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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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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자기자신만의 시를 찾아야 생명력이 있다...
2017년 04월 23일 20시 30분  조회:1969  추천:0  작성자: 죽림

삶의 진정성을 향해서

                                                                         김명인 (시인) 







제 주변의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아주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자 했고, 나중에 그 꿈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몇 달 전의 일인데, 저한테 혹시 중 고등학교 때 쓴 작품이 있으면 그걸 모아서 책을 만들고 싶다며 원고 청탁이 왔습니다. 하지만 그때 글을 쓰지 않았던 저로서는 그 청탁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문학이 무언지 모르고 지낼 때였으니까 작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을철이면 동해안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고기가 오징어입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오징어 말리기를 도우면서 조그만 시골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문학이나 다른 문화를 접해볼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글을 써서 뭐가 되겠다거나 하는 따위의 꿈은 꾸지 않았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니까 돈이나 많이 버는 직업을 얻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잘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제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가 되면 누구한테도 존경을 받을 테고 마음대로 돈도 벌면서 편안한 생활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이 워낙 가난했으니까 대학에 진학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있으면 오징어 배나 타면서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막막한 생각이 들어 도망치다시피 해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오징어 배를 피해 서울로 도망친 끝에 


혼자 공부를 해 대학 입학 시험을 치렀는데 떨어졌습니다. 다 포기하고 내려가려고 생각했는데 마침 주변에서 다른 대학도 시험을 한 번 쳐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녔던 고려대학에 우연히 1차 지망도 아닌 2차 지망으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들어간 셈이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보니까 그 공부가 전혀 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의도했던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궁리 끝에 다시 시험을 쳐서 의과대학에 도전했지만 건강을 해치고 학업조차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한테 허락된 이 길이 최선이라고 하면 열심히 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비며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고 나자 무엇보다도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珝♣?비로소 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왕에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할 바에야 장학금도 받아 학비는 더 이상 내지 않고 다녀야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학과 과목들에 신경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조지훈 선생님께서 제가 다녔던 학교에 재직하고 계셨습니다. 건강을 해쳐서 학교는 거의 못 나오실 형편이셨지만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강의 강의하는 과목의 모든 과제는 성적의 대상이 되었고, 과제로 학과 공부가 계속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받았던 과제 중에서 첫 번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30매 정도로 요약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선생님이 쓰신 시론 책인 {시의 원리}에 대해서 노트 필기를 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숙제는 자작시 다섯 편을 써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왕이면 학비를 내지 않고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스스로 결심을 했는데, 학점을 잘 받지 못하면 학비를 내야 할 형편이었던 저로서는 그 과제를 받고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시가 뭔지를 알아야 하는데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우선 남들의 시를 읽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모든 걸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각오를 가졌기 때문에, 시를 읽는 것도 참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라고 생긴 것은 빠뜨리지 않고 손에 닿는 것은 다 읽어본 것 같습니다. 제가 판단을 해서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이 있거나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다만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노트에 옮겨 적었던 시가 대학노트로 7권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시를 열심히 읽었는가 하면 대학노트 7권의 시를 모으기 위해서 제가 읽었던 시는 아마도 10배 정도는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시가 뭔지를 좀 알 것 같았고 자작시 다섯 편을 선생님께 제출을 했습니다. 


조지훈 선생께 제출할 숙제로 처음으로 시를 쓰다 


그렇게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시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지훈 선생께 다섯 편을 제출한 뒤에도 시를 계속 썼습니다. 뭔가 나 같은 표현하는 형식이 있다면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를 꾸준히 써 나가기 시작했는데, 누구한테 습작을 보여줄 대상이 없었습니다. 내가 쓴 시가 잘된 시인지 잘못된 시인지 누가 판단을 해주고 검토를 해줘야 하는데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 주변에 읽어줄 시인이 없어서 동급생들한테 좀 읽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사실 동급생들은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생각다 못해 와병 중이신 선생님 댁을 찾아 뵙기로 했습니다. 시가 몇 편 써지면 그걸 들고 2주에 한 번씩 선생님 댁으로 갑니다. 그때는 워낙 촌스러웠으니까 변변히 말씀도 못 드리곤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왜 왔어?" 하고 문간방에서 누워 계시다가 방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고개를 숙여 꾸뻑 절을 하고 손을 내밀어 "이걸 좀 읽어주십시오" 하면, "두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잘 썼다거나 잘못 썼다는 말씀도 없으신 채 2주만에 가면 옛날 원고를 돌려주시는 겁니다. 아무 말씀도 안하시니까 원고를 받고 새로 써간 시를 내밀고 돌아오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검토를 하시고 내가 쓴 이상한 말에 밑줄을 그어놓고 다른 말로 고쳐놓거나 또 제목이 영 마음에 안 들면 제목을 고쳐 놓으십니다. 시 한 편에 서너 군데 첨삭을 해서 돌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첨삭을 해놓은 것을 보니까 제가 미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표현이 되고 깊은 의미를 띠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첨삭을 해놓으셨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자발적으로 시험공부를 한 셈입니다. 다만 선생님은 제 원고에 첨삭만 해주셨고, 그런 관계는 제가 대학 4학년 때 선생님이 돌아가심으로 해서 끝났습니다. 조지훈 선생님께서 2년 동안 제 작품을 읽어주신 셈이 됩니다. 


그 사이 저는 놀랍게도 첫해에 신춘문예에 3편이 최종심에 올랐습니다. 그때가 대학 2학년 때인데 소설가 윤후명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1년도 채 공부를 안했는데 이렇게 시를 잘 쓰는가. 혹시 시의 천재가 아닌가' 하는 따위의 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해마다 최종심에 올라갈 때도 있고, 그나마 아무 것도 아닐 때도 있고 떨어진 것으로는 스무 번도 더 됩니다. 결국 저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되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고는 군대에 갔습니다. 


군대 생활 3년을 끝내고 돌아오니 10월 중순이 좀 넘었을 때일 겁니다. 신문사마다 신춘문예 공고가 나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취직을 하기 위해서 학교를 찾아갔더니, 지금 고대 교수로 재직중인 김인환 선생이 이렇게 귀띔을 해 주었습니다.  
"야, 너 대학 때 쓴 작품 정도면 요즘 신춘문예가 질이 좀 떨어졌으니 투고하면 충분히 당선이 될 거야." 
그러면서 정리해서 신문문예에 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아무 근거도 없고 취직은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열흘 동안 작품을 열 다섯 편이나 썼습니다. 그 작품들을 나누어서 신문사마다 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원양어선을 타고 떠나는 형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 형님을 배웅하러 부산으로 기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형님한테 무언가 짤막한 글을 써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부산에 도착하니 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걸 책 앞에 끼워서 다른 책과 함께 드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작품이 아까워서 그걸 남는 작품과 합쳐서 다른 신문사에 투고를 했습니다. 그것도 하루만에 쓴 작품인데, 그것이 그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시인이 된 내 생애가 우연일까 필연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돌이켜보지만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우연적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의과대학에 합격이 되었으면 시를 썼겠습니까. 제가 다녔던 고려대 국문학과는 그 한해만 후기로 학생들을 뽑았던 것입니다. 제가 국문학과를 들어간 것도 우연이고 시를 쓴 것도 극히 우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까 아마도 우연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제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6·25사변을 겪으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고, 그때는 실컷 먹어보는 게 저의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식구들의 절반이 좌우 대립의 와중에서 죽었으니까 생활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납부금을 제때에 내지 못해서 집으로 쫓겨오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면 가방 팽개쳐 놓고 낚싯대를 바닷가로 달려갔고, 학교 공부는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웬지 바다 앞에 서면 막막하고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곤 했습니다. 제 시가 그런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이 되었다면, 후기 대학에 붙어 시인이 된 건 필연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운명의 척수가 저를 몰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많은 시인들이 스스로 느끼는 어떤 결핍이나 절실한 느낌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것입니다. 시는 무언가 하면 한 사람이 느끼는 절실함이나 특수성을 언어라는 형식을 통해서 바꿔놓는 양식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적 충동을 언어라는 형식으로 바꿔놓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시라는 대화 체계를 낳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는 언어를 표현 매재로 선택하는 순간 이미 공유자산화 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유의 자리에서 표현되는 것은 나를 끌어내는 형식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나를 끌어내는 내용은 일종의 느낌이거나 관념일 수도 있고, 감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문단에 데뷔한 뒤 한동안은 관념화하는 데서 헤매었습니다. 데뷔한 2, 3년 동안은 시를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애를 썼고, 또 어떻게 하면 그럴듯한 생각을 그 속에 포함시키는가, 누가 읽어봐도 참 괜찮은 생각이라는 것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삶 가운데 막연하게 스며드는 깨달음이나 절망, 외로움 따위가 큰 시의 자신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이런 것들을 시로 형상화하려 애썼습니다. 말하자면 추상성이 제 시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관념시를 쓰다가 나만의 시를 찾아 


그러나 어느 순간 반성이 되었습니다. 데뷔한 지 3년 정도 그런 느낌이 지속되다가 그  다음부터 반성이 되더군요. 제 시 자체에 스스로 불만이 생긴 거죠. 내가 쓴 시가 나조차 감동시키지 못하고, 나에게 절실하지 못하다면 내 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쓴 시는 내 스스로에게 절실하다고 믿어지는 시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거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가 아니라, 우선 내가 인정하는 시를 써야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생각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알아듣든 말든 나만의 시를 생각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나만이 쓸 수 있는 시의 형식이 딱히 생각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나만이 쓸 수 있는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내 고향 울진 이야기, 군대 가기 전 한 열 달 정도 머물렀던 동두천 이야기 등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시로 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꼈던 삶의 구체적인 감흥, 또 나만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 나만이 말할 수 있는 삶의 진실들을 표현하는 게 내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 거죠. 
그렇게 해서 탄생된 시 몇 편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동두천(東豆川)·I] 



동두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열 달 정도 고등학교 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을 하면서 즐거움보다는 자괴감이 더 많았습니다. 스물 세 살의 저는 월급은 쥐꼬리만큼 받았고 세상살이는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안 가도 갈 군대를 영장을 미리 받아 놓고, 그 감격 속에 훈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어렸을 때 먹고살기 힘들어서 방황하던 생각들이 겹쳐서 이런 시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제 진솔한 삶으로써 시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실천에 옮겨진 셈입니다. 


한 삶이 갖는 고유성은 간절히 희구하고 진정으로 애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룩되는 게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마 이 시도 그런 것일 겁니다. 저는 제 시로나마 제가 간절히 원했던 것,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세계를 담고자 애썼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다시 그때를 돌이켜 보고 제 시작품들을 읽어 보기도 합니다만, 남의 것이 아닌 자신만의 것을 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 여기서 과연 진정성은 무엇인가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저는 진정성을 돌아볼 때면 우리가 어떤 것을 왜 필요로 하고, 왜 거기에 매달리는가, 어떻게 그것을 영위하고, 그 결과 어떤 전망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살이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고비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그 의문이 곧 진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의문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삶의 본질적 실체와의 접촉에서 생겨납니다. 내가 꼭 묻고 싶은 의문이나 듣고 싶은 대답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생깁니다. 말하자면 진정성은 살아가는 실체적 감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식 없는 삶의 근원에서 우러나는 것이 곧 진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 곧 진정성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근대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 삶의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잘 살게 되면서 우리네 삶은 나날이 황폐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구심력, 우리네 삶을 지탱해 주는 중심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뭐가 삶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모든 삶들은 해체되고 구심점은 나날이 사라지고 고뇌와 갈등은 없어지고, 뭘 묻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삶의 진정성과 반성을 시 속에 담으며 


저는 시를 이제껏 써오면서 의사가 되기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괜찮은 의사가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행려병자가 되어 서울역에 쓰러져 있었다 할지라도 시인이 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의 길은 무언가 잃어버린 말을 되찾게 해주는, 남겨진 진실을 들으려고 애쓰는 과정입니다. 돌이켜 나에게 묻고 대답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의미들을 반성하는 무기가 곧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졸시 [침묵]을 함께 읽도록 하지요. 이 시는 동두천에서 많이 떨어져 와서 쓴 작품입니다. [동두천] 연작이 씌어진 게 1976년인데, 이 시는 1997년에 씌어졌으니 그 간격이 한 20여 년 되는 셈입니다. 저의 여섯 번째 시집 {길의 침묵}에 실려 있습니다.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침묵] 전문 



어떤 물음에는 쉽게 대답이 되지만, 어떤 물음에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해답이 안 나오는 인생 앞에 서 있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값어치 없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거나 저는 저에게 많이 물어 보면서 스스로 대답을 찾아 보려고 애를 썼고, 그게 정 안될 때에는 이처럼 들끓는 저 안의 울음 소리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제 삶의 진실이라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침묵도 달리 보면 각도를 달리하여 우회하여 있을 뿐 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아니고는 펼칠 수 없는 어떤 자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어딘가 제 시가 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제 시는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제 안에서 튀어나온 어떤 시, 저에게 절실한 어떤 시는 제 창조와 저의 변형의 어떤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누리는 것은 영원한 시간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입니다. 누구나 제한된 시간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이 없는 것들은 제한된 시간을 말할 수 없겠지요. 생명이 있는 것들이 유한한 삶을 살기 때문에 갖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은 죽음의 한 짝이 아니겠는가 봅니다. 꽃의 경우에도 영원히 피어 있다면 누가 아름답다고 하겠습니까.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인식에 바탕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저로서는 죽음과 재생의 신화라고 봅니다. 왜 시가 아름다울까. 시야말로 죽음과 재생의 원초적인 형식과 내용을 말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관련과 참여로써 진실을 찾아내고,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과 재생의 신화 내용도 진실과 감동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시야말로 죽음과 재생의 신화를 아로새기고, 진실과 감동을 먹고 살아가는 생명체라고 봅니다. 


시는 그렇다 할지라도 시인은 완성된 시를 쓸 수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은 죽음과 재생의 신화에 참여할 수 있지만, 그것을 완성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상 자체가 우주적으로 넓혀져 있기 때문에, 그 우주적 존재는 우주를 자기를 넓히지 않는 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원의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시인으로 하여금 환호하게 만드는 게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근원적 삶에 자리하고 있다 믿으면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인만이 그런 특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처음 쓸 때에도 그랬지만 시력 30년이 넘은 지금에도 시는 저를 들뜨게 하고 감동스럽게 만듭니다. 누군가 필생을 던져서 돌파하고 싶은 감동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회피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순간으로 끝날지라도 거기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제 시가 펼칠 수 있는 감동의 자리가 생생하게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는 자리야말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도정이 아니겠습니까. 연어는 물맛 때문에 온갖 부귀의 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모천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마도 제 시에도 상실과 회복이라는 원초적인 물맛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잃어버린 낙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낙원에 돌아가려고 애쓰는 게 저의 시 쓰기가 아니겠는가 믿고 있습니다. 끝끝내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완성을 그리워하는 나그네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상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고, 시인은 더 깊은 근원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잠잘 곳이 없고 쉴 곳이 없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하는 순간 그는 이미 나그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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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딱 ―이상국(1946∼ )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낡은 집이 많은 우리 동네, 한 집이 공사를 하더니 그림 같은 집으로 외양도 산뜻해진 게 보기에 좋았더라.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격앙된 여자의 까칠한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응?!” 여자가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길에 한 줄 횡렬로 서 있는 남자 중학생 넷 중 하나가 “여섯 시 사십 분요”라고 대답했다. “응, 응, 그래.” 막힌 말문을 여자는 내친 기세로 터뜨렸다. “지금이 오전이니, 오후니!? 이 시간이면 어른들이 퇴근해서 쉴 땐데 길에서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 민폐 아니니!? 왜들 그렇게 남 생각할 줄을 모르니!?” 나는 훤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떴다. 요즘 중학생들 무섭다던데 우리 동네 아이들 착하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웬일인지 다들 열중쉬어를 하고 있었다. 새로 이사 온 그녀는 ‘동네가 왜 이 모양이야!’ 못마땅하고 주민들을 깔보는 것 같다. 

지방 하고도 도시가 아닌 시골 동네에서는 구성원 간 영향이 긴밀하다. 이사 온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새 이웃을 맞는 동네 사람들도 어느 정도 삶이 변동한다. 새 이웃이 어떤 사람들일까 기웃거리는데,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골목을 빠져나갔’단다. 싣고 온 살림이 단출한 것이다.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다는 말을 그 집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듣고 화자는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단다. 어른은 쉬쉬할지 모를 사정을 당당히 밝히는 아이도 깜찍하니 사랑스럽고, 요런 딸을 둔 ‘쫄딱 망한’ 젊은이라니! 낯선 가족에 대한 긴장이 풀리고 편히 받아들일 마음이 든 화자, 더이상 잃을 것 없이 ‘께벗고’ 들어온 새 이웃이 안쓰러우면서 담뿍 정이 간단다. ‘쫄딱’이라는 말, 속이 쑥 내려가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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