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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키에르케고르는 각 개인이 삶의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과 저술에서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은 아버지 미켈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학 단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교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존립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최고의 진리임을 주장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은 아버지 미켈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서부 유틀란트의 황무지에서 한 가난한 소작인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어느날 신이 자신의 고통과 가난에 무관심한 데 절망과 격분을 느껴 언덕 위에 올라가 준열하게 신을 저주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펜하겐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던 삼촌에게 갔는데, 그때부터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는 수도 코펜하겐에 5채의 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그 덕분에 금전문제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저술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키에르케고르가 한 사람의 인간이자 작가로서 성장한 데는 재정적 유산보다는 심리적 유산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통 루터교를 엄격히 고수했고 형식논증의 논리를 좋아했지만, 아들 중에서 가장 총명한 키에르케고르에게 시킨 엄격한 종교적·지적 훈련은 상상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강한 성격과 경건한 모습 이면에 불안하게 놓여 있는 억눌린 우수의 영향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죄의식을 알게 되었으며, 뒷날 그 이유가 아버지가 어릴 적에 신에게 퍼부었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죄를 알고 충격을 받은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어머니의 죽음과 6명의 형제 자매 중 5명의 죽음이 신의 저주를 증거한다는 확신이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러 코펜하겐대학교에 갔으나 오히려 철학 쪽에 관심을 가졌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2년 뒤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목표를 바꾼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레기네 올센이라는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 어린 소녀와 설명할 수 없는 죄의식과 복잡한 인간정신에 대한 유별난 의식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파혼했고 베를린으로 가서 6개월을 살았다. 이 사소한 연애사건은 통속소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몇몇 저작에서 반성과 해설의 자료가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삶의 단상〉(1843)의 방대한 원고를 가방에 넣고 베를린에서 돌아왔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은 거의 모두가 익명이나 각 저작에 어울리는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내놓는 사상을 권위자의 견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독자들의 판단, 특히 선택을 위해 제시된 다양한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 책 제목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의미이다. 즉 이 책은 미적 인생관 또는 윤리적(윤리종교적) 인생관의 대안을 제시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각 개인이 삶의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과 저술에서 기초가 되었다. 같은 해에 출판된 〈공포와 전율〉·〈반복〉에서는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역설적이라고 결론짓는다.
1844년에는 〈철학 단상〉·〈불안의 개념〉을 발표했다.
그는 〈철학 단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교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존립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색인:헤겔주의). 그는 자유의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고 믿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헤겔 철학에 대한 공격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 철학과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전에 먼저 자유의 철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심리학 분야로 확장할 필요를 느꼈다(불안). 그 결과가 〈불안의 개념〉이었다. 비상할 정도로 통찰력이 번득이는 이 책은 아마 현존하는 최초의 심층심리학 저술일 것이다.
1845년 키에르케고르는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이라는 새 책을 준비했다. 이 책은 방대하며,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성숙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담긴 사상을 반복하는 면도 있지만 사실상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 단계 혹은 종교적 영역은 미적 단계만이 아니라 윤리적 단계와도 구분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색인:미학). 사실 이러한 발전은 인간 윤리가 삶의 방식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이전의 모든 저술들에 구현되어 있는 생각들의 논리적 결과였다.
따라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는 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 둘만 있었던 데 반해 〈인생행로의 단계〉에는 종교적 영역을 포함해 세 영역이 있다.
인생과 인간성 전체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견해는 점차 음울한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심리적 분위기가 이렇게 바뀐 것은 불쾌한 경험을 많이 한 탓이었다. 레기네 올센은 결혼을 해버렸으며, 그리하여 속세를 벗어나 그녀와 일종의 신성결혼을 맺은 상태에서 오로지 신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때만 기다리던 낭만적 환상은 깨어지고 말았다.
사실상 이 환상은 〈공포와 전율〉·〈반복〉의 2책에 깔려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환상을 버렸다는 것은 〈인생 행로의 단계들〉의 제1부인 〈성찬〉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성찬〉은 플라톤의 〈향연〉을 본떠 사랑·에로스·성·여자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여성 일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가차없는 경멸을 담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밖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에 담긴 취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제대로 보면서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쓴 문학비평가들과 언쟁을 벌였다. 이 언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판명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인간에 대한 심한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이 쓰라림은 그 후에 쓴 대부분의 저술들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언쟁 직후에 쓴 조금 색다른 책인 〈철학 단상에 대한 결론적·비학문적 후기, 모방적·감상적·변증법적 구성, 실존적인 기고〉(1846)는 인상적인 제목과 함께 "요한네스 클리마쿠스가 짓고 S.키에르케고르가 출판함"이라는 글귀를 달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중요한 철학 저서가 한 책의 후기 형태이며 그 책의 분량의 1/5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지닌 아니러니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저서를 '실존적인 기고'라고 칭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그의 목표는 당대 유럽을 휩쓴 지배적 철학인 헤겔 철학에 보복을 가하는 일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하는 것 전체를 체계화하려는 헤겔의 시도를 공격하면서, 실존은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발전하기 때문에 체계로 구성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그는 논리에 운동성을 도입하려는 헤겔의 시도에서 논리적인 오류가 발생하는 것에 주목하고, 범주들을 뒤섞는 데서 혼란이 일어났다고 폭로했다. 헤겔은 자신이 객관적 인식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주관성이 진리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키에르케고르의 정의를 인용하면, "헌신성이라는 가장 정열적인 정신은 객관적으로 불확실하며, 이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진리, 그것도 최고의 진리이다."
현대 실존주의의 초석이 된 이 교설은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가리켜 일컬었던 '체계'를 손상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 체계를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체계를 구축하는 자는 실존을 지성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헤겔은 실존과 사유를 동일시함으로써 신앙의 여지를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체계 속의 한 단락에 지나지 않는 것, 즉 일반자의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수모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도가 되도록 설교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동시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키려는 의무감만큼은 확실히 느꼈다.
나아가 그는 신이 자신에게 특별한 임무를 지정해주었기에 글쓰는 일마저도 완전히 그만두어야 한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은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글쓰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으며, 이번에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다듬기 시작하는 일이 '소명'이 되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모습을 알리는 임무와 세속사회에서 안락을 추구하는 등 한마디로 성직자가 그리스도의 종 대신에 시민의 노예가 됨으로써 종교를 배반한 덴마크 국교회의 수치스런 상황을 폭로하는 임무를 신에게 명령받았다고 생각했다(→ 색인:덴마크 복음주의 루터교 민족교회).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사고는 더욱더 엄격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의 저술들, 특히 〈탐구 정신에 관한 교훈적 담론〉(1847)·〈사랑의 작품〉(1847)·〈그리스도교 담론〉(1848)·〈죽음에 이르는 병〉(1849)·〈그리스도교 훈련〉(1850) 등에서 그리스도교를 다른 어떤 저술보다 더 완고하고 비타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훈련〉은 덴마크 교회의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가장한 것이기ㄱ도 했다. 1855년 무렵 그는 신에게서 국교와 성직자들을 가차없이 공격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확신하고는 즉시 많은 양의 소책자·팜플렛과 〈순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 잡지는 그중 10권이 키에르케고르 혼자만의 기고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과도하게 진행된 국교회 비판운동으로 그의 건강은 몹시 쇠약해졌다. 운동을 시작한 지 거의 2년이 지날 무렵 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1개월 후 죽었다. 그무렵에는 재산도 탕진한 상태였다. 졸도하기 전 〈순간〉 제10호를 인쇄소로 보내면서 남은 유산을 다 써버렸다. 그는 소유하고 있던 몇 안 되는 귀중품을 그가 사랑한 여자이자 당시 관리와 결혼하여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에서 살고 있던 레기네 올센 앞으로 남겨 두었다.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정점을 이룬 국교회에 대한 치열한 공격은 관리하기가 무척 힘든 유산이었다. 이 책은 국교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나, 많은 성직자들 개개인이 국교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수정하거나 심지어 인연을 끊게 만들었다.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철학적·예술적 진가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인정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1877년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최초의 저서를 출판하여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제공한 덴마크의 문학비평가 게오르 브란데스(1842~1927)의 공이 컸다. 브란데스는 공공연한 무신론자이자 그리스도교 증오자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키에르케고르를 교회에 반항한 인물로 다루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종교에 특별히 헌신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그리스도교적 교설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키에르케고르 저작집 초판의 편집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은 확고한 그리스도교도였고 다른 두 사람은 무신론자, 그것도 한 사람은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자였다.
독일에서는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이 널리 퍼져 제1차 세계대전 전에 그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이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제1·2차세계대전이 진행된 기간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학자들이 기여했는데, 이들은 대개 '죽음에 이르는 병' 등 키에르케고르가 다룬 것과 똑같은 현상을 취급했다.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신학도 카를 야스퍼스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 사상과 유대인 종교사상가 마르틴 부버와 같이 실존주의 사상을 고양하는 데 공헌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작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났는데, 이 과정에서 '불안'·'고통' 등의 상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이루어졌다. 이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은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고독하게 죽은 뒤 약 1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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