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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1)
/윤동주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1936.12(추정).
나는 윤동주의 삶을 다룬 어느 창작물에서, 여주인공이 윤동주에게 한 말을 기억한다. "동주씨의 시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져요." 그럴만하다. 잘 알려진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들은 항상 그 무엇에 대한 결핍을 담고 있었다. 막막했던 시대, 나약한 민족의 시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고뇌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끝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봤고, 끝 없이 참회했다.하지만 <개>의 초점은 사뭇 다르다. 작고 사소한 것에 마음을 두었다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서 드러나는 모습과 일맥상통하지만서도, <개>는 그의 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이 있고 낙관이 있다. 윤동주는 어쩌면 이 시의 풍경을 보면서, 잠시 고뇌를 잊고 휴식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개
윤동주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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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夭折의 특권
"시인에게는 '요절夭折의 특권'이라 하는 것이 있어 젊음이나 순결함을 그대로 동결한 것 같은
그 맑음이 후세의 독자까지도 매혹시키지 않을 수 없고, 언제나 수선화 같은 향을 풍긴다"
일본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こ 가 한 말이다.
요절한 윤동주의 세번째 시비가 일본 우지宇治에 이번 10월에 세워졌다.
우지는 교토에서 전차로 한 30분 거리인데 늘어선 산자락에 우지강이 길게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일본 최초의 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가 거기에서 쓰여져 동상이 강가에 있고 일본동전 10엔짜리에 새겨진 세계문화유산 '뵤도잉平等院'이 있으며 커피보다 차문화인 일본에 우지차로 유명한 곳이다.
그 긴 강의 몇개 다리 중 하나인 아마가세 구름다리엔 사연이 있다. 서울의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1942년 3월, 도쿄의 릿쿄立敎 대 문학부에 들어가 다섯달을 다닌 후 같은 해 가을, 교토의 동지사 대학으로 편입을 한다. 재학 시절 교우들과 우지로 소풍을 갔고 우지강 아마가세 다리에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남기게 된다.
십여 년이 걸려 우지 그 다리에서 걸어 십분 거리에 또 하나의 윤동주 시비가 그렇게 세워졌다. 거기엔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碑'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의 시 '새로운 길'이 한일 양국어로 쓰여져 있다.
75년 전 25살의 청년 윤동주가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나의 발자욱을 포개고 서서 물과 산과 그가 바라 본 하늘을 보니 진한 감회가 서린다.
어둡고 적막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생각하며 '육첩방을 나가면 남의 나라' 라고 읊었던, 잃어버린 조국에 가슴 아파하며 그 마음을 절제된 시로 묘사한 윤동주. 동결된 그의 한없이 순결하고 순수한 영혼을 떠올려 본다.
뵤도잉平等院, 우지의 대사찰과 뮤지엄에서 고대 백제의 냄새를 물씬 맡고는 5시면 어둑해지는 밤길을 달려 다시 교토 시내의 윤동주가 살던 하숙터에 세워진 시비 앞에 선다. 지난 해까지
동지사에서 하루에도 몇 번을 바라보던 시비에 새겨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 '하늘을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이 새겨져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교토의 시모가모 경찰서로 잡혀 가기 전, 동지사대에 한학기를 다니며 머물던 하숙집은 교토 조형미술대학의 설립자가 재일교포로 그 하숙집터 일대를 사서 교사로 짓고는 그 앞에 반듯하게 시비를 세웠다. 동지사에서 가까운 거리임에도 나는 귀국 후 재방문을 해서야 처음으로 그걸 보게 된다.
내가 사는 서울 동네 가까이의 윤동주 하숙집을 떠올렸다. 거기에 현판은 있으나 집주인 아들이 그 앞에서 군밤을 구어 팔고 있었다.
올 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백주년으로 나도 이렇게 그의 시비 세개를 하루에 보게 되었다. 교토 윤동주 기념회의 박희균회장이 친절히 안내하고 많은 자료를 보여준 덕분이다. 그의 윤동주 사랑과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한국에서 덕혜옹주의 영화가 있을 무렵 알게 된 일본 작가 '타고 키치로' 선생은 덕혜옹주가 일본에 있을 때에 지은 단가시를 발견하여 그 영화를 만드는데에도 기여했지만 NHK TV, PD로 있을 때 여러 해에 걸친 기획으로 윤동주 다큐를 만든 분이다. 동지사 대학에 그의 시비를 세우려 아무리 시도해도 어려운 것을 타고 선생이 다큐를 만들어 방영된 후 그 캠퍼스에 시비가 세워지고, 우지의 아마가세 다리에서 찍은 시인의 마지막 사진도 그가 발견하여 그 사진 한장의 인연으로 마침내 시인의 세번째 시비가 서게된 것이다. 그는 윤동주 백주년에 맞추어 짧은 생애의 전기집도 일본에서 냈다.
일본에 윤동주의 정신을 사랑하는 그런 분들로 교토지역에 시인의 시비가 세개나 선 것이다.
겨우 27년 1개월의 삶 1917 12 30 - 1945 2 16
"요절의 특권이란 젊음과 순결을 고대로 동결하는 것"이라고 일본 시인이 말했다지만, 윤동주의 그 시대적 요절은 더욱 비참하다. 그러나 깊은 골짜기일수록 바로 곁에 더 높은 산이 우뚝 서있다는 말은 진리여서 75년 후 갈등의 양국 국민에게 그 순수한 영을 빛으로 발하고 있음을 본다.
옥사한 후쿠오카 시는 여러 해 시비 세움을 거절하고 있으나 얼마 후 동경에는 다시 그의 네번째 시비가 선다고 한다.
요절한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이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1938년 5월 10일 지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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