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서 산다는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시를 쓴다는 것은 사는 한가지 방식이다. 사랑하는 한가지 방식이다.”-<<시의 사변>>에서
조룡남의 수많은 시를 통하여 끊임없이 되뇌이는 뜨거움과 련민과 그리움과 때로는 체념과 기쁨 등 사랑의 여러가지 무늬를 느낄수 있었다. 그것은 산전수전 풍상을 다 겪은 분의 가슴속에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고있기때문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바로 그런것들이 그를 이 지상에서 버티게 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삶의 어느 한 단락에 억울하게 모자가 씌워져 오래동안 자유스럽지 못했던 그의 리력들이 안타깝고, 말없이 다소곳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청춘시절 휩쓸고 간 거친 바람의 흔적이 보여서 안타깝고... 그래서 그의 깊고 뜨거운 곳에서 눈물이 되어 그의 시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나는게다.
그가 태여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먼 중로국경지대인 훈춘시 춘화향 동흥진촌이다. 동흥진촌은 춘화향의 중심지로서 후에는 춘화 즉 서토문자로 중심이 옮겨졌지만 그때만 해도 촌으로 치고는 꽤나 크고 번성하였다. 한개 촌에 소학교가 둘(학교마다 악대도 있음), 교회도 둘이여서 례배당도 둘, 앞거리에는 층집도 여럿 있고 양행(洋行)들이 즐비하였다. “오늘 동흥진시장에 나타난 물건은 래일이면 울라지보스또크시장에 나타났다”고 한걸 보면 교역도 꽤나 번성하였던 것이다...
그는 1935년 6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가족은 서울사람이였는데 한일합병후 인천에서 직접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로씨야 연해주로 건너가서 울라지보스또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세아 강제이주를 피해서 고향에 돌아가던도중 중국을 거쳐가다가 훈춘에 눌러앉아 살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형과 누님들은 다 로씨야 태생이지만 그는 중국태생이다. 그때 동흥진촌에는 그의 집처럼 로씨야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 즉 해삼위에서 이사온 가정이 몇집 있었는데 작은 가게 같은걸 챙기고있었다. 마을에서는 이런 집들을 “해삼집”이라고 불렀다. 동흥진촌마을 뒤에는 가마후런산이라고 부르는 큰 산이 솟아있고 마을앞에는 맑디맑은 큰 강이 흐르며 강 건너에는 기름진 전야가 펼쳐진 그야말로 산 좋고 물 맑은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고향에서 그는 다른 어린이들처럼 평범한 나날들을 보냈다. 좀 특이한게 있었다면 고향산천에 대한 각별한 사랑에서였다고나 할가? 아니면 유년시절의 호기심에서였다고 할가? 아침에 눈만 뜨면 산과 들, 강변에 나가 휘젓고 다니며 놀고 고기잡이, 벌레잡이, 산열매 따기에 온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줄도 몰랐다. 길다란 코물을 쭉쭉 빨아먹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어린시절 그의 별명은 코풀레기였다고 한다. 그는 그때 벌써 어머니나 누나들이 못가본 곳까지 다 가보았다. 대왕구 폭포며 분수령 합수목이며 감시대 웅뎅이 자라늪이며 서토문자와의 경계에 있는 곰골 바위굽팡이며 다 가보고 꿰뚫고있었다. 또 새나 베짱이같은 곤충을 잡아다 둥우리를 만들고 기르기를 좋아하여 밖으로 나다니기만 하였는데 그 시절 날마다 땅거미 질 무렵이면 그의 어머니나 누나들은 마을 안팎을 뒤지며 그를 부르고 찾아다니기가 일쑤였다. 야단도 되게 맞았지만 이튿날이면 또 그 버릇, 그 본새가 반복되군 하였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문학창작에 관한 꿈 같은건 있을수가 없었던 시절, 그러나 그는 옛말이나 이야기 듣기, 어머니가 들려주는 구전동요와 옛노래들에는(“둥근 달님 따다 가”, “세장세장 할아버자 마당 쓸다”, “연잎배 떴다” 등) 큰 흥미를 가지고 심취되어있었다. 한겨울 누구네 집에서 <춘향전>, <심청전>이나 <류충렬전>같은 전책을 읽는다는 소문을 듣기만 하면 어김없이 찾아가 어른들 틈새에 끼여앉아 밤이 새도록 들었다. 이런것들이 후날의 문학창작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후날 그때 어머니가 들려주신 구전동요와 옛 노래들을 정리해서 <소년보>나 <아동세계> 등 잡지에 “변봉인 구술, 조룡남 정리” 라고 어머니 이름을 밝혀서 여러수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학교 입학전 누나들 어깨너머로 보고 익혀서 식자를 다 떼고 읽고 쓰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으며 어떤 과목은 누나들보다도 먼저 암송하였다. 학교는 그에게 있어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야말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진취심이 강했던 그는 늘 공부에 열중하였고 성적도 좋아 늘쌍 일등을 차지하였다. 공부자체가 흥미로운 것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주 엄한 분이시라 일등을 못하면 집에 들여놓지를 않았다. 어느 한번 2등을 했다가 며칠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혼났던 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어린이들보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때 그한테는 많은 만화책과 유소년독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교에서 유독 혼자만 내내 잡지와 신문을 주문하여 읽었다는 점이다. 집에서는 어린 그한테 남들보다 지력투자를 좀 한 셈이다. 그 잡지 이름은 월간 <<좋은 어린이의 벗 (良い子の友)>> 이였고 신문 이름은 <<주간소국민 (週刊少國民) >>이였다. 이런 환경, 이런 어머니의 슬하에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교를 마쳤다.
1950년 그는 훈춘중학교에 진학했는데 훈춘중학교가 있는 훈춘현성은 그의 고향 춘화에서 200리나 떨어진 산골마을에 있었다. 큰 종이에 붓글씨로 입학생명단을 써서 벽에 붙이던 그 날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고 그는 되뇌인다. 오늘까지도 기억하고있는 그때 수험번호는 1042번이였다. 입학시험을 잘 쳤는지라 크게 근심은 하지 않았으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큰 것이였다. 어떤 사람은 입학비률이 8대1일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대1이라고도 했다. 중학교는 모든것이 크나큰 충격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교원들의 진영이였다. 모든 과목 교원들이 다 촌소학교의 교원들과는 비교할수 없이 훌륭했다. 중학교 3년간 크게 영향을 주고 인상이 깊었던 교원들을 들자면 김병종, 김해진, 리광해, 황휘, 허룡운, 장한수 등 선생님들이다. 그이들 중 어떤이는 후날 작가로 연변문단에서 활약하였고 어떤이는 이름난 언어학자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어떤이는 우파분자로 되여 로동개조를 하기도 했다. 그때 그의 공부성적은 늘 좋아 앞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어느 한번 시험에서는 평균점수 99점을 맞아 전교적으로 소문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교사 리광해선생님은 그를 훈춘중학교 력사 이래 공부를 제일 잘한 학생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책을 많이 접할수 있었고 독서의 참기쁨을 알게 되였는데 책이 많았던 시절은 아니였지만 서점에 드나들 수 있었고 학교 도서실의 책도 마음껏 빌려볼수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고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은 <<큐리부인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이였다. 그리고 1951년 중학생 대표로 뽑혀 연변제1차 하령영에 참가하였는데 그것은 난생처음 연길에 와서 즐겁고 유쾌한 생활을 경험하게 된 활동이었다. 야유희, 화토불 시랑송모임, 석현제지공장참관, 새벽농장참관, 비행장로동, 문학써클 활동… 그 어느 활동이나 다 재미나고 흥미로와 평생을 두고 그의 기억에 깊이 남는 활동들이였다. 또 하나 추억할 것이 있다면 이 중학시절부터 그의 문학창작활동이 시작되였다는 점이다. 1951년 그는 <<불꽃>>이란 시를 써서 <연변문예>에 발표했고 뒤이어 <<중국인민지원군>>이란 시를 써서 같은 잡지에 발표하였으며 <<공장>>, <<매>> 등 동시를 써서 <소년아동>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중 <<매>>는 당선이 되여 첫 창작상을 받기도 하였다.
1952년 여름 학제개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년 앞당겨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하니 그 학교에는 당시 동시창작의 대가셨던 김례삼(필명 민우-대표작 <<고개길>> , <<기차놀이 하자야>> 등) 선생님, 해방후 중국조선족 소설문학의 개척자의 한분이신 다재다능하셨던 백호연(필명 목일성-작품 <<한촌의 한선생>>, <<산촌의 마리아>> 등)선생님께서 교단에 계셨다. 이런 스승들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 하에 그의 문학꿈은 큰 성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연변사범학교에 입학한 첫날 교정에 신입생들이 모여있는데 김례삼선생님께서 찾아오셔서 “여기 누가 조룡남이냐?” 하고 물으며 찾으시여 “잘 왔다”고 하시며 그를 반갑게 맞아주셨다고 한다. 중학시절 <연변문예>에 발표한 그 몇편의 작품은 원래 당시<연변문예> 편집이셨던 김례삼선생님이 손수 편집한 것이였다. 또 동시 <<반디불>>은 원래 2절로 되여 “얼른 쫓아 잡아라/ 불이 깜박 꺼졌네”로 끝났었는데 선생님께서 보시고 “참, 재미있게 썼구나. 그런데 아쉽다. 애들이 반디불을 잡지 못해 얼마나 실망하겠니? 반디불을 잡는 것으로 한절 더 써넣 는것이 어때?” 하고 말씀하시여 “반짝반짝 반디불/ 다시 전등 켰구나/ 살금살금 기여라/ 옳다 하나 잡혔다”라는 3절을 더 만들어 넣은 것이다. 김례삼 선생님께서는 그를 여러번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다. 동란의 세월이 끝난 뒤 어느 한번 회의에서 김례삼선생님을 처음 만났는데 그를 꼭 껴안아 주시고 흐느끼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너무 슬퍼마라, 살아있으면 됐다. 이제 네가 겪은 고통과 네가 흘린 눈물은 너 혼자만의 소중한 재산이 되였다”고 하시며 그에게 격려와 사랑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김례삼 선생이 아득했던 지난 날 자신에게 베푼 사랑과 관심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회억하였다.
그때 연변사범학교에는 교간으로 <학습보>라는 작은 간행물이 발간되었는데 백호연선생님께서 주필을 맡으시고 그를 부주필로 임명해주셨다. 그는 편집기술을 백선생님한테서 처음 배웠다고 하였다. 그때 문학써클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백선생님께서는 여러번 자신의 원고료를 써클에 기부하여 종이를 사서 문학자료들을 등사하여 나누어 가지도록 하였다. 백선생님은 문학, 음악, 미술, 서예, 육상에 수영까지 여러 분야에 거쳐 재능이 뛰여난 인재였다. 지식도 연박하고 마음씨도 너그러우며 관용으로 남을 포용하는 인격자로서 우리 민족 지식인의 량심이였다고 할수 있었다. 일본 명곡 <<황성의 달(荒城の 月)>>을 번역해주시던 일이며, “작문이라면 대수로와하지 않던 너에게 이 마지막 작문평을 어떻게 써주어야 하나?” 로 시작된 선생님의 그 마지막 작문평이며 그 눈물겨운 수많은 일들을 어찌 잊을수 있을까! 동란의 세월이 끝난 직후 훈춘에 있었던 그는 인츰 빈손으로라도 술 한병, 과자 한봉지 달랑 들고 화룡으로 쫓겨가계시는 백호연선생님을 찾아가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는데도 백선생님께서는 학교에 나가셔서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계셨다. 백선생님께서는 그를 꼭 껴안아주시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또 보기는 보는구나,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이제 훌훌 다 털어버리고 가배 노력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도루 찾아야지!” 그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나는 너를 믿는다!” 하고 말씀하시며 격려해주셨다. 그는 후에 <<고개길>> 이란 김례삼스승님께 바치는 시를 써서 <장백산>에, <<분필가루는 더럽지 않아>> 라는 백호연스승님께 바치는 시를 써서 <연변문예>에 발표하였다.
연변사범학교시절 바쁜 공부의 여가를 타서 시들을 적지 않게 창작 했지만 아직 습작 단계라 번번히 퇴자를 맞고 신문이나 잡지 지면에 발표된 시들은 많지 못했다. 그중 대표적인 시를 들자면 1954년 11월 7 일 <연변일보>에 발표된 <<눈 내리는 밤>>이란 비교적 편폭이 큰 시였다. 이 시는 그때 <연변일보> 편집이셨던 김철선생님께서 발표해준 것이였다. 이 시는 당시 교내는 물론 문단과 연변대학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동시 창작에서는 큰 진전을 보여서 <<반디불>>을 비롯한 <<제비네 학교>>, <<딸랑강아지>>, <<호박꽃 초롱>>, <<호수가의 일요일>>, <<민들레씨 동동>> 등 지금까지도 동시대표작으로 불리는 여러 수의 동시들을 창작했다. 후날 이런 동시들에는 다 곡이 붙어 음악교과서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그중 <<호박꽃 초롱>>은 한국 작곡가가 다시 작곡하여 KBS에서 방송되였다.
<<반디불>>은 반세기도 넘는 60여년전 일인 그가 1953년 연변사범학교 2학년 학생시절에 쓴 작품이다. 그는 연변사범학교 3년간 방학에 딱 한 번 밖에 집에 가지 않았는데 려비때문도 있었겠지만 더욱 중요한건 학교에 남아 독서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그 3년간이 그의 인생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때 연변사범학교는 중사반과 예사반으로 나뉘여있었는데 <<반디불>> 작곡자 김덕균과 그는 중사반으로서 일반 고중과목에 교육학, 심리학 등 과목을 더 전수받았다. 예사반은 다시 음악반, 미술반, 무용반, 체육반으로 나뉘여 예능교사양성이 목표였기때문에 예능수업이 위주였다. 그 영향으로 중사반 학생들도 예능에 열중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학교 악대출신 김덕균도 음악에 열중하는 사람들 중 한사람으로 그때 벌써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그때는 배고픈 세월이였다. 그 겨울방학 집에 가지 않은 김덕균과 함께 배가 고파서 밤에 세수대야를 가지고 기숙사 김치움에 가만히 들어가서 김치를 퍼담아 훔쳐다가 맨김치를 찢어먹으면서 두 사람은 곡만들기에 집중하였는데 그렇게 하여 생겨난 곡이 바로 <<반디불>>이였다. 매워서 입을 하-하- 불고 다시고 하면서 말이다.
2002년, 연변대학 사범분원으로 개칭된 분원청사 교정에 반디불비가 세워지게 되였다. 따지고보면 <<반디불>>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작품인데 그저 작사자, 작곡자 모두가 당시 사범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7살 학생들이였다는 점이 조금 재밌고 놀라울 뿐이라면서 모교에 깊이깊이 고맙다고 그는 말한다. 지금 사범분원에는 <반디불문학사>란 문학동아리가 만들어지고 몇년째 <반디불문학상>활동도 이어지고있다.
1955년, 그는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훈춘시 제2소학에 안배받았고 반년 후 훈춘중학교에 전근되여 조선어문교원으로 일하였다. 당시 연변사범학교 200여명 동창생 중 중학교 교원으로 승진한건 자신 한사람이라 한다. 훈춘중학교 교단에 서있었던 그 1년 반 남짓한 기간 그는 전현 연구교수(观摩敎学)를 2번이나 맡아서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평판이 매우 높았다. 문학창작에서도 <<엄마 전쟁이란 무어예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살뜰한 거짓말>>, <<강철의 새 노래>>, 동시 <<마음에서 받은 꽃씨>> 등 반향이 큰 작품들을 륙속 발표했다. 그리하여 1956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성립시 제1기 회원으로 입회하게 되였고 이어 길림성 청년창작가회의에 연변대표 일원으로 장춘에 가서 회의에 참가하는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렇게 좋은 날은 얼마 길지 못했다...
1957년 전국적으로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다. 그는 <<기러기>>, <<뚱알라 애가>> 등 소위 독초작품을 쓰고 반동언론을 산포했다는 죄장으로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 모자를 쓰고 추방되여 농촌에 쫓겨가서 로동개조를 해야 했다. 23년간이나 이어졌던 그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였으며 그의 문학생애에서는 하얀 공백으로 남겨진 시간들이다. 1957년 그는 우파모자를 쓰고 농촌에 쫓겨가 처음에는 훈춘의 여러 곳을 전전하고 후에는 또 왕청의 여러 곳까지 전전하면서 5년간의 로동개조를 해야만 했었다. 농민질도 했고, 석탄캐는 광부질도 했고, 벌목부, 류벌공, 나무군, 운반공, 돼지사양원, 건설공지잡공, 똥푸개까지 못해본 일이 없었다. 그 속에서 일을 잘 하고 개조표현이 좋다는 평판을 받고 또 특별한 공도 세우고 하여 1962년 그는 우파모자를 벗고 다시 공직을 회복하여 교원으로 임직하게 되였다. 하지만 중앙문건에는 “공중 속에서 우파모자를 벗긴다는것을 선포하고 다시는 우파로 보지 않는다”라고 규정하였지만 기실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모자를 벗은 후에는 또 “모자 벗은 우파”로 불리며 처처에서 불리익을 당했고 의연히 문학 창작의 권리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했는데 단지 우파분자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시 붙잡혀나가 여러 해를 두고 끌려다니며 온갖 잔혹한 투쟁을 다 받고 로동 개조를 강요당하였다. 고깔모자를 쓰고 소흑판으로 만든 반혁명, 잡귀신 패쪽을 쇠줄끈에 달아 목에 걸고 조리돌림을 당하며 길바닥 살구씨도 주어먹어야 했고 똥묻은 신바닥으로 귀쌈도 얻어맞아야 했으며 책상 걸상을 높이 쌓은 꼭대기에 올라가 락하하는 항공표현도 수없이 반복했어야만 했다...
1979년 4인방이 타도되고 중앙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우파분자에 대한 개정이 있었다. 이는 우파분자가 로동개조표현이 좋아 모자를 벗긴다는 개념이 아니고 원래 우파분자가 아닌 생사람을 우파분자로 잘못 판정하여 모자를 씌웠으니 이를 개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당안에서 모든 우파관련자료는 다 불태워 없애버리고 진정으로 거뜬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문학창작의 권리도 이때에야 다시 가지게 되었다. “진실은 아무때고 밝혀지고야 만다”는 진리를 그는 다시 한번 터득하였지만 한가슴 가득한 슬픔과 비애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우파모자를 쓸 때 새파랗던 22살의 청년이 엄혹한 세파에 찌들려 45살의 중늙은이가 되여있었기때문이다. 그동안 동창생이나 같은 년령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젠 사회의 중견이 되고 높은 위치에서 중임을 맡고있었는데 자신은 억울하게 죄수로 몰려 로동개조를 하다나니 이제야 겨우 돌아와 인생을 맨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가련한 모습이였기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인생에는 청춘시절은 없었다고 할수 있다. 20에 40을 졸라붙인 것이 그의 인생 도표인 것이다.
그때 시정회의에 모여온 우파들에게 주최측에서 간촐한 연회를 챙겨주고 술도 부어주며 위로했는데 술 한잔 먹고나면 그동안 억울했던 세월을 생각하며 불만을 토로하고 분통을 터뜨린다 해도 리해해줄만한 일이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20여년 세월에 기가 꺾이고 풀이 죽고 겁쟁이가 되여서 술을 부어줄 때마다 “이게 꿈 아니냐는듯” 그저 머리를 쪼아리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련발할뿐이였단다. 그가운데는 “매일 찰떡을 쳐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우파가 된 사람도 있었고 중국이 조국이냐? 조선이 조국이냐? 하는 물음에 조선일가? 중국일가? 말설이다가 그만 조선이라고 잘못 대답해서 우파가 된 사람도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개나 돼지나 늑대로 변하였던 그 암울했던 세월에 그에게는 하나의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그는 이 말을 어느 한번 맞아죽을지도 모르는 투쟁대회에 끌려나가면서 당시 연길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유언처럼 써서 어머님께 드려서 부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된건 그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머니였다. 수많은 절망 속에서도 아들을 하늘처럼 믿고 애타게 기다리고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다시다시 용기를 내여 버티고 일어서군 하였다.
우파분자 모자를 벗고 나서도 문학창작을 맘껏 할수는 없었다. 모자벗은 우파로 불리며 어느 신문, 어느 잡지도 그의 작품을 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9년 시정을 받은 후에는 진정한 창작의 자유를 가질수 있었지만 일정시간 적응기를 거쳐서야 비로소 제대로 글을 쓸수 있었다. 어두운 지하동굴 속에 갇혀있던 사람을 갑자기 밖에 내놓으면 햇살에 눈이 부셔 사물을 잘 보지 못하고 조롱 속에 갇혀있던 새를 갑자기 밖에 내놓아도 날개쭉지가 굳어져서 처음에는 잘 날지 못하는 것과 같은 도리일 것이다. 그도 같은 처지였다.
1979년 우파개정이 있은 후 그는 훈춘2중에 돌아와 조선어문교원으로 임직하여 일하였는데 3년간 조선어문과를 가르치며 반급담임을 맡았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늘 청년시절 간직하였던 문학창작의 꿈이 그를 괴롭혔다. “문학창작을 하려면 환경을 바꿔야 한다. 어느 잡지사나 출판사같은 단위로 옮겨야 한다.” 이런 생각이 후날 그를 연길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그때 <연변문예>잡지 총편이셨던 김해진선생님은 그의 중학시절 은사이신데 훈춘에서 보내주면 <연변문예> 편집부에서 받아주겠노라고 약조했는지라 고심한 끝에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여 교육국 국장을 찾아가 자신을 연길에 보내달라는 요구를 제출하였다. 당시 교육국 김국장은 그의 학생시절 담임교원이였는데 “너는 여기서 열심히 해서 학생들을 대학에나 많이 붙여라”고 하며 요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도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졸라대고 성화부리는 바람에 김국장도 손을 들고 마지막엔 할수 없이 “그럼 연길로 가서 꿈을 한번 펼쳐보거라” 고 하면서 그를 보내주게 되였다.
그의 문학창작은 사실상 연변인민출판사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서적을 읽고 작가를 만나고 창작을 담론하고 작품을 평하고 하는 일들이 그에게는 평생 소망했던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였다. 그리고 작가협회에서 조직하는 작가들의 모임이나 필회, 창작답사 기타 사회활동에도 참여할 수도 있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학창작을 시작한 때는 전국적으로 ‘반주임’이란 작품을 시작으로 소위 “상처문학”이 류행하던 시기였다. 초기 그의 문학도 그 범주에 속하는 문학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때 글로 쓸 수 있는 그의 인생경험이란 지난 23년간의 로개생활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작품을 들자면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아, 청산골>>, <<영원한 미소>>, <<해빙기의 강변에서>>, <<옥을 파간 자리>> 등 시들이다.
시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 물음에 그는 “시는 내 인생의 전부이다”라고 대답하고 싶다고한다. 그는 시를 사랑하였고 시와 함께 웃고 시와 함께 울고 시와 함께 통곡하면서 70여성상을 살아왔다. 기쁘고 즐거웠던 나날에도 슬프고 서러웠던 나날에도 지어 죄수로 추방되여 쫓겨가 고역에 허덕이던 세월에도 시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시를 배반하지 않았고 시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 훈춘 이도구의 지하탄굴 속에서 짐승처럼 네발걸음으로 벌벌기면서 석탄구르마를 끌 때도, 그는 저 시비리야에 추방되여가 고역 속에 시달리는 12월 당원들을 위하여 뿌쉬낀의 시를 읊었다. “시비리 지심 속 깊이 / 씩씩한 견인성을 간직하라 / 그대들의 숭고한 지향과 슬픈 로역은 / 헛되지 않으리.” 그리고 대황구 동골치기 원시림 속에서 벌목을 하고 류벌을 할 때도 그는 네그라쏘브의 <<볼가강에서>>를 소리높이 읊었다. “발목엔 쇠고랑 차고, 피 흐르는 어깨엔 닷줄을 메고 / 강변으로, 강변으로 배를 끌어도 / 나의 아픈 가슴은 끌어내지 못한다 /…오, 볼가여, / 나는 너를 노예의 강, 암흑의 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훈춘 삼가자 국영농장에서 똥수레를 몰고, 돼지먹이 술찌기를 실어나를 때도 그는 눈물을 삼키며 인도영화 “류랑자”에 나오는 <<라즈의 노래>>를 목놓아 불렀다. “나는 모른다, 비애가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를 / 나는 비애와 고통을 행복으로 노래부르나니 / 나의 노래를 막을자 그 누구더냐? /…오, 운명이여, 나의 운명이여/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참혹하게 나를 희롱하는것이냐? / 도처에 류랑한다, 도처를 류랑한다 / 아바라므 아바라므 …. 이것이 바로 그에게 있어서의 시의 의미이다. 정녕 시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 엄혹한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시의 사변>>이란 시에서 “나에게 있어서는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시를 쓴다는 것은 사는 한가지 방식이다, 사랑하는 한가지 방식이다”라고 썼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숭고한 감정, 가장 소중한 품성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오직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인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로동자가 하나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농민이 한포기 곡식을 다루는 것도 모두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이다. 시는 곧 사랑이다. 사랑은 시의 구세주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까지 끓을것인가, 나의 심장은>>라는 시에서 “먼 그날이 와도 나의 심장은 오직 사랑을 위해 끓다가 터질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나의 사랑…”이라고 썼다. 이것은 청년시절에 쓴 시인데 지금도 의연히 오직 사랑만이 오염된 이 세상을 구원하고, 타락한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것이라고 믿고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구에 담겨진 그의 사상이라면 사상이요, 철학이라면 철학일 것이다.
최근년간 북경에 있는 여러 학회와 연구회들에서 해마다 달력을 만들었는데 2011년 중국신문부간연구회에서 <<중외철리명언 정선>> 달력에는 그의 언론 7조가 10월 달력에 올랐다. 2012년에는 또 중국 중외명인 문화연구회에서 <<중화명인격언>> 달력을 제작했는데 격언 8조가 10월 달력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3년에는 중국문화예술협회와 세계다원문화연구회에서 제작한 달력<<2013중국년력인물>>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막언과 나란히 그의 반디불비 사진과 비암산진달래시비 사진이 실렸다. 2014년에는 북경예도묵향서화원에서 제작한 달력 <<중한서화명가>> 에는 1월-3월 세개월에 거쳐 그의 작품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최근 중국기실문학연구회, <<성세화장총서>>편위회, 중국당대문학연구회 등에서 대형 문헌들을 륙속 출판했는데 2011년 중국기실문학연구회에서 건당 90주년을 기념하여 <당에 드리는 송가>라는 대형문집에 그의 략력과 수필 <<노래 저켠의 추억>>이 수록되고 최우수문예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또 2011년 <<성세화장총서>> 편위회에서 18 차당대회 헌례 총서로 <<성세화장 . 당대송시대전>>이란 대형문헌집을 출간했는데 그의 략력과 시 <<민들레 (외3수)>>가 수록되고 시사최우수창작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2013년 중국당대문학연구회에서 모택동동지탄신 12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당대백명 시사격언가작품선>>이란 대형문집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 역시 그의 략력과 시 6수, 격언 10조가 수록되고 일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또 지난해 모택동탄신 120주년, 항미원조 승리 60주년, “뢰봉동지를 따라 배우자”는 모택동의 제사 5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기실문학연구회에서 <영원한 빛발 (永遠的光輝)>이란 대형문헌집을 출간 했는데 시사집에는 시 <<민들레>>, <<고향정회>> , <<산>>, <<땅>>, <<장백산-우리 어머니>>, <<영원한 미소>>, <<해빙기의 강변에서>> 등 7수가 실렸고 풍비송—당대홍색시사 가작상을 수상하였다. <문론집>에는 략력과 장편수필 <<잘 가라, 식도락>>전문이 실리고 금상” 수상하고 영원한 빛발 영예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또 최근 중국작가교류협회에서는 중국작가 그밖에 협회, 중화시사학회 등 여러 협회와 조직의 추천을 받아 2014년도 제1호 문건으로 <중국국가 1급작가>>의 직함 (국가가 인증하는 직함자 격증서 발급)을 수여한다는것을 공포하기도 하였다.
그가 수상한 성급 이상의 상은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길림성 최고상) 3차, 전 국소수민족문학상 2 차, 전국소수민족문학연구 원예사상 1차, 홍콩 세계문화예술연구중 심과 세계화인교류협회의 국제우수작품상 등이다.
허나 그는 지금껏 창작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뿌듯하고 긍지감을 느끼는 때는 어떤 상을 수상할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도 더욱 반갑고 기쁜건 길거리를 가다가 문득 생전 모르는 사람이 제앞으로 달려와서 그의 손을 잡고 “조룡남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잡지에 실린 사진으로 선생님을 알고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뵙고싶었는데… 촌에 살다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시와 수필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선생님의 작품이면 어느 한편 빼놓지 않고 다 읽고있습니다…”하고 인사할 때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진정으로 글 쓴 보람을 느끼며 자신의 문학은 바로 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저와 같은 인민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라고 되뇌이었다.
그는 최근 3년간 투병중이라 창작은 별로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끔 작은 글들을 써보느라 하지만 그것조차도 잘 안되어 “풍월의 시절도 지나갔구나!”하고 뿌쉬낀이 그랬듯이 혼자서 탄식하기도 한단다. 이 3년간 그는 새 작품을 창작하기보다 이미 발표된 글들을 모아 작품집으로 묶는 작업에 정력을 모았다. 병으로 쓰러지던 2010년, 시집 <사람아, 사람아>를 출간하였고 2011년에는 동시집 <반짝반짝 반디불>(중국판)을 출간하였으며 지난해에는 산문집 <노래 저켜의 추억>을 출간하였다.
2010년 그는 병으로 쓰러진 그는 연변병원에 10차례 입원하였고 8차례 도관수술(介入治疗)을 받았다. 그는 처음 연변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사선생에게 “나는 북경이나 상해로 치료하러 가지 않는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끝을 보겠다. 화학치료나 방사선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매달 한번씩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고 결과에 따라 입원도 하고 수술도 받고 집에서 그저 약물치료를 한다고 한다. “이만큼 살지 못한 사람도 많고 많은데 욕심을 버리고 이만큼 산것에 만족하고 감사할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한번 태여나서 한번 죽기 마련이다. 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갈 때는 꽃잎이 스러지듯, 단풍잎이 떨어지듯 그렇게 뒤모습이 곱게 자리내고 가야 한다” 라며 마지막 나날들을 긍정적으로 즐겁게 보내고 있다고 한다...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력임.
-연변조선족자치주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
-시집<<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1989), <<그리며 사는 마음>>(1995), <<민들레씨 동동>>(1996, 한국출판), <<해빙기의 강변에서>>(1999, 한국출판), <<고향마을 동구앞에서>>(2000, 한국출판), <<사람아, 사람아>>(2010), <<반짝반짝 반디불>>(2011), <<노래저켠의 추억>>(2013)
-10여수 시작품이 중소학교 교과서 과문으로 편입
-연변주정부 우수작가상, 연변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및 공로상, 연변주당위 주정부 민족문화사업특수공헌인물상,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2차), 향항세계문화예술연구중심 세계우수작품상, 한국 미래문학해외동포문학상, 카나다 민초해외문학상대상 수상
-1998년 9월 연변작가협회 한국방문대표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출국 참관교류
-2010년 연변TV방송국에서 “산과 흙의 시인-조룡남”이란 제목으로 55분에 달하는 인물사적영상편 제작, 방송
-시비로는 “반디불비”(연길/2002), “비암산 진달래”시비(룡정/2004)
///해란강닷컴 /류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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