 에든버러 공도 과학, 기숙, 스포츠, 자연보존, 청소년 복지 등과 관련된 많은 단체들의 총재 겸 후원자이다. 특히 에든버러 공은 세계 자연보호기금의 명예총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제 지속되는 과거의 역사를 잊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한 '엘리자베스 2세'란 상징적 존재와 영국의 미래를 겹쳐 보며 《이야기 영국사》의 매듭을 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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